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 그늘진 하늘 (1)
낭만이란 무엇인가. 지금 이 자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엘프들에게 낭만이란 어리석음과 비슷한 어감의 단어로 통했다. 신을 잃고 오직 생존을 위해 방랑하는 이들에게 낭만은 현실을 도피하는 마약 중독자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느껴졌으므로.
그러나 그런 그들조차도, 그들의 가슴속에서도 이 희미한 달빛은 아둔함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신들이 거하던 시절부터 그들의 민족을 이끌던 왕, 그리고 그와 검무를 나누고 손을 맞잡은 이방인의 모습은.
먼 시절에 사라졌던 것으로 여겨진 용이 돌아오고, 죽었던 신들의 파편이 모이는 시대가 도래했다. 천 년이다. 사그라진 신앙, 낡은 동화책에 색감이 돌아오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은.
그 시간의 변화는, 퇴적된 세월은 엘프들에게서 전성기의 강인함을 앗아갔으나……. 잊혀진 전설에 대한 동경을 가져오기엔 충분했다.
“비가 오는구나.”
레이아는 자리를 비키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달무리가 짙게 어리고, 희미한 달빛 사이로 해무가 감도는 밤이다. 갑판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전에, 예민한 엘프들의 귀엔 비바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들어가자. 한잔 해야겠구나. 거기 너희들. 너희도 따라오거라.”
그녀는 제르올렌의 가신들에게 턱짓하고는 선창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여왕의 발걸음에 맞추어, 귀족과 와일드프린스들은 저마다 짧게 두 사람을 향해 묵례하고는 자리를 비켰다.
* * *
한편, 아벨은 입술을 뜯는 리시르를 힐끗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네 배우자를 믿느냐?”
“당연한 소리를…….”
“헌데 어찌 그리 긴장하느냐?”
그녀의 말에 리시르는 눈을 꾹 감았다. 그녀는 애써 두려움을 떨치며 말했다.
“나는…… 나는 저 사내가 그이를 해치면…… 나는…….”
“나를 대적하겠다?”
“할 거야!”
리시르는 감은 눈을 뜨지 않으며 외쳤다.
“할 거라구! 내가…… 내가 살아온 시간이 너보다 길어! 이젠 더 길다구! 옛날의…… 그 시절의 내가 아니야. 나는…….”
“후후. 리시르. 그래……. 나는 네가 잘 자라 주어 무엇보다 기쁘구나.”
아벨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리시르는 덜덜 떨며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흐느꼈다.
“아벨…… 나는. 나는 제리가 없으면 살 수 없어. 그이가 내 전부야.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 따윈 없어. 하지만…… 그이가 죽는 것을 볼 자신도 없어.”
“네 마음을 안다. 리시르. 잘 알아.”
홀로 남은 자들이, 망망대해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등대가 있다면. 어찌 그 빛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는 어린 동족의 심정을 무시할 수 없었다.
고룡의 광기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 아벨은 자신의 품 안에서 흐느끼는 리시르를 내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손쉬운 방법이 있었다면, 아니. 설령 제아무리 어려운 방법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는 살아남아야 했다.
만일 용의 생존을 위해 신성이 필요했다면, 그 시절 용들은 신에게 대적했을 것이다. 지옥의 편에 선다는 것에 거리낌을 느낄 만한 전황은 아니었으니. 애당초, 완벽한 우군이란 없는 시대였다.
리시르의 말을 들으며 페르난데스는 제르올렌의 방식에 대해 고민했듯이, 아벨은 리시르의 상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고룡의 광기는 해묵은 영혼에 다가오는 족쇄다. 결코 풀 수 없는…….
반쪽짜리 해결책. 아니, 미봉책이나 차악에 불과한 방법이다. 신성을 박아 넣는 것은. 제 몸에 신성을 담아 현세를 살아가는 그녀는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자라지 않는다.’
고룡의 광기를 잠재우기 위해선, 고룡이 되지 않으면 된다. 성장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퇴적하는 세월을 비껴 가는 방법이란, 달리 말해 그 세월이 육체와 정신에 침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리시르는…… 여전히 어린 용이다. 제 신에게서 신성을 강탈한 대가로 종족 전체에 저주를 받은 엘프처럼. 그녀는 저주를 받은 것이다. 영원히 성장할 수 없는 저주를.
만들어진 불멸을…….
‘대저 신에게 저주란……. 축복과 같은 것이니.’
아벨은 짧은 상념을 끝내고 고개를 털었다. 그녀는 리시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네가 너의 배우자를 믿듯이, 나 또한 그렇단다. 리시르. 그이는 결코 한번 확언한 바를 철회하지 않으니. 오늘 그이와 네 배우자의 싸움이 더 길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응…….”
아벨에 대한 공포감 탓인지, 혹은 오랜 세월을 거쳐 비로소 상봉한 동족에 대한 감정 탓인지. 리시르는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신을 만난 적이 있나?”
