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12화 (313/388)

312. 꼭두각시들의 전쟁 (9)

술탄과의 담소는 예상보다 길게 늘어졌다. 페르난데스는 긴 대화를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으나, 지금 당장 작전을 수립하고 향후 대책을 논의하는 것 외엔 달리 할 일이 없었던 탓에, 그는 술탄의 호기심에 어울려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면, 자네 취향이란 것이 우유 온도를 잘 맞추는 정숙한 여인이란 뜻이군?”

“그게 그렇게까지 간추려 말하면 그럴 수도 있군요.”

“아니, 그 말이 맞아. 그건 중요한 사안이지. 하하!”

알 하쉬르는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박장대소했다. 어느새 그는 술병을 들고 병째로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래서 셋 중 누군가?”

“셋……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대동하는 그 이국의 미녀들 말일세. 각기 다른 출신에 다른 외모라니. 아주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부인들이 아닌가.”

그 말에도 페르난데스는 섣불리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셋 중 누구지?

아벨은 가장 그의 상황과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보듬어 주는 여인이다.

키르하스는 이 시대에 그와 가장 오래 함께했으며 그에게 가장 진심으로 충성하는, 심지어 그의 아이를 가진 여인이다.

프레이야? 논외였다. 그녀는 지금 반절 이상 친구에 가까웠다. 아마 그녀도 그 자신에게 무언가 이성적인 호감을 가지진 않았을 터였다. 그냥 재밌어서 함께한다는 느낌.

그런데 방금까지 술탄과 나눈 대화는…… 아리아에 대한 것이었다.

“셋 모두 아닙니다.”

“무엇이……?!”

“제 첫…… 안사람은 저 셋이 아닙니다.”

-그냥 니가 술탄 해라.

페이자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키르자트의 술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후궁들을 모아 둔 하렘궁이다. 대륙 동부권의 문명 국가들과는 달리, 서부권 계열 국가들은 이성 관계에 개방적이었으니까.

술탄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신의 첩실을 모아둔 비밀스러운 궁궐을 짓곤 한다. 그것을 외부에서 부르기를 하렘 이 후마윤. 이를 동부권 단어로 풀어 설명하자면 ‘술탄 외의 남성이 금지된 구역’이다.

페이자쉬의 말처럼, 키르자트의 사람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난잡한 관계다. 술탄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자네 부모님이 혹시 키르자트 사람이셨는가?”

“아마 아닐 겁니다.”

“생긴 건 일단 완벽하리만큼 동부인인데…… 으음.”

-빨리 그 말도 해 봐. 사실 너 사제라고.

‘닥쳐.’

-아니, 왜? 진실이잖아?

페이자쉬의 끊임없는 이죽거림을 무시하며, 페르난데스는 술탄이 하사한 술을 들이켰다. 입맛이 썼다.

“위대하신 군주, 해 지지 않는 제국의 하나뿐인 태양이시여—.”

“짧게 말하라!”

그때, 막사 휘장 너머에서 호위 무사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기나긴 호칭 묘사는 듣기만 해도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다. 업무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그로서는 더욱이.

술탄의 말에, 무사는 찔끔하더니 말을 이었다.

“세르너드 경의 가신, 키르하스가 뵙기를 청합니다!”

“오? 이거, 하하. 마침 타이밍도 좋군. 그렇지 않나, 세르너드 경?”

“……예. 술탄.”

“한번 그녀에게도 물어보도록 하세! 들라 하라!!”

곧, 휘장이 열리며 키르하스가 들어섰다. 그녀는 난생처음 마주하는, 지극히 사치스러운 야전 막사에 놀란 듯 멈칫거렸다.

대황야 출신인 그녀로서는 궁궐도 아니고, 야전 막사가 이토록 사치스럽게 꾸며질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 같았다.

-표정 관리 하시지?

‘뭐?’

페르난데스는 페이자쉬의 말에 저도 모르게 입술과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술탄이 껄껄 웃었다.

“부부 금슬이 아주 좋군! 보기에 좋아. 하하! 자, 수인 아이야. 마침 내 궁금한 것이 있었다.”

“네……? 네?”

