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그늘진 하늘 (2)
“어떤 정보 반사 독립…… 아니. ‘예언자’가 내게 해준 말이 있었다. 다가올 미래엔 종말만 보인다……라고.”
“뭐, 그치들이야 늘상 그렇지 않나.”
“그래선 안 되는 일이니까.”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낮추며 앉아 있는 제르올렌을 바라보았다. 제르올렌 또한 그를 올려 보고 있었다. 맥락 안에서 느껴지는 함의를 조심스럽게 파악하면서.
“그래선 안 된다?”
“……그래.”
치기 어린 부정이 아니다. 그건 어떤 확신에 가까운 부정이었다. 세계가 멸망해선 안 된다는 듯. 그럴 이유가 없다는 듯한 말이다. 제르올렌의 미감에 주름이 잡혔다.
“자네도 예언자였나?”
“아니. 나는…… 시간을 거슬러 왔다.”
“시간을……? 잠깐. 미래에서 왔다는 뜻인가?”
“그래. 비슷하지.”
“하하, 이런.”
제르올렌은 한참 아무 말 없이 페르난데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곧 그는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뼘 이상 큰 키에 장대한 체구. 사자 같은 머리칼이 바람결에 스쳐 일렁였다.
육상 맹수처럼 빛나는 시선으로, 먹잇감을 탐색하듯 한참 그를 내려 보다가. 곧 두 눈에 힘을 풀어냈다.
“미치진 않은 것 같군. 하기야, 인간 광인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면 부끄러울 뻔했어. 시간을 거슬렀다라…… 운치 있군. 세계의 마지막을 보고 돌아왔나?”
“그래.”
“그래서, 예정된 종말을 막아 내고 싶다는 건가?”
“막았어야 했다. 종말에 조력했던 자들 대부분을 해치웠으니.”
“그랬음에도 미래가 변하지 않아 이상하다는 말이로군. 그래서 날 찾아온 거야. 그렇지? 지난 세계에선 없었을 조건을 찾아야 했을 테니까.”
말이 빨라 좋군. 페르난데스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올렌은 한참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아마 먼 미래. 세계가 멸망한다면 엘프들은 사라졌을 것이다. 세계의 종말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고 그저 역사의 뒤안길 어디론가로 실종되었겠지. 그것이 엘프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미래니까.
그러니, 종말의 순간을 직접 보았던 존재가 과거로 돌아온다면…… 여전히 변하지 않는 미래를 뒤틀어 보겠다면 가장 먼저 살아남은 엘프들과 접촉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있다.
“한번 들어나 보지. 정확히……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나?”
“방금 전 그대가 했던 말. 샤를 대제와의 접점이 필요하다. 혹시, 대제가 생전에 남긴 유물이나 유산. 혹은…… 대제가 직접 건축한 유적이라도…….”
“뭐? 하하, 하하하!”
제르올렌은 페르난데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간의 긴장감마저 사라지고, 그는 우스운 이야기를 듣기라도 했다는 듯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로 폭소했다.
“이거 정말 웃기는군. 대제의 유물?”
“……내가 무슨 농담이라도 했나?”
“아아, 그렇게 정색하지 마. 미안하군. 참았어야 했는데!”
그는 큼,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자리를 털고 걸어 나갔다. 잠깐 걷지. 그는 페르난데스의 의사를 묻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자네들은 이미 그 녀석의 유적에 살고 있다네. 왜 멀리 찾으려 하나?”
“그게 무슨 뜻이지?”
“샤를 대제. 칼로스. 그 녀석이 무슨 대단한 신물을 쥐고 휘두르거나,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았거나, 엄청난 대장장이가 되기라도 했겠나?”
그 시절 인간들에게 무슨 대단한 기술이 있었겠는가. 마법을 이용해 만들었다 한들 엘프의 것을 넘을 수 없고, 철기를 두드려 만들었다 한들 드워프의 공학보다 뛰어날 수 없었다.