제르올렌은 좌현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너울지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술병을 페르난데스에게 툭 던졌다.
페르난데스는 허공에서 술병을 낚아채고는 입을 축이며 그의 곁에 앉았다.
“그래.”
“그리 좋은 경험은 아니었나 보군. 사제라면서.”
“모든 아들이 어찌 제 어버이를 사랑하겠나.”
“가끔 탕자도 나오고 그래야 조화롭지. 그래.”
제르올렌은 껄껄 웃고는 술병을 건네받아 들이켰다.
“신이라. 우스운 말이 아닌가. 초월체들. 불멸자들. 영혼의 격이 필멸의 영과 달리 구조적으로 관념을 담을 수 있도록 강인하게 축조된 자들…… 혹은, 그 정도의 세월을 견디어 영성의 격을 이룩한 자들.”
이렇게 간단히 추려 말하자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지 않은가? 제르올렌은 어깨를 으쓱였다.
“누구든 쉽사리 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라 하더라도. 저 스스로 존재 자체가 고결한 놈들은 결코 아니지.”
“영자 기생충.”
“뭐? 하하하하!! 으하하! 그래! 그래, 그 말이 맞군! 기생충들이야!”
제르올렌은 눈물을 찔끔 흘리며 한참 웃음을 터트렸다. 곧 그는 울적한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기울였다.
“리시르에게 들었다 했지. 엘프 만신전의 종말에 대해서.”
“그래.”
“패배한 신들의 말로가 그랬지. 드워프 놈들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너희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야. 너희 만신전은 패배하지 않았으니.”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우리의 신들은……. 우릴 빚어낸 우리의 ‘어버이’들께서는. 먼 우리의 선조이며 위대한 지도자였던 그들은. 대악마의 손아귀 아래에서 영혼이 뜯어져 삼켜질 그 순간에, 무엇을 향해 기도했을까.”
“뭐?”
제르올렌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다가오는 먹구름을 홀연히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신들은 누굴 향해 기도했을까. 죽음 앞에 그들이라고 초연하지는 못했을 터.”
제 죽음 앞에서 초연했다면, 차라리 관념에 가까운 존재였다면 나았을 것이다. 자신의 신성을 강탈하는 대가로 ‘저주’ 따위를 걸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보다는 저열한 인격신인 그 작자들은. 다가오는 종말을 바라보며 누구에게 기도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무엇에 기도해야 하겠는가.”
“종말이 보이나?”
“보여야 알 수 있던가? 저 해무 속에 빗방울이 숨어 있다는 것을, 밤바다 아래에서 우리가 반드시 보아야 할 수 있던가? 느낄 수 있는 것일세.”
제르올렌의 눈이 흐릿하게 빛났다. 그는 페르난데스에게 술병을 건네며 말했다.
“인간들과는 달리, 우리는 그런 것에 더 민감한 편이니까.”
“……!”
그 순간, 페르난데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전생 시절의 기억이다.
종말이 초읽기로 다가오던 시절. 대악마의 관문이 개방되고 천상의 문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투쟁하던 대전쟁의 초기. 모든 그림자에서 악마가 웃음 지으며 승리와 비명을 만끽하던 그 시절에—
마구잡이로 신성을 품은 존재들을 사냥하던 해상의 지배자들. 엘프들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모두 사라졌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떠났다고 했다. 어디론가 그들만 아는 안전한 곳으로. 또 어떤 이들은 저 깊은, 위험한 바다 속으로 침몰해 종말을 맞이했다고도 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대륙에 정주하지 않는, 바다 위를 표류하는 이들이 정확히 어느 시점에 사라졌는지는. 그 시절 페이자쉬에겐 관심도 없는 일이기도 했다.
“만일…….”
만일 종말이 도래한다면. 너희는 어떻게 되지?
페르난데스가 그렇게 묻자, 제르올렌은 고개를 숙이고는 후, 하고 웃었다.
“사라지겠지.”
“뭐?”
“종말의 시간이 다가오고, 지옥이 이 물질 세계를 탐하며 결국 그 기나긴 전쟁…… 천 년의 휴전 끝에 일어난 새로운 전쟁이 도래한다면.”
놈이 깨어날 것이다. 우리의 신을 삼키고, 만신전 권역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웃음 짓던 고대의 악마가. 아직 때가 아니라 말했던, 이젠 종족신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그 기생충이.
“우리들이 종말을 느끼고, 종족 전체가 다가오는 절망감 앞에 무릎 꿇는 그 순간. 놈이 현실의 장막을 걷어 내며 도래해 우리의 영혼을 삼키고 마침내 진정한 신으로 거듭나겠지.”
“그래서, 섬이었나?”
“뭐?”
