290. 구만장천의 열쇠 (6)
보라색 마력을 흩뿌리는 마법진 위에 정좌하고 있던 아벨이 돌연 눈을 떴다. 그녀는 창밖으로 보이는 수평선 어딘가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페르난데스.”
“왜 그러시오?”
“용이 온다.”
“……뭐?”
페르난데스는 아벨의 몸속에 잠든 여신의 신성과, 그녀 자신이 품은 용의 존재감을 최대한 증폭시키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단순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녀의 수명과 힘을 소모하지 않으며 오로지 존재감만을 드러내야 했기 때문이다.
페르난데스는 수인을 멈추지 않으며 눈을 떴다. 아벨의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내면에서부터 용의 기운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손을 뻗어 재빨리 그녀의 가는 손목을 붙들었다.
“진정하시오.”
“페르난데스……! 나는…… 나는…….”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오.”
“아니, 나는 느낄 수 있다. 이 느낌……. 이 익숙한 감각……. 용이다. 아직 남아 있었단 말인가. 아직까지 살아 있었단 말이냐…….”
아벨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페르난데스는 그녀가 받은 충격과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젠가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표류자라 말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떠나 먼 시간을 정처 없이 떠도는 표류물이라고. 슬프지만 진실이었다.
이 시대. 다시 눈을 뜬 이래로 그녀가 본 과거의 잔재들은…… 그녀를 기억하고 있던 존재들의 말로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의 동족들은 전멸했고, 그녀를 기억하던 카라드펠린과 사다르켈리사는 먼 차원에서 죽었다.
이제 그녀를 붙잡고 있는 끈은 오로지 페르난데스 한 사람뿐이었다. 맹목적이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있어 현실에 남은 유일한 출신 증명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동족이 나타난다면. 반대의 경우로 볼 때. 만일 페르난데스에게 전생의 아들이나, 또는 아리아가 나타난다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직접 확인해 보면 될 일이오. 아직은 아니오.”
“페르난데스…….”
“갑시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첨탑을 벗어났다. 갑판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뛰어다니고 있었다.
* * *
“용이 온다아아!!”
“함포!! 함포 준비!! 발포를 준비해라!!”
“실탄을 걸어! 예포가 아니야! 실탄을 걸어라!!”
와일드프린스들이 날뛰며 선원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레이아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신과 마법사들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보호 주문들을 걸어 대고 있었다.
그들의 광기에 가까운 편집증은, 엘프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왕의 기함을 상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가상 적국의 방향에서. 막을 수 있는가, 없는가를 떠나서. 종족의 명운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막아내야 하는 일이었다.
“옵니다!!”
수평선 위로 붉은 점이 보였다. 점으로 인식하는 순간 동전만큼 커지고, 그 접근을 가늠할 때쯤이면 이미 손바닥만큼 커져 있었다. 엄청난 속력, 그럼에도 아직 먼 거리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크기!
“발포하라!!”
“멈추시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 나가며 소리쳤다. 그의 말에 엘프들이 움찔 떨었다. 생존 본능에 거의 공황 상태까지 이른 엘프들마저도 그의 말에 머뭇거렸다.
두 명의 서펜트 킹을 죽인 자. 용의 기수. 그리고 레이아 여왕의 친애를 받는 자. 그런 수식어들은, 자신의 군주를 신과 동일하게 여기는 엘프들 사이에선 결코 저항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레이아 여왕! 백성들을 진정시키시오!”
“저 용이 적이 아니라 확신할 수 있나?”
“아니! 하지만 대화를 먼저 해 봐야 하오! 백성들을 갑판 밑으로 피신시키시오.”
“용의 입김은 기함의 방호를 뚫…….”
“내가!”
페르난데스는 손을 뻗으며 말했다. 손가락이 허공을 얽자, 그의 머리 뒤에서 검은 헤일로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레이아는 그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아, 저 사내도…… 엘프 왕의 기함을 파괴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다.
“내가 지키겠소. 나를 믿으시오?”
“모든 인간들 중 가장.”
“그렇다면 그대와 그대의 가신들만 남고, 백성들을 피신시키시오.”
“알겠다.”
가장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인물이 남는다. 엘프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그녀의 말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건 가장 고결한 군주의 자세 중 하나였다. 침착함을 되찾은 여왕을 바라보며, 갑판 위의 혼란이 빠르게 식어 갔다.
-스르릉.
