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구만장천의 열쇠 (7)
레이아의 연회는, 제르올렌 왕가의 엘프들에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무뚝뚝하게, 그러나 조심스럽게 음식을 퍼 날랐다.
한 상 가득 차려진 수십 가지의 음식들. 활동 범위가 넓은 가이메른 왕실다운 라인업이었다. 각 지방의 특산물들을 전혀 다른 레시피로 조합해 누구든 자신이 선호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 만찬이다.
정작 그들의 군왕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제르올렌의 기사들은 감히 서펜트 킹과 겸상을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움츠려 있었다.
“정말 훌륭한 식사로군.”
독주를 잔뜩 마시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제르올렌이 입을 닦으며 말했다. 그는 레이아의 가신들이 직급과 신분에 상관없이 한 식탁에서 같은 식기를 들어 올리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이게 새 시대란 말이지…….”
“계속 그런 말 쓰지 마, 제르올렌. 친절한 옆집 할아범처럼 말한다고 정 안 들어.”
“네 정 필요 없다. 꼬마야.”
제르올렌과 레이아는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끈적한 황금색 액체가 각자의 목울대를 스쳐 넘어간다. 식도가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독한 술. 젊은 청년다운 취향이 아닌가. 제르올렌은 껄껄 웃었다.
“의도치 않은 초대였고, 생각도 못 한 만남이었지만. 환대에 감사하지, 가이메른 여왕.”
“성으로 부르지 말고, 레이아라 불러 줘. 그거 짜증나는 이름이라서.”
“하하. 그래. 두 민족의 결합이라 하였나. 그렇다면 한 왕가의 이름을 대표할 수는 없겠지.”
제르올렌의 눈빛에 호의가 섞여 있었다.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빈 잔과 레이아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이제 분위기는 충분히 무르익었고, 나를 독살하지 않았으니 내 가신들 또한 네 말을 존중할 거야. 나의 영역에 찾아와 무례를 저지른 이유를 듣고 싶군.”
“독살……? 하하,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으면서 왜 내 초대를 수락했지?”
“네게 용이 있는 순간부턴 의미 없는 짓이니까.”
식사를 제안한 순간부터 그는 독살의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에겐 리시르가 있지만, 어째선지 레이아에게도 용이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해군력에서 크게 밀린다.
이 회담이 파국을 맞이하고 자신의 기함으로 복귀한다면, 당장은 살 수 있어도 종족 전체의 멸망은 피할 길이 없다.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인명은 결코 수복되지 않는다.
만일 이것이 모두 함정이었고, 레이아가 자신을 독살하고자 한다면 피할 방법이 없다. 저항한다면 백성들의 목숨이 소모될 터였으므로. 제르올렌은 처음부터 독살을 시도할 경우 저항 없이 사로잡혀 가이메른 왕가에 합병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놀랍군. 서펜트 킹이 이런 생각을 가질 줄이야? 너는…… 너희 셋은 모두 너희 자신을 위해 동족을 구렁텅이로 밀어버린 녀석들이 아니었나?”
“진심인가? 가이메른이나 말레이른이 제 변명 한마디 없이 목을 내주었나? 그럴 놈들이 아닌데…….”
제르올렌은 눈을 크게 뜨고 레이아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그 시절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보이자 웃음을 터트리며 술잔 위에 손을 얹었다.
“우리 셋이라…… 그 시절. 대륙의 전쟁 속에서 우리들은 군왕은커녕 장수조차 아니었었다, 레이아 여왕. 세 명의 모험가였지. 의뢰가 생기면 처리하고, 괴물이 나타나면 처리하고, 피난민이 발생하면 구출하는. 그래, 돈에 무력을 팔아 살아나가던 그런 놈들이었다.”
다소 뛰어났지만. 제르올렌은 서펜트 킹다운 오만함을 잠시 내려 두고도 그렇게 생각했다. 뛰어났다. 종족 전체를 둘러보아도 그들 셋만 한 자들이 없었다. 세 사람이 함께 움직일 때, 그들은 개인의 힘으로도 전장의 전황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건 신의 가호였을까, 종족 가능성의 정수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우연과 우연이 겹친 어떤 기적적인 일이었을까. 한 사람만 있었더라도 추후 반신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여겨졌던 인물들이 한 시대에 셋이 태어났고, 그 셋이 서로 친구가 되었다는 것은.
“옛 이야기를 하지. 옛날 방식으로.”
-화르륵!
술잔 위에서 제르올렌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곧, 독주 위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는 우울하게 웃으며 잔을 들어 올리고는, 레이아의 잔에 부딪쳤다. 불이 옮겨붙었다.
레이아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존재가 비로소 천 년을 넘게 산 사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눈은, 세월이 축적한 지혜만큼이나 세월의 광기와 우울을 품고 있는. 종족의 역사 그 자체였다.
그녀는 제르올렌과 박자를 맞추어 술을 넘겼다. 불은 술보다 뜨겁지 않았다. 그리고 술은, 지금 그녀와 잔을 나눈 저 사내의 비탄만큼 격렬하지 않았다.
