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95화 (296/388)

295. 구만장천의 열쇠 (11)

리시르는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자신과 제르올렌의 향후 거취가 여기 눈앞의 사내에게 걸려 있다는 것을 알 정도로 현명했다.

아벨의 존재를 제외하고 본다면, 레이아의 엘프들은 수적 우세를 믿고 해상전을 걸어온 입장이었다.

반면 제르올렌의 병력들, 비록 그 수가 얼마 되지는 않으나 그들에겐 그녀 자신이 있었다.

용의 입김은 기함을 박살 낼 수 있다. 아니, 오직 용의 입김만이 서펜트 킹의 기함을 무너트릴 수 있었다.

많은 것들이 사라진 이 시대에서, 레이아의 엘프들은 리시르의 존재 앞에 감히 제르올렌을 도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벨레사스가 있는 이상, 두 용의 존재가 호각이라는 가정 아래에서 제르올렌에게 남은 것은 저 자신의 무력뿐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진리는 수적 우위에서 나온다.

눈앞의 사내가 아벨레사스의 배우자라면, 적어도 그 정도로 긴밀한 관계에 있다면. 그의 의사에 따라 지금의 교착 상태가 좌우될 수 있었다.

“그를 증오하지 말아 다오.”

그러니, 물질 세계에서 그 누구보다 신에 가깝다는 용이. 그 최후의 생존자가 조용히 고개를 늘어트리며 간청할 수밖에 없었다.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과 그가 아끼는 백성들을 위해서.

그러나 대화가 이어질수록 페르난데스의 표정은 점점 싸늘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마침내 용이 간청하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그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아벨의 안색이 초조해지고, 리시르는 반쯤 체념한 기색을 띠었다. 그녀는 힘없이 아벨을 곁눈질했다.

페르난데스가 제르올렌을 참하고자 마음먹는다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된다면 그녀는 아벨을 대적해야 했다. 가능한 일일까? 천상 전쟁 당시 가장 흉포했던 용 중 하나를 상대로?

‘은거하기 직전에 아벨이 불살랐던 도시가 여섯이었나?’

아마 그쯤 되었을 것이다.

당시 드워프의 화포가 용의 비늘을 충분히 박살 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드워프 도시조차 그녀의 입김 아래 불타올랐다는 사실이 곧 그녀의 무력을 증명했다.

반면 리시르는 유순한 용이었다. 대전쟁 시절에 그녀는 너무 어렸고, 그녀의 날개가 단단해지던 즈음엔 이미 대부분의 용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투쟁을 위해 날았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긴장된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밤바람 아래에서 반백이 된 머리칼을 흩날리며,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참다 못한 아벨이 한 걸음 나서서 그의 옷가지를 살며시 쥐었다.

“페르난데스.”

“잠시.”

페르난데스는 손을 뻗어 아벨을 저지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달 위로 희미한 달무리가 스며 있었다.

폭풍이 일겠군.

바람을 맞으며, 그는 고개를 돌려 갑판 어느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실루엣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가장 사랑하는 이를 기만했군.”

“…….”

“사랑이라는 단어가 적이 민망하다면 달리 표현하지. 그대를 가장 신뢰하던 이를 속였구나. 제르올렌 왕.”

연회가 끝난 것일까. 제르올렌은 술기운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걸어 나왔다. 긴 망토가 밤바람에 거칠게 펄럭였다. 그는 잠시 아무 말 없이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잠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을 교차했다. 제르올렌은 쓰게 웃으며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철컥, 강철이 부딪치는 싸늘한 소리. 그의 손엔 긴 창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날 찾은 것이 레이아 여왕의 의사가 아니더군. 그리고 그녀의 백성들 사이에서 그녀의 귄위가 너무나 공고했으니, 적어도 백성들의 의사 또한 아니었을 테고. 자네였나?”

“그래.”

“피차 궁금한 것이 많겠군. 시간은 길고, 밤은 호젓하니…….”

-키이잉…….

창날이 서슬 퍼런 빛을 내며 달 아래에 번들거렸다. 창끝을 곧게 뻗은 자세로, 제르올렌은 사자의 갈기 같은 머리칼을 흩어내며 말했다.

“칼 든 두 무부에게 필요한 것은 호기일 뿐. 그렇지 않나?”

“……어째서?”

페르난데스의 물음에도 제르올렌은 묵묵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유와 설명은 그다음에.

제르올렌의 눈빛에서 완고한 호승심을 엿본 페르난데스는, 말없이 대검을 뽑아 자세를 갖췄다.

연민검, 묵빛 대검의 검신이 달 아래에 파르스름히 빛난다. 그 광경을 보며 아벨과 리시르의 낯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페르난데스! 어째서……?”