레이아는 지휘를 위해 빼 들었던 장검을 다시 칼집 안으로 납도했다. 스으으…… 숨을 길게 들이쉬고, 다시 내쉬었다. 칼자루 위에 검지 손가락 하나를 살짝 얹은, 언뜻 보기엔 무방비한 자세—
와일드프린스들 모두가 그녀와 동일한 자세를 취하며 눈을 반개한 채 다가오는 용을 바라보았다. 엘프 무예의 기수식이다. 저 무방비한 상태야말로, 가장 강렬한 일격을 도사린 뱀의 어금니와 같다.
그러니, 서펜트라. 이들은 바다뱀들이다. 설령 용의 비늘이라 하더라도 한 번은 물어 주겠노라 독기 품은 뱀들이, 다가오는 용을 바라보고 있었다.
-쿠구구구궁!!
용의 날갯짓 아래에 거센 풍압 탓에 파도가 일어난다. 용의 근처엔 다수의 그리핀들이 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지척이다. 용의 머리 위에 타고 있는 존재가 보였다. 제르올렌……. 화려한 왕관을 삐딱하게 쓴 젊은 엘프가 그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 그리핀에 타고 있는 엘프 기사들이 보였다.
* * *
-콰아아아앙!
붉은 비늘이 정오의 햇살을 받아 이글거렸다. 기함의 갑판은 군대가 주둔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지만, 용의 거체와 그 존재감 탓에 함선 전체가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레이아의 기사들은 칼자루 위에 손을 얹으며 용을 바라보았다. 놈의 입이 열린다면, 그리고 숨결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면.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비늘 한 장은 바스러트릴 각오였다.
예리한 살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늘 위에 활공하는 그리핀들 위에서도 그와 같은 살기가 흘러내렸다.
그때, 용이 고개를 늘어트렸다. 그것은 새파란 눈으로 주위를 찬찬히 훑다가, 한 지점에 못 박힌 듯 멈췄다.
페르난데스와, 그 뒤에 선 아벨에게.
[아벨레사스……?]
“이 목소리는…… 리시르. 너로구나.”
[어떻게…… 네가 살아 있지?]
용에게선 적의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의 우릉거리는 목소리에 질겁한 몇몇 기사들은 성급하게 칼자루를 움켜쥐었지만, 그 누구도 섣불리 공격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대화가 통하기는 하는군. 레이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해후는 잠시 미뤄 두지. 아타일라틀. 그보다 중한 일이 있으니. 나와라, 제르올렌!”
“어린 녀석이 거침없구나.”
용의 머리 뒤에서 부드러운 금발이 너울졌다. 훤칠한 신장의 엘프 청년이 훌쩍 뛰어내려 갑판 위에 당당히 섰다. 화려한 장식이 자수된 감색 망토가 바람에 흩날려, 청년의 단단한 몸이 더욱 장대하게 보였다.
“그대가 당대의 서펜트 킹인가? 흐음……. 가이메른이로군.”
“……그렇다.”
“네 아비는 죽었나? 그 녀석, 그런 방식으로 세대를 이어 나가려 하니 제 자식에게 목이 떨어지지.”
그는 주위를 돌아보며 픽 웃고는 말했다.
“이런 대접은 처음이지만, 함정치고는 제법 정중하구나. 나를 불러내려 한 것이 아니었느냐?”
“그래, 제르올렌. 나는…….”
“잠깐.”
그는 여전히 흉흉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와일드라이더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서펜트 킹이란 엘프들에게 신과 같다. 천상 전쟁 이래로 지금껏 자신의 민족을 이끈 영원왕들. 그런 존재에게 대적함에도 기개를 잃지 않은 자신의 동족을 바라보며, 그는 깊은 웃음을 지었다.
“훌륭하구나. 무예와 기교는 모르되, 적어도 그 기개만큼은 옛 시절에 손색이 없다. 하지만, 군왕과 군왕의 친전이다. 피아를 가리더라도 격조에 맞춰 행해야 함이 아니겠는가? 정병들이여, 칼을 거두고 물러서라. 적어도 오늘 동족의 핏물이 바다를 적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그의 말은 조용했지만 힘이 있었다. 와일드라이더들은 움찔 떨며 자신의 군주를 바라보았다. 레이아는 복잡한 눈으로 제르올렌을 보고는, 곧 고개를 저었다.
“만찬을 준비해라. 회담은 그 이후에 하도록 하지.”
“하하! 가이메른 그 고까운 녀석 아래에서 너 같은 딸이 나오다니. 역시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로다. 라그라스!!”
“예!! 전하!!”
그가 하늘을 향해 외치자, 창공에 떠서 갑판을 내려보며 무기를 다잡던 기수들이 일제히 화답했다. 제르올렌은 손을 펼치며 외쳤다.
“내려와 만찬을 즐겨라! 이국의 동족이 대접하는 식사가 얼마나 훌륭할지는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예, 전하!!”