“그 시절 우리는 세상을 사랑했네.”
음유시인의 노래 구절처럼, 이 홀 전체에 그의 목소리가 낮고 넓게 깔려 울리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각 왕가의 기사들이 식기를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 * *
엘프 왕가들의 인정과는 별개로. 훗날 종족을 구원할 자들이라 한다면 세 사람을 꼽을 수 있으니. 그들 모두가 얽매임 없는 자유 기사들이라.
대지의 방패 가이메른. 용암 거인의 불꽃을 벼려 만든 창과 대지의 여신 라리샤가 직접 가호한 방패를 두른 기사. 용의 입김을 직접 막아내어 오만 대군의 목숨을 구한 용사.
금고지기 말레이른. 천상의 신 에이다아르가 하사했다는, 만신들의 성궤를 지닌 대학자. 엘프 일곱 마법 학파를 모두 통달한 달인.
창공의 기사 제르올렌. 시대 최고의 그리핀 기수. 단 한 차례의 돌격으로 악마 대공의 심장을 파괴해 다섯 도시와 이십만 백성을 구원하고도, 어떤 보답도 요구하지 않은 채 방랑을 떠난 편력 기사.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며 동족을 구하고 괴수를 척살하며 이종족을 밀어내어, 대전쟁 속에서 엘프들의 영토를 수호한 세 사람은, 우연처럼 한 전장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물론, 다들 서로를 믿지는 않았지.”
들려오는 소문의 절반만 사실이라 하더라도 믿을 수 없기는 매한가지다. 소문이 온전히 사실이라면? 그때부터는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다. 한 사람이 가지기에 너무나 위협적인 무력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졌다.
같은 전장에서 보낸 얼마간. 그들은 강대한 악마들과 미쳐 날뛰는 고룡. 그리고 끊임없이 화약을 투사하는 드워프들과 대적해야 했다. 아군 따윈 없는 전장이었고, 그런 것이 당연했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들이 구해 낸 수와 죽어간 동족의 수가 비슷해지기 시작한 어느 시점. 그들은 마침내 서로를 인정했다. 이자들이라면 적어도 등을 맡길 수 있겠구나. 마침내 같은 시야를 공유하는 녀석이 나타났구나.
“웃긴 일이지. 능력을 인정하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
그 힘과 능력을 인정한다. 그 즈음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만큼 강하다는 것, 나만큼 위험하다는 것. 그러니—
“차라리 보이는 곳에 두어 견제를 해야겠다.”
결론은, 엘프식 화법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들은 그 날 이후 서로를 친구라 부르며 동행했다. 종족 최강의 용사들이 한 무리를 결성했다는 소식은 너무나도 빠르게 대륙을 강타했다.
* * *
천상 전쟁이 언제, 어떻게 끝을 맺었는가. 그 시절의 사료 대부분은 사토 속에 묻혀 있었고, 남아 있는 자료라 한들 민담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제르올렌은 기억한다. 천상 전쟁 시절을 거닐었던 그는.
“세계의 종말?”
“그래.”
악마의 두개골을 잘라 내며 하기에 썩 괜찮은 화두였다. 제르올렌은 픽 웃으며 말레이른의 말을 받았다.
“내기할까. 내일이지?”
“아니. 백오십이 년 후.”
“거 구체적인 숫자로군.”
“신들께서 점지하신 시간이다. 제르올렌.”
말레이른은 성궤의 끝을 매만지며 속삭이듯 말했다. 제사장은 이래서 귀찮다니까. 그는 씩 웃으며 덤벼드는 악마의 가슴팍에 창날을 박아 넣었다.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육편이 비산했다.
“사유가 뭐라 하던가? 아니. 내 직접 맞춰 보지. 드워프들이겠군. 그 굴착꾼들이 결국 대륙을 박살 낸 거야. 그렇지?”
“농담이 아니다.”
“진담이면 뭐. 종말이 오는데 우리가 뭘 할 수 있나?”
슬쩍 웃는 제르올렌을 바라보며, 말레이른이 손을 흔들었다. 순식간에 마력이 뭉치고는 곧장 달려드는 악마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그는 전류가 방전되어 타닥이는 손을 휘휘 털고는 말했다.
“악마와 신들의 전쟁 사이에서 소모되기만 하는 지금. 우리에게 달리 미래가 있을 리가 있나? 정정하지. 내가 신들께 청원한 것은, 우리 종족의 남은 수명이었다.”
“남은 수명이라고?”
“그래. 우리 종족들이 버틸 수 있는 시간. 이 전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불멸자들의 아귀다툼 속에서 필멸자에 불과한 그들이 얼마나 더 긴 시간을 살아남을 것인가. 그들의 종족은 명백한 내리막길을 타고 있었다. 완만하지만, 결코 멈출 수 없는 종류의.
