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08화 (309/388)

308. 꼭두각시들의 전쟁 (5)

아마르 카간은 조악하게 꾸며진 옥좌에 앉아 있었다. 옥좌는 깃발들로 엉성하게 바느질되어 덮여 있었다. 어떤 것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또 어떤 것은 반쯤 불에 타 있었다.

낡고, 해지고, 때 묻은 깃발들. 그건 군기와 인장기들이었다. 아마르 카간에 대한 과열된 충성 경쟁이 낳은 새로운 전통이었다.

치세가 짧고, 그 대부분을 내전으로 이룩한 아마르 카간은, 단적으로 말해 속내를 알 수 없는 잔악한 군주였다. 그의 휘하 장수들은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어야 했다.

그가 유도한 공포였다. 진실된 충성심을 얻기에 턱없이 짧았던 탓에, 아마르 카간은 자신의 지배력을 공포로 쌓아 올렸다.

적에게도, 아군에게도. 수레바퀴는 평등하게 원형을 그리며 굴러가므로.

“위대한 카간이시여, 사절이 당도했습니다.”

“그래.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아직 출정하지 않은 장수들은 카간의 옥좌를 중심으로 둥글게 앉아 있었다. 곧, 게르의 휘장이 걷히며 체구 단단한 한 사내가 들어섰다.

짙은 고동색 눈과 부리부리한 콧대. 키르자트 족속이었다. 아마르의 입이 비죽 솟았다. 사절의 시선이 그의 옥좌에 고정된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아, 보았는가.”

“…….”

사절은 애써 분노를 삭이며 고개를 숙였다. 훼손되어 모두를 파악하긴 어려웠어도, 그건 아국에 대한 지독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귀족들의 인장을 엉덩이로 깔고 앉아 있는 꼴이라니!

아지만의 군기, 알아인의 가문기, 샤이한의 휘장과 카헤트의 지휘기…….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만 해도 벌써 네 개 도시가 넘게 불타올랐다는 뜻이다.

“전리품은 승자의 덕목이지. 아국의 빛나는 태양께서는 너희의 전리품을 인정하신다 하셨다.”

“하하! 다들 들었나? 전리품을 ‘인정’한다라. 그래, 그렇다면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또 무엇이지?”

사절은 분노를 삭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아마르 카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곧, 그는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너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너희에게 보였던 자비와 아량을! 너희는 대키르자트를 모욕했으며, 적법한 아국의 강역을 훼손했노라.”

“아량? 자비? 하하!”

“우리는 너희가 굶주릴 때에 식량을 보내었다. 너희가 쟁기와 쇠솥조차 없어 고단할 때에 너희에게 철물을 공급했다! 겨울철 너희의 곡식이 바닥을 보일 때, 누가 너희의 겨울을 지원했느냐!”

“곡식? 식량! 철물!! 너희는 언제나 그 이상의 값으로 우리의 자원을 수탈해 갔다!”

사절의 말에 장수 하나가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사절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너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키르자트에 대적했을 때. 너희가 감히 우리의 강역을 짓밟고 우리의 도시를 약탈했을 때를 기억하라! 너희의 선조, 너희의 조상과 아비 모두가 라호르 요새 앞에서 산 채로 매장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너희의 그 비루한 역사 속에서 너희가 키르자트의 강역에 발을 내디딘 첫 사내들이리라 생각했느냐!”

분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저자를 죽여라. 저자를 자루에 담아라! 장수들은 감히 자신의 앞에 떳떳이 서서 그들을 모욕하는 저 문명인을 용서할 수 없었다.

-척.

그때, 카간이 손을 들었다. 순식간에 게르에 침묵이 감돌았다. 이 거친 사내들이 단 한 사람의 손짓에 겁에 질리고 복종하는 것을 보며, 사절은 움찔 떨었다.

“계속해 봐라.”

“너희…… 너희의 침략에 위대한 술탄께서 단죄를 선언하셨다. 그러나 술탄께서는 여전히 관대하시며, 너희가 굶주림과 비루함 속에서 생존을 위해 발악한 것일 수 있다 판단하셨으니. 너희 마적들에게 기회를 주겠다 말씀하셨노라!”

“……기회라?”

“돌아가라! 다신 이 땅을 밟지 마라! 너희가 습득한 노획물들에 대한 소유를 인정하고, 그 작은 재화로 만족해 돼지치기들의 삶을 연명코자 한다면 그리하라! 무지와 굶주림 속에 일어난 범죄는 단벌이 아닌 훈육으로 계도하라는 것이 술탄의 자비였노라!”

사절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게르의 기세는 더없이 흉흉해져 갔다. 아마르 카간의 위압감 속에 간신히 고개를 숙인 장수들은 사절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때, 카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맛있더군.”

“……뭐?”

