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99화 (300/388)

299. 그늘진 하늘 (4)

키르하스가 돌아간 이후,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고 간 대화의 내용이 머릿속에 잡히지 않았다.

단어들이 공기 중을 부유했다. 눈물 흘리던 키르하스를 애써 다독이고 내보낼 때, 오늘 하루만 같이 있어 달라 간청하는 그녀의 말을 거절해야 했을 때. 그녀의 표정과, 그녀의 큰 눈에 비친 그 자신의 표정까지도 여전히 기억 속에 못 박혀 있었다.

마른 숨이 답답했다. 그는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축복이다.’

자식을 얻을 것이라 생각한 적 없지만, 가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방만에 불과하다. 행위엔 결과가 따르는 법. 찰나의 쾌락과 한순간의 안온을 위해 행했던 일이었으나, 결과를 부인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전생 시절 대륙을 호령했던 대영웅과 그 사이에서 자손이 생겼다. 설령 그녀가 대족장이나, 또는 위대한 영웅이 될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식의 탄생은 그 자체로 기쁨이자, 행복이 되어야 마땅했다.

축복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아리아.’

그는 깊은 늪에 침잠하는 기분으로 기름진 어둠이 내려 깔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리아. 아리아……. 너는. 우리 아들은. 나의 후회와 나의 목표는, 나의 이상은 한순간의 거품에 불과했던가?

아들의 삶과 행복을 위해 했던 모든 일들의 끝에, 아들이 우리의 곁에 돌아올 수 있을까? 나는…… 내가 했던 지금까지의 삶은…… 본산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한 이 하위 차원에서 품은, 꿈결에 불과한 건가?

-페르난데스. 그만둬라.

페이자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한창 농담을 늘어놓던 그조차도, 키르하스가 잉태한 생명이 딸이라는 말에 침묵을 지켰었다. 자식의 성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들이 아니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서 태어나는 자식이, 전생의 자식이 아닐 수 있다. 설령 아리아와 이어지더라도, 그런 뻔뻔한 짓을 다시 저지른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서 아들이 탄생하지 않을 수 있다.

전생 시절의 아들은, 이 시대에 다신 나올 수 없을(@나오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역천을 성공한 이후, 이 여정의 끝에, 우리의 곁에 무엇이 남아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삼고 달려 왔던 것인가. 신기루와 무지개, 나비의 날갯짓과 찻잔 속에 피어오르는 거품. 그런 것들과 다르지 않다.

-그만해. 제기랄. 내가 손이 있었다면 네 뺨을 후려쳐 줬을 텐데 아쉽게 되었군.

‘네게 육체가 있었다면 넌 내 손으로 죽었어, 이미.’

-그딴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정신은 멀쩡한가 보군. 긍정적이야. 기왕 긍정적인 것, 시각을 보다 더 긍정적으로 바꿔 보는 건 어떤가?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

페르난데스가 으르렁거리며 그를 노려보자, 페이자쉬는 어깨를 으쓱였다.

-못 할 건 뭔가? 우리는 어느 누구의 아비이고, 어느 누구의 남편이기 전에 마학자였어. 심지어 대단히 뛰어났고, 아주 유능했던 학자들이었지. 이봐. 이성을 잃은 두뇌에 무슨 쓸모가 있지? 차라리 내게 몸을 넘겨.

‘이성?’

-그래. 이성. 익숙한 사고 실험을 해 보지. 몇 가지 가설을 세워 보자고. 하나, 우리의 자식이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

페이자쉬는 허공에 손가락을 짚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둘, 설령 아들이 태어난다 한들 전생의 아들과 동일한 자식이라는 것은 증명이 불가능하다. 같은 이름을 붙이고, 같은 성장기를 거치고, 심지어 같은 외모를 지닌다 한들. 그것이 같은 존재가 맞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찌질하게 굴지 말란 뜻이야. 제기랄. 여든이나 처먹은 놈이 그런 꼴이라니. 지금의 키르하스는 전생의 키르하스와 동일인인가? 지금의 르네 필리파는 전생의 카르벨리에 여제와 동일인이라 생각하나? 비센테 왕이 자식을 낳아 비센테 2세가 태어난다 한들, 전생의 기사왕이 재림하기라도 할 것 같나?

익숙한 역설이다. 델리스 외벽의 역설. 목재 성벽에 보강재를 청동으로 대어, 훗날 청동 성벽이 되었다 한다면 그 요새는 기록상에 남은 요새와 동일한 물건이라 생각할 수 있는가.

마학 이론의 기초였다. 존재의 연속성에 대한 고찰. 마력의 변환 과정과 그로 말미암은 마법의 구현 과정에 대한 이해에 항상 언급되던 유서 깊은 역설이었다.

같은 과정을 자기 자신에게 대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럼…… 어쩌자는 거지?’