한 번의 국지전으로 희생되는 동족의 수가 물경 오천이다. 애초에 수가 많지 않은 그들로서는 견디기 힘든 손실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 전쟁은, 그런 손실을 언제나 모든 순간에 강요해 왔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측이었다. 그러나 말레이른은 그보다 한발 앞서서, 정확한 기간을 점지받고자 했다.
그리하여 만신전의 대답은 일백오십이 년. 지금과 같은 전쟁이 계속해 발생할 경우 종족의 자체적 생존 기능을 상실하기까지의 시간이었다.
“뭐……. 그래, 그 말이 맞군. 우리들 모두가 죽으면, 적어도 우리의 세상은 종말을 맞이할 테니까. 그래서 해결책이 있나?”
“미봉책은 남았지.”
말레이른은 눈을 가늘게 뜨며, 핏빛으로 물드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악마 대군이 다시 몰려오고 있었고, 그의 뒤에 도열한 병사들은 눈에 띄게 지쳐 있었다.
“방주를 건설해 당면한 종말을 피하는 것.”
“방주라……? 그, 바다 위에 뜨는, 배를 말하는 겐가?”
“대악마의 관심사는 주 물질계가 펼쳐진 대륙이고, 천상 만신전의 이목도 대륙에 집중되어 있지. 드워프나 인간들…… 녀석들의 문명도 대륙에 있으니. 일단 바다로 피한다.”
“배 몇 척을 띄운다 한들 우리 모두가 수용될 수가 있나?”
“이미 진행 중인 계획이야, 제르올렌. 삼 왕조 모두가 이 계획에 동의했네. 대악마가 직접 내리는 저주. 고룡이 직접 뿜는 불길. 드워프가 직접 쏘아 올린 화포. 그 셋을 제외한 어떤 것들에도 감히 상하지 않을 요새 도시를 바다 위에 띄울 계획.”
이는 우스운 농담이다. 대악마가 그들을 직접 저주하기엔, 대륙의 정세에 집중하기도 벅찼다. 고룡들은 자신의 둥지를 지키기에도 바빴고, 드워프들은 땅 밖으로 나서지 않으니 바다에 화포를 발포할 일이 없다.
유예라. 종족의 종말을, 적어도 물질 세계의 종말 직전까지 끌어가는 유예. 말레이른은 쓴웃음을 지었다. 화려한 멸종 대신 세월 속에 삭아가는 쇠약을 택한 것이다. 대륙에 터전을 잃고 난 뒤에 남은 것은 표류뿐이었으니.
“그럼 그걸 내게 말하는 이유가 뭐야.”
“가이메른과 자네, 그리고 나. 우리 셋은 미봉책을 완성할 방법을 찾기 위해 떠난다.”
“……그건 무슨 소린가.”
“먼 바다로 피해 종족의 목숨줄을 이어 놨다 한들, 대륙 자체가 멸망해 버리거나 어느 한쪽이 패권을 움켜쥐면 소용이 없다. 그 뒤엔 어차피 누구나 죽음을 맞이할 테니까. 그러니, 우리가 이를 저지해 보자. 제르올렌.”
단순히 물질 세계의 멸망을 막아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엘프들의 생존 조건은 두 가지였다. 물질 세계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는 것. 또는, 어떤 하나의 패권국이 등장해 세계를 움켜쥐지 않는 것.
우선 잠시 환란을 피하고, 전쟁 속에서 각 세력들이 서로 힘을 잃어 스러지면. 그때 다시 뭍에 올라 문명을 재건하자. 이것이 삼 왕조와 말레이른이 예언을 토대로 만들어 낸 계획이었다.
나쁘지 않다. 그러나,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오지도 않은 멸망을 막거나, 있지도 않은 패권국을 견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내가 뭘 해야 하는데?”
“만신전으로 향할 거다.”
“……뭐?”
“만신전의 문을 열겠다. 가이메른과 네가 앞장서고, 내가 청원하지. 우리의 존재는 분명 신들의 안배였을 터. 우리의 청원을 거부하지는 못할 것이다.”
엘프 만신전은 오만한 신들이었다. 그들에게 직접 대답을 구하기 위해선 반드시 무언가를 희생해야 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사제의 목숨이었다. 스스로 분신하여 자신의 영혼을 오롯이 바치면, 그 위로 신들의 답신이 그늘처럼 드리워지곤 했다.
하지만 변변찮은 사제가 아니다. 말레이른은, 그리고 가이메른과 제르올렌은. 한 종족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가능성을 품은 자들이었다. 남들이 우러러 말하기를 ‘만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은 자들’이라. 그런 그들이 직접 청한다면 감히 무시하진 못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세상을, 그리고 민족을 사랑했으므로. 그들을 구할 수 있는 자들은 자신들뿐이라 생각할 정도로 충분히 오만했으므로.
* * *
“……신을 만나서 어떻게 되었지?”
어느새 이야기에 빠진 레이아는 술을 홀짝이며 말했다. 연회장의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물고, 고대의 전설에게 전설 속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늙은 망령이, 지친 눈으로 말했다.
“놈들을 죽였다. 단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