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 꼭두각시들의 전쟁 (2)
로베르는 언제나처럼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황금항의 이른 새벽은 토파즈처럼 빛났고, 로베르는 창가에서 어스름히 밝아 오는 아침 햇살을 즐기며 홍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수많은 첩보와 서류들, 보고서들이 가지런히 정돈된 책상 위로, 잉크 묻은 깃펜을 옮겼다. 누군가를 죽이고, 어떤 이의 가정을 파괴하고, 또 어떤 이에게 누명을 씌우는 일은. 지극히도 무감정하고 사무적인 펜촉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이 일을 사랑했다. 아침의 고요함과 함께 제국의 전반을 한 손에 쥐고 들여다보는 순간이, 그의 삶의 행복이라 할 법했다.
“전하!!”
-쾅!
다음 보고서를 천천히 정독하고 서명을 그려 넣으려는 찰나에 문이 박살 나듯 열리며 시종장이 뛰어 들어왔다. 로베르는 고개를 살짝 비틀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궁중의 예법에는 노크라는 예절이 실려 있다네.”
“송, 송구합니다, 주군. 하지만…….”
“뭔가?”
“키르자트 방면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샤르자 항에 주둔 중이던…….”
“펠론소 록펠러 경이군.”
“예, 록펠러 경의 보고입니다.”
로베르는 짜증 섞인 기색을 지우며 보고서를 건네받았다. 그의 궁중 시종장, 드뷜레 자작은 때때로 경솔했으나, 쉽사리 침착을 잃는 성격은 아니었으며 록펠러는 아이언사이드 중에서도 그레이서클에 속하는 정예 요원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순간 몇 가지 정보가 스쳐 지나갔다. 샤르자 항, 알 무카파. 쉬운 사내는 아니지만 거느린 수족은 별 볼 일 없는 지방 토호. 대추야자와 야자기름 따위를 수출하는 한산한 무역항이며, 키르자트 최후방에 위치한 지역.
유일한 장점이라 하면 키르자트의 수도, 알 자흐라와 대단히 근접한 탓에 위성 도시 물류를 파악해 술탄의 정책 동향을 인지하기 쉽다는 것 정도.
‘전쟁……?’
기실, 키르자트 내부는 제국 첩보 자원의 최전방이라 할 만한 지역이다. 제국에 명백히 대항할 수 있으며, 대항한 전력이 있는 적국의 심장부에 파견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를 지닌다.
그런 곳에 투입된 이가 급보를 보낸다는 것. 전쟁, 혹은 키르자트의 붕괴에 준하는 내분이나 술탄의 임종. 그 정도가 예상할 만한 답안이었다.
하지만, 보고서를 읽는 로베르는 앞서 했던 모든 가설을 깨끗이 치워 버려야 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들이 적혀 있었다.
“엘프 삼왕조의 통일……?”
로베르는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선 제 서슬에 화들짝 놀랐다. 충격적인 정보에 집중이 흐려진 탓이다.
“이제부터 바다는 모두 놈들의 손에 떨어지겠군. 끔찍한 일이야.”
“그리고…….”
“세르너드 경이 그 장소에 있다라. 하긴……. 그래, 그 사내라면 그럴 수 있지. 엘프 삼왕조의 통일을 그 사내의 위업에 한 줄 더 추가해도 되겠군. 기나긴 서사시가 나오겠어.”
“하지만, 왜…… 왜 그랬을까요? 전하. 엘프 왕가들의 연합은 결코 제국에 득이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그래. 심지어는 인류 모두에 득이 될 수 없지.”
제아무리 우호적인 세력이라 하더라도, 바다 전역을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압도적인 강대국이 탄생한 셈이다. 사소한 외교 갈등으로도 해상 무역로가 완전히 끊어져 버릴 수 있는 종류의 강대국.
한 나라가 어떤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눈치를 보아야 한다면, 그건 속국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첩보는 인류의 해상 무역 전방이 속국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가? 대체 왜 그들을…….”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았을 때, 페르난데스의 행동은 거의 온전히 대의를 위한 것이었다. 인류의 대의를 위한. 그렇기에 로베르는 그를 존중해 왔다. 그는 그가 해낸 모든 업적 속에서 자신의 사익을 결코 챙기려 들지 않았으니까.
그건 말 그대로 성자의 사고관이었다. 행보와 사상은 다소 과격하고, 때론 사악해 보일 지경이었으나, 결과는 언제나 의로웠으므로. 로베르는 교회가 그를 공식적으로 시성하기 전에도 그가 진정코 만신전의 성자임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행동에도 반드시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인류 문명 전역에 자칫 한없는 위기를 가져올 악수가 아닌가.
“잠깐. 백국마족의 평원으로 향했다고? 술탄에게 병력을 요청했고? 황제의 밀사 자격으로?”
“예, 전하.”
“하하…… 이런. 제기랄.”
로베르의 머릿속에 섬광이 번뜩이는 것 같은 충격이 다가왔다.