키르하스는 갑작스러운 술탄의 말에 당황한 듯 보였다. 그녀는 꼬리를 움찔 떨며 고개를 숙였다.

“저 목석 같은 사내를 어찌 녹여 내었느냐? 비법이 있다면 나 또한 내 가신의 영애들에게 공유할 생각이니.”

“저…… 음…… 네?”

“하하하!”

‘내 표정이 뭐 어땠는데?’

-아주, 추했어. 딱 그 몸 나잇대로 보일 정도로.

스무 살에게 스무 살 같다는 말을 하면 칭찬일까? 하지만 여든 살에게 스무 살 같다는 말을 하면 이젠 더 이상 칭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칭찬을 한 것도 아닐 테고.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던 키르하스가 움찔 떨더니, 곧 더듬거리며 말했다.

“술탄, 제 수하들이 대륙 동부에서 속보를 가져왔습니다. 시일이 급한 일인 터라, 무례를 무릅쓰고 직접 찾아뵈었습니다.”

“음? 그게 무엇인가? 기탄없이 말해 보게.”

“대륙 동부가 술탄의 적과 같은 자들에게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지금 확인된 바로는 대황야 전역, 그리고 리뷔에에 이르는 넓은 전선이 이루어졌다 합니다.”

“호오, 제국이? 하하. 세르너드 경. 이건……?”

“예, 술탄. 계획대로 되어 가는군요.”

“역시 정말 놀랍군. 자네 반절만큼만 유능한 것들이 내 아래 있었다면 내 과업이 배는 쉬웠을 텐데 말이야!”

키르하스가 생각하기에 이건 특급 정보였다. 기실, 페르난데스와 독대하여 전하고 싶었지만, 술탄의 지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기에 숨길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저 둘의 반응은 예상한 모든 것들과 달랐다. 당황하거나, 놀라거나, 무관심하거나, 또는 적어도 초조해하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적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여긴 시점에, 오히려 그것이 과소평가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카라드스카르의 군세는 대륙 문명 사회의 거의 모든 접촉 면적과 다면 전쟁을 수행하고도 여력이 남을 지경이란 뜻이니까.

그런데 그 전선 중, 아마 가장 밀도 높을 이 지역의 군주가 어떻게 저토록 태연자약할 수 있단 말인가?

-턱.

그때, 연신 움찔거리며 혼란을 표현하던 키르하스의 귓가 위로 누군가의 손이 얹어졌다. 익숙한 체온과 감각. 페르난데스였다.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걱정 마, 키르하스.”

“으, 은공? 하지만, 아시잖아요? 놈들의 머릿수가…… 파악된 것만 해도 이십 만이 넘어요!”

당연한 걱정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십만 명. 그것이 전부 보병으로 편제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막대한 수였다.

백국마족의 총인구는 동부 소왕국 두어 개 정도에 그친다. 척박한 환경과 문화 탓에 점거한 지역 대비 인구가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국가에서 동원 가능한 최대 병력이 전체의 5%. 전투를 지속하고도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전투 수행이 가능한 연령을 추리고 추려 산출한 수치다.

‘뭐, 종말 직전에는 거의 모든 인원들이 전투 수행을 강요받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싸우지 않으면 멸종하리란 두려움 탓이었을 터. 일반적인 국가 간의 전쟁에선 오십만 명의 도시 하나에서 일만 명의 군사만 뽑아내어도 대단한 일이었다.

무장, 보급, 배식, 관리 등에 사용되는 비전투 군인들은 저 수치의 세 배가 필요하고, 전쟁 수행에 자본을 동원하기 위해선 도시 기능을 정지할 수 없으니 물경 열 배의 인원들은 부족한 인구만큼 산업에 동원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5%다. 그 이상으로 넘어간다면 국가의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

‘하지만 카라드스카르는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모르는 것이 아니다.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말 그대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모든 인구를 무장시켰으며, 전투를 수행할 수 없는 모든 인구를 전투 지원에 투입했다.

국가의 체제를 유지하기는커녕, 애당초 존재할 수가 없는 방식의 구성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게 만드는 단 하나가 있다면.

‘싸우는 족족 모든 곳에서 승리하고, 승리한 모든 지방의 자원을 수탈해 다음 전투 수행을 준비한다.’

