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 꼭두각시들의 전쟁 (6)
평지에 비해서, 숲의 밤은 더 빠르고 길게 찾아온다.
세이리는 아무 말 없이 앞서 걷는 다리안을 뒤따르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황제의 타락 이전, 그는 가장 촉망받는 성당 기사 중 하나였다.
말 그대로, 신이 직접 축조하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태양의 의로움을 가슴에 품은 젊은 청년이었다.
정오의 태양처럼 유쾌하고 따듯하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를 처음 만나던 날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황실 심처에 위치한 ‘황제의 눈’들의 연병장에서, 그는 즐겁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었다.
“반갑군! 좋은 오후야! 나는 다리안 쉬라이크라고 하네!”
“세이리 드 아리안느입니다. 그쪽이 새로 오신 그 ‘성당 기사’ 나리인가요?”
“이젠 아니지! 같은 ‘황제의 눈’끼리 잘해 보자고!”
다리안은 하하,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그의 웃음이 신기하기만 했다.
황제의 눈이 무얼 하는 집단인지 모르는 것은 아닐 텐데. 교회 출신 인사가 이런 자리를 달가워할 리가 없지 않은가.
황제의 눈은 암살자들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황제의 정예 호위 무관들이었지만, 실상 그들의 임무는 대부분 아이언사이드의 첩보를 바탕으로 펼치는 암살 작전에 치중되어 있었다.
선제후 시스템으로 황실의 권위는 결코 공고하지 않다. 선제후들은 권력이 만들어낸 야수들이며, 그들 각자의 영지 안에서 그들은 왕의 직위를 갖고 있었다.
제국이 하나의 나라라는 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선’이 필요했다. 귀족적인 도리라 불릴 만한 선이.
각 제후들을 견제하고 적절히 다스리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규범. 그것이 황제의 눈이었다.
어떤 제후가 반란을 도모한다면? 제국법상,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제후를 억제할 규범이 없다. 각 제후들은 군비 확장에 개입하는 것을 내정 간섭이라 생각할 터였으므로.
심지어, 전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명분에 따라 반군은 얼마든지 ‘치안유지군’으로 둔갑할 수 있었다. 귀족 사회는 언제나 그런 곳이었다.
그런 야수굴에 존재하는 황제의 목줄은 정보력과 암살이었다. 아이언사이드와 황제의 눈. 어떤 제후가 반란을 준비한다면, 황제의 눈은 그 제후를 찾아간다.
결코 제후를 직접 죽이진 않을 것이다. 권력의 공백엔 더 큰 혼란만 찾아올 테니.
그 대신, 황제의 눈은 군사력 증강과 관련된 다른 이들을 죽인다. 최소한의 칼질으로, 최소한의 피해로. 제국의 기틀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의로운 일이든, 그들의 행동이 결국 암살에 불과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성당 기사가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언젠간. 이에 대해 다리안에게 물어봤을 때에, 다리안은 웃으며 말했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 말인가?”
“대장은 그대로 교회에 남아 계셨어도 기사단장 정도는 쉽게 하셨을 텐데요.”
“맞아! 이건 비밀인데, 광명순교회의 기사단장 어르신이 내게 다음 기사단장을 맡으라 말했던 적이 있었지.”
“한데 대장은 왜 굳이……?”
“교회는 황실과 교분을 트고 싶었고, 황실은 내 무력을 탐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리안은 구김살 없이 웃었다. 세이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아마도, 장밋빛 미래가 있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성당 기사로서 지나갈 수 있는 가장 밝은 길이.
그 모든 명예와 지위를 내려놓고 황제의 암살자가 되어야 했던 이유는, 그가 몸담은 교회가 그것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최측근이라 할 만한 곳에 자신의 신도를 심어 두고자 했던 탓이다.
그 시점, 50년 전쟁의 장기화로 황실의 권위는 점점 추락하고 있었다.
황제는 강력한 무력을 필요로 했으며, 교회는 황실의 권위가 역사상 최저점을 이룩한 이 시점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정 아래에서, 한 사람의 명예는 너무나 가볍다. 한 사람의 삶은 너무 쉽게 부정되고 만다.
다리안은 그런 상황 속에 있었고, 세이리가 보기에 그의 웃음이 이토록 맑은 것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왜 웃죠?”
“웃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나?”
“예?”