“귀족들의 살점은 맛있더군. 돼지나 말 따위보다 부드럽고 기름져서 술 한잔 걸치기에 아주 좋았다.”

“……!!”

“평원의 매들은 그 자식들 또한 맹수다. 하지만 너희 자식들은 그렇지 않더군. 어린 양이나 송아지처럼 감칠맛이 좋았다. 계집들은 따듯했고 너희가 말하는 ‘전사’들마저도 그리 질기지 않았다.”

“이……놈!!”

“계도라 하였느냐? 우리가 너희에게 이 며칠간 말미를 주며 베푼 교훈은 어째서 받아들이지 않았지? 우리는 너희에게 단 한 가지 가르침을 주었고, 앞으로 우리가 베풀 가르침 또한 하나뿐이다.”

카간은 천천히 사절의 눈앞까지 걸어갔다. 사절은 자신보다 한 뼘 이상 큰 카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분노와 공포로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걱정 마라. 우리에겐 인내심이 많으니. 이해하지 못한다면 계속, 계속, 계속해서 너희에게 가르쳐 주리라. 우리의 지혜는 단 하나뿐이니, 깨닫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으리라.”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우리가 너희에게 줄 유일한 지혜, 그건 약육강식이다.”

-우득!

사절의 어깨가 부서졌다. 그는 카간이 손을 뻗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카간은 한 손으로 사절의 팔을 뽑아내어 바닥에 집어 던졌다. 피가 흩뿌려지며 사절은 비명을 내지르고는 바닥에 허물어졌다.

“이자의 용기를 높게 사겠다. 이자를 죽이지 마라.”

“하지만 카간!”

“이자가 타고 온 말에 이자를 묶어라. 이 나라의 겁쟁이들은 말에 탈 자격조차 없으니, 제 말에 끌려가도록 하라.”

그 말을 듣는 사절의 표정이 파리하게 질렸다. 질주하는 말을 따라 뛰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상 입은 몸으로 말의 뒤에 끌려갔다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리라.

그러나 카간은 다시 옥좌에 앉으며 턱을 괴었다.

“최대한 빨리 가야 할 게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야 너희의 왕이 생전에 내 말을 듣지 않겠느냐.”

* * *

‘지맥이 뒤틀려 있군.’

-악마의 소행이 아니야. 이건…… 마법이다.

‘정확히 말해선, 악마의 마법이겠지.’

페르난데스는 허리를 펴며 생각했다. 그는 근 이틀가량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까지 말을 타고 이동하며 대지의 지맥을 살피고 있었다.

모든 대지엔 일정 이상의 마력이 스며들어 있다. 이것이 결정화되면 마력석으로 가공할 수 있다. 많은 이론들이 있었지만, 페르난데스는 대지에 결정화되어 뭉쳐 있는 마력석 광맥들을 머나먼 고대의 마법 사용의 여파라 생각했다.

뭄토의 승천이 만들어 냈던 여파가 대황야를 뒤엎고 그 아래에 거대한 마력석 광맥을 만들어 낸 것처럼. 대지 깊은 곳엔 마력석들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 마력석들이 서로 공명하여, 마력이 흐르는 길을 지맥이라 부른다. 지금 이 땅 아래에 잠든 지맥은 뒤틀리고 엉겨 붙어 특정한 파장을 내뿜고 있었다.

이 대지 위에서는 정상적인 마법 활용이 어렵다. 지면으로부터 스며 나오는 마력 간섭이 일종의 쐐기가 되어 주문에 개입하는 탓이다.

‘마법전을 견제하는 건가?’

-놈들의 수준은 저열하니까. 그런 이후에 전쟁이 성립하겠지.

이 시대. 단순한 군사력만으로 전쟁의 승리를 장담하는 것은 어렵다. 일정 이상의 규모를 갖는 강대국들은 반드시 전투 마법사들을 양성해야 했다.

마법사들이 전장 위에서 고요한 전쟁을 벌이고, 그 아래에서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싸운다. 그것이 현대전의 기초였다. 능력과 시간, 그리고 마력이 충분하다면. 마법사는 저 홀로 수십, 수백여 명의 병사들을 찢어발길 수 있는 존재들이었으므로.

따라서, 백국마족에 대한 문명 사회의 괄시는 다대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었다. 그들의 마법은 원시 부족의 주술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므로. 하지만, 이제 판도가 바뀌었다.

‘키르자트의 마법 전력은 사실상 봉인되었겠군.’

-돌아가지. 파악할 만큼 파악했어.

페르난데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 위에 올라탔다. 키르자트의 전투 마법사들은 당분간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지맥이 뒤틀려 대마법의 안정성이 무너진 이상, 개별적으로 사용하는 소규모 마법을 제외한 대규모의 마법 방사는 아군 오사의 위험이 있다.

전술적인 영향력을 가진 고가의 병기가 이제 고작 수십 명의 궁수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카라드스카르. 역사 자체는 전생과 같게 흘러가는가.’

