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98화 (299/388)

298. 그늘진 하늘 (3)

“프레이야 님. 확실한 것 맞아요?”

“그렇다니까. 여신을 뭘로 보는 게냐?”

키르하스는 안절부절못하며 끙끙거리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프레이야에게 말했다. 프레이야가 기억하기로는, 같은 질문이 벌써 열 번을 넘겼다.

확실한가, 확실하다. 주어가 사라진 대화가 허공 위를 맴돌았다. 단어가 공기에 무게를 더하듯, 대화가 이어질수록 키르하스의 어깨가 무겁게 짓눌러졌다.

“대체 뭐가 문제더냐? 자연스러운 일인 데다가, 축하할 만한 일이기까지 하지 않느냐? 당장 그 녀석에게 가서 말하거라!”

“저는…… 저는…… 아직 안 돼요……. 한 번만 더 봐 주시면 안 될까요?”

키르하스는 큰 눈을 낮게 깔며 프레이야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시무룩한 그녀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프레이야가 그녀의 이마와 팔 위에 손을 얹었다.

잠시 따듯한 기운이 그녀를 감싸 휘몰아쳤다. 이윽고 프레이야의 눈이 뜨였다. 그녀는 키르하스의 배를 힐끗거리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다.”

“이걸 어떻게 말해요!”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게 왜 네 책임이냐? 녀석 책임이지. 제아무리 목석같은 놈이라 하더라도 기뻐할 소식이 아니냐!”

“프레이야 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뭐…… 뭐?”

키르하스는 우다다 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프레이야는 한참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혀를 쯧 찼다. 필멸자들의 사고방식은 이따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 * *

선실을 빠져나가, 페르난데스가 있을 탑으로 향하는 길에서. 키르하스는 입술을 깨물며 중간중간 수차례 멈춰 서야 했다. 이 며칠간 그녀는 거의 방 밖으로 모습조차 드러낸 적이 없었지만, 그녀의 주군은 그런 그녀에게 관심을 가질 여가가 없는 듯했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키르하스로서는 그가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바쁘지 않으면 죄를 짓는다는 듯 살았다. 그에게 휴식이란 다음 일을 위한 재충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페르난데스가…… 단순히 며칠간 두문불출했다 한들 이제 와서 키르하스에게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키르하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점점 뒤처져 가고 있잖아.

제국의 암여우는 그와 결혼을 했다. 파혼했지만. 어쨌건 그녀로서는 단 한 번도 밟아 본 적 없는 위치에, 꿈에도 감히 생각해 본 일 없는 위치에 스스로 올라 웃음을 터트려 댔었다.

한편 아벨은…… 그 고아한 고룡은 심지어 논외였다. 그녀가 페르난데스를 사랑하는 것처럼. 아마도, 주군 또한 그녀를 아끼고 있을 것이다.

내가 먼저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 주군이 날 먼저 찾으셨었어.

그랬다. 지금 페르난데스 주위에 꼬여 있는 다른 여자들과 자신은 다르다. 주군의 능력과 외모, 혹은 사회적 위치에 눈이 돌아가 다가오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랐다.

주군이 수습생에 불과할 때, 그는 그녀를 직접 찾아왔었다. 자신의 수하가 되라고. 거절할 수 없는 매력을…… 차라리 마력에 가까운 매력을 보이며.

오랜 수감 생활 속에도 꺾이지 않던 그녀의 자긍심은 그 순간 찾아볼 수조차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녀는 기꺼이 복종했다.

그런데 왜? 왜 내게 관심이 없을까? 나는…… 나는.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페르난데스의 방문 앞이었다. 망설임, 초조함, 고뇌가 그녀의 눈가를 스쳤다. 깨문 입술 사이에서 비릿한 혈향이 돌았다. 곧, 그녀는 체념한 듯 손을 들어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오?”

“은공. 저예요.”

“들어오거라.”

여느 때와 같은 무뚝뚝한 목소리. 키르하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죄인처럼 걸어 들어섰다.

넓은 방, 정체를 파악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실험 도구들과 무언가 복잡한 글줄이 끼적여 있는 서류 더미 사이에서 페르난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감각한 눈과 그 아래 찌들어 있는 오랜 피로감, 그러나 싸늘하다는 느낌보다는 고아하다는 느낌이 먼저 드는…… 차갑지 않은 시선. 귀족적인 외모와 선 굵은 턱선. 삐뚤게 자리 잡은 흉터와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다는 듯 날카롭고 당당한 눈매까지.

언제나의 은공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설레는 시선이다. 쇠 비린내가 짙게 나는 듯한 강철 같은 사내. 군청색, 승리의 상징. 빛나는 등대…….

“고민은 끝났느냐?”

“힉!?”

“……?”