당시 인간들의 수준은 들짐승보다 조금 나은 정도. 트롤보다 머리를 쓰는 수준에 불과했다. 천 년. 대륙을 지배하던 수많은 패권 종족들 사이에서 생존만을 도모하던 부족 사회에 불과했다.
그때의 기술과 유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건 그저 녹슨 철검이나 부서진 도자기들처럼, 사학적 가치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마법적인 처리가 된 유물이 필요하다면 엘프의 보물전을 뒤지는 편이 낫다. 강력한 고대의 병장기들이 필요하다면 대륙의 지하 던전들을 탐사해 드워프 유물을 파헤치는 편이 낫다.
“녀석의 유적은 너희의 땅 그 자체였다.”
“무슨 의미지?”
“모르겠나? 녀석은 물론 뛰어난 전사였고, 위대한 군주였지만……. 이봐. 내가 자네를 그 시절 녀석에 빗대 생각한 이유가 무엇일 것 같나? 생김새? 아니. 자네가 더 잘생겼어. 놈은 야만적인 부족장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니.”
녀석이 남긴 유물이라……. 제르올렌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굳이 따지자면 너희의 존재와 너희가 이룩한 문명, 지금 시대 자체가 녀석의 유물이요, 너희가 발붙인 땅이 녀석의 유적이다. 녀석은…… 뭐라 해야 할까. ‘상징’이었으니까.”
“상징이라?”
“불굴의 상징. 가장 절박한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으리란 상징. 의지라는 것을 저 몸으로 나타내는 표상. 그 당시 수많은 인간 부족들이 그자의 의지에 매료되어 기꺼이 복종했고, 그것이 너희가 가진 최초의 왕국이 되었다.”
그의 말에 페르난데스는 발을 멈췄다. 의지의 표상. 불굴의 상징이라……?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대제가 남긴 유물은 반드시 존재해야만 했다.
“……까마귀관은?”
“뭐?”
“그 예언자가 한 말이 있다. 샤를 대제의 까마귀 관을 찾으라. 그게 무슨 뜻이었을 것 같나? 대제의 유물이나 유적이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물론 숭고한 뜻이고 낭만적인 관념이지만. 실증하는 물건을 찾으라는 의미가 아니란 말인가?”
“까마귀관……? 까마귀관이라…….”
제르올렌은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만일 정말 그런 것이 있다면 바다에 있는 물건은 아니겠군. 녀석이 해상에서 활동한 적이 없었을뿐더러, 해상 위에서 발견된 강력한 유물이 있었다면 반드시 삼 왕조 어딘가에서 습득했을 것이니.”
“대륙에 있는 물건 또한 아니었다. 세계가 멸망하던 순간까지 나타난 적 없는 유물이야. 이번 삶에서 처음 들어 본 물건이다.”
“그렇다면 답은 뻔하군.”
“……뻔해?”
“해상에도, 지상에도 없다면. 지하에 있지 않겠나?”
“……고대 던전들을 말하는 건가?”
대륙의 곳곳에 존재하는, 그리고 아직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던전들은 적지 않았다. 고대 드워프의 유적일 수도 있고, 천상 전쟁 시절 지각 변동에 의해 파묻힌 시설일 수도 있으며, 또는 봉인이나 은폐의 목적으로 암반을 파고 내려가 설치한 기관일 수도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지하 던전들의 존재에 익숙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런 그라 할지라도 지하에 매장된 모든 던전들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뿐더러, 파악할 수도 없었다. 어느 곳, 어떤 위치에 어떤 던전이 매장되어 있을지 알 길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러나, 제르올렌은 고개를 저었다.
“지옥을 말하는 걸세.”
“지옥의 악마들이 소유하고 있을 거란 의미인가?”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지. 칼로스의 말년에, 녀석이 사망한 이유가 악마들 탓이었으니. 녀석은 대악마와 투쟁하던 당시에 얻은 저주로 인해 죽었네.”
