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구만장천의 열쇠 (10)
제르올렌은 오랫동안 근심하지 않았다. 그는 놈의 가슴을 찌를 때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방법이 있든 없든. 그것이 놈의 목숨을 부지할 이유가 되진 못했다.
찢어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남기며 놈의 몸이 사그라들었다. 이 차원 너머 관념이 되어 흩어져 나갔다. 영원한 종언을 고하는 소리가 아닌, 다시 돌아올 종말을 보이는 메아리에 불과했지만.
“방법이 뭐지?”
“신을 되살리자. 이 차원이 관념에 의한 것이라면, 신의 귀환으로 놈의 존재를 덮어 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말레이른이 제안한 방안은 정공법이었다. 영체가 되어 힘을 잃고 사그라드는 신을 되살린다. 그리고 만신전 권역을 다시금 신들의 영토로 삼아 놈의 흩어진 사념을 정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때, 가이메른이 입을 열었다.
“너무 위험한 방법처럼 들리는군.”
“뭐?”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인가?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우리의 동족들이 살아남을 수는 있겠나? 전쟁이 지속될 경우 우리가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남은 시간이 백여 년이라면. 신이 사라지고 세계수가 불타오른 뒤에 다시 계산한 시간은 얼마나 되겠나?”
이 장소에서 일어난 일을 동족들에게 알릴 수는 없다. 사실 그들의 신은 모두 악마의 손에 떨어졌고, 지금껏 죽었던 선조들은 악마의 영혼을 배불리게 되었노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실을 감춘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악마는 죽었고, 만신전은 황폐화되었으니 이제 세계수가 말라붙을 것이다.
그 뒤에 일어날 일은 너무나 자명했다. 내전이다.
“그럼 어쩌자는 건가?”
“이것들을 우리가 취한다.”
“이것……? 신을……?”
가이메른은 선조 신들이 남긴 그들의 파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들이 되살아나 힘을 회복한다 하더라도, 이미 이것들은 한번 패배했다. 그 대가로 우리 모두가 전리품이 되었다면. 같은 일을 반복하라며 이것들에게 기회를 줄 이유가 없다.”
“그럼…….”
“우리가 신이 된다. 놈의 말대로 영원히 살아남아서. 종족이 멸망할 때 놈이 깨어난다면.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종족을 만들어내면 된다. 내전이 일어난다면, 그 선봉에 서서 최대한 빠르게 전쟁을 종식시키면 될 뿐이다.”
가이메른은 허리를 굽혀 영체를 집어 올렸다. 형형히 빛나는 그 힘에 취한 듯,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신의 영체를 음미했다.
“돌아가자.”
세 사람은 왕이 될 것이다. 악마의 제사장에 불과했던 삼 왕조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다. 불타버린 세계수와 잃어버린 신의 자취를 그리워하는, 그들의 가련한 백성들을 끌어모아서—
복수하겠다. 한 종족의 운명을 두고 노름한 이 패잔병들에게. 한때 선조라 불렸던, 그리고 그보다 긴 시간 ‘신’이라 불렸던 이들을 되살려서.
“그땐, 우리가 신의 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우리의 하인이 되어 영원히 우리 모두를 섬겨야 하리라.”
패배해 제 신도들을 모조리 악마의 뱃속에 헌납한 채 목숨만 연명했던 이 나약한 신들은 더 이상 필요 없다. 엘프는, 엘프 자체로 위대해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가이메른이 신들의 영성을 한데 모았고, 말레이른이 그것을 파괴해 나누어 가졌으며, 제르올렌은—
* * *
“아무 말 없이 따랐다.”
그는 후회 가득한 눈으로 술을 넘겼다.
“만신전에 있던 놈들은 모조리 죽었지. 신도, 악마도, 그 무엇도 할 것 없이 모조리. 떠나기 전, 우리는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결벽증적으로 청소를 해야 했어. 긴 시간 이후, 돌아가기 위해 우리가 관문을 넘었을 때…….”
세월의 저주가 그들에게도 묻어나 있었다. 종족의 신을 죽이고 그 영성을 삼킨 대가가.
