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그늘진 하늘 (6)
익숙하지 않은 양식이지만, 적어도 지극히 사치스러운 건물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커튼의 얇은 비단 위에 화려하게 수놓아진 금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열린 창 안으로 커튼이 너울지며 저녁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지도를 펼쳐 놓고는 잠시 망연히, 하늘 너머를 보았다.
여정의 종점이 머지 않았다.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더라도.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의 몸은 점점 부서지고 있었다. 처음 디모니카 세례를 받았을 당시와 비교하자면 그 징조가 명확했다.
피로하다. 근골과 장기, 그리고 감각 기관들이 미세하지만 확실하게 노화한 것이 느껴졌다. 애당초, 그가 받았던 디모니카 세례는 완벽하지 않았다. 육체의 구성이 일반적인 디모니카들에 비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부족함 없는 몸이었다. 일반적인 디모니카가 보일 수 있는 기능성의 칠 할에서 팔 할 정도의 수준. 이는 달리 말해 잘 단련한 일반인의 최대 한계를 두 배 이상 상회하는 능력이었으니, 전생을 생각한다면 투덜거릴 거리조차 아니다.
그는 이보다 가혹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았으며, 이보다 처절한 순간에도 승리했었다. 이 정도는 그에게 예측 범위 안에 있는 손실률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이 년에서 삼 년이라…….’
페르난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되는 수명은 오 년. 그리고 육체의 기능성이 최소한 유지되는 효용 한계는 이 년에서 삼 년이다. 처음 디모니카가 되고, 육체 성능과 소모율을 계산했을 때부터 고려했던 사항이었다.
그러므로, 사라진 수명과 부서지는 몸 따위가 아쉽지는 않다. 그의 목표는 안온한 장생과 편안한 말년 따위가 아니었으며, 속죄는 죽은 아들의 생환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변수가 있다면, 그를 망설이게끔 하는 단 하나가 있다 한다면…….
‘녀석이 말하는 것 정도는 들을 수 있을까?’
-페르난데스…….
자식의 존재다. 아들의 죽음이 그의 삶을 부정하게 만들었듯이, 키르하스가 품고 있을 그의 자식은…… 비록 그 아이에게 지금 당장 어떤 애착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더라도, 그 자체로도. 그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만들도록 하고 있었다.
-키르하스는 대족장이다. 당장 황무지의 패권을 쥐고 흔드는 녀석이고, 시간이 더 흘러 녀석이 완숙해진다면 그 위치는 더욱 공고해지겠지. 더군다나, 동부의 데인, 그리고 제국의 황제조차 우리의 우군으로 보아도 좋다. 그 녀석의 경우와는 전혀 달라.
‘그렇겠지.’
지난 이 년여 간의 시간 동안 페르난데스는 대륙 중앙에서 동부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영역에서 각지의 권력자들과 충분한 친분을 쌓아 왔다. 그의 자식은 분명 그 덕을 볼 수 있을 테니……. 아들의 경우와는 다르다.
-제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는 류의 같잖은 생각 따윈 하지 마라, 페르난데스. 우린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을 시작한 거였으니. 이제 와서 스스로 고결한 척하지 마. 치열할 필요는 있어도, 치졸할 필요는 없다.
페이자쉬는 싸늘하게 말했다. 그랬다. 아들의 죽음이 가져온 후회와 회한이 그의 동력이었지만, 그건 선의에서 비롯된 어떤 숭고한 회개 따위가 아니었다. 저열한 이기심이다. 저 자신에게 향하는, 값싼 자기 위로에 불과했다.
아들에게 속죄하고 싶다. 아들에게 용서받고 싶다. 아들의 웃음과, 행복을 보고 싶다. 이것이 진정코 녀석을 위한 것이었나? 아니다. 그건 페르난데스가 투영하고 싶은 위안에 불과했다. 이기심이다.
이제 와서 성숙한 아비인 척하지 마라. 그런 것이 되려 하지도 말고. 페이자쉬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고맙다.’
그래서,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동기가, 그의 목적과 의지가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탓.
그 순간, 발코니 난간 위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쥐었다. 본능에 가까운 경계였다.
‘샥시시?’
-아직 시간이 이른데?
키르자트 샥시시가 제아무리 유능하다 한들 레이아의 입항을 파악하고 고작 두어 시간이 흐른 지금 시점에서 활동을 개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타닷.
지극히 은밀한 발걸음 소리. 디모니카의 감각과 지금까지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인지할 수도 없을 수준의 작은 소음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칼을 침상 아래에 밀어 넣고, 당장 뽑아 올리기 쉽도록 역수로 잡으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곧, 작은 털뭉치 같은 것이 창틀에 아른거렸다.
