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02화 (303/388)

302. 그늘진 하늘 (7)

로베르는 여느 날처럼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제국 전역에서 수집된 각지의 첩보를 정리하고, 동시에 아이언사이드들의 임무 할당을 조율하며, 반란 또는 각종 귀족 범죄의 정황이 포착된 대귀족들을 뒷조사하는 일 따위로.

극도로 분주하며 대단히 은밀한 일 처리였다. 드넓은 사무 책상엔 수많은 보고서들이 쌓여 있었지만,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하게 구분되어 결코 어질러져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보고서 한 권을 들어 올리고 천천히 읽어 내리고, 깃펜에 잉크를 묻혀 서명을 그러 넣는 그 일련의 과정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슥, 종이를 긋는 펜촉의 감각을 느끼며 일필휘지로.

-투둑.

“이런.”

그러던 중 펜촉 끝이 갈라지며 잉크 한 방울이 터져 나왔다. 보고서 끄트머리가 검게 물들었다. 로베르는 인상을 찌푸리며 냅킨을 들어 올렸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전하. 장 드뷜레이옵니다.”

“들라.”

로베르는 테이블 위에 흐른 잉크를 재빨리 닦아 내고는 깍지를 꼈다. 곧 문이 열리며 중년의 말쑥한 사내가 들어섰다. 장 드뷜레 자작. 트레뮐레 가문의 법의귀족이자 시종장 직을 맡고 있는 오랜 충신이었다.

“무슨 일인가?”

“요원 하나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어디서? 키르자트인가?”

“아닙니다. 전하.”

잠입 및 첩보 임무를 수행하는 아이언사이드들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위험 속을 거닐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임무 중 사망하는 요원은 극히 드물었다. 아이언사이드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파악했다 하더라도 제국을 직접 적대하는 것이 퍽 부담스러운 탓이다.

그러므로, 작전 중 요원의 실종은 대단히 큰 문제였다. 요원의 정체가 탄로 났을 때 정치적 문제가 될 수는 있어도 요원에게 직접 해를 가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백국마족의 평원에 파견된 요원이 실종되었다 합니다.”

“백국마족의 평원이라……. 첼리니였나?”

“예, 전하.”

“요원의 일가에 보상금을 지불하게. 첼리니에게 동생이 하나 있었나?”

“예.”

“그 동생이 아직도 마법에 관심이 있거든, 필라인네일 대학에 입학 소개장을 하나 적어 주게. 이 일은 요원들 전체에 알리고.”

로베르는 막힘없이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그 휘하의 모든 첩보 요원들 중 그가 신상과 가족력을 파악하지 못한 자 따윈 없었다. 수하를 통제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상벌에 엄정한 것과 신변을 빈틈없이 확보하는 것이었으므로.

그건 그렇고…… 로베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이면 백국마족의 평원이라.

“세르너드 경이 했던 말, 기억하나?”

“카간이라는 자가 나타날 거란 예언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의 말에 드뷜레 자작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정보 요원들은 예언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확실한 데이터에 기반한 예측만을 신봉할 뿐이었다. 그들 사이에선 교회나 마법사들이 종종 말하곤 하는 ‘예언’이나 ‘잠언’ 따위를 불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적어도 내 앞에선 그런 태도를 보이지 말게.”

드뷜레 자작의 모습에 로베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작은 섬칫 놀라며 표정을 다스렸다. 로베르는 혀를 차며 말했다.

“존경할 필요는 없더라도, 존중할 필요는 있는 인물일세. 그자의 업적을 안다면 결코 방만히 여기지 말게. 다른 이들도 아니고 그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내일 세상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진지하게 재고해 봐야 할 문제가 될 걸세.”

로베르는 고개를 저었다. 저건 첩보 조직에서 활동하는 요원들이 갖는 천성에 가까웠다. 압도적인 정보량을 쥐고 흔드는 자들은 으레 자신들이 아닌 타인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겸손은 미덕이 아니다. 그러나 오만은 확실한 악덕이다. 오만함은 필연적으로 오판을 낳으며, 오판은 곧 실책으로, 실책은 패배로 이어지므로.