“제리! 멈춰라! 싸울 이유도, 싸워 얻을 이익도 없다. 말로, 말로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

두 용이 당장이라도 두 사내를 잡아끌 듯 다급하게 외쳤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똑바로 제르올렌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서펜트 킹을 처단하며 느낀 것이 있지. 그대가 대답해 보겠나?”

“무엇을?”

“가이메른은 신을 모방했고, 말레이른은 악마를 모방했었다.”

죽은 신의 신성을 취해 새로운 신을 만들어내려 한 왕.

백성들의 영혼을 취해 저 자신이 승천하고자 한 왕.

그리고…….

“그대는 무엇을 모방했나?”

신의 신성을 용에게 심는다. 그것 자체는 가이메른의 방법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신의 신성을 품은 용과 계약을 걸어 자기 자신의 영생을 보장받는다라……?

“적어도 가이메른은 만들어진 신을 통해 제 종족의 저주를 해주하고자 했다. 놈의 방편은 역겨웠더라도, 적어도 놈에게 마지막 변론이 있었다면—.”

[여를 조롱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여를 비웃을 수 없어! 여는 오로지, 오로지 여의 민족을 위해 행했다. 오로지 여의 종족의 안녕을 위해 행했어!]

[그렇다면 네 신의 영성을, 네 그 소중한 동포들과 나누었어야지. 가이메른 대왕!]

놈의 변명은 추악했고, 놈의 방식은 역겨웠다. 그리고 개인적인 호오로도……. 제 아들의 몸을 강탈해 수명을 이어 나간 가이메른의 존재는 용서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놈에게 마지막 변론이 주어진다면. 놈의 입에서 단 하나 진실된 말이 있었다면. 적어도 놈은 백성을 위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독재자의, 절대 군주의 아집과 욕망이었다 하더라도. 영원히 군림할 꼭두각시들을 위한 알량한 호의라 하였더라도…….

“리시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그대가 리시르에게 해준 말이라면 전부.”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네. 호의를 가장하지도, 사랑을 기만하지도 않았어. 나는 저 아름다운 용을, 우리 민족과 다를 바 없는 그녀를 사랑했네.”

“그렇다면 그대의 수명과 힘에 얽힌 이야기까지 진실되었나?”

“…….”

용에게 신성을 새긴다. 설령 죽은 용이라 할지라도 부활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힘이다. 세월 속에 스러져야 했을 용의 영혼마저 속세의 인과에 엮어 낼 수 있을 정도의 힘이다.

살아 있는 용이 그 힘을 얻는다면, 용은 능히 신이 될 수 있다. 천상용 칼라드펠린이 그랬듯이. 언제든 불멸자로 승천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제르올렌은 용이 지닌 신성에 편승하는 것을 택했다. 업적을 통해 신성을 쌓아 올리는 것과는 달리, 다른 신의 신성과 힘을 직접 받아내는 것은 필멸자의 육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열쇠검을 쥐고 그 힘을 다룰 때 페르난데스조차도 영혼이 불타올랐듯이.

심지어는 디모니카를 만들어 내는 과정 또한 다르지 않다. 육체에 강제로 신성을 흘려 넣어 초월적인 신체를 얻는 그 과정. 반쪽짜리 신성이 만들어 내는 기적이라 하더라도 디모니카 시술의 성공률은 고르고 고른 적격자들 사이에서도 1할을 넘기지 못한다.

서펜트 킹들이 스스로 신이 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신의 저주를 받은 육체에 신성을 담을 방법이 없었다. 확실한 안전장치 없이는 시도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용을 이용한다. 용에게 신성을 흘려 넣고, 용의 영혼을 담보로 잡아 계약을 이루어 낸다. 마치 악마와 인간 사이의 계약처럼. 신과 인간 사이의 ‘신앙’처럼.

“자네 이름은?”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사제인가?”

“……지금은.”

“자네와 나 모두가 서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으나, 내가 제시할 수 있는 해결책은 여전히 하나뿐일세. 자네의 기량을 보아야겠네.”

오게. 그 말을 꺼내는 제르올렌의 눈이 어둠 속에서 고고하게 빛났다. 페르난데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검신을 모로 그어 어깨 위로 들었다. 단단한 자세로군. 견고하고, 틈이 없어. 제르올렌은 머릿속에서 상대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높였다.

“죽이진 않겠다.”

“담대하군.”

제르올렌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곧, 두 사내가 서로를 향해 달려 나갔다.

* * *

-카아아아앙!!

창이 쏘아져 날아온다. 페르난데스는 한순간 창날의 움직임을 놓쳤다. 회피는 순전히 우연과 경험에 의한 것. 페르난데스의 뺨을 좁게 스쳐 지나간 창날이 한순간 흐릿하게 변했다.

페르난데스의 검신이 창대를 훑으며 크게 반원을 그렸다. 카각, 카득. 예리한 날이 창대를 긁으며 불똥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리고 그대로 제르올렌의 목젖을 향해—

-콰드드드득!