“그런 기록을 본 적이 없는데.”
“당연히 그랬겠지.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대악마가 몇이라고 생각하나?”
“다섯.”
“그 시절에도 다섯이었네.”
뭄토와 사다르켈리사는 비교적 나이 어린 악마들이라 할 수 있다. 천상 전쟁 이후에 타락한 존재들이었으므로. 그들을 포함해 다섯을 신성에 가장 근접한 대악마라 이른다면……. 그 시절에도 다섯이 있었다는 의미는.
“하나는 내가, 우리 셋이 상대했었지. 다른 하나는 칼로스가 대적했었고.”
“하지만 천상 전쟁 시절에 사망한 대악마는…….”
“없었다고? 왜 역사가 그렇게 기록되었을 것 같나? 우리는 그것이 우리 민족의 치부였던 탓에 은폐했다. 하지만 칼로스, 그 녀석은 그런 과업을 완수하고도 어찌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것 같나?”
“수수께끼는 그만하지.”
“그래, 그만하지. 너희 만신전의 신들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대악마의 죽음을 은폐한 이유는 그것이었어.”
“왜지? 천상의 신들이 저 스스로를 추켜세울 가장 좋은 기회를, 왜 스스로 저버린 거지?”
제르올렌은 입을 열려다가 잠시 멈추고, 페르난데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가늠하듯이,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자인지 파악하는 듯.
잠시 후, 짧은 체념이 그의 눈가를 스쳤다.
“그 시절의 약속이었다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찍이 예측했던 대로, 광원 없는 대양 위의 호우는 마치 검은 장막이 하늘 위에서부터 쓸려 내려오는 듯 보인다. 먹물처럼 어두운 빗방울 속에서, 제르올렌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천상이 물질 세계에 간섭을 포기하고, 지옥의 대악마들이 휴전을 선언해 봉인되는 조건. 물질 세계의 주권을 물질 문명에게 오롯이 돌려주는 조건. 카를로, 그 필멸자 녀석이 대악마에게 홀로 대적해 결국 놈의 목에 칼을 꽂아 넣기로 약속한…… 그 조건이.”
천상 전쟁 시절, 인간은 악마에게 대적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악마들의 입장에서 당대의 인간은 적수가 되지 못했고, 인간들에겐 악마를 상대할 능력과 여유가 없었으니.
그러나 샤를 대제는……. 그 강인했던 필멸자는 천상의 대신들에게 대악마를 죽이겠노라 약속했다. 축복을 받는 대가로, 그리고 향후 물질 세계에 더 이상 직접적인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대악마의 죽음은 곧 그 휘하 군단들의 소멸을 의미한다. 죽일 수만 있다면, 지옥과 천상의 오랜 전쟁에서 저울추를 기울일 수 있는 결정적인 한 수가 될 것이었다.
오랜 투쟁 끝에, 샤를 대제는 당대의 대악마를 격살하는 데에 성공한다. 천상의 대신들은 지상에서 물러났고, 세력을 소실한 지옥은 다시금 힘을 비축할 때까지 봉인되는 것을 택한다.
“어째서? 인간이 신의 개입을 거부할 필요가 있었나? 그 시절 인간에겐 유일한 우군이었을 텐데?”
“우군이라! 하하, 불멸자에게 필멸자란. 신에게 신도란 다만 병정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으니……. 카를로에겐 그것이 악마인지, 또는 신인지 중요하지 않았지. 지옥과 천상 둘 모두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그저 신들의 거래가 보다 더 믿을 수 있었을 뿐.”
그래서 감췄군. 그 시절에도 교회는 있었으며, 오히려 신이 직접 살아 움직이던 그 시절이라면 종교라는 이름의 광기에서 더욱이 자유로울 수 없다.