키르하스가 딸꾹질을 시작하자, 그제서야 페르난데스는 서류철에서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 * *

‘쟤 왜 저러지?’

-뭐 훔쳐 먹은 것마냥?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문을 열고 들어온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며칠간 방 밖으로 나오질 않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싶었는데, 정작 함께 들어간 프레이야에게서 별말이 없는 것을 보니 개인적인 사정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인적 자원의 부상 정도를 주의 깊게 확인하는 페르난데스로서는 의아한 일이다. 며칠 정양해야 할 정도의 부상을 입은 적이 없으니, 키르하스의 문제는 심리적인 것에 가까울 터.

심리적 요인에 의한 문제까지 해결해 줄 수는 없다. 그건 오롯이 홀로 해야 하는 법이며, 그는 키르하스를 믿었다. 황무지의 대족장, 수인들의 지배자 키르하스 하트테이커는 어떤 고난이 온들 쉽사리 무릎 꿇을 위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니, 그녀가 그간의 공백을 깨고 스스로 나섰다는 것은 고민이 끝났거나……. 혹은 고민에 대한 상담을 원해서일 터였다. 그렇다면 상의해 줄 용의가 있다. 그녀의 전력 누수는 페르난데스가 가진 손 패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문제였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만사를 제쳐 두더라도 함께 해결해야 했다.

“고민은 끝났느냐?”

“힉?!”

“……?”

반응이 영 이상했다. 그녀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는 움찔 떨었다.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모습이 마치…….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네게 근심이 있다는 것 정도는.”

그의 말에 키르하스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은공께선 저를 걱정하셨군요!”

“……? 당연한 것이 아니냐?”

“그렇…… 그렇죠?”

키르하스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걸음 다가왔다. 평소와 같은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아 보였다. 그녀는 입을 열어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우물쭈물거렸다.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찻잔을 꺼내고는 손가락을 엇짚었다. 화륵, 헤일로가 타오르고 곧 찻잔 위로 거품이 일었다.

“차 한잔 하겠어?”

“감사합니다아…….”

그러고는 다시 침묵.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지도 않고 찻잔을 들어 홀짝였다. 그 모습을 보며 페르난데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하는 짓이 꼭 아리아와 같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는 손가락을 꿈질거리며 말을 더듬을 때가.

-내 지팡이를 부쉈을 때.

‘실험 재료를 모조리 삶아 버렸을 때도.’

-흐음……. 그리고.

‘녀석을 가졌을 때.’

페이자쉬가 대답하지 않으려 하기에, 페르난데스가 대신 말을 꺼냈다. 전생의 감정을 고스란히 지닌 페이자쉬와는 달리, 페르난데스는 그것을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감정 대부분이 거세된, 빛바랜 추억으로.

페이자쉬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상관없었다. 지나간 일들 따위는. 아마도. 페르난데스는 애써 덤덤하게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런 경우엔 대부분 그저 같이 차 한잔 마시는 것으로 해결이 되고는 했……’

“저 아이를 가졌습니다.”

“풉?!”

찻잔을 들어 입가에 대던 페르난데스가 순간 차를 뱉어 내고는 한참 기침을 터트렸다. 그의 반응에 키르하스의 고개가 더 깊게 숙여졌다.

침묵이 감돌았다. 이때의 침묵은 융단과 같아서, 그 아래에 휘몰아치는 혼란을 애써 품고 움찔거렸다.

페르난데스는 간신히 호흡을 정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키르하스는 거의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보였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침묵이 길어져서는 안 된다. 그건 마치…….

‘이봐, 경험자. 뭐라 말 좀 해 보지?’

-이럴 때만 남인가? 너와 나는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잖아.

‘빌어먹을.’

이것이 문제였다. 페르난데스와 페이자쉬는 같은 기억을 품고 있다. 다만, 페이자쉬는 전생의 감정을, 페르난데스는 현생의 감정을 느낀다. 서로의 기억은 같은 형태를 가지더라도, 같은 색감으로 덧칠되어 있지 않다.

페이자쉬는 남 일처럼 낄낄거리며 방 한켠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일단 물어나 보자구.

“언제……?”

-그 질문 말고! 이 머저리야. 그건 최악의 질문이었어. 너는…… 너는 쓰레기구나!

세계를 멸망시킨 흑마법사에게 쓰레기라고 매도당한 페르난데스는 더듬거리는 키르하스의 시선을 힘겹게 받아 내며 후회했다.

“……알게 된 것은 며칠…… 며칠 전이었습니다.”

“그렇구나…….”

“네…….”

“그래…….”

말에 마침표가 찍히지 않는다. 말꼬리를 단호하게 끊어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페르난데스의 머릿속은 지금 놀랍게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패닉 버튼이 있다면, 저도 모르는 제삼의 페르난데스가 그것을 연타하고 있는 듯한 충격이었다.