깃털이 사방에 흩날리며 그리핀들이 하나둘 갑판 위로 착륙하기 시작했다. 비처럼 쏟아지는 그리핀의 깃털 사이로, 제르올렌은 올곧게 걸어와 레이아의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내 동족의 새 시대를 마주하니 기껍군. 서펜트 퀸 가이메른.”
영원왕의 미소를 바라보며, 레이아는 그의 손을 쥐고 흔들었다. 천상 전쟁 이후, 엘프들이 동족을 향해 보이는 첫 외교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 * *
엘프들이 연회실로 향할 때에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었다. 갑판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용이 그랬다. 용들은 주위의 소란에 아랑곳없이 가만히,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벨레사스……. 정말 살아 있었구나.]
“목이 아프구나. 리시르. 오랜만에 보는 친우를 이리 곤란하게 해서야 되겠느냐?”
[이런…… 내가 정신이 없었군.]
화르륵, 불길이 비늘 위를 뒤덮는가 싶더니 그 아래에서 붉은 머리칼을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아벨에게 다가와 천천히 그녀의 뺨에 손을 얹고는 눈을 감았다.
“보고 싶었어, 아벨. 너도, 모두도.”
“오랜 시간을 견뎠구나, 리시르. 어린아이가 이제 다 커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나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어. 어떻게 된 거야? 왜 살아 있었는데도…… 내게 아무런 말이 없었지?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천상 전쟁 이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오랜 세월이었다. 천 년이란, 불멸자들에게까지도. 영생을 구가하는 용들이라 하더라도 불사는 아니다. 세월이 퇴적할수록 기억이란 광기와 유사한 편린이 되어 가슴에 틀어박힌다.
많은 용들이 쇠락했다. 노화가 없다 한들 그것이 불멸하겠는가. 광기에 빠진 용들은 ‘용사’라 불리는 필멸자들에게 참살당했고, 그렇지 않은 용들은 자신의 퇴화를 저주하며 스러졌다.
그렇게 용들이 사라져 갔다. 시간 속에서 천천히. 세대가 끊긴 종족치고는 오랜 세월이었다. 마지막 용의 자취가 사라진 것이 오백여 년 전. 전설보다 신화에 가까운 시간 이전.
“나는 죽었었다. 다시 살아난 거야. 이 년 전에.”
“용들이 돌아오고 있어……?”
“아니. 나는 기적에 가까운 우연의 산물이다. 리시르, 용들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어.”
아벨의 말에 라크리시르는 눈물을 터트렸다. 희망이란, 부재의 흔적을 찾았을 때 더욱 잔혹한 법이다. 차라리 알지 못했더라면, 차라리 갖지 못했더라면 이보다 담담했으리라.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러나 살아 돌아온 자신의 동족이 선고하는 종언은, 듣지 못했던 순간보다 무겁게 다가왔다.
“나는…….”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 동족은 백여 명이 넘게 남아 있었고, 네가 태어났을 때에도 오십 남짓은 남아 있었지.”
카라드펠린, 사다르켈리사, 아벨레사스, 라크리시르. 이 시대에 남은 용은 넷이었고…….
“내가 죽을 땐 너 혼자 남아 살게 되겠구나. 리시르, 나는 그것이…… 견디기 어렵다. 얼마나 외로웠느냐. 얼마나 비통했느냐.”
아벨은 눈물 젖은 눈으로, 자신의 품에 안긴 리시르의 등을 쓸어 만졌다. 그녀는 종족의 종말을 보지 못했다. 그 시절엔 이미 죽어 쓰러진 뒤였던 탓이다. 멸종이 임박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심각하게 여긴 적은 없었다.
그러나 리시르, 이 어린 용은 그렇지 않았을 터였다. 그녀는 살아서 그 모든 순간들을 마주했다. 자신의 형제와 자매, 아비와 어미가 세월 속에 스러져 가는 것을. 그리고 더 이상 자손이 나타나지 않는 순간들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녀보다 어렸던 용들은 격변하는 세상을 견디지 못했다. 그녀보다 나이 많은 용들은 세상의 무게 속에 녹슬어 갔다. 그녀가 살아남은 것은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였을까. 아벨은 대답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살아난 거야?”
“이이의 힘이었다. 다신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 얽혀 만들어진 순간이지.”
아벨이 슬쩍 몸을 돌리자 페르난데스가 걸어 나왔다.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눈물 젖은 리시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만나서 반갑소. 이 시대 마지막 용을 마주해 영광이로군. 나는 페르난데스 세르너드라고 하오.”
“필멸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우리 종의 특질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벨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리시르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벨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고는 말했다.
“네 연인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겠느냐?”
“기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