하물며 분열되어 으스러져 가던 인간 부족들을 연합해야 했던, 당시의 샤를 대제로서는 감출 수밖에 없는 기록이었을 터. 페르난데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제르올렌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대륙에서 엘프가 쫓겨난 이후에 벌어진 일이며, 시기상으로 보아도 천상 전쟁 말엽의 비사였다. 제 동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비밀을, 엘프들의 군주가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그의 말에 제르올렌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녀석이 죽인 악마는 제 소굴 안 깊숙한 곳에 있었고, 인간 혼자 잠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네. 카를로는 당시 인간들의 조력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대도 대륙을 밟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을 텐데?”
“대륙의 범위에 하늘은 포함되어 있지 않던 모양이더군.”
구만장천의 제르올렌. 고대의 영웅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나는 그 시절에도 창공에서 패배한 적 없는 그리핀 라이더였다네.”
카를로…… 폭풍우 속에서 돌연 자신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던, 호기 넘치는 강대한 전사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선뜻 친구라 부를 수 있을, 얼마 되지 않을 인간.
칼 한 자루를 비껴 차고 온갖 괴수와 악마, 드워프나 고룡을 베어 넘겨 마침내 인간들의 도시를 만들어 낸 사내. 저 스스로 한 시대의 상징이 되었던, 혹은 그래야만 했던 사내의 모습이.
신은 죽음의 순간 누굴 향해 기도를 할까.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있다면 그것에 가장 근접한 자가 바로 그였다. 신을 믿지 않는 인간은 절망의 순간 누굴 향해 기도를 할까.
[자네는 신을 믿지 않잖나. 그렇다면 기도를 해 본 적이 없나?]
[왜 없겠나?]
[오? 종교가 있었던가?]
[신을 믿지 않는다라…… 우스운 이야기 아닌가. 신의 실존을 부정할 수가 있나? 단지 추종하지 않을 뿐이지. 그리고 기도는…… 글쎄. 당연히 지칠 때, 힘들 때마다 하곤 하지.]
단단한 근육으로 온몸이 뒤덮인 거구의 전사는, 순해 보이기까지 하는 맑은 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주여, 다만 그곳에 계시옵소서. 세속의 환란과 지상의 시련이 모두 우리의 시금석이요, 일용할 양식과 찬미할 덕성 모두가 우리의 소출이니.]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른 누구의 병정도, 어느 누구의 꼭두각시도 되지 않은 채로. 악마의 타락과 신들의 관심은 그 무게가 다르지 않다. 그 시절 사내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제르올렌은 엘프들의 희망과 미래가 있다면 이 종족이 아닐까 생각했다. 종족신의 이름으로 의태한 악마 탓에 신에게 구원을 바랄수록 멸망에 가까워지는 그들에게는…….
“종교와 신앙, 그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존재로 증명하는 것. 나는 그것이 우리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태우고 창공을 날았다. 몰려드는 악마들을 찢어발기며, 대악마의 거처를 향해 곧게. 제르올렌은 그의 여정의 끝을 보지 못했다. 대악마가 품은 저주는 필멸자의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그 끔찍한 불멸자에게 달려드는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며 그는 발을 돌려야 했다. 그에겐 자신의 종족을 살려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천상 전쟁이라 불리는 그 광기의 시대는 끝났으나, 여전히 물질 세계는 천상과 지옥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이 시대. 종말이 목전에 다가오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희망이 있다면, 그건 그날의 영웅들과 같은, 불굴의 영성을 갖춘 존재에 의해 찾아올 것이다.
“어디지? 그 시절 대악마와 샤를 대제가 격돌했다는 장소가?”
“키르자트 남부에서 더 남쪽으로. 그대로 전진하면 평야가 나타나지. 악마들이 세웠던 고대 도시들이 사토 아래에 파묻힌 곳이.”
“백국마족의 대지…….”
페르난데스는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카라드스카르는 단순히 한 인간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일이 복잡해지는군. 페르난데스는 빗속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