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꼭두각시들의 전쟁 (7)
“자리를 지켜라! 자리를 지켜!!”
나팔 소리가 두 번 울리자, 백부장들은 병사들에게 고함치며 군영 속을 돌아다녔다.
페르난데스는 평원 너머에 일렁이는 모래 먼지들을 보며 생각했다. 도착했군.
“물러서지 마라!!”
군사들의 사기가 드높았다. 사실, 패배를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키르자트와 대적할 수 있는 국가는 문명 사회에서 오직 레바인테르 하나뿐이었으며, 레바인테르의 최근 부침으로 키르자트는 명실상부 대륙 최강을 논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고작 마적들이라니. 병사들이 자신만만해할 만하기도 하다.
페르난데스는 높은 언덕에서 군중을 내려보며 생각했다. 어리석다.
마법 전력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었고, 전장은 적들이 가장 선호하는 야전이었다.
적의 병력은 지금 이 평야에 결집한 키르자트 전군에 밀리지 않으며, 심지어 저들은 거의 전원이 기병들이다.
평원에서, 적절한 마법 지원이 없다는 가정하에 기병은 전장의 신이다.
단 한 번에 이 거대한 군영이 돌파당하지는 않을 테지만, 적지 않은 피해를 강요받아야 하리라.
-부우우우우--!!
나팔이 길게 울었다. 이윽고, 땅 울림이 시작되었다. 첩보에 따르자면 이 평원으로 향한 군세는 카라드스카르의 장수 중 하나가 이끄는 오만여 명의 기병들이라 했다.
말도 안 되는 숫자다. 오만 명의 병력을 결집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그 오만 명 전원이 기병이라는 소리는 농담처럼 들린다. 현대 전술 교범 대부분을 무시하는 병과 편성이며, 엄청난 자원 손실을 야기하는 편제였다.
하지만 저들은 유목민이다. 말은 저들에게 있어 일상적인 가축과 같고, 개개인의 능력들이 들쭉날쭉할 수는 있어도 적어도 문명 사회의 기병들에 밀리지 않는다.
그리고 말은, 가장 미숙한 기병이 창을 쥐고 아무렇게나 달려들어 박아도 사람을 조각낼 수 있는 맹수다.
-예케 테타이 울루스!!
-예케— 테타이이이! 울루스!!
대 테타이 제국이라. 페르난데스는 높은 구릉지 위에서 달려드는 기마들의 군세를 보며 고소를 머금었다.
단 한 번도 국가를 이룬 적 없는 유목민들이 제국을 운운하며 달려드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저들의 심리 근간에는 열등감이 가득하다.
문명 국가를 증오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누구보다 문명 국가들의 세련된 건축물과 재물들을 선호한다.
저들은 탐욕스럽고, 열등감에 시달리며, 항상 분노해 날뛰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러므로 더욱 두렵다. 그 원초적인 갈망이 두렵다. 저 맹목성이, 저 흉포함이. 이젠 문명 사회의 병사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야성이 두렵다.
저들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키르자트의 병사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모두 죽고 말 테니까.
-예케 테타이 울루스!! (대 테타이 제국이여)
-으뤼야!! (진군하라!)
-으뤼야! 으뤼야! 르뤼웨인가르야!!! (진군하라, 매들아!)
-부우우우!!
수만 명의 병력이 동시에 같은 단어를 외치는 광경은 압도적이기까지 하다.
기병들의 돌격 방진은 느슨했고, 오만여 명이 느슨한 대열을 유지하며 돌격하는 광경은 저들의 수를 두 배는 더 크게 보이도록 한다.
실제로, 키르자트 진영의 병사들 사이에선 넋 나간 목소리가 흔히 들렸다.
“오만 명이라며……?”
“오만……? 저게……?”
이는 첫 번째 패착이다. 기병 돌격을 방비하기 위해 밀집 대형을 고집한 결과, 병사들은 자신의 군세를 과소평가하고, 적들의 숫자를 과대평가하게 된다.