“우중충하게 무게 잡고 있으면 퍽퍽한 삶이 한결 나아지던가? 이봐 세이리. 내 경험상, 대부분의 문제는 고민한다고 해결되지 않아. 그저…… 그날 그 일에 최선을 다해 봐야지.”
“샤일드의 사제다운 말이네요.”
태양이 먹구름 뒤에 숨었다 한들, 비가 내리고 어둡게 그늘진다 한들 그 위에 햇살이 없겠는가. 바람이 불면 언제고 구름은 걷힐 것이며, 햇볕은 반드시 다시 떠오르기 마련이다.
샤일드의 신도들이 고난 앞에서 하는 기도들은 대개 그런 기조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샤일드 교회의 성당 기사였던 다리안 또한 그랬다.
“대체 어쩌다가…….”
상념에서 벗어난 세이리는 아무 말 없이 앞서 걷는 다리안의 등을 바라보았다.
숲의 그림자 탓일까. 그의 등 뒤에 내려앉은 그늘은 그의 덩치보다 더 거대해 보였다.
마치 산자락이 그의 어깨 위에 얹혀 있는 것만 같았다.
-달그락.
그때, 세이리는 산로 한 귀퉁이에 불쑥 튀어나와 있는 나뭇조각을 건드렸다.
작은 관목이나 가지 따위가 아니었다. 무언가 깎아 만든 것 같은, 엉성한 조각이었다.
각목인가? 말뚝? 왜 이게 이런 곳에…….
“이건……?”
세이리는 문득 발을 멈추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건 무덤이었다. 작은 봉분 위에 나무 각목을 하나 깎아 꽂아 만든, 초라한 묘비였다. 삐뚠 글자가 그 위에 박혀 있었다.
“아르민……?”
“아르민. 7세. 유언은 ‘살려주세요.’”
다리안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세이리는 그의 등 뒤를 따라 걸으며 주위를 살폈다.
어둠 속에서 명백히 자연물이 아닌 것들이 보였다. 점점 더 많이, 더 빼곡하게.
어느새, 좁은 산길의 양옆은 온통 무덤으로 가득해져 갔다. 어떤 것은 아주 작았고, 어떤 것은 큼직했지만. 모두 작은 말뚝으로 묘비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다리안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안셀. 15세. 유언은 ‘주여, 너무 뜨거워요.’”
“멜리아 12세. 유언은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피터 28세. 유언은 ‘이 아이들 대신 저를.’”
“대장……?”
“모두. 전쟁 난민들이었다.”
다리안의 목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낡은 병기고 속에 오랫동안 잠들었던 강철처럼. 차갑고 묵직하며 녹이 얹은 목소리였다.
“난민들. 아비와 어미를 잃고 마을이 불타 방황하던 고아들과, 병들고 지친 약자들. 나는…….”
다리안이 멈춰 섰다. 어느새 그들은 묘지 한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오두막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오두막 앞에 서서 뒤를 돌았다.
“내게 ‘눈’이 뜨인 이후, 나는 가장 먼저 그들을 모았지. 십자군에 항거할 수 없었던, 그러나 지독하게 운이 좋아 살아남은 아이들을 모았었다. 난민들을 모으고 그들이 시대의 광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여긴…… 피난민촌이었군요.”
“그런 마을 중 하나였지.”
세이리의 눈에 그제야 주위가 확연히 들어왔다. 조명 하나 없이 어두운 탓에, 자칫 이곳은 숲 한복판에 생긴 공터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공터의 경계면엔 어설프게나마 짐승의 침입을 쫓으려 시도한 흔적들이 있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이 공터의 경계가, 아니 이 공터 전체가 멀지 않은 과거에 완전히 소각되었던 탓이다.
흔적들은 검은 잿가루 아래에 묻혀 있었고, 잿더미는 숲이 만들어낸 이끼와 잡초 아래에 깔려 있었다.
“왜 이들이 죽어야 했는지 알아?”
“…….”
“이들이 ‘도망자’들이었기 때문이지. 이들이 운이 좋았기 때문에. 악마의 하수인이 아니라면 화형대에서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고, 악마의 소행이 아니라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제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건…….”
“세이리. 정말 그런가?”
