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그늘진 하늘 (5)
서펜트 킹의 기함은 문명 사회 그 어떤 항구 도시에도 입항 허가 없이 접안을 시도할 수 있다. 국경 분쟁이나 무력 대립과 같은 단어는 적어도 해상 위의 엘프들에게 통용되는 어휘가 아니다.
극도로 치우친 비대칭 전력. 지상의 어떤 공격 수단으로도 파괴할 수 없고, 설령 피해를 입힐 수 있다 하더라도 항구 근해 교전에서 온전히 파괴하지 못한다면 끔찍한 보복이 기다리는, 차라리 재앙에 가까운 무력이다.
엘프들은 내륙에서 완벽하게 무력하다. 그리고 해상 위에선 완벽에 가깝도록 강력하다. 엘프들은 바다 전역이 그들의 영토라 주장하고 있으며, 따라서 해상 무역로는 그들의 영토 내에서 일어나는 불법 국경 침략이라 말한다.
이에 대해 부정할 수 있는 인간들은 없다. 소극적으로 무시할 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리상 키르자트와 어떤 연고도 없는 가이메른 왕조가 샤르자 항에 무단 입항했을 때, 도시 행정부는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사절단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제법 예법을 아는 자로군. 네 주인에게 고하라. 우리 일족의 귀빈이 입항하고자 한다고.”
“대왕이시여. 당신의 귀빈은 곧 아국의 귀빈으로 환대받을 겁니다.”
레이아 여왕의 접견실에서, 사절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여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뒤에 걸린 왕가의 문장들을.
가이메른, 말레이른, 제르올렌. 엘프 삼왕조의 인장이 같은 위치에 걸려 있었다. 사절의 낯이 다소 창백해졌다. 항구 도시의 행정부는 당연히, 해상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엘프들의 왕조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동부의 가이메른, 북부의 말레이른, 서부의 제르올렌. 삼대양의 군주들. 엘프 왕가들은 서로 교분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으니, 저 세 가문기가 동시에 걸려 있다는 것은—
‘이거 큰일이군.’
문명 사회의 모든 해상 무역로가 한 왕조의 아래에 복속되었다는 의미였다. 적어도 바다 위에선 확고하게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는, 이종족의 손 아래에.
사절은 속으로 천천히 주판을 두드리며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허나 귀국의 정병들은 뭍을 딛지 못하니, 귀빈께서 거친 홍진에 몸이 상하실까 저어되옵니다.”
“쓸데없이 말을 늘이는구나. 걱정 말거라. 인간이니.”
“……!”
“세르너드. 나와.”
사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군중 속에서 당당한 체구의 청년이 걸어 나왔다. 젊은 외모, 동부 왕국 출신일까. 귀족 특유의 날카로운 선과, 무인에게서 느껴질 법한 기도. 그리고 살짝 드러난 피부에 온통 박혀 있는 흉터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공연히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소. 나는 그저 내륙으로 통하는 길목이 필요했을 뿐이고, 하루만 정비할 시간을 준다면 없던 것처럼 사라져 드릴 테니.”
“귀빈을 접대함에 감히 그런 실책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부디 편히 지내시길. 하선 후 접객까지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사절은 고개를 깊게 숙이고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레이아는 흥, 하고 웃으며 턱짓했다. 와일드프린스 한 사람이 걸어 나와 사절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이건……?”
“여왕의 하사품이다. 그대들이 어련히 잘해 주겠거니 싶으나, 세르너드는 나의 친우이자 우리 모두의 은사이며 또한 가장 높은 귀인이니. 이건 당부라 여겨 주었으면 좋겠구나. 나의 말을 네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절은 상자를 열지도 않고 공손히 받은 뒤 어전을 빠져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던 페르난데스는 레이아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환대에 감사드리오.”
“투자라고 해 두지.”
“투자?”
“제르올렌에게 들었다. 인간들이 지녔던 첫 군주의 유적을 찾고 있다고. 녀석은 너희의 군주가 남긴 것이 ‘상징’이라 하던데. 너도 그렇게 들었나?”
“그렇소.”
“그렇다면 이건 투자다. 최초의 군주가 지녔던 상징을 발굴해 내는 것에 성공한다면, 그보다 확고한 정통성이 어디에 있겠나. 미래의 황제가 만들 새로운 제국에 대한 투자지.”
“……아쉽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요.”
“하하!”
레이아는 싱긋 웃으며 손짓했다. 축객령이었다.
“네가 실패하는 모습은 상상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성공한다면 너는 더 이상 동부 왕국의 귀족이거나, 인간 신의 사제 정도에 머무르지 않을 것만 같고. 갈 길 바쁜 몸인데 내 더 이상 널 붙잡아 둘 수 없으니. 가거라.”