‘빨리.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여기서?’

-아들인지 딸인지!

‘빌어먹을, 그걸 어떻게 알…… 프레이야?’

-그래! 그 여신은 생명의 여신이야. 정황상 그 여신이 키르하스에게 회임 사실을 알렸을 텐데, 신력으로 그걸 파악했다면 당연히 성별 정도는 구분했을 것 아니냐!

“성별은……?”

-아. 물론, 그걸 물어보는 순간부터 쓰레기라는 점이 더 확실해지긴 하지. 이 쓰레기야.

‘개자식!’

페르난데스는 으르렁거리며 페이자쉬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이 어떻게 비춰졌는지, 키르하스는 움찔 떨며 고개를 숙였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고, 찻잔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는 키르하스의 손에 손을 포개었다.

“힉?!”

“진정해라.”

“은공…… 은공.”

“왜 네가 겁을 먹느냐. 진정해. 네 잘못이 아니지 않나.”

“하지만…….”

-자, 이제 여기서 피임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닥쳐.’

자식이라는 것은…….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에게 보이지 않게 고개를 돌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계획에 없던 사건이 터지는 것처럼 당혹스러운 때는 없었다. 모든 수를 계획 속에 착수하는 그에게는 더욱이.

놀라울 정도로 차가운 계산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키르하스의 전력 손실, 대황야의 지배력 약화와 같은.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든 것만큼 빠르게, 그는 자기 자신을 혐오했다.

축하해야 했다. 축복해야 했다. 하지만……. 그제야 그는 자신의 감정을 선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 냉정한 사고가 돌아온 덕에, 누구보다 명징하게 그 자신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겁을 먹었군.

그의 사고가 마비된 이유는 공포 탓이었다. 또다시 잃을 순 없다는 두려움. 또다시 비극을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더 이상.

더 이상 그가…… 그의 동료, 그의 부하, 그의 지인들을 ‘도구’로 보고 있지 않았다는, 인간적인 감수성에 대한 공포. 그건 판단을 둔하게, 그리고 그 자신을 약하게 만드는 약점에 불과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삭일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다. 무시할 수 없는 감성이다. 그는 눈을 꾹 감고 한참 말을 골랐다.

“너를 내칠 생각 따윈 한 적이 없다.”

“은공…….”

“내 너를 거두었을 때, 네 상태, 네 위치, 네 모든 것은 이미 나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니. 나는 나의 것을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은공.”

“그러나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미래에 중요한 요인은 아니더라도, 내 개인에겐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네게 어떤 불이익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말해 다오. 아들이냐, 딸이냐.”

단순한 호기심, 혹은 성별에 대한 선호가 아니다. 이건 그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의 전생은 아들의 영혼을 건 도박이었다. 죽은 아들의 삶을 되돌리기 위한 발악이었다.

그러나 애써 무시하고 있던 불안 요소는 언제나 주위에 산재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가 했던 수많은 업적들로 인해 미래가 바뀌었다. 더 이상 전생과 같은 미래가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죽어야 했을 인물들이 살아 있고, 살아야 했을 인물들은 죽어 흙 속에 매장되어 있다. 전생에 없던 인물이 자식을 갖는다면, 그 자식의 영혼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며,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여러 가지 가설이 가능했지만, 페르난데스가 고려한 가설은 ‘복원력’이었다. 전생에 없던 인물이 태어났다면, 전생 당시 그 시기에 태어났어야 했을 인물이 그 자리를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가설이다. 이는 확인하기 지극히 까다로운 가정이었다.

복원력은…… 달리 말해 운명론이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지극히 혐오하는 그라 할지라도, 완벽하게 부정할 수 없는 어떤 필연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있어 거의 유일한 희망에 가까웠다.

운명이 있다면, 세계가 멸망하는 것 또한 운명의 영역에 포함될지도 모른다. 그건 결코 수긍할 수 없다. 그러나…….

“딸입니다.”

운명이 없다면, 아들이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전생의 영혼은 지금, 아직도. 본산 세계 대악마의 손에서 고문당하며 비명을 내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그리고. 그렇다면.

역천이 일어났을 때. 본산 세계에 지금의 현실을 뒤집어씌울 때. 아들의 영혼은 그 ‘운명’이라는 소용돌이 아래에서 산산조각 나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

확인하기 까다롭고, 확인하더라도 대처 방법이 없는 데다, 확신하는 순간 그에게 남은 모든 의지와 열정을 앗아갈 것이 뻔했던 가정.

그 가정의 증명 앞에서,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현실이냐, 이상이냐. 문장조차 되지 못한 단어가 그의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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