“너희는 역사를 내디딜 수 없으리라. 우리에게 삼켜진 신들의 파편이 내린 단 하나의 저주였다. 대지를 밟는 순간에, 우리는 몰락한 도시와 왕국을 마주했다. 전쟁 속에 힘을 잃고 난민이 된 이들뿐. 더 이상 위대한, 고결한, 강인한 엘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신앙을 잃고, 권위를 잃고, 힘도, 자존심마저 잃어버린 난민들뿐이었다. 세 영웅은 각지의 난민을 구원하고 이들을 이끌어 보려 했다.
처음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그다음, 악마의 태동을 저주했다.
최후엔, 패배한 신들의 나약함을 비난했다.
잘못된 건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신이었다. 종족을 위해 신을 죽인 세 사람은, 이제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종족을 구원할, 운명이 점지한 위인들이 아니다.
세 명의 폭군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문득, 목장 속 돼지들과 같다고 생각했다.
이 나약한 자들에게 힘을 나누어 줄 수는 없다. 보다 현명하고 뛰어난 자가 이들을 이끌어야 했다.
그러나 세 폭군은 동시에 서로를 생각했다. ‘너희는 아니다.’ 이미 충분한 힘을 가진 존재가, 만신의 힘을 모두 흡수한 이후에 벌인 행각은 만신전의 공간에서 충분할 정도로 겪었다.
너무 무능한 자에게 줄 수 없는, 그리고 너무 유능한 자에게 빼앗길 수 없는 힘. 엘프 만신전의 부서진 신성들을 품에 안고—
세 폭군은 각자의 길로 떠났다. 자신을 거부하는 대륙을 벗어나 대양으로. 바다 위에 영원히 표류한다 하더라도, 기꺼이.
영원히 표류한다는 의미는, 어쩌면 영원히 생존한다는 뜻과 같을 테니까.
“풍문으로 들었지. 내 나름 조사를 해보기도 했고. 다른 녀석들이 영생을 위해 취한 방식들을 들으며, 혐오감 속에 늙어 가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놈들과는 달리 별다른 재주가 없었으니까.”
동부로 떠난 가이메른은 동부 해안의 어떤 마녀에게 육체 전이의 비술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가장 적합한 육체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는 자손을 만들었다.
북부로 떠난 말레이른은 에이다아르가 사용한 방식을 모방했다. 육체의 구성을 유지하기 위해 엘프의 영혼을 뽑아내 자신의 몸에 심었다.
그런 방법을 찾지 못한 제르올렌은, 세월 속에서 사그라들고 있었다.
* * *
“용의 육신은 불멸한단다. 페르난데스. 그렇다면, 어째서 이 시대에 더 이상 용들이 남아 있지 않다 생각하느냐?”
“정신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렇다.”
리시르는 부드럽게 웃었다. 용들의 특징일까. 그녀의 미소는 놀라울 만큼 아벨의 것과 닮아 있었다.
“너는 마법사로구나.”
“그렇소.”
“그렇다면 어째서, 이토록 강대한 육신에 그토록 보잘것없는 영혼이 남아 있는지도 알겠느냐?”
용의 영혼을 보잘것없다고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의 말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페르난데스는 우묵한 눈으로 리시르를 바라보았다.
용들은 불안정한 생물이다. 불멸자의 육체와 필멸자의 영혼을 동시에 이고 사는 존재다. 그들의 육체는 진화의 정점이라 표현할 만했다. 생명체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산물이다.
그러나 육체는 분명, 종의 세대에 따라 진화할 수 있지만. 영혼은 어떠한가. 머나먼 고대의 야만스럽던 인간들의 영혼에 비해, 지금 시대의 인간들이 가진 영혼의 질이 뛰어나던가?
아니다. 영, 성, 혼, 백. 영체를 구성하는 네 가지 요인 중 육체가 관여할 수 있는 요소는 고작 백 정도에 그친다.
존재의 정점에 신성이 머물 수 있다면, 용의 육신은 진화가 만들어 낸 자연적 신 그 자체다. 그러나 영혼이 그 격에 맞지 않았던 탓에, 육체가 선사하는 장구한 수명 속에서 그들의 정신은 서서히 퇴적해 간다.
