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92화 (293/388)

292. 구만장천의 열쇠 (8)

천상 전쟁 시절, 일반적으로 ‘신화시대’라 불리던 머나먼 상고 시대에는 대륙 위에 악마와 천사, 용과 엘프와 드워프들이 활보했다. 지옥이나 천상과의 접촉이 지금처럼 엄밀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평범한 사람도, 어느 정도 운이 따라 준다면 신의 편린과 조우할 수 있다. 신들의 가호나 관심을 구걸할 수 있다. 심지어 때에 따라서는, 자신이 추종하는 신을 떠나 다른 신에게로 개종할 수조차 있었다.

그리고 그 뜻은, 신들 또한 자신의 추종자를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는 의미로도 통했다. 간과하기 쉽고, 믿기는 어렵지만. 분명 가능한 일이었다.

가능한 일이었을 터.

* * *

말레이른의 표정이 창백했다. 그는 성궤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채로 덜덜 떨었다. 오랜 시간 그를 보아 왔던 가이메른이나 제르올렌으로서는 놀랍기 그지없는 반응이었다.

엘프 특유의 오만함. 그들 스스로는 ‘귀족적임’이라 표현하는 태생적인 오만함을 지금 이 순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제르올렌은 그를 바라보며 절박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떨던 말레이른이 마침내 눈을 뜬 것은 반나절이 지난 후였다. 그의 몸에선 신과의 교신 속에 타들어 간 영성이 입자가 되어 흩어지는 것이 선히 보일 정도였다.

“물을…….”

“자.”

제르올렌은 수통을 뜯어 그에게 건넸다. 말레이른은 떨리는 손으로 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그대로 토해 냈다. 위산이 섞인 토사물이 에이다아르의 성소 바닥에 흩뿌려졌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우리는…….”

한동안, 그는 더듬거리며 어떤 단어를 생각해 내려 애썼다. 아니, 그 단어를 입에 담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영혼이 찢겨 나갈 것처럼 겁에 질린 채로.

그 처참한 모습이 그 광경을 지켜보던 두 사람에게 인내심을 주었다. 그들은 차분하게 말레이른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몇 차례 헛구역질을 한 끝에, 토사물이 묻은 턱을 애써 닦아 내며 말했다.

“버림받았다.”

“뭐?”

“신들…… 아니, 불멸자들이. 그자들이 우리를 버렸어.”

“버려질 수도 있는 건가? 보통…… 신과 피조물이라는 관계가……?”

“신이 아니야. 놈들은…… 신이 아니야. 다시는 그런 단어로 놈들을 표현하지 마라.”

말레이른의 눈은 지치고 상처받은 야수처럼 이글거렸다. 그의 눈에선 땀과 눈물이 섞인 액체가 흘러나왔다.

“제르올렌. 우리는 창조된 것이 아니었어.”

“음……. 나는 아타일라틀이 아닌데. 이봐, 가이메른, 자네는 용인가?”

“농담하기에 적절치 않은 상황처럼 보이네. 제르올렌.”

“퍽퍽한 것들…….”

엘프는 신의 자손들이다. 그 어떤 문명 종족보다 장생하며, 고결하고, 아름다우며, 강인하다. 세월이 가져오는 용맹과 지혜가 그들의 혈관 아래에서 맥박 치며, 그들의 문명은 동시대 그 어떤 족속들보다 우월하다.

당연히, 신이 아니라면 이런 피조물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더군다나 신들은 창세 이래로 그들에게 끊임없이 지혜를 전달하고, 발전 방향을 지시하며 문명을 이끌어왔다.

삼 왕조의 사제왕들은 그들의 세상으로 향하는 나침반이다. 왕들의 권위가 곧 신의 권위였고, 강력한 왕권 아래에서 엘프들은 하나 되어 움직일 수 있었다.

세계수가 이 세상에 드리워져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상, 엘프와 신들의 유대는 세계수의 가지 위로 떠오르는 첫 일출처럼 강렬했다.

그러나.

“우리는 놈들의 자손이 아니야. 놈들은…… 우리의 탄생에 어떤 영향도 행사하지 않았다. 놈들은 그저…… 우리의 신앙과 영성을 착복하는 존재들에 불과했어.”

“……뭐?”

엘프들의 사회구조가 신정일치에 가깝다는 것은, 엘프들의 삶에서 신앙을 분리해 볼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가 비록 왕가의 기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는 바람의 신 탈리에 신의 신도였다. 말레이른의 말에 그의 인상이 와락 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놈들의 존재가…… 놈들이 우리에게 보인 형상 전체가 기만이었다. 놈들은 우리를 사랑하지도, 우리를 보살피지도 않아. 그건 차라리…….”