“제 눈이 어두워 실언했습니다.”

“그래. 상관없으니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지. 예언에서 훗날 카라드스카르라는 이름으로 불릴 카간이 나타난다 하였네. 선제적 예방 조치로, 예언에 명시된 이를 암살했지.”

“투르게진이라는 소년의 죽음은 세 명 이상의 정보원이 확인했습니다. 아마르 씨족의 족장이 아들의 죽음에 광인이 되었다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감히 내 수하들이 내게 거짓 보고를 올렸을 것이란 의미는 아니었네. 그러나 세르너드 경은 암살 실패를 의심하라 했지. 하지만 나는 달리 생각하고 있다네.”

그는 자신의 수하들을 믿었다. 그 능력이 아닌, 진솔함을. 암살은 실패할 수 있다. 능력이 부족했든, 운이 좋지 않았든. 어떤 경우에라도 성공이 100% 보장된 작전은 없는 법이다.

그러나 신의는 결코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의 수하들, 특히 그레이서클이라 불리는 최고위 요원들은 설령 제 목숨이 걸려 있다 하더라도 그를 배신할 인물들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중 셋이 ‘아마르 투르게진의 죽음이 확인되었다.’라고 보고한 지금 이 시점에서, 로베르는 전혀 다른 가설을 세웠다.

세르너드 경의 의견이 옳다면. 즉, ‘미래의 카간, 카라드스카르가 죽지 않았다.’와 ‘아마르 투르게진은 죽었다.’라는 두 정보가 모두 참이라면.

“아마르라는 그 젖먹이가 카라드스카르가 아니었거나, 또는 다른 카라드스카르…… 다른 카간이 나타났거나. 둘 중 하나가 되겠군.”

카라드스카르라는 이름은 가명이다. 세계의 흉터라는 뜻을 가진, 으스스한 별명이다. 그러므로, 그 가명을 사용하며 카간의 위치에 올라설 또 다른 인물이 있다면 결국 예언은 실현될 터였다.

거기에 그의 요원이 죽었다면, 가설에 현실성이 붙는다. 이제 필요한 것은 교차 검증이었다.

“지금 키르자트에 파견된 요원이 넷인가?”

“예, 개중 둘은 백국마족의 평원에 인접한 도시에 주둔 중입니다.”

“술탄에게 붙어 있는 하나를 제외하고 남은 셋을 평원으로 보내게. 각자 다른 지역으로 진입하고, 한 사람은 투르게진 씨족으로, 나머지 둘은 평원 전체의 전황을 조사하게.”

백국마족은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끊임없이 내전을 반복하던 땅이다. 수많은 유목 부족들이 수많은 국경선을 그려 나가며 만들어진, 유동성 높은 지역이었다.

가장 최신화된 지도조차도 고작 일주일 사이에 완전히 틀린 정보가 되곤 한다. 유목 부족들은 단 한 차례의 교전으로도 부족의 명운이 갈리는 탓이다.

그 전까지야 백국마족은 굳이 파악할 필요도 없는 구석에 위치해 있었고, 감히 평원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마적 떼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조금 더 정밀한 관측이 필요할 수는 있었다.

“기우였으면 좋겠군.”

대륙 정반대 편에 있는 어떤 영주와 동일한 말을 입에 담으며, 로베르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끼룩! 끼룩!

열린 창 너머에서 갈매기가 시끄럽게 울며 항구 안쪽 깊숙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먼 바다에서 비바람이 몰아칠 징조였다.

* * *

-바스락!

마른 나뭇가지들이 발치에서 으스러지며 시끄러운 소음을 내었다. 한 무리의 사내들이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다. 이른 저녁, 사내들은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횃불에 불을 붙였다.

“길이 험하군. 흔적이 끊겼어.”

한 사내가 허리를 굽혀 바닥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호리호리한 중년 사내였다. 그는 곁에서 주위를 훑어보는 다른 사내에게 말했다.

“증인은 앞으로.”

“읍! 읍!!”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갈이 물린 채 포박된 여인을 끌고 나왔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숨 막힌 소리를 지르다가, 사내에 의해 무릎 꿇려져 헐떡였다. 사내는 그녀의 입에 걸린 재갈을 풀어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이건 범죄예요! 아무리 당신들이라 하더라도 민간인을 납치하고 핍박하다니! 게다가 그 사람은 성기사라고요!”