페르난데스는 레이아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며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저건 명백한 호의였다. 일국의 여왕으로서 그녀가 보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호의.
적어도 항구 도시인 이상, 엘프 여왕의 ‘부탁’을 거절하거나, 엘프들의 귀빈을 박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단 입항과 불법 입국에 가까운 행태지만, 이에 대해 하나하나 따져들 수 있는 간 큰 행정가는 없다.
페르난데스는 짧게 묵례하고는 몸을 돌려 어전을 빠져나갔다.
“무운을 비마, 세르너드.”
* * *
신원 미상의 외국인이 입국한다면, 당연히 무장을 해제하고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와 그 일행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사절은 생각보다 더 높은 직위의 인물인 듯했고, 그가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터번을 두른 항구 도시의 병사들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서기 바빴다.
그쯤 되자, 페르난데스는 사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타국의 왕을 직접 접견하는 사절이 평범한 행정 귀족일 리는 없을 테지만, 항구 병사들의 태도는 일반 귀족들을 보는 것과 퍽 달랐다.
“귀빈께선 무슨 생각에 그리 골몰하시는지요?”
사절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는 마차 너머에 흘러가는 이국의 풍경에서 고개를 돌려 사절을 보았다.
“영주시오?”
“하하…….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해상 최강 전력의 입항에 곧장 반응한 사절이라 함은 당연히 전권대사였을 테고, 방금 어전에서 그대가 보인 태도는 행정가의 것이라기보다는 군주의 것에 가까웠거든.”
“제 태도라 하셨습니까?”
그는 사뭇 공손하게 말했다. 당연히, 오만하거나 당당한, 일반적인 고위 귀족들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좀 더 깊은 심도의 은밀한…… 가령 눈빛이나 표정 따위의 사소한 제스처 같은 것을 의미했다.
“그대의 시선이 레이아 여왕의 뒤를 스치더군. 엘프 삼왕조의 가문기를 한 번씩 훑고는 잠시 멈췄지. 삼왕조의 인장을 명확히 알고 있으며, 그 셋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고 있고, 그와 동시에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으니. 군주의 자세가 아니겠소.”
“이거 놀랍군요.”
사절은 부드럽게 웃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사흐반 베일레 에얄샤르자 알’무카파. 편하게 알 무카파라 불러 주시길 바랍니다. 이제 반대로 제가 묻고 싶군요. 삼왕조의 통합을 이루어 낸 여왕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입항한 동부의 인간 귀족…… 당신의 정체가 뭡니까?”
“나는 추론이었는데, 그대 또한 그리해야 옳지 않겠소?”
“수수께끼라. 현자의 미덕이지요. 좋습니다. 여정 중에 즐거운 소일거리가 될 것 같군요.”
페르난데스는 아무런 내색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 무카파의 시선이 따끔거릴 정도로 노골적이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베일레 에얄샤르자. 놀라운 일이군.
‘그러게. 에얄레트의 군주가 직접 고개를 숙여 가며 시종의 자세를 자처하다니.’
샤르자는 이 도시의 이름이고, 에얄은 에얄레트. 키르자트 특유의 ‘대영지’를 의미하는 단어다. 베일레는 ‘군주’라는 의미였으므로, 동부 문명의 오등작 개념으로 볼 때 공후에 가까운 고위 귀족이다.
그런 자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엘프 여왕에게 호위 없이 직접 접견해, 정체를 숨기고 시종처럼 비굴하게 굴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엘프의 해군력에 굴종했다? 아니. 그런 눈치는 아니었다. 그 순간에도 해상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전략을 수립하던 태도였으므로.
-제 수하를 믿지 못하는군.
‘그리고 필요하다면 엘프를 적대할 생각이고.’
-이거 조심해야겠어.
군주가 직접 분장해 사절을 자처한다. 그건 군주의 담대함과 자신감을 나타내는 일이었고.
사절로 참관한 자리에서 대응 전략을 고민한다는 것은 엘프를 적대할 생각까지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창가에 턱을 괴고는 슬쩍 웃었다. 그 정도의 사고가 가능한 과감한 군주라면, 언제든 그를 암살하려 시도할 수 있다. 서펜트 킹의 공증이 있다 하더라도.
‘밤손님이 오겠군.’
-반겨 드려야지.
저토록 교활한 귀족이 단순히 그들을 대접하고 얌전히 보내 줄 리가 없다. 엘프들의 속셈, 혹은 향후 정세를 파악해야 하는 입장에서, 반드시 그에게 모종의 접촉을 시도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페르난데스는 ‘직접 알아보라’고 말했다. 한 지방의 군주씩이나 되는 자가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그와 공식적으로 접촉할 리가 없었으므로, 이럴 경우에 그를 방문할 이는—
‘샥시시. 오랜만에 보겠군.’