그것이 고룡의 광기다. 지금은 민담이나 신화에서 전해지는. 늙은 용들의 광란이다.
“그대는 어떻게 살아남았소?”
그러니, 이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는 직감적으로 제르올렌의 생존법과 라크리시르의 생존법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영생할 수 없는 두 존재를 영생토록 만들어 낸 방법이, 그녀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용의 육신은 신성을 담을 수 있다.”
한 존재에게 ‘힘’이라 불릴 만한 요인이 충분하다면, 그 존재는 신성을 띄게 된다. 그러니, 자연이 만들어 낸 신의 육체 안에 신성을 담아 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의 확인에 가깝다.
“그리고 그이에겐 신의 파편이 있었다.”
“다른 서펜트 킹과 같이…… 그래. 그랬겠지.”
가이메른이 여신을 부활시키기 위해 신의 파편을 아벨의 시체에 박아 넣으려 했던 것처럼. 같은 방식을 사용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아벨의 몸속엔 멜리실두르의 파편이 남아 있다. 여신의 신성이 그녀의 수명을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용을 현세에 부활시킬 수 있는 힘이라면…… 살아 있는 용의 불안정한 영혼을 충만케 하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일 테니,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신의 힘을 사용했군.”
“그래.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이의 영혼과 나의 영혼을 결박했다. 둘 중 하나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남은 하나도 죽음을 맞이하도록.”
“악마의 계약을 변용했군.”
악마들이 추종자들의 영혼을 대가로 힘을 내려주듯이, 그런 종류의 계약 시스템을 변용한 것이로군. 페르난데스는 빠르게, 그녀가 어떤 짓을 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만들어진 신’이다. 살아있는 신의 육체에 죽은 신의 파편을 섞어 만든, 가이메른이 만들고자 했던 가장 완벽한 신이다. 그리고 제르올렌과 맺은 계약은, 신과 신도가 맺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앙을 삼키고 힘을 하사하는 것처럼, 영혼과 영혼을 거래하여 영생을 보장하는 방식이었다.
“아니, 그건…… 아주 낭만적인 청혼이었단다.”
리시르는 얼굴을 붉히며 부정했다. 그 모습에 페르난데스는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 비이성적인, 낭만에 집착하는 행동마저 용들의 특징이었단 말인가?
리시르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오직 죽음만이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으리라. 그이와 내가 나눈 유일한…… 그래, 네 표현대로라면, ‘계약’이었다.”
* * *
“가이메른은 신의 힘을 이용해 제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고, 말레이른은 대악마의 방법을 차용해 스스로 대악마가 되려 했지. 나는 그저 살아남고 싶었다.”
그의 말에 레이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이제,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아니, 적어도 일말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숙한 분위기가 장내를 내리눌렀다. 신의 죽음과 종의 몰락에 대한, 역사의 산증인이 스스로 법정에 올라 증언하는 재판장이었다.
이건 고해나 참회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때 위대했던 영웅의, 세월을 지나 흘러가며 얻은 단 하나의 욕망이 고작 ‘생존 본능’이었다는. 엘프들의 몰락을 대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가이메른에게 ‘우연’이 있었듯이, 내게도 우연이 찾아왔었다.”
“……그게…….”
“그래. 아타일라틀. 전쟁 당시 그토록 많이 투쟁했던 두 종족의, 전쟁 이후 남은 두 패잔병들의 만남이었지. 고룡의 광기를 피해 살아남은 어린 용이, 폭풍 속에서 지친 날개를 접기 위해 나의 기함에 올랐었다.”
“기회라 여겼나? 살기 위한 기회라고?”
“아니. 내 짐을…… 내 후회를 덜어낼 기회라 여겼다.”
비탄에 빠진, 지친 어린 용에게 늙은 엘프가 다가간다. 서해의 여름 폭풍은 거셌고, 대양 위엔 용의 거체가 쉴 수 있는 섬이 없었다.
용은 생존을 위해 엘프들의 기함에 올랐다. 천상 전쟁 시절이라면 결코 없었을 도박이었다. 그 시절 엘프와 용은 적대적이었으니.