이런 경향은 전열에서 더욱 도드라졌다. 아군의 존재감이 뒤에서 희미하게 느껴지고, 바로 옆의 병사들은 공포와 흥분에 전 땀내를 풍기며, 정면의 적들은 흙먼지를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가득 일으키며 돌격하는 상황은.
“궁병대!! 사격!!”
“궁병대! 사격!!!”
전열에 고함이 난무한다. 적들과의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졌다는 판단이다. 정확한 지시라 할 만했다. 적들이 모조리 기마병이 아니었다 한다면.
일반적으로, 마법의 지원을 받지 않는 장궁의 사거리는 300m를 넘기지 못한다. 그리고 기병대의 전속 돌격은 300여 미터 바깥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단순한 숫자 나열은, 실제 전장에서 더 비극적인 결과로 표현된다.
-두두두두두두!!!
화살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키르자트 장궁병들은 숙련된 병사들이었으며, 순식간에 허공을 시커멓게 물들일 정도로 연사를 시작했다.
카라드스카르의 기병들은 방패를 들어 올렸다. 첫 돌격에 참가한 병력 중 3할가량은 화살 세례 속에 허물어졌다.
갑주를 잘 차려입은 병사들은 몰라도, 말들은 피격 면적이 너무 넓었다.
하지만, 300여 미터. 전력으로 질주하는 말이라면 단 20초.
다시 말해. 키르자트에게 주어진 선제 공격의 시간은 20초뿐이었다. 그사이 쓰러진 기병들은 오백여 명이 넘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단순한 산수였다. 지금 쓰러진 자들의 백 배를 쓰러트려야,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
-두두두두두두!!!
방진 곳곳에서 충격이 잇따르고 있었다. 기병의 첫 돌격에 전열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장창을 바싹 세우고, 말뚝을 박아 넣었던 지형을 제외하고서. 거의 모든 방진들에.
“막아!! 막아아아!!!”
백부장 하나가 고함치며 뛰어다니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머리엔 팔뚝만 한 투창이 박혀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주위의 병사들은 순식간에 패닉에 빠져들었다.
온 사방에서 흙먼지가 일어났고, 먼지 속에서 기마가 튀어나오면 그 자리의 사람들이 육편으로 다져졌다.
창대를 들어 올리고, 방패를 밀어붙이고, 말뚝 뒤에 몸을 숨기는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상대를 너무 얕봤어.”
-예상보다 빨리 무너지겠군.
“뭐, 피해를 감수할 필요가 있으니까.”
키르자트는 밀집 방진을 택했다. 일반적인 기병들을 상대하기에 가장 적합한 방진이다.
각 방진과 방진의 거리를 벌리고, 최초에 돌출한 궁병대의 사격이 끝나면 보병을 전진시켜 적의 돌격을 막아내는 방식이다.
세련되었다고는 할 수 없어도 전형적인 야전 전술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방진에 돌격하는 기병들의 속력이 상상 이상이었다는 점과, 평원의 기병들은 보병 방진의 얇은 틈을 비집고 돌격하는 기예에 가까운 기마술을 지녔다는 점이 패착이 되었다.
실제로, 지금 카라드스카르의 병력은 나무뿌리처럼 갈래갈래 찢어져 돌격했다. 유려하게 움직이고, 부드럽게 회전하는 모양새가 놀라울 정도로 완숙하다.
저들은 말뚝과 장창병들을 우회하며 틈새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기마의 돌격력은 무게 자체로 의미를 가지므로. 말의 가슴과 발굽에 치인 병사들은 곤죽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방패애애애!! 들어어어엇!!”
“활, 활을 들었다!!!”
저들은 복합 기병이라는 점이다. 가벼운 무장에 간과했겠지. 저들은 기본적으로 유목민이자, 사냥꾼들이었다. 기마 궁술은 저들의 민속 무예에 가깝다.