전신을 감돌던 긴장감이 맥없이 빠졌다. 페르난데스는 짧게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키르하스. 꼬리가 보인다.”
“앗.”
창가에서 조심스럽게 얼굴이 삐죽 튀어나왔다. 장난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망울로, 키르하스가 살금살금 걸어 들어왔다.
“이 지역 건물들은 문이 바깥에 나 있더냐?”
“뭐, 창문도 문은 문이잖아요!”
키르하스는 헤실헤실 웃으며 다가와 페르난데스의 맞은편, 창가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꼬리가 살랑거리며 바람결에 흔들렸다.
“곧 비가 내릴 것 같던데…… 은공.”
“그래서?”
“비가 오면 밖에 나돌아다니기 좀 그러니까요…….”
키르하스는 조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곧 투덜거리며 말했다.
“기왕에 먼 땅의 외국까지 왔는데, 그냥 가만히 숙소에 있기 싫습니다!”
“거리 구경이 하고 싶었나?”
“네! 이상한 건 아니잖아요! 물론! 우리가 놀러 온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래도…….”
애초에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웃음기를 애써 참으며, 변명을 중얼거리는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그…… 태교에도 좋을 것 같고……?”
그렇게 말하는 키르하스의 얼굴이 터질 듯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그…… 수도의 젊은 여식들은 이따금씩…… 연인과 도시를 유람하는…… 그런다고들…….”
페르난데스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키르하스가 중얼거렸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구체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이 일정은 대악마와 관련된 것이며 시일을 다투는 위급한 사안이라는 것쯤은.
그런 와중에 전략과 무력 양측을 모두 담당하고 있는 페르난데스에게 여유 시간이 충분할 리가 없었다. 당장에 그는 수면조차 포기하며 모든 시간을 준비나 계획, 또는 수련 따위에 투자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심지어 다른 일행들에겐 알리지도 않고, 최대한 은밀히 방을 빠져나온 것이 아니던가. 그를 독점하고 싶었다.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겼지만, 막상 도착해 그의 피로한 눈매를 보니 말을 이어 나가기 어려웠다.
-턱.
어느새 다가온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하는 키르하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자꾸나.”
“네, 네!”
키르하스는 퍼뜩 고개를 들고는 해맑게 웃으며 외쳤다.
* * *
키르하스는 아무 생각 없이 노상 식당들을 구경하며 꼬치 구이 하나를 쥐고 걷고 있었다. 그녀는 고기를 우물거리며 연신 페르난데스에게 이것저것 종알거렸다.
페르난데스는 엷은 미소를 띤 채 그녀의 말에 대답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그녀에게 닿아 있지 않았다. 고기를 넘기는 상인, 지게를 들고 어디론가 향하는 노예, 길거리를 걷는 백성들…….
언뜻 보면 일반적인 시장 거리의 풍경이었고, 낯선 외국어를 사용하는 이방인들에게 향하는 호기심에 불과한 시선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셋이 붙었군.’
미행이 붙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엘프 여왕의 귀빈이라 불린 사내가 뜬금없이 출타했다면 당연히 눈이 따라붙겠지. 그러나 너무 노골적이었다.
“은공, 은공? 듣고 계세요?”
“그래. 아, 저건 맛있어 보이는구나.”
“어디요!?”
“저 음료 말이다. 더운 남부 지방에서 열리는 열매의 씨앗을 볶은 뒤에 뜨거운 물을 내려 마시는 차란다. 나도 몇 잔 정도 먹어 본 기억이 있구나.”
“맛있나요?”
“달진 않지. 풍미가 훌륭하고.”
“제가 사 올게요!”
키르하스는 퍼뜩 튀어 나가 가게로 향했다. 페르난데스는 그 뒷모습을 보고 잠시 웃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상인이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옮겼다.
‘샥시시는 아니고…… 알 무카파의 수하들이겠군.’
샥시시는 저렇게 멍청하지 않다. 대륙에서 제국 아이언사이드들과 맞대결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보기관이 저토록 어리숙할 리가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상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상인의 낯이 금세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굳은살이 많군.”
“이, 일이 고되어 그렇습지요!”
상인은 페르난데스의 유창한 키르자트어 발음에 섬찟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페르난데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 도시의 군주는 현명하고 과감했지만, 가신들의 상태가 썩 훌륭한 편은 아니었다.
이러면 일이 좀 늘어지는데…… 그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었다.