“그대의 기함이 섬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봤지. 다른 서펜트 킹들의 기함은 함선이었어. 언제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도록. 더 안전한 곳을 향해 방랑할 수 있도록. 그러나 그대의 기함은 섬이었네. 섬은 움직일 수 없지.”
드넓은 대해 위에서 언제든, 어디로든 도망칠 수 있는 요새가 있다는 것은. 그 강력한 힘만큼의 안정감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어떤 위협이 다가오더라도 어떻게든 도주해 살아남을 수 있으리란 믿음이.
그런 믿음이 허물어지는 순간. 더 이상 도주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엘프들이 느낄 절망감은 과연 어떨까.
하지만 섬이라면. 정주민족이 된다면. 지켜야 할 터전에서, 더 이상 도주할 곳 따윈 없다면. 극단적인 배수진이다. 종의 안위를 고려한다면 결코 선택해선 안 될.
그러나…… 종말의 절망감 앞에 무릎 꿇는 순간, 진정한 종말이 다가오고 만다는 이 딜레마 속에서 한 왕은 그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도주로가 없다면. 이보다 절박해진다면 쉽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
현명한 판단이다. 대륙의 정주민족. 인간들은 최후의 최후까지 종말에 대항해 무기를 고쳐 들어 일어섰으니. 달리 말해 전생 시절 엘프들의 실종은, 정확히는. 제르올렌의 기함이 함락된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정말…… 현명하군. 내가 아는 그 어떤 인간들도. 아니, 동족들조차도 자네가 파악한 지점까지 접근한 이가 없었네.”
“하나가 더 있었겠군.”
“……하나?”
“보험이 하나 더 있었을 거란 말일세. 단순히 배수진을 치고, 죽기 살기로 버텨 보자는 소모적인 자세로 그치지는 않았을 테니.”
“맞춰 보겠나?”
페르난데스는 제르올렌에게 술병을 건넸다. 제르올렌은 희미한 수평선에서 시선을 돌려 페르난데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는 술을 들이켜는 제르올렌은 한참 들여다보다가, 문득 말했다.
“그대들의 신들을 삼킨 그 대악마. 그자를 모방했군.”
신성을 삼키고 잠복해, 이젠 종족신 자체가 되어 버린 한 기생충의 방식을 그대로 모방했다.
어린 용에게 신성을 심어 신으로 부활시키려 한다. 그것까지는 가이메른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하인이 아닌, 진정한 종족신으로. 패배했던 과거의 신들이 아닌, 새로운 희망의 상징으로 삼으려 했군. 종족 전체가 절망감에 휩싸이는 순간 종말의 신이 도래한다면……. 희망을 상징으로 삼은 새로운 종족신을 섬기어 종말의 조건을 근절하려 했어.”
“실패했지만 말이야.”
“포기하긴 이르지 않나?”
“모든 동족들이 신앙해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조건이었네. 모든 동족들이 절망의 순간, 희망을 향해 기도할 때 그 표상으로 작용해야 성공할 수 있는 도전이었지. 어찌 그러겠나? 이미 세 왕조가 갈라진 이 마당에, 내가 주도권을 쥐고 신앙을 강요해야 간신히 시도해 볼 수 있을 텐데.”
이미 해상의 패권은 레이아가 쥐고 있으며, 제르올렌은 패전을 유예받은 망국의 왕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레이아가 그를 독살하려 했다 한들 저항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한 사람은 구원을 받았으니. 그걸로 족하여 살아가려 했네. 그녀가 우리 모두의 신이 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나의 신이 되어 주었으니.”
“그래서, 자포자기라도 한 건가?”
“아니. 아직 하나가 더 남았네. 예상할 수 있겠나?”
제르올렌은 술병을 흔들며 남은 술을 가늠했다. 빈 병이었다. 그는 짧게 혀를 차고는 밤바다를 향해 술병을 던졌다. 병이 깨끗한 포물선을 그리며 검은 파도 아래로 철썩 떨어져 가라앉았다.
“뭐지?”
“인간.”
천상 전쟁은 인간의 승리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전쟁의 광풍을 피해 바다 위로 도망쳤던 제르올렌은, 다른 왕들과는 달리 인간을 무시하지 않았다.
빈 땅을 운 좋게 점거한 버러지들. 다른 서펜트 킹들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실 그들이 대륙을 질타하던 당시에 인간들은 가축이나 노예보다 나은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제르올렌은 결과만 두고 그들을 보아야 한다 생각했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생존과 번영이 그 증거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대악마의 봉인이 곧 지옥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 터.
그 시절 수많은 지옥 관문들. 그리고 사사건건 개입해 병정 놀이를 벌이려 했던 신들. 그 외의 다른 강대한 종족과 괴수들 사이에서, 그들이 살아남은 이유가 반드시 있었을 것이라고…….
“너와 꼭 닮은 놈을 만나, 확신할 수 있었다.”
칼로스. 인간들의 말로는 샤를로스 대제. 녀석의 존재가 승리의 열쇠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