세이리는 다리안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정말, 오직 악마만이 이들에게 살아날 길을 줄 수 있었나. 신은, 그토록 자비롭고 영광된 우리의 하나님은 왜 이들을 살리지 못했지? 이들이 정말 타락했기 때문에? 이 어린아이들이 악마의 꾐에 빠져 어둠에 물들었기 때문에?”
그는 지팡이 끝으로 작은 묘지 옆에 쌓인 흙먼지를 뒤적였다. 그 아래에서 반쯤 타들어 간 성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아이는 마을이 불타던 순간에도 샤일드의 성상을 품에 안고 있었어. 이 아이들의 출신지가 ‘타락의 정황이 강력히 의심되는 장소’였다는 이유가, 이 아이들의 사인이었지.”
“대장…….”
“나는…… 늦었다. 세이리. 너무 늦었어.”
무엇이? 그렇게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다리안이 멀쩡히 그 장소에 있었다면 아마 이 아이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고작 피난민촌을 급습한 소수의 사제와 성기사들로는, 산속에서 날뛰는 다리안을 결코 막아낼 수 없다.
다리안은 오랜 시간 황제의 눈으로 복무하며, 그 누구보다 기습과 사보타주에 익숙한 인물이 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또 다른 의미로. 늦었다는 말은.
“그러니, 너는 떠나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 너는 떠나 황실로 돌아가라. 다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등을 돌렸다.
검은 어둠이, 깊은 그림자가 그의 등 뒤에 어려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찬란했던 청년이 하루아침에, 한순간에 몰락해 비참함을 곱씹는 모습을 보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대장. 우린 모두 공범들이에요.”
“세이리.”
“그럴 거라면, 우리가 먼저 행동했어야지요. 대의와 희생을 논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먼저 행동했어야죠. 우리는 겁쟁이들이었어요. 명령이라는 변명 아래에서 우리는 감정 없는 칼날처럼 굴었으니.”
“세이리…….”
“하지만, 우리에게 심장이 없던가요? 우리가 사람을 죽일 때, 우리는 그저 칼날의 무게만을 느꼈던가요? 우리가 그저 쓰임 좋은 도구에 불과했었나요? 대장. 어쩌다 그렇게 되셨나요?”
그녀는 울먹이며 다리안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이 다리안의 뺨을 감쌌다.
“대장이 절 살린 것이 제 기억으로는 정확히 열세 번이었어요.”
“열두 번이다.”
“한 번은 방금 전, 이단심문관들의 손에서. 그러니까 열세 번이죠. 그리고 그걸 다 세고 있었나요? 쪼잔하기는!”
세이리는 애써 쿡쿡 웃으며 농담을 했다. 다리안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대장에게 기회를 줄게요. 그만큼. 열세 번 안에 저를 설득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거예요. 그다음엔…… 우리 같이 세상을 설득해 나가요.”
“나는 교회를 용서할 수 없어.”
“용서 말고 합의는 가능할 거예요.”
“교회도 나를 용서할 리가 없고.”
“누구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죠.”
“희망이 없는 길에 투신해 너까지 고난을 함께할 필요는 없어.”
“‘황제의 눈’에게 고난이란 말을 쓰다니 너무 섭섭하네요. 지금까지 저랑 대장이 이겨낸 사지가 몇 개쯤 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세이리는 울먹이면서도 꿋꿋하게 밝은 목소리를 유지했다. 그가 자신의 눈물을 보지 못하기를 바라며.
그 순간, 다리안은 안색을 굳히며 그녀를 등 뒤로 자리를 옮겼다.
“대장?”
“이단심문관들이 혼자 찾아온 것은 아니었군.”
“그게 무슨……?”
“나와라. 어느 교회에서 왔느냐?”
다리안은 숲속의 어둠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때, 파공성과 함께 무언가가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다리안은 지팡이를 휘둘러 날아든 물체를 공중에서 쳐냈다.
쿼렐. 석궁의 짧은 화살촉이다. 지팡이 한가운데에 박힌 물건을 잠시 바라보고는, 다리안은 으득, 하고 이를 깨물었다.
“페이른 로얄 헌팅 스쿨?”
“의 교수직을 맡고 있는, 카를로마노 파빌로스라 하오. 쉬라이크 경. 교회 출신은 아니나, 교회의 의뢰를 받기는 했지.”
“그래. 이단심문청이…… 페이른 왕국 내부에 있었지.”
숲의 그림자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향해서, 다리안은 천천히 몸을 도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