“성기사‘였’었지.”

사내는 차갑게 말하며 소매 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횃불 아래에서 단검이 새파란 빛을 내뿜으며 번쩍거렸다.

“이젠 용의자다. 증인, 활동 당시 그자와 가장 친밀한 관계였다는 증언이 잇따랐었다. 경우에 따라 그대는 증인이 아니라, 피고로 취급될 수 있음을 주의해라.”

“주의는 무슨! 나는 필라인네일 대학의 부교수이자, 제국 황실의 궁중 마법사이며—.”

“그리고 우리는 주의 천칭이다. 금언하라. 질문과 주장은 그대의 몫이 아니요, 그대가 행할 수 있는 변론은 주의 전당 앞에서만 유효하리라.”

“……후회할 겁니다.”

“우리의 후회는 세상에 물든 악을 방기한 우리 자신에게만 해당될지어다.”

“말을 말아야지. 내가.”

여성은 투덜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엇이 되었든, 전직 성기사를 심판하려거든 약식 재판이라도 이루어져야 할 터였다. 종교법에 무지한 그녀였더라도, 그들의 행사가 결코 언제나 부당하게 진행되지는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가 저항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누명을 쓴 것이고, 그녀는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민간인으로서 그를 변호할 의무가 있었다.

‘대장…….’

한참 전에 소식이 끊기고 잠적한 그녀의 상관을 떠올리며,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찬란한 명예가 뒤따르던 황실의 위대한 사냥꾼들이 어쩌다 이런 취급을 받게 되었는지…….

“증인, 말하라. 그자가 어디에 숨었을 것 같나?”

“대장은 추적과 은신의 달인이었어요. 이런 식으로 요란하게 수색한다고 잡힐 리가 없잖아요! 차라리 편지를 보내지 그래요? 혹시 모르죠, 운이 좋으면 답신이라도 올지!”

“형제들, 불을.”

사내는 고개를 흔들고는 엄숙히 말했다. 여성은 깜짝 놀랐다. 여기서 화형대를 꺼내려는 건가? 하지만 사내들은 횃불을 흔들며 앞으로 나설 뿐이었다.

“지금 뭘 하시는…….”

“이 산 전체에 불을 놓는다면 어딘가에서든 나타나겠지.”

“하, 하지만 대장이 여기에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이 산에는 화전민촌이 있어요! 무고한 희생자들이 나올 거라고요!”

“그들의 무고함은 주의 앞에서 입증될 것이며, 단 하나의 악인을 방기하느니, 일백 사람의 핏물을 보는 것이 만신전의 뜻이라. 주여, 가호하소서.”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사내들이 나지막이 기도를 읊기 시작했다. 여인의 낯이 금세 창백해졌다. 이 사람들은 산 전체를 불살라 버리려 하고 있었다! 외진 산기슭이었고, 이 근방 영지의 영주조차 신경 쓰지 않을 야산에 불과했다지만, 산촌엔 적어도 스무 가구 이상의 화전민들이 있었다!

“너희의 무고함도 너희 신의 앞에서 입증되는가?”

“나타났군.”

“대장!”

숲의 저 멀리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여인은 그 낯익은 목소리가 어딘지 음울하고, 그르렁거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반가운 음성이었다.

“세이리. 오랜만에 보는구나.”

“대장! 세상에…… 다리가……?”

숲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한 청년이 절뚝거리며 나타났다. 청년은 천을 둘둘 감은 긴 막대를 지팡이 삼아 사내들에게 걸어 나왔다.

“……지금 이 순간부터, 피고가 하는 모든 언행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법정은 무슨.”

“피고는 더 이상 성직의 법의를 입고 있지 않으며, 피고에게 행해지는 이 절차는 오로지 피고가 몸담았던 교회의 대주교가 간청했기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보다 ‘약식’ 절차를 원한다면, 그리해 주겠다.”

“고풍스러운 겁박이로군. 너희 위선자들의 행태는 늘상 그랬지.”