-몰라서 물어? 이미 판은 짜였고, 돌이킬 방법도 없으며, 돌아가고 싶지도 않잖나! 머저리……. 최후의 기회를 얻었다고 희희낙락한 것이 고작 이 년 전이었어. 네 결심은…… 우리의 결심은……! 아니. ‘나’의 결심은 고작 그 정도에 불과했나!!

페이자쉬는 페르난데스의 무기력한 눈을 마주 노려보며 소리쳤다. 음성을 통한 전달이 아니라, 영혼과 영혼의 이어짐을 통해 들려오는 분노였기에. 그의 분노는 단어 이상의 색체를 지닌 채 페르난데스의 심장을 찔러 들어왔다.

그랬다. 결과가 도출되기 이전, 모든 가정은 무의미했다. 후회는 결단의 시기를 늦추는 악재에 불과하다. 마학자는 냉정해야 하며, 전략가는 보다 더 냉철해야 한다. 전략가의 심장은 느리게, 그리고 둔중하게 울려야 하는 법.

세계 자체를 판돈에 올린 도박판 위로 뛰어오른 이상. 그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정지는 퇴보이며, 유일한 승리 조건은 전진뿐이고. 걸어야 할 것과 얻을 수 있는 것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그 수준을 넘어선, 전체와 전체를 양측 저울에 걸어 둔 투쟁이었다. 운명 따위를 고려하며 별점을 치기엔, 그에게 산적한 문제가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휴식이 필요하군.’

그럼에도 잠시 머리를 식힐 필요는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페르난데스는 서류철을 정리하고 방 한켠에 기대어 둔 대검을 들어 올려 어깨에 걸쳤다. 묵직한 무게감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어차피 레이아의 기함이 내륙에 닿을 때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지금 하는 연구와 실험은 당장 중요한 것들이 아니었다. 더 붙잡고 있는다 한들 진척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에겐 아주 잠시라도 환기가 필요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 * *

-후우우웅!!

검로가 거칠어, 퍼붓는 빗물이 무겁게 짓쳐들었다. 칼날이 허공 위를 춤출 때마다 그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멈추었다가, 이윽고 다시 쏟아져 내렸다.

머리칼이 구불거리며 흐르는 감각이 기분 나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뜨거운 피가 차가운 비에 식혀지며 사지가 서늘하게 굳어 가는 느낌이 제법 좋았다.

그러니 다시 한번. 후웅, 빗방울들이 검로에 얽혀 매듭을 지으며 춤을 춘다. 디모니카의 시력은, 광원이 지극히 적은 한밤 중 대양 위의 빗속에서도 빗물의 비산을 육안으로 잡아낼 수 있었으므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며 한 번 더.

마력이 흐르는 것처럼, 아른하게 흐드러지는 빗물 속으로 검로를 틀어 한 번—

-콰득!

“음……?”

검로가 막혔다. 그제야 시선을 돌려 보았다. 어느새, 그의 눈앞에선 비를 맞고 있는 아벨이 보였다. 그녀는 장검 한 자루를 비껴 들고 대검 검신 옆을 눌러 밀었다.

“감기가 들 수도 있다.”

“디모니카는 감기에 걸리지 않소.”

“……내가 걸릴 수도 있지 않느냐?”

아벨은 페르난데스의 눈을 바라보다가, 입을 다시 다물었다. 곧 그녀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다잡았다.

“기왕에 감기에 걸릴 양이라면 잠시 땀이나마 흘려보내는 것이 좋겠구나. 오거라.”

고민이 많아 보이니 검무로 털어 주겠다는 것이다. 그녀다운 배려였다. 직접 캐묻거나 섣부른 공감과 위로를 하는 대신. 무던하게 격려하는 방식의 사려 깊은 배려.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검날을 치켜세웠다. 전력을 다하더라도 서로의 몸을 쉽사리 상하게 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던 탓일까. 홀로 하는 검무보다, 오히려 부담이 덜했다.

-챙!

“검로에 사념이 짙다.”

한 번의 일격을 가볍게 흘려내며.

“살은커녕 종이 한 장 가르기 어려운 검기로구나.”

-카앙!

잔소리에 가까운 투덜거림. 아벨이라고 답답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 우직한 사내는, 심계를 숨기는 것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진솔하게 털어놓는 법을 잊은 종류의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의 고해를 들어야 하는, 그리고 그 한탄을 숨겨야 하는 사제들에게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타입이다. 아벨이 생각하기에, 고민을 홀로 삭히는 그의 자세는 그가 말한 대로 어떤 사악한 흑마법사나, 계략가들의 것과는 그 궤가 달랐다. 고행하는 사제의 삶에 더 밀접한 감각이었다.

“그러니, 내게 고해하겠느냐?”

“무엇을?”

“아무 말이나. 간절하지는 않더라도.”

그건 아벨 나름의 농담이었지만, 페르난데스는 웃지 않았다. 그는 칼을 빙글 돌려 가볍게 부딪치고는, 바닥에 늘어트렸다.