키르자트의 악명 높은 정보 기관. 샥시시의 개입뿐이다.
* * *
알 무카파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풀었다. 엘프 여왕의 귀빈들을 숙소에 인도한 이후, 살가운 미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그 자리엔 차가운, 매를 닮은 인상의 귀족만이 남아 있을 뿐.
“샥시시는?”
“정보 지원 요청을 넣어 두었습니다. 전하. 술탄께서는…….”
“정보는 확실할수록 좋지. 아직 때가 아니다.”
서펜트 킹의 함대가 입항했다는 것은 항구 입장에서야 일대 사건이겠으나, 국가 전체로 보았을 때는 사소한 해프닝에 불과했다. 항구에 피해를 입히거나 실질적인 전면 교전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그저 방문한 뒤에 사라졌다는 점에서 더욱이.
그러나, 엘프 왕조들이 연대했다는 정보는 그렇지 않다. 보다 더 구체적인 정황을 파악하기 전에 이런 충격적인 정보가 중앙에 흘러 들어가선 안 된다. 지금의 술탄, 알 하쉬르는 전쟁광이며 예방적 선제 공격이라는 외교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전쟁 군주였으므로. 이 정도의 작은 실마리로도 해전 위험이 있었다.
샥시시는 술탄의 눈과 귀이므로, 그들의 지원을 받는 시점부터 술탄이 이 일을 깨닫게 될 때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나…… 적어도 그 자신이 나서서 부담을 질 필요는 없었다.
“그자의 정체와, 이 땅에서 무엇을 원해 저 먼 바다를 돌아 왔는지. 그걸 먼저 파악해 두도록.”
“예, 전하.”
“결코 방심하지 말고, 어느 순간에도 귀를 열고 있어라. 쉬운 상대가 아니다.”
알 무카파는 마차에서 짧은 순간 나누었던 대화를 반추했다. 간단한 제스처와 순간적인 표정 변화를 눈치채고, 그 작은 정보로 상대의 정체를 파악해 냈던 그 사내의 기교를 떠올렸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그 대상이 알 무카파처럼, 외국의 고위 귀족이기까지 하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보 기관 출신이거나, 정치판에서 수십 년은 구른 노귀족들이 갖는 특징인데.’
고작해야 스물 남짓, 거기에 보이는 모습은 전형적인 무사의 것이니. 기사 계급의 전쟁 귀족일 수는 있어도 정치가는 아닐 터. 페르난데스가 알 무카파의 정체를 파악한 것처럼, 그 또한 페르난데스의 정체를 가늠하고 있었다.
정보 기관의 교육을 대단히 심도 깊게 익힌 자다. 그리고 그 가정은 최악의 가설을 가져온다. 동부, 또는 레바인테르 제국의 요원이 엘프 여왕의 귀빈이라는 가설은…….
‘엘프가 동부인들과 손을 잡았다. 심지어 세 왕조가 모두 연계한 새로운 군사 집단으로 부상한 엘프들이…….’
50년 전쟁이 종전한 지 이제 이 년이 지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동부인들과 엘프들이 한 배를 탔다 한다면, 향후 전장은 대황야가 아니라 키르자트 국내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대황야의 주권은 수인 호족들이 쥐고 있다. 그리고 수인 호족의 군주는 레바인테르 제국과 모종의 협약을 맺고 있다는 정황이 있었다. 키르자트의 동부 국경선은 지금 준전시 상황에 돌입해 있다.
그 와중에 그들의 술탄…… 알 하쉬르가 지금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다음 전쟁은 50년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알 무카파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주색 비단이 길게 깔린 소파에 몸을 늘였다. 그는 자신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하에게 말했다.
“너도 그 자리에 동행해라. 샥시시와 그자의 대화를 단 하나도 빠짐없이, 숨소리 하나마저도 기록해 내게 전달하도록.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용인할 수 없다.”
“만일 그자가 진정코 흑심을 품고 입국한 것이라 한다면 어찌하오리까?”
“엘프 여왕의 공증이 있는 이상 성내에서 그들을 건드릴 수는 없지……. 그들이 도시를 뜨면 그때 행동하도록.”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질 않기만을 바랄 뿐. 엘프 여왕의 귀빈이 도시 인근에서 급사했다면 반드시 그 일의 책임을 추궁할 것이고, 이 도시가 항구인 이상 엘프 여왕의 추궁은 단순히 외교적 질책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
어제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항구 도시를 내려다보며, 알 무카파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먼 바다에서 비바람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른 저녁임에도, 흐린 하늘이 수평선 너머로 길게 그늘져 있었다.
“기우였으면 좋겠군.”
저 비가 소나기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알 무카파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