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 구만장천의 열쇠 (9)
“엘프에게도 신이 있다면, 어떻게 생겼을까. 그는 우리를 닮았을까? 아니, 우리가 그를 닮았을까?”
제르올렌의 말이 연회실을 음산하게 울렸다. 레이아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이 시대, 엘프 만신전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으며 실제로 여신과 직접 대화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 또한 직접 신의 모습을 마주한 것은 아니었다. 신의 형상은 어떻게 묘사되는가. 오래된 묘사화나 모자이크, 또는 태피스트리와 스테인드글라스에서. 그들은 가장 완벽한 형상의 엘프로 표현되곤 했다.
당연히 그래야 했다. 신들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피조물에게 자신의 형상을 부여했으므로. 그렇게 알려져 있었으므로.
“만약에 우리와 같은 형상의 불멸자들이 있었다면…… 우리는 차라리 진실을 외면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에게 복종했을 것이다. 만약에…… 그런 존재들이 우리를 사랑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위해 영혼을 불사르며 살아갔을 테지.”
제르올렌은 천천히 눈을 감고는, 떨리는 손으로 술을 마셨다. 그날의 풍경이 지금도 그의 눈꺼풀 뒤에서 선연히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보라색이었다.
* * *
세계수는 엘프 만신전과 물질 세계를 잇는 관문이며, 다른 문명 종족에겐 존재하지 않는 신의 증명이다. 교회와 성당을 세우고 자신의 신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하등 종족들과는 달리.
보라. 수평선 너머로 뻗은 이 거목은 우리의 신이 우리를 사랑함을 증거하노라. 엘프들은 자랑스레 외쳤다.
하지만, 어째서 다른 종족의 신들은 이러한 선물을 내리지 않았는가. 그들의 기적에는 왜 대가가 없었는가.
그것이 정말, 엘프 신들의 우월함 때문인가?
“이게…… 대체……!”
제르올렌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창을 맞잡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 자세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관문을 통과하고 나온 이 세상. 저 먼 하늘과 꿈틀거리는 대지, 그리고 안개 덮인 지평선 너머에 이르기까지 영혼이 비산하고 있었다.
신들의 차원은 형상보다 관념에 가까운 장소였다. 아주 찰나, 충격에 집중을 잃고 의식이 흩어진 그 순간 그의 몸은 천천히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있었다.
“정신 차려!”
말레이른은 어금니를 사리물며 수인을 짚었다. 바스러지던 가이메른과 제르올렌의 육체가 다시 형태를 되찾았다. 말레이른은 혐오를 숨기지 못한 채 저 하늘 너머를 향해 턱짓했다.
“저걸, 신이라 부를 수 있겠나? 저 존재를 감히 우리 종족의 구원이며 빛이라. 우리의 창조자라 부르겠나! 저건 아귀야!”
그가 가리킨 방향에 어떤 형상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또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간 엘프들의 영혼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제르올렌은 자신도 모르게 속삭였다. 저런 광경을…… 저런 존재를 그는 알고 있었다.
“악……마…….”
엘프 중에서도 ‘타락한’ 존재는 얼마든지 나온다. 악마의 타락은 종족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신의 존재가 뚜렷한 엘프들에게 있어서도, 악마의 유혹은 무시하기 어려울 만큼 치명적이었다.
그런 자들은 종종, 동족을 제물로 바치거나 스스로를 번제(燔祭)하곤 했다. 그 영혼은 자신이 신봉하는 악마에게 빨려 들어가고, 악마는 자신의 존재를 증거하기 위해 힘과 유물을 남긴다.
그런 행태가…… 놀랍도록, 유사하지 않은가..
“그래. 우리의 선조들, 선조와 그 선조들. 동족들. 전부가 저 기름진 뱃속에 들어갔겠지! 대단하지 않나? 한 종족 전체를 집어삼키기 위해, 종족 전체의 저항 의사 자체를 빼앗는 방법을 취한 거야! 저 기생충들은 신의 형상을 의태했다고!”