사고방식의 틀이 다르다. 아니, 격이 달랐던 것이다!
그래. 이 사내는 ‘인류의 대의’를 위해 싸웠다. 언제나! 페이른 왕국에서는 왕실을 위해. 데인 왕가에서는 데인 왕가의 존립을 위해. 그리고 황무지에서는 황무지의 호족들을 위해……!
그건…… 어떤 특정한 국가나 단체의 편을 들지 않는, 지극히 중립적인 사고관이 아닌가? 오직 인류 전체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착수하는, 그러면서도 마냥 시류에 끌려 가지 않는 절묘한 한 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군……! 해상 세력을 미리 정리했다는 건가?!”
“예……?”
“황제의 밀사 자격? 웃기는 소리! 이 사내는 애당초 제국의 신하가 아니었네. 제국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야. 이 사내가 바라보고 있는 시야를 예상이나 하겠나?”
“그…… 무슨 말씀이시온지…….”
“보게! 제국을 위해서는 엘프는 통일 왕조를 가져선 아니 되네. 하지만 인류 전체를 위해서는……? 인류 전역을 어떤 한 거대한 국가라 가정하고 본다면. 엘프 왕조의 통일은 오히려 득이 된다는 뜻이네.”
“어떻게 엘프들의 해상 지배가 대륙 문명에 이익이 된다는 말씀이신지 저는 잘…….”
“답답하군!”
로베르는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제국이 한 지방의 도시라 생각하게. 키르자트 또한 그렇고! 두 도시는 최근의 전쟁으로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있지. 그런 와중에 서로 친교를 트고, 무역로를 대대적으로 개방하며, 때론 물자 지원을 하기 위해선 다리가 필요하네. 두 도시와 전혀 연관 없는 가교가.”
“그게 엘프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엘프는 제국도, 키르자트의 편도 아니니. 그리고 엘프 왕조의 통일은…… 그 가교 역할에 불협화음이 없도록 미리 ‘땅을 다지는’ 행동이었겠고! 분열된 왕조가 해상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다면, 두 도시의 친목은 영원히 도모될 수 없을 테니까.”
“대체 키르자트와 그런 대대적인 물자 교류가 어째서 필요한 겁니까?”
“백국마족.”
로베르는 말을 이어 나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급히 코트를 걸치고 지팡이를 손에 들었다.
“마부를 대기시키게!”
“어디로 가십니까?”
“팔텐노이아! 황제 폐하를 만나 뵈어야겠군.”
키르자트와 레바인테르 제국의 연합이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반드시 어떤 강대한 외적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 상황에서, 페르난데스가 미리 경고했던 백국마족의 웅거 외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단순히 ‘예언’이나 가설 따위가 아니다. 그가 이런 대규모 작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로베르가 미처 입수하지 못한 정보가 그의 손엔 들어 있다는 것이었으며—
‘르네 필리파가 그걸 인정하고 페르난데스를 파견했다고?’
정보전에서 아이언사이드가 밀린다면 로베르의 정치적 입지는 더 이상 온전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제국 홀로는 상대할 수 없다는 가정이 뒤따랐기 때문에 행동한 것이다!’
백국마족의 평원에 파견된 요원이 실종되고, 평원 내부로 향하던 교류가 모조리 단절되었다. 평소라면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일이다. 아마 또 그 마적들이 서로 칼부림이라도 하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을 터.
그러나 하나하나, 어떤 것은 단순하고 어떤 것은 충격적인 정보였지만. 그 퍼즐이 모두 모이며 드러나는 어렴풋한 실체는 그보다 더 명징했다.
그가 ‘성자’라 생각하며 존중하고 있던 그 사내가 전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내가 전쟁을 예상했을 때,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던 적은 지금껏 없었다.
군마 수백여 기로 선제후의 본대를 공격하거나, 선대 카르벨리에 공작의 소규모 군대로 제국군 전체를 압박하는 등. 그는 언제나 최소한의 병력으로 전쟁을 준비해 승리했던 사내였다.
그런 사내가 두 강대국의 전력을 요구하고 있다면. 그 상대는 대체 어떤 이들이겠는가.
* * *
“살려…… 살려 주십시오. 제발…….”
“재미있군.”
-스르릉.
늦은 여름의 푸른 초원 따윈 이제 더 이상 없다. 피가, 온 사방에 피가 널려 있었다. 그것이 초원의 푸른 잎사귀 위로 흩어져 있다는 것에 수많은 전사들이 역겨워하고 있었다.
피를 쏟으며 죽는 것은 바르지 않다. 설령 죽는 순간이 온다 하더라도. 전쟁 중에 전사하는 것이 아닌, 전후 포로의 입장에서 죽어 갈 때라면 그건 차라리 원죄에 가깝다.
결코 하늘에 닿을 수 없을 테니. 생명이 지상에 스며들어 전사들의 선조조차 고개를 돌릴 것이었으므로. 전쟁 중에 죽은 전사들에겐 매가 내려온다. 하지만 포로의 사체 위엔 까마귀가 앉을 것이다. 지네와 개미, 시체 벌레들과 구더기들이 꼬일 것이었다.