이번에도 놓쳤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칼을 휘둘러 쳤다. 대검의 궤적이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한 반원을 그렸다. 창날이 뱀처럼 파고들어 검신의 궤도를 흩어내고 그 틈을 파고든다!

-카가각!

두 사람은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다. 검끝과 창대의 격돌 사이에서, 두 사람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서로의 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 초를 다시 나누어 찰나. 그 섬전 같은 시간 속에서 극히 정밀한 공방이 서로의 목숨을 탐하며 오고 간다. 한 수, 다시 또. 한 수.

-키이잉……!

페르난데스는 짧게 혀를 찼다. 떨어지는 기세가 벼락같고, 와락 달려드는 창날은 거암처럼 무겁다. 디모니카의 육체, 그것도 극도로 단련된 육신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격돌마다 몸에 쌓이는 전투 피로가 심상치 않다.

칼날을 치켜들고, 잠시. 제르올렌의 창이 공중을 유려하게 선회하며 틈을 찾는 이 순간을 노려서. 장병기의 단점, 그것도 창의 결점이 있다면 공방의 연계에 찌르기를 고려한다는 점이니!

-쩡!

검을 쥔 두 팔에 힘줄이 뱀처럼 꿈틀거린다. 맨손으로 사람의 두개골을 찢어낼 수 있는 디모니카의 몸이, 전심전력을 다해 도끼질하듯 제르올렌의 종단을 휩쓸어 나간다.

-콰드드드득!

공간이 찢어져 나간다. 데인 왕의 기예와 디모니카의 근력이 만들어 낸, 먼 시절 검술의 총화가 손 끝에서 피어오른다. 그러나—

-쾅!

고대의 기예라면, 제르올렌에게 있어 그런 종류의 기교는 이미 생득의 영역에 있으니. 창날이 순간 반전한다. 단순히 찌르고, 돌리고, 휘둘러 치는 모든 동작이 먼 옛날, 천상 전쟁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오랜 수학의 결정이다!

“후…….”

두 사람의 공방으로 일어난 소란에 엘프들이 몰려나와 주위를 둘렀다.

인상을 찌푸린 채 그들을 바라보는 레이아와 가신들.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두 용과, 저 멀리에서 긴박하게 응원하는 키르하스까지. 갑판 위가 긴장감 속에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그 주위를 살피며, 페르난데스는 짧게 숨을 골랐다. 세 번의 호흡을 보낼 동안 일어난 격전이었다. 그는 칼을 가슴 위로 모아 어깨로 넘기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찌르기. 대검의 길이 자체를 이용하는 기술이다. 다만, 상대의 병기는 창이다. 제르올렌은 페르난데스의 자세를 보고 슬쩍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옛날 생각이 물씬 나는 놈이로군.”

-스륵.

제르올렌의 다리가 반 바퀴 돌아 바닥을 내디뎠다. 창날을 휘적 흔들어 등 뒤로 돌리고, 창대를 어깨 어림에 끼워 넣었다.

횡베기. 창날의 끝으로 거리를 잡아, 일격에 상대의 목을 노리는 공세. 그러나 상대의 병기는 대검이다. 휘두르는 공방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자세를 취하며.

두 사내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대검으로 숫제 창인 양 찌르려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창을 칼처럼 휘두르려 하는 이 순간에—

-후우웅……!

융통무애라. 어떤 한 정점에 도달한 기술은, 극단의 기술과 맞닿은 부분이 있었다. 두 사람의 병기가 서로를 향해 뻗어 나와, 공중에 얽혔다.

-쾅!!

“정말, 녀석이 떠오르는군.”

“누군지 물어도 되겠나?”

“너희의 옛 왕.”

격돌의 충격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다스리며, 제르올렌은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다. 페르난데스 또한, 손목이 저려 당장이라도 칼을 놓칠 듯했으나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칼을 납도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이건 그러니, 사내다운 허세에 가까웠다. 난 아직 멀쩡한데, 넌 아픈가 보다? 그런 식의 눈빛을 서로에게 던지며, 도발에 가까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칼로스.”

“샤를 대제……?”

“뭐, 인간 이름은 다 비슷하니까 말이지.”

제르올렌은 저벅저벅 걸어와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물끄러미 손을 바라보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건 악수라는 건데, 우리 동족들은 일반적으로 서로를 인정했다거나, 합의를 보았거나, 협정을 맺을 때 이런 특유의 제스처를 취하곤 한다네.”

“실없는 소리.”

페르난데스가 슬쩍 웃으며 손을 잡자, 제르올렌이 그 손을 힘 있게 움켜쥐며 속삭였다.

“주위를 물러 주게. 자네나 나나 둘이 해야 할 말이 적이 쌓여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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