그리고 그 시절을 기억하는 어린 용과, 그 시절을 살아갔던 늙은 엘프는 비바람 몰아치는 갑판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종류의 동질감을 느꼈다.
살아남고 싶었구나.
살아남아 버렸구나.
이제 홀로 남은 용과, 세월의 마지막 잔재가 되어 가는 엘프는 어느 누가 먼저라 말하기 전에, 서로의 눈만을 바라보며 사랑에 빠졌다.
“용의 육신에 신들의 파편을 심었다. 그녀는 그로써 완전해졌고, 나는 그녀의 품에서 빛을 찾았지. 내게 신이 있다면, 죽어 사라진 파편들이 아니라 그녀 그 자체였을 걸세.”
“정말 못 들어주겠군.”
이제 화를 낼 타이밍조차 놓쳐 버린 레이아는 투덜거리며 술을 들었다. 그녀의 노기가 진정되고, 연회장을 뒤덮었던 충격이 해소되자 와일드프린스들도 한숨을 내쉬며 여왕을 따라 술잔을 올렸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연인이니 뭐니 시시덕대기나 하고 말이야.”
“여왕 폐하를 위하여!”
“닥쳐!”
레이아는 으르렁거리며 술을 털어 넘겼다. 그녀는 크, 하는 소리를 내고는 입을 닦고선 물었다.
“멜리실두르께선 살아 계신다. 여신께선 내게 직접 명하신 일이 있어.”
“신의 파편을 모아 신을 부활시라는 건가?”
“그래.”
“의미 없는 일이야. 고대 신들에겐 악마에 대적할 힘이 없다. 그들에게 있었던 유일한 힘이라 함은, 제 피조물들을 저주하는 것뿐이었어. 그런 존재를 왜 부활시켜야 하고, 왜 우리는 스스로 노예가 되어야 하지?”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 우리가 대지를 밟을 다른 방법이. 우리의 권역을 회복하고, 우리의 민족을 부흥시킬 다른 방법이 있어?”
엘프들은 몰락하고 있었다. 천상 전쟁 시절뿐만 아니라 지금 시대에도. 한때 대륙을 질타하던 이 위대한 종족은 이제 오만 명이 넘지 않을 소수 민족으로 전락했다.
종의 멸망이 머지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겐 백성의 안위를 확보하고 국가를 부흥시킬 의무가 있었다.
“대악마와 신들이 대적하던 시대를 천상 전쟁이라 부르면, 전쟁의 승자는 누가 되었을 것 같나?”
“……뭐?”
그 뜬금없는 말에 레이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제르올렌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전쟁의 승자는 생존자들이지. 지금 대륙을 누가 지배하고 있나? 그 시절, 수많은 부족과 민족들이 무너지고 대륙이 부서지며 하늘이 흘러내리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아, 기어코 패권을 손에 쥔 종족이 누구이겠는가?”
“……인간?”
“그래. 그 시절을 대전쟁이라, 혹은 대탈출이라, 뭐라 부르든. 지금을 인간의 시대라 부르는 것에 반대할 자는 아무도 없지.”
신들이 물러나고, 대악마가 봉인되고, 용들이 멸종하고, 드워프가 사라지고, 엘프가 쫓겨나던 그 혼란기를 버텨 낸 종족이, 지금 시대의 주역이다.
가장 보잘것없고 나약했던. 짧은 수명과 비루한 육체, 쉽게 유혹되는 가냘픈 영혼을 지녔음에도. 그럼에도.
온 힘을 다해 이룩한 문명이 무너지더라도, 두 손에 남은 것이 고작 의지뿐이더라도. 허리를 굽혀 낡은 연장을 들고 다시 시작하는 자들을 일컬어 말하길.
불길이라. 영혼과 생명을 한 줌에 불살라 단 한 발자국을 내딛더라도. 그 뒤의, 그 후의 한 사람 또한 그다음 발자국을 내디뎌 기어코 길을 만들어 내었으니.
불길의 시대라. 그렇게 말하는 종족이 지금 이 대륙에 남아 있었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유일한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