차라리, 목장을 관리하는 농부의 것과 같은 심정이다. 자신의 돼지가 아무리 곱게 꿀꿀거린다 하더라도, 도축이 필요할 때 결코 자비를 보이지 않을. 그 정도의 관계였다.

엘프. 아우릴라스(신들의 자손)라는 이름을 가진 이 비천한 족속들이 아무리 신들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신들의 입장에선 크게 의미 없는 행동이었을 터.

세상의 몰락이 가깝고, 온갖 종족의 갖은 신들이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악마들이 그들의 권속과 함께 대륙을 박살 내는 이 시점에서. 신들은 차가운 이성으로 판결을 내렸다.

[놈들의 쓸모가 다했다.]

세계는 유일하지 않다. 물질 세계는 피어오른 거품처럼 무가치하다. 빛나는 보석이 잠들어 있다 한들, 불멸자들의 시선에서 이 차원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엘프 만신전이라 불린 이 오만한 족속들은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용케도 자신에게 찾아온, 우리 속 가장 뛰어난 돼지에게 속삭였다. 그건 어떤 삐뚤어진 조롱에 가까운……. 일종의 변덕이었다.

[너희의 세상은 종말을 맞이하리라.]

그리고 그들은 그 광경을 약간의 아쉬움과, 약간의 즐거움, 그리고 대부분의 무관심으로 스쳐 지나갈 것이다. 본디 비극이란, 객석에서 마주할 때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아닌가.

“그만두지. 듣고 있기 어렵군. 사제에게 가 보게, 말레이른. 충분히 상담을 취하고, 술 한잔 걸치고, 그 다음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든가 하지.”

“우리가 살기 위해선!!”

-쾅!

말레이른은 성궤를 박살 내며 말했다. 신들의 축복과 지혜가 잠들어 있다는 저 고대의 기계장치가 그의 마력에 의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그 충격적인, 그리고 신성모독적인 광경에 제르올렌은 말을 잃었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선! 놈들의 힘이 필요해!”

“……그게 무슨 소리야.”

“모르겠나? 세계수. 저 거대한 나무는 그냥 단순히 몸집 불린 묘목이 아니야! 저건 놈들이 이 물질 세계에 남긴 첨탑이다! 놈들의 신성이 우리에게 개입하게 만드는, 차원 관문이야. 놈들이 우리를 떠나고 버린다면 세계수가 남아 있겠나?”

세계수는 분명 생명체다. 마도공학적인 생명체에 가깝지만, 어쨌건 살아 숨 쉬는 존재다. 타락의 기운을 흡수하고, 새로운 생명을 내뿜으며 엘프들의 터전을 보호하는 유산이었다.

그런 존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선 막대한 자원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세계수는 다만 담수에 뿌리를 뻗고 있을 뿐, 그 외의 영양을 섭취하려 하지 않는다. 그건 어떤 대단한 설계 때문이 아니라, 신들의 신성이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단말을 유지할 필요가 없는 신들의 입장에서, 세계수의 생명을 붙들어 놓을 이유가 있는가? 아니다. 신들에게 엘프가 더 이상 필요한 자원이 아니라면, 세계수 또한 그렇다.

그리고 삼 왕가의 권위는 세계수에서 나온다. 세계수가 불타오르면 그 즉시 왕권이 허물어질 것이고, 갑작스럽게 등을 돌린 신들에 대한 애정을 갈구하며—

이 비루한 족속들. 신의 관심 없이 살아갈 방법조차 모르는, 이 아둔한 동족들은……. 그 즉시 내전을 일으킬 것이다. 나쁜 것은 왕이다. 사제 왕들이 신의 총애를 잃어 우리 종족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신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왕의 목을 걸어라.

“그땐 너무 늦네. 너무 늦어……”

온갖 종족들이 갖은 힘을 다해 투쟁하는 이 세계에서, 신의 권위를 잃고 내전으로 국력을 깎아 가는 쇠락한 족속이 어찌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답은 단 하나일세. 우리에겐 놈들의 힘이 필요해.”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건가?”

“당연히.”

그러니, 신들을 죽여 신성을 앗겠다. 만신전의 모든 신들을 죽여 없앤다면 우리 종족 전체에 돌아갈 힘을 구축할 수 있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고, 신의 권위와 어떤 초월자의 간섭이 없는 온전한, 필멸자들의 문명을 쌓아 올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말레이른은 두 영웅을 설득해 냈다. 세 사람은 그 길로 세계수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엘프 만신전으로 열려 있는 물질 세계 유일한 관문을 향해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말레이른은 이 시대에 가장 신들의 총애를 받는다고 알려진 대사제였고, 또한 그 개인의 마법마저 압도적이었으니.

“신을 죽일 방법이 있네.”

* * *

“거짓말…….”

레이아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가 쥔 술잔이 찰랑거리며 떨렸다. 그녀는 멍한 초점으로 애써 그를 바라보았다.