청년은 완전히 그림자 밖으로 나서 횃불의 조명 아래에 섰다. 그의 얼굴엔 깊은 그늘이 어려 있었지만, 두 눈은 여전히 불길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말해라. 내게 무슨 잘못이 있다는 것인가. 그리고 너희에겐 어떤 자격이 있어 나를 심판하려 하는가?”

“피고, 다리안 쉬라이크. 속칭 황제의 눈. 샤일드 교회의 집행성기사. 불타는 성체 기사단의 수석 고문. 맞나?”

“그래. 내가 다리안 쉬라이크다.”

“피고는 지난 5월 17일. 제국 프라방 지방의 소도시 하센에서 일어난 방화와 성기사를 향한 무차별적인 암살 기도, 12명의 기사와 4명의 사제를 포함한 총 43명의 피해자를 살해한 것을 인정하는가?”

“인정한다.”

“피고는 지난 5월 22일. 제국 쥘리하 지방의 소규모 촌락 바르앙에서 11호의 민가를 불태우고 19명의 기사와 2명의 사제를 포함한 총 28명의 피해자를 살해한 것을 인정하는가?”

“방화는 빼고, 살인은 내가 했지.”

“피고는 그 이후로 마지막 행적이 파악되기 전까지 도합 8개의 도시에서 총 213명의 피해자를 살해했으며, 진범이 밝혀지기 앞서 스스로 성직을 포기하고 파문을 요청했고, 요청이 인가되기 전에 잠적하여 이 산에 은거했다. 맞나?”

“……인정한다.”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사내는 다리안을 노려보며 천천히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끊어서 씹어 뱉듯 말했다.

“팔텐노이아 교구의 샤일드 교회 프란치스코 대주교의 간청에 따라 마지막 변론의 기회를 주겠다.”

“그대는……. 그대들은…….”

다리안은 상처 입은 야수처럼 어금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대들은 지난 세 달간. ‘십자군’이라는 명목하에 일어난 총 148건의 방화와 8,519인의 민간인 학살, 그리고 그에 버금가는…… 전쟁 범죄를 일으켰다. 인정하는가?”

“…….”

“그대들의 전쟁 범죄로 인해 발생한 수천 가구의 인명 피해와 전쟁고아들, 파괴된 거주지로 인한 아사자들과 그 근방의 빈곤과 기아. 그대들이 뿌려 놓은 그 재앙에 대해 항변할 기회를 주겠다. 언제나 그랬듯이. 너희 모두에게, 나는 항상 항변할…… 속죄할. 그래, 속죄할 기회를 주었으니.”

-스르릉.

사내는 칼자루에서 장검을 뽑아 들었다. 서늘한 세인트메탈 장검이 어느새 떠오른 달빛 아래에서 새파랗게 빛났다.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피고는 모든 범행을 인정했음에도 반성의 여지가 없으며 범행 재발의 우려가 지대한바. 피고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내 너희에게 같은 죗값을 물겠다. 반성의 여지가 없고, 범행 재발의 우려가 지대하므로!”

“나는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의 렐리기오사 헤레티카이며, 만신전이 보장하는 나의 권한으로 그대의 형을 집행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아들이며, 인륜의 덕복으로 그대를 벌하겠노라!”

-챙!

사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칼을 휘둘렀다. 그 순간, 다리안이 쥐고 있던 지팡이가 흐릿하게 변했다. 이윽고 사내의 칼이 반으로 갈라지며 튕겨 나가고, 사내의 가슴팍에 지팡이가 꽂혀 파고들어 있었다.

그 자리의 누구도 다리안의 움직임을 따라간 이가 없었다. 사내들은 딱딱하게 굳어 다리안을 바라보았다.

-스르릉…….

동시에, 헤레티카들은 일제히 장검을 뽑아 들어 다리안을 겨누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다리안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기도해라. 사제들. 너희의 신에게 간절하게. 너희의 죗값을 용서해 달라 간청해라!”

다리안은 사내들에게 뛰어들며 외쳤다.

“너희 모두가 너희 신 앞에서 용서받은 후에, 내가 그자 또한 죽여 없앨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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