“베일레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나는 그저 도시 관광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가서 전하려거든, 다음엔 샥시시와 함께 오길 바라마.”
“……그대가 도시를 관광하는 것인지, 침략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온 것인지 알 도리가 없지 않겠소?”
“침략? 하하, 누가 이곳을 굳이 침략하려 한단 말인가?”
“동부의 왕국들이나 제국이. 엘프 함대의 원조를 받아 상륙을 시도한다면 우리가 감히 막을 수야 있겠소?”
“어차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막을 수 없을 텐데, 굳이 지금 경동하여 내게 경계심을 심어 줄 필요가 있겠나.”
페르난데스는 픽 웃었다. 그 모습에 상인으로 분장한 사내가 움찔 떨었다.
“너희가 너희 베일레의 절반만큼만 사려 깊었어도 베일레의 고충을 절반은 덜었겠군. 그럴 생각도, 그럴 필요도 없으니, 우리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샥시시와 함께 숙소로 찾아와.”
“왜 샥시시가 필요한 것이오……?”
“네게 말해 줄 용의가 없다. 가라.”
페르난데스는 무능한 자들을 혐오한다. 그건 오랜 천성에 가까웠다. 지금 이 시대, 무능이 곧 죽음으로 이어지며 개인의 실수가 집단의 멸망을 야기하는 전란기에서 무능함은 죄악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의 모욕적인 언사에 상인은 낯을 굳히며 물러났다. 그와 거의 동시에, 길 건너에서 키르하스가 웃으며 뛰어왔다. 짙은 고동빛 맑은 음료가 든 잔이 보였다.
-나도 맛을 좀 느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페이자쉬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에게 잔을 건네고는 자신도 한 모금 마셨다.
“엑!! 웩! 써요!”
“하하, 그 맛에 먹는 거지.”
“진짜, 엄청, 써요!!”
그녀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 모습에 페르난데스가 웃음을 터트리자, 볼을 부풀리며 툴툴거리던 키르하스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저녁놀이 지는 거리를 거닐었다.
* * *
“그자가 샥시시를 요청했다고?”
“예, 전하.”
“샥시시라…… 샥시시라.”
알 무카파는 인상을 찌푸렸다. 모든 정보기관들이 그렇듯이, 샥시시의 주 업무는 정보 수집과 통제, 여론 조작에 그치지 않는다. 적극적인 암살과 사보타주를 포함한 정예 요원들이며, 동시에 공포의 상징으로 존재했다.
그런 자들을 직접 만나길 요청했다는 것은……. 알 무카파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못 짚었구나.”
“무슨 말씀이시온지…….”
“비공식 외교 사절일 가능성이 있다.”
샥시시가 수집한 정보는 그대로 정제되어 술탄의 귀로 흘러 들어간다. 즉, 공식적인 루트를 거치지 않고 술탄과 직접 대화를 시도하고자 한다면 샥시시보다 빠른 경로는 없었다.
서펜트 킹을 대동한 소란은 그것을 위한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서펜트 킹이 대뜸 나타나 동부의 인간을 키르자트의 항구 도시에 떨어트리고, 그자를 귀빈이라 칭한다면 적어도 샥시시의 입장에선 반드시 접촉해 보아야 하는 이변으로 여겨질 테니.
“내 손을 떠난 일이 되었구나. 그렇다면 제국이나…… 아니면 교회의 인물일 수 있다.”
“교회 말씀이십니까?”
“최근 동부의 정세에 대해 들은 바가 있더냐?”
“없습니다.”
“알아는 두거라. 제국은 큰 분열을 간신히 딛고 일어섰고, 동부의 교회들은 사분오열되어 흩어졌다가, 겨우 다시 모였다. 그런 와중에 술탄과 접촉하려 하는 이들이 있다면, 공식적인 외교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서로가 완전한 우군이라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긴장감 속에서, 기나긴 전쟁을 간신히 마친 적대 국가의 수장과 모종의 외교 라인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면 공식적인 루트를 사용할 수야 없었다.
국가 내부의 정치적 공세에 시달리게 될 것이 뻔했으므로. 제국이나 만신전 교회처럼, 분열되어 불안정한 집단의 중추들이 적대국과 외교를 시도한다면 당연히 은밀한 방식을 취해야 했다.
“그자들이 바라는 대로 해 주어라. 샥시시를 부르고 연회를 준비해.”
“예, 전하.”
“공식적으로는 엘프들의 귀빈을 맞이하는 연회가 될 것이니 만전을 기하거라. 사절…… 사절이라…….”
알 무카파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