“키르하스의 문제로구나?”

“알고 있었소?”

“회임 사실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별일 아니다. 생명의 탄생은 언제나 축복받아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썩 좋은 시기는 아니지만, 기실 새 생명이 잉태됨은 그 순간이 어느 때가 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좋은 시기가 되곤 하는 법이다. 불안 요소가 없는 세상이 어디에 있으랴.”

“딸이라 하오.”

“축하한다.”

진심이었다. 아벨에겐 용다운 탐욕이 있었지만, 그것이 독점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사랑은 독점적인 영역에 있지 않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만을 사랑하는 사람의 외형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에 있었다.

“난 아직도…… 아직도 생각하곤 하오. 아직, 내 눈앞에 선하오. 내게 울며 간청하던 녀석의 모습이. 죽여 달라 말했던 그 몰골이. 내 잘못과 내 실수들이……. 내가 만들어 낸 생명이 내 손 아래에서 죽어갈 때. 온기가 사라진 그 싸늘하고…… 메마른 손가락이.”

처음 포대기에서 뻗어 나온 작은 손과, 아리아를 닮은 콧망울과, 그를 닮았던 곱슬머리가.

그의 사랑을 갈구하던 푸른 눈과, 고통 속에 눈물 흘리던 어린 뺨까지.

[아버지께서 자랑스러운 결과를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매정한 아비의 비아냥에, 치욕을 삼키며 등 돌려 떠나던 그날의 뒷모습과.

앙상한 몸. 마력으로 맥동하는 심장. 탁하게 들뜬 하늘색 눈동자 아래로 죽음을 바라던 시선.

그 모든 순간 끝에, 뒤늦게 깨달았지만 끝내 전하지 못한 말까지.

‘너는…… 언제나 내게 자랑스러웠단다.’

아비로서 그는 아들의 요람이며, 아들의 이상이며, 아들의 등대가 되어 주었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아리아. 내가 너와 나의 사랑을 무너트렸다. 다시 돌이킬 수 없을 수도 있다. 나를 용서하지 마라. 다만 나는 후회 속에 침잠하겠노라.

“정말. 오늘은 못 봐주겠구나.”

-쾅!

“컥!”

아벨은 한숨을 내쉬고 다가오더니, 대뜸 페르난데스의 가슴을 후려쳤다. 폐가 오므라들 정도로 강맹한 일격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끅, 하는 숨소리를 내지르고는 그대로 허물어져 헐떡였다.

전혀 대비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충격이 배로 컸다. 아벨은 차갑게 그를 내려보며 말했다.

“고작 이런 공격에도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빠져 있구나. 어휴……. 무어라 말을 더 잇겠느냐. 네 고민이 정말 그것이었느냐?”

새 생명에게 더 좋은 아비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두려움 때문이었느냐고, 아벨은 싸늘하게 말했다.

“한심하구나! 더 좋은 아비가 되기에 앞서서, 더 좋은 배우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냐! 네 그 이기적인 근심이 다른 누군가에겐 비수가 되리라 생각치 못하였느냐!”

“아벨.”

“입 다물거라!”

-쾅!

아벨은 장검을 거꾸로 들고 바닥을 내려찍었다. 쿵, 단단한 목재 사이로 칼날이 박히며 무거운 파열음이 들렸다.

“가거라! 키르하스에게 가 보거라. 그 아이에게 있어서도 너는 첫사랑이며, 첫 남자가 아니냐. 그런 사내가 대뜸 아이를 만들고는 혼자 우울해하고 있다 한다면, 그 아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겠느냐! 너는 그렇게 나이를 먹고도 아직 그다지도 어리단 말이냐!”

아벨은 한참 씩씩거리더니 칼을 뽑아 비껴 차고는 빗속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는 일어섰다.

세계의 종말, 지옥의 도래, 대악마들의 웅거, 만신전의 봉문, 대제후들 사이의 내전…….

그러한 굵직한 사건들이 여전히 산적해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가슴에 가장 깊게 자리 잡은 근심은 눈앞의 작은 생명이었다.

“딸이라. 이름을 무어라 지어야 할까.”

-이제 와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네.”

녀석의 미래엔 적어도 고난이 없게 하리라. 페르난데스는 등을 펴고 걸으며,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는 또다시 한 아이의 아비가 되었다.

자식이 부모의 자랑이 될 수는 없다. 자식이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부모의 자랑인 까닭이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부모 된 사람으로서 자식의 자랑이 되는 것뿐이었다.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그 작은 손에 안겨 주리라.

후회는 한 번으로 족했다. 미래는 여전히 어둡고, 여전히 불안하더라도.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것이 자신의 대에서 끝날 것이라는 확신뿐이었다.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환기는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행동뿐이었다.

* * *

그로부터 사흘 후, 레이아의 기함은 키르자트 서부 항구 도시, 샤르자 항에 입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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