-우리가 없었다면 그랬겠지.

전생 시절 백국마족 또한 같은 전략을 사용했었다. 이 유물의 정체는 알 수 없다. 백국마족의 봉기 당시 페르난데스는 카라드스카르의 군세와 전혀 상관없는 지역에서 활동했던 탓이다.

그러나 풍문으로 들은 바는 있었다. 카라드스카르의 군단이 진군할 때에 마법 전력이 봉인된다고. 오직 육상 병력에만 모든 전투력을 치중한 백국마족의 군단이 문명 사회를 짓밟을 수 있었던 이유다.

페르난데스는 페이자쉬의 말에 픽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마력이 몇 차례, 의도하지 않은 매듭을 얽어 내며 저 스스로 부스러진다. 그러나 점점 더, 시도하는 횟수가 많아질 때마다 마력의 매듭이 점차 정교해져 간다.

-화르륵!

몇 번쯤 시도했을까. 곧 페르난데스의 머리 뒤에서 검은 헤일로가 타오르며, 손끝에서 불똥이 타닥였다. 성공했다. 페르난데스는 가벼운 마음으로 말머리를 돌려 이끌며 미소 지었다.

지맥이 뒤틀려 마력의 매듭을 왜곡한다고? 설명은 복잡해도 논리 자체는 마력 쐐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마력 쐐기는 마법전의 영역에 있으며—

그는 마법전에서 단 한 차례도 패배한 적 없었다.

* * *

“아, 왔는가?”

술탄은 뜻 모를 웃음을 짓고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나갈 때까지만 해도 연회가 한창이던 이 야전 막사에는, 음산하고 끈적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대신과 장수들은 하나같이 안색을 굳히고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들 사이를 걸어 술탄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래. 사절이 돌아왔지.”

술탄은 픽 웃으며 잔을 옆으로 늘어트렸다. 곧장, 시종이 다가와 그의 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몸을 거의 아작 내어 놓고 말에 끌려 왔더군. 간신히 내 앞까지 와서 죽었어.”

“사절이 가져온 소식이 있었습니까?”

“아니. 녀석은 입을 열기 전에 죽었다.”

술탄은 빙긋 웃었다. 살아서 카라드스카르를 만나고 돌아온 유일한 사람이 죽었으며, 여전히 적군의 동향은 오리무중이었음에도, 그는 아무런 내색 없이 술을 마셨다.

그리고 페르난데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술탄이 건네는 잔을 받아 마시며 그를 따라 웃었다.

“계획대로 되어 가는군요.”

“그래. 네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지.”

사절은 굳이 정보를 가져올 필요가 없다. 아니, 살아 돌아올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죽어야 했다.

페르난데스가 술탄에게 건넨 작전은 사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으므로.

“네 작전에 죽은 그 녀석은 내가 아끼는 병사였다. 내 호위 무관들 중에서도 심지가 굳고 담대하던 녀석이었지. 필요한 일이었지만, 녀석을 위해 한잔하지.”

“예.”

술탄은 포도주를 들이켜고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전술은 제국의 방식이 아니다. 보다 과격하고, 잔혹한 방식이다.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성과를 얻어내겠다는 전술적 논리가 아니었다.

전술의 기본은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시키거나 위협 요인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적에게 더 큰 피해를 줄 기회를 소모한다 하더라도.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항상 적에게 가해질 영향력만을 고려했다. 그의 전술적 판단은 아군의 희생을 강제한다. 적의 피해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아군의 희생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그건, 필요하다면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희생 자체를 필수 요인으로 보는 시각이다.

“놈이 네 생각대로 움직일 것 같나?”

“그래야 할 겁니다. 카라드스카르의 치세는 오래지 않았고, 놈의 부하들은 공포에 밀려 놈을 섬기고 있으니. 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이 가져올 권위입니다. 놈과 놈의 부족들을 도발했으니, 놈은 제 권위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에 응할 겁니다.”

사절을 보내 백국마족의 장수들 한가운데에서 놈들 모두를 도발했다. 카라드스카르는 반드시 이 도발에 응하여 적들을 압살해야만 했다. 그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이제, 카라드스카르의 병력들은 다른 전략적 목적을 뒤로 미루고 곧장 술탄의 본대에 달려들 것이었다.

놈들의 위치가 파악되었다 하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제 키르자트는 전장을 고를 수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지도의 한 구획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술탄도 같은 구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호르 요새.

백국마족의 마적들이 준동했던 지난 세월 동안, 놈들이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범했던 한계선이었으며 사절이 놈들을 도발하기 위해 언급했던 지역이다.

카라드스카르는 반드시 이곳을 점령하고 싶을 것이었으므로.

‘그렇게 해 드려야지.’

놈에게 선물을 남겨 주어야겠군. 페르난데스는 술탄과 마주 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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