-피이잉!!
지근거리에서 화살을 쏘아내고, 장창을 우회해서 피해를 누적시키는 전술. 스웜.
-두두두두두두!!!
혼란에 휩싸여 대열이 흐트러진 곳을 향해, 기병창을 곧게 들고 달려들어 충격하는 전술. 차징.
“싸워! 물러서지 마라!!”
“술탄께서 지켜보고 계신드아아아아!!”
두어 차례의 차징 이후에, 완전히 무너진 전열을 으깨며 시작되는 난전. 날뛰는 말과 그 위에서 완벽하게 자세를 컨트롤할 수 있는 무사의 조합은 보병의 악몽이 된다.
“기병전을 포기한 것은 좋았지만, 궁병의 숫자가 너무 과했어. 피해를 최소화시키며 이길 작정이었겠지. 지금까진 통했을 거고.”
-기마 전체에 축복이 걸려 있어.
“별것 아닌 잡기술이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효과적이지.
페이자쉬의 말에,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만 필의 기마에 모두 강력한 축복이나 주문을 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럴 능력이 있는 마법사도 없을 테고, 이 지역에선 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으니까.
그러므로, 기마에 걸어둔 주문은 아주 단순한 것들이었다. 저들은 말이 공포를 잊게 만들었다.
특수하게 조제한 약과 간단한 사술로 걸 수 있는 단순한 최면 기법이었다.
그리고 두려움 없는 말과 뛰어난 기수가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전장 위에서 장송곡을 자아낸다.
장창도, 불도, 말뚝도 두려워 않는 말과, 그 모든 것들을 회피 기동하며 같이 질주하는 아군의 대열에 혼란을 주지 않을 정도로 숙련된 기수들의 합작이다.
애당초 키르자트는 기병전을 상정하지 않았다. 중갑 기병대는 저들의 마속을 따라잡을 수 없고, 경기병대가 저 틈 안에 들어가면 잘려 나갈 뿐이니.
그러므로, 키르자트의 대기병 전략은 견고한 보병 방진을 이용하여 피해를 확산시키는 방식이었다. 일종의, 사람으로 쌓아 올린 요새를 만든 셈이다.
“전멸하겠군.”
-너무 빠른데.
“그러니까. 우리도 한 수 보여드려야지.”
-삐이이이익!!
창공 위로 매가 날아오르며 활개 치는 소리가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르른 하늘 위에 박힌 작은 점. 그의 시력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매가 물고 있는 작은 꽃송이까지.
하늘 위에 떠 있는 매는, 푸른색 꽃을 물고 있었다.
그리고 전장에서, 푸른색은 언제나 아군을 상징하는 색이다.
저 먼 북부에서도. 그리고 이곳, 대륙에서도.
“와라, 키르하스.”
* * *
“다미딘이 죽었다고……?”
아마르는 눈을 크게 뜨며 전령의 말을 들었다. 전령은 고개를 깊게 숙이고는 몸을 덜덜 떨며 말을 이어 나갔다.
“승…… 승전이었습니다. 도시 것들의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카간께서 물어보시는 것에 대답해야지.”
전령의 목 위에 두꺼운 손이 얹어졌다. 몸집이 거의 오우거만큼 거대한 사내가 그의 뒷목에 손을 얹고는 조용히 그르렁거렸다. 전령은 거의 흐느끼다시피 외쳤다.
“네, 네! 카간! 위대한 초원의 매여! 다미딘 님께서 전사하셨습니다!”
“어째서지? 녀석은 제법 쓸 만한 놈이었는데.”
아마르는 턱을 쓰다듬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승전은 당연한 결과였다.
애초에 보고받기로, 야전으로 끌려 나온 병력은 근처 도시들이 급파한 선봉들이었을 뿐이며, 놈들의 전력은 지금 라호트 요새로 집결하고 있었다.