완고하고 자존심 높은 족속들을 타락시키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 가장 효율적인가? 그건 아마도, 신을 위장하는 것이다. 자비를 보이고, 사랑을 가장하고, 자신의 이름을 속삭여…… 자기 자신을 신봉하도록.
충분했다는 의미인가? 그것이 충분했다는 뜻이란 말인가? 이제 쓸모를 다했으니, 종족 전체를 불살라 마지막 영혼까지 쓸어 마시고는 제 힘을 비축하겠다는 의미였나?
제르올렌은 타오르는 눈으로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존재를 노려보았다. 영혼의 탐식자. 저 존재는…… 그는 저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더 이상 그를 그가 알려준 이름으로 부를 수 없었다.
[내 아이들이 돌아왔구나!]
그건 부드러운 합창 같은, 달콤한 목소리였다. 영혼의 틈을 비집고 집중을 앗아가는……. 다만 듣는 것만으로도 무릎을 꿇고, 자애를 구걸하길 바라도록.
얼마나,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란 말인가. 신들에게 향하는 관문은 이토록 쉽게 열 수 있었고, 누구나 원한다면 신의 형상을 볼 수 있었다. 엘프의 장구한 역사 동안, 단 한 사람이라도 세계수의 정상에 올라 관문을 열었다면…… 그랬다면.
“왜 우리를 막지 않았지?”
제르올렌은 핏물을 뱉으며 말했다. 분노와 혐오 탓에 어금니를 씹어 잇몸이 망가졌다. 그는 다가오는 존재에게 외쳤다.
“왜냐! 너희는…… 너희는 왜!!”
왜 우리를 이용했지? 왜 우리를 막지 않았지? 왜 우리를 버렸느냐? 많은 질문들이 함의되어 있었지만, 그 어떤 질문도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마음이 꺾였다. 지금까지 믿고 있었던 대의도, 지금껏 믿어 왔던 상식들마저 모두 허물어지는 이 상황에서. 제아무리 굴강한 전사라 할지라도 이성을 유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왜냐니? 재밌는 질문을 하는구나! 글쎄, 왜일 것 같나? 응?]
놈은 허공에 거대한 눈을 만들더니 데굴데굴 굴려가며 말했다. 죽은 엘프들의 영혼이 그 근처에서 거품처럼 피어올라, 마치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놈의 시선이 말레이른에게 못박혔다. 곧 놈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왜 너는 말해 주지 않았느냐? 으응? 칭얼거리는 꼴이 우습고 귀여워 아껴 주었거늘. 제 역할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했구나?]
“네…… 이놈!!”
말레이른은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제르올렌은 그 과정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짧지 않은 시간, 함께 사선을 건너며 지내온 탓에. 그는 말레이른 특유의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저건,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때 짓던 표정이었다.
[아하! 혹시…… 신이 없다고 했느냐? 그래, 그래……. 친절하기도 하지……. 가상하기도 하지! 친구들의 마음을 지켜 주고 싶었느냐? 멋져, 다정하구나! 없긴 왜 없다 하였느냐! 이리도 온전히 너희와 함께하고 있었는데!]
놈은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벌렸다. 놈의 입 안에 보석처럼 빛나는 형체들이 있었다. 엘프의 영혼과 유사한…… 그러나 티끌 하나 없이 고결한.
종의 기원. 엘프로서의 본능이 맹렬하게 외치고 있었다. 선조. 아마도, 진정으로 그들이 ‘신’으로 숭상했을 아득한 옛 시절의 선조들이다.
[너희는 패배했다! 나에게, 나의 군단에! 아이들아, 알겠느냐? 네 어버이들은 이제 나의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되었으니. 너희 또한 그리되리라! 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느냐? 죽고 싶지 않다 외치는 병졸을 보았느냐? 아름답더구나! 내가 너희의 바람이요, 대지요, 들풀이며, 여명이었다! 너희가 부른 모든 신의 이름이 곧 나를 위해 존재하였으니!]
놈은 행복을 터트리며 웃었다. 관념에 가까운 세계인 탓에, 사념 자체가 형상을 빚어내고 있었다. 광기에 가까운 고양감이 사방에 터지고, 오색 찬란한 거품을 일으키며 파도쳤다.