그렇게 죽긴 싫다. 그건 바르지 않았다. 전사는 피를 토하며 헐떡였다.
그 위로, 서늘한 빛을 흘리는 창이 한 자루 내려왔다.
“지금껏 네가 잡았던 노예들도 그런 말을 했던가? 네가 그자들을 모두 살렸다면 네 부족은 지금의 두 배는 넘었겠군.”
“죽더라도. 죽더라도 피 흘려 죽고 싶진 않소!”
“그게 소원이라면 바라는 대로 해 주지. 여봐라! 이자는 존중할 가치가 있더냐!”
태양을 등지고 말 위에 앉은 사내가 뒤를 돌아 외쳤다. 곧 함성이 울렸다.
-예!
“이자들 모두가! 그럴 가치가 있던가!”
-예!!
“그렇다면 선조들께서 만족하실 방법을 보여라. 이자들 모두에게!”
“자, 잠깐! 모두……?”
사내의 낯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턱을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다. 태양을 등져 그림자 내린 얼굴 아래에, 새하얗게 빛나는 이가 웃음 짓고 있었다.
“오랜 전통대로, 네 씨족에 자비를 보이마.”
“나만…… 내 목숨으로 충분하지 않소!”
“그런가?”
다각, 말이 한 걸음 다가와 그의 앞에 섰다. 거대한 검은 말이 발굽을 들어올려 사내의 가슴팍 위에 발을 얹었다. 숨이 막힌 사내는 한참 컥컥거리며 버둥거렸다.
“지금 이 순간이 너희 모두에게 얼마나 깊은 흉터가 될지 궁금해지더군. 전통, 전통이라. 선조들의 낯을 보아서라도 그리해 주어야지.”
“이…… 이…… 사악한……!”
“수레바퀴보다 큰 자들은 자루에 담아라! 원하는 대로, 오늘 더 이상 평원 위에 피가 흐르지 않도록 하라!”
-예!!
고함이 평원 전체에 울려 퍼졌다. 대륙의 ‘문명’ 사회들에게 제법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근방 부족들을 약탈하던 ‘마지막’ 부족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평원 위에 얼마나 많은 부족들이 있는가. 또 얼마나 많은 전사들이 있던가. 지금까지 오랜 역사 속에서 그것을 헤아린 사람은 없었다. 수천, 혹은 수만의 게르들이 평원 위를 떠돌고 있었겠지.
그러나 한 사내의 손 아래에서 그들은 마침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이십오만 팔천사백. 개중 전력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전사’, 남녀와 노소를 불문하고 말 위에서 활줄을 당기고 창날을 던질 수 있는 ‘전사’들의 수는 물경 십오만 명.
태어난 순간부터 말의 고삐를 쥔 사람들이다. 걸음마를 배울 때부터 사냥터를 쫓아다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은 곧 그 시간만큼의 투쟁이었으며, 그 사이에서 벼려진 창과 칼들은 문명 사회에 더 이상 씻을 수 없는 깊은 흉터를 아로새기리라.
-다각, 다각.
사내의 말이 태양을 등지고 나아간다. 거대한 전투 탓에 피로 물든 평원을 곧게 가로지르며. 다각, 다각. 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비명과, 고함과, 욕설과, 간청이 그의 그림자를 쫓았다.
바람이 불었다. 피비린내 사이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감정이 와류되어 흘렀다. 심장이 요동치고, 며칠 밤을 지새운 피로한 육체에 새로운 힘이 깃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한 모든 전사들의 육신에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주술사들은 이를 경계했다. 선조들의 힘이 아니라고. 이건 보다 사악한 이들의 소행이라고. 그런 말을 당당하게 했던 주술사들은 모두 자루 아래서 말발굽에 깔려 으스러졌다.
사내는 바람을 타고 웃으며 달렸다. 다각, 다각. 비명이 흐려지고 신음이 잦아드는 어느 시점. 이제 그의 등 뒤엔 그를 따라 내달리는 전사들의 흥분 섞인 호흡과 땅을 박차는 발굽의 울림만 가득했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바람이 부는 곳으로!”
“그 끝에선 또 어디로 가시려 하십니까!”
“뒤를 돌아 다시 반대로!”
세계를 양단하고, 다시 한번 가로질러 이 세계 전체에 두 번 없을 흔적을 남기리라. 사내는 고함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카간! 카간! 카간!
-아마르 카간, 예케 테타이 울루스!!
-르뤼웨인가르야, 으뤼야(매들아, 달려라)!!
늦여름. 백국마족이 통일 왕조를 옹립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제국의 심장부에 도달한다.
그 시기, 아마르 카간의 병력은 초원 경계 인근의 모든 도시들을 덮치고 있었다.
제국도, 대황야도, 키르자트조차도 미처 온전히 대비하지 못했던 그 순간에.
카라드스카르의 대북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