즉, 다미딘이 마주한 적군은 그저 시간 벌이용 소모품들에 불과했다는 뜻이었다. 라호트 요새에 술탄의 전력이 충분히 모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그런데, 고작 그런 전투에서 지휘관이 사망했다? 물론 놈이 제 혈기에 못 이겨 칼을 들고 뛰어나갔을 수도 있다. 오히려 그렇게 하기를 장려했으니까.
제아무리 소모품들이라 하더라도, 결국 군단의 사기를 올리고 떨어트리는 모든 것들은 과정이 중요하다.
얼마나 압도적으로, 또 얼마나 잔악하게 적들을 섬멸하는가. 그것이 사기를 가름하는 열쇠였다.
그러므로, 다미딘은 어느 정도 전장이 안정화된 이후에 직접 칼을 빼어 들고 진군했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다미딘의 죽음을 이해시키는 이유는 아니었다.
다미딘은, 그리고 그의 장수들은 이미 ‘그것’의 축복을 깊게 받아들였다. 적어도 이 땅 위에선 적수 없을 전사들이란 뜻이다.
어설프게 찌른 창칼은 오히려 장수들의 피부 가죽조차 찢을 수 없었을 터.
“설명해라. 전령. 카간께서 네 대답을 기다리신다.”
“예, 예!! 서쪽에서 적병이 나타났습니다!!”
“……적병이라?”
“예, 카간! 한 무리의 기병대가 나타나 돌연 들이닥치더니, 그대로 다미딘 님과 그 부관들에게 달려들고는, 수급을 취한 이후에 곧장 달아났습니다!”
전령의 말에 게르 안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기책에 걸리거나, 적군에 뛰어난 전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기병전에서 패배해서 지휘관이란 놈이 죽었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키르자트의 기병들은 이미 수차례 부딪친 적이 있었다.
키르자트가 가진 가장 성가신 놈들은 마법사와 끈질긴 보병들뿐이지, 기병 자체는 별 볼 일 없는 것들이 아니던가?
“말 위에서 패배했다는 소리냐? 다미딘이?”
“예……!!”
“그 일을 해낸 놈이 대체 누구냐.”
“정확히는 저희도 미처…….”
-턱.
전령은 그 순간 자신의 목을 가볍게 주무르는 거대한 손아귀의 억센 힘에 움찔 떨며 황급히 말을 이었다.
“수인! 수인 놈들이었습니다! 수인족 놈들이었습니다!!”
“바야르, 지금 황야 방면으로 누가 가 있지?”
“출룬이 출정했습니다. 카간.”
“젠발밧은?”
“출정 대기 중입니다.”
“녀석에게 출룬을 지원하라 말해. 대황야를 짓밟아 놓고, 제국으로 향하는 길목을 터놓으라 전해라. 키르자트 방면이 정리되는 대로 제국을 칠 것이니.”
“예, 카간!”
바야르는 고개를 깊게 숙이고는, 아직까지 엎드려 있던 전령의 뒷목을 질질 끌어 게르 밖으로 빠져나갔다.
곧,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다각, 다각, 다각.
전장에서 멀지 않은 숲속. 페르난데스는 말 위에 서서, 다가오는 발굽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평원에서의 전투는 처참한 패전을 기록했다. 하지만 유의미한 패전을. 만일 그대로 패배했다면 키르자트의 병력들은 결코 카라드스카르의 군세를 지연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휘부가 박살 난 카라드스카르의 군세는 잠시 평원에 머물러야 했다.
곧, 우거진 관목 사이로 한 필의 기마가 다가왔다.
“고생 많았다.”
“뭘요! 선물도 들고 왔는데!”
“목은 왜…… 술탄에게 가져다줄 생각이냐?”
“아니요! 녀석들을 도발할 때 써야지요!”
키르하스는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평소의 싹싹하고 애교 많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건, 대황야의 수호자이자 사냥 신의 전령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녀는 피 묻은 보자기에 둘둘 말아 놓은 수급을 흔들며 페르난데스에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