“거짓말. 서펜트 킹. 네놈들의 위선과 역겨운 욕망은 이미 두 왕의 선례에서 알고 있었다. 감히…… 감히 어떻게……!”

인퍼머르 시에서의 광휘. 새벽의 여신 멜리실두르가 보여 준 여명과 그 빛을 기억한다. 단숨에 흡혈귀를 몰아내고 그들의 영과 육을 충만케 했던 그 빛을…….

어떻게 그런 위대한 존재들이 거짓이라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신들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말할 수 있는가? 레이아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를……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 제르올렌. 네 말대로…… 오늘 우리 동족의 피가 바다를 적실 일은 없을 것이니. 하지만 돌아가라. 네 거짓의 대가를…… 우리가 직접 벌하겠노라.”

“이야기를 마저 들어라.”

“닥쳐! 더 이상 그 간사한 혀를 놀리지 마라! 그웬!”

“예, 전하!!”

“이자를 추방해라! 이자들 전부를!!”

제르올렌의 기사들은 일제히 일어나 자신의 군주를 보호했다. 그러나 무장 하나 없이 시작된 연회였기에, 그들은 창칼을 드리우는 레이아의 와일드프린스들에게 저항할 수단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눈에선 굳은 신념이 보였다. 자신의 왕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마저 내던질 그런 신념이.

“내 이야기를 마저 들어.”

제르올렌은 다가오는 그웬의 팔을 순식간에 꺾어 무기를 강탈하고는 그의 몸을 집어 던졌다. 놀라운 힘과 기술이었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고는, 그웬의 장검을 부러트려 바닥에 던졌다.

그 서슬에 손바닥이 찢어져 핏물이 흘렀다. 제르올렌은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피에 젖은 손. 그날처럼…….

“이야기가 끝난 이후엔 저항 없이 돌아가마. 그리고 네가 모든 이야기를 끝낸 뒤에도 전쟁을 바란다면, 그렇게 하겠다.”

여전히 불신과 분노에 차 있는 레이아에게, 늙은 망령이 으르렁거렸다.

“너의 아비와 말레이른은 그 시절의 힘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야.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택했지만, 놈들에게 없는 것이 내겐 있었다.”

그건 위협이었다. 천상 전쟁 시절의 힘을 고스란히 갖춘, 신을 참살했던 상고의 대영웅이 자신의 존재감과 힘을 숨기지 않으며 하는 위협. 레이아의 본능이 경고성을 내질렀다.

와일드프린스들의 반응은 대단히 즉각적이었다. 그들은 즉시 칼자루 위에 손가락을 얹으며 제르올렌을 바라보았다.

“나는 구원받았으니까.”

“신을 죽였던 네놈들이 감히 구원을 입에 담다니!”

“신이 아니라, 용에게. 아타일라틀. ‘두려운 뱀’이라는 뜻이지. 그러나 내가 만난 그녀는 결코 두렵지 않았다.”

가련했지. 제르올렌은 씁쓸하게 웃으며 피 묻은 손을 들어 술을 넘겼다.

* * *

“나는 그이에게 구원받았다.”

라크리시르는 눈물을 훔치며 온화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아벨은 퍽 감명받은 모양이었다. 아벨은 그녀의 손을 꼭 쥐고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그런 아벨의 모습에 장난스럽게 웃으며, 라크리시르는 페르난데스에게 말했다.

“네가 나의 오랜 친우를 되살렸으며, 용을 잃어버린 이 세상에 다시 용의 날개를 되찾아 주었으나……. 너와 이 엘프들이 결코 좋은 뜻으로 우리를 찾아온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

페르난데스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두 엘프 왕들에게 깔려 있는 적대감은 이미 명백했으므로. 그러나 리시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서펜트 킹들을 먼저 만나 보았다면……. 그이를 어떻게 생각할지 알겠다. 하지만, 그이와 나는 그저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야. 이들 모두가 사실 그저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지. 그이를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이를 증오하진 말아다오.”

“어떻게 천 년을 살아남았소?”

가장 궁금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가이메른은 노화하는 자신의 육신을, 자신의 자식들의 몸을 통해 해결했다.

말레이른은 자신의 영혼에 백성들의 영성을 섞어 육체를 강화했다.

하지만 제르올렌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아 천 년을 버텼다는 말인가.

엘프가 아닌 페르난데스에게 그 방법이 반드시 선할 필요도, 악하다고 증오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혐오할 이유는 충분했다.

이물이 섞인 영혼은 반드시 타락한다. 전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페르난데스는 가장 완고한 순수주의자에 가까웠다.

“내게 그이가 필요했던 것만큼, 그이에게도 내가 필요했었다. 알고 있느냐? 용의 육신은 불멸하고, 용의 영혼엔 신성이 깃들 수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