달큰한 향이 코를 찌르고 피가 달아올라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제르올렌은 입술을 씹어 정신을 차리며 놈을 노려보았다. 힘이 빠져나가던 창날을 억지로 추스려 세웠다.
[놀랍구나. 너희 셋은…… 그 시절의 녀석들에 못지않아. 너희 종족에게 남은 저력이라고는 수확철을 기다리는 밀알의 것을 넘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내 예상이 틀렸나? 폐광이라 생각해 폐기하려 했건만!]
놈의 눈에서 탐욕이 일렁거렸다. 말레이른은 뒤로 물러서며 조용히 수인을 잡았다. 가이메른은 한 발 앞으로 나서 방패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제르올렌은, 창날을 똑바로 들어 놈의 미간을 향해 겨눴다.
[너희도 나의 보석이 되어 영원히 빛날 것이다. 너희의 투쟁 또한 장구한 시간을 달래 주는 여흥이 되겠지! 싸워라! 죽을 때까지 싸워 너희의 영혼을 세공해라! 그로써 너희는 더욱 완벽한 보물이 되어 남으리라!]
놈의 외침과 함께 세계가 일렁였다. 놈의 주위를 날아다니며 영혼을 수확하고 집어삼키던 작은 존재들이 하나둘 형상을 입으며 지상에 내려앉았다.
세 영웅은 대답 없이 각자의 무기를 준비했다. 입을 열어 반박하기엔, 또는 다른 말을 내뱉기엔 너무 지쳐 있는 상태였다. 관념의 세계에서 영혼의 피로는 곧 육신에 영향을 미쳤다.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죽게 되겠지. 세 사람은 동시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에 이어질 생각 또한 서로 다르지 않았다.
반드시 살아남을 이유는 없다. 반드시 죽여야 할 필요만 있을 뿐.
* * *
“어떤 존재가, 개인이 갖기에 너무나 강력한 힘을 쟁취한 순간부터는 그 존재에겐 신성이 어린다. 육신과 영혼의 한계를 벗고 관념에 가까운 존재로 탈바꿈하지. 개인의 선악을 넘어선 자연법칙이다.”
제르올렌은 조용히 말을 이어 나갔다.
“신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탄생했지. 고대의 어떤 존재들. 너무나 해묵어 기원을 알 수 없는, 관념 그 자체가 되어버린 대신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악마들 또한 그랬다. 군단을 지배하고 졸개들의 영혼을 틀어쥐어 사역하는…… 악마들의 정점에 위치한 존재들.”
다섯 대악마. 그 모든 이름과 존재가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세계의 비사에 대해 접하다 보면 악마의 준동 그 끄트머리엔 항상 그들의 이름이 있다.
타이반, 예카세트, 사다르켈리사, 뭄토, 우르카시아.
하지만 모든 대악마들이 그 시절에도 그렇게 불렸던 것은 아니었다. 천상 전쟁 시절, 사다르켈리사는 아직 타락하지 않았고. 뭄토는 탄생하지 않았었으나.
“그 시절에도 대악마라 불리는 자들은 다섯이었다. 그 전까지 알려진 놈들은 크게 넷이었으나, 하나가 더 있었지.”
수확자 에이다아르. 엘프 만신전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만신전의 신들을 모두 집어삼키고 잠적한 악마.
오랜 시간 신을 의태하여 엘프를 사육하고, 엘프들의 영혼을 집어삼키며 성장한 끝에 그 어떤 존재들보다 강대한 힘을 갖추었다고 자부했던 악마였다.
“놈이 우리를 버린 이유는, 더 이상 영혼의 질이 우수하지 않았던 탓이었지.”
천상 전쟁 시절의 엘프는 사양길에 놓여 있었다. 점점 줄어 가는 인구, 그리고 점차 사라지는 고대의 지식과 힘. 엘프 종족의 신생아들은 전 세대보다 왜소해지고, 나약해져 갔다.
영혼의 순환이 깨어지고 오직 사육되기 위해 개량된 종족이다. 종족 전체에 드리워진 암운은, 놈이 살아 있는 한 걷어질 수 없으며—
“놈이 살아남아서, 만신전 영역에서 직접 걸어 내려와 세계수 위에 강림할 때. 과연 그 누가 놈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한 종족을 온전히 집어삼키고, 그 종족의 신들을 모두 잡아먹은 악마다. 놈의 오랜 잠적은 그 기간만큼의 힘을 선사했다. 놈을 막을 방법은, 관념의 세계에서 물질 세계로 도래해 온전한 형상을 빚어내기 전에 처단하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싸웠을까.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는 공간이었으니. 어쩌면 영원히. 놈이 바라는 대로 영원히 투쟁했을지도 모른다. 끝없이 몰려오는 악마들과, 웃음을 터트리며 그 광경을 지켜보는 놈의 시선까지. 그 아래에서—.”
시간이 없더라도 경험은 남는다. 그리고 퇴적된 경험이란 사람의 본성을 뒤틀기에 충분한 힘을 갖는다. 고룡들의 말로가 끝내 광기로 치닫듯이.
놈이 바랐던 대로.
* * *
기억이 끊기고, 붙고, 다시 뒤엉키는 시간이 지났다. 영원에 가까운 투쟁 끝에 세 영웅은 대악마의 목전에 다다랐다.
다시 생각해 보면, 기이한 일이다. 자신의 병력이 산산이 부서지는 그 순간에도 놈은 그 자리에서 움직임 없이 웃음 짓고만 있었으니.
그러나 그때 그들에겐 그런 생각을 품을 여력이 없었다. 말레이른의 주문이 놈의 몸을 속박했고, 가이메른이 발버둥치는 놈의 몸을 눌렀으며, 제르올렌의 창이 놈의 심장 위에 내려앉았다.
[너희는 영원히 살아야 할 게다.]
“뭐?”
“듣지 말게. 더는.”
[세월을 향해 창칼을 올리고, 시간을 도려내며, 죽음을 디뎌라. 너희의 족속들에게 주어질 찰나를 조금이나마 연명하고자 한다면.]
놈은 세 사람의 눈을 그대로 바라보며 웃었다.
[나의 죽음이 너희의 승리라 여기지 말라. 너희의 생존 또한 나의 즐거움이 되리니, 발버둥 쳐라. 너희 스스로를 세공해라. 나는 이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시간이 길지 않더라도, 너의 것보다는 길 것이다. 너는 지금 죽을 것이다.”
가이메른은 싸늘하게 말하며 놈의 몸을 밀어붙였다. 놈은 헐떡이며 웃었다.
[그래! 그래! 죽음이라! 내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너희들 위에 군림하였는지 아느냐? 어느 정도의 세월을 너희의 신앙 속에 보냈는지는? 나는 불멸이다! 너희의 삶과 죽음, 너희의 종교와 문명, 그 모든 것들이 나를 향해 이어지니라!]
종족신이 되어버린 기생충과, 관념을 형상화하는 차원이 만들어 낸 합작품이다. 놈은 이미 엘프라는 종족 자체가 가진 신앙의 상징이 되었다. 그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흐르더라도 변하지 않을 것이며, 놈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는 영원히 엘프가 걷는 대지의 그림자 아래에서 메아리치리라.
짧은 대화 속에서도 그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놈은 돌아올 것이다. 언젠간, 모든 동족들의 영혼을 잡아먹는 그 순간에.
그리고 엘프가 멸종할 정도의 사건이 일어나고, 세월이 흐른 뒤에라면. 놈의 경쟁자들 또한 힘을 잃어버린 뒤겠지.
놈이 저항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었다. 투쟁하는 세 영웅의 모습을 보며 아직 때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놈은. 저 기생충은 죽음을 의태하려 한다.
“죽여야 한다.”
말레이른이 웃음 짓는 놈의 입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법이 있다. 아직.”
놈의 입 안에서 빛나는 영체들을 바라보며, 말레이른은 단호한 눈으로 주문을 얽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