그것을 위한 속도전이다. 자원의 소모 속도보다 자원의 약탈 속도를 더 높일 경우, 카라드스카르의 군단은 대륙 전역의 그 어떤 군사 강국보다 밀도 높은 군사력 투사를 보여 줄 수 있다.

“그래. 키르하스 경, 그렇게 불러도 되겠나?”

“편하신 대로 말씀하시지요. 술탄.”

“그대의 주군이 옳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으니.”

“하지만, 술탄. 제국이 전화에 휩싸이게 된다면…… 술탄께선 어떤 외적 지원 없이 홀로 적들을 마주해야 합니다!”

“내게 그럴 능력이 없어 보이나?”

“저는 단순한 무부가 아닙니다, 술탄. 저는,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대황야를 실효 지배한 모든 씨족들의 수장입니다.”

키르하스는 고개를 들었다. 페르난데스와의 군신 관계를 넘어서, 이제 그녀는 대족장으로서 동맹 국가의 수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격식을 내려놓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예, 키르자트에는 지금 다가오는 대적을 홀로 막아설 능력이 없습니다.”

“그 주군에 그 가신이로군. 하하하!”

알 하쉬르는 일견 무례해 보이는 키르하스의 모습에도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군왕과 군왕 된 자리라, 나 또한 편히 말하지. 오해하지 않길 바라마, 대황야의 키르하스. 나는 그대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셨겠지요. 샥시시들의 정보력이 그리 무디지 않았을 테니.”

“그리고, 나는 애당초. 아니…… 너의 주군과 나는 애당초, 이 순간을 노렸다.”

“……예?”

“외부의 지원을 받아 키르자트에서 모든 전쟁을 수행하라고? 그런 말에 동의하는 군왕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나? 당연히, 놈들이 들불을 지르고자 한다면 그 불길은 초원 전역에 펼쳐져야 마땅하지.”

알 하쉬르, 이 시대에 가장 강력한 문명 왕국 전쟁 군주. 그는 웃음을 잃지 않으며, 야수처럼 말했다.

“놈들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우리가 대황야 방면으로 놈들을 유도한 거였다. 대황야의 키르하스, 미안하게 되었군. 피해를 감수해야 할 테니.”

“……은공?”

“키르하스. 놈들에겐 약점이 있어.”

혼란에 휩싸인 키르하스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페르난데스는 급하지 않게 말을 이어 나갔다.

“놈들의 전투 능력은 과대평가해도 모자랄 수준이지만, 놈들의 전투 수행 인원 대부분은 허수라는 점이다.”

“……네?”

보급이 끊긴 병력은 빠른 속도로 전투 수행 능력을 상실한다. 이건 기초 상식이다.

보급선이 길어질수록 병력들이 소모하는 보급은 단위 면적의 제곱에 비례하여 상승한다. 이것 또한 상식이다.

그리고, 카라드스카르는.

약탈을 제외한 어떤 방식으로도 보급을 확보할 수 없다.

이십만 명이 넘는, 그것도 전원이 기마병인 압도적인 재앙.

하루아침에 다섯 개의 도시를 넘고 다음 날엔 그 두 배의 도시를 집어삼키는 폭풍.

놈들은 빠른 것이 아니라.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들불을 잠재우기 위해서 필요한 수를 써야지.”

“그게 네 주군과 나의 계략이었다, 키르하스. 작전명은…….”

“맞불.”

단순한 청야 전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식량을 불태우고 퇴각하는 것보다 빠르게 놈들이 짓쳐들 테니.

먼저, 놈들의 병력을 분산시킨다. 대황야로, 동부 왕국으로, 제국으로, 키르자트로.

보급선이 길어질 때마다 놈들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두 배를 넘어간다. 그러니, 놈들은 반드시 점령지에서 보급을 약탈해야 했다.

놈들의 거점은 명백히, 키르자트 외곽에서 점거한 다섯 개의 상업 도시. 그 도시와 영지 내부의 권역에서 약탈한 보급물을 지금 출정군 전원에게 분배하고 있을 것이다.

대황야 이북으로 진군한 원정군들은 아직 자체적으로 보급망을 건설할 능력이 부족하므로. 대황야는 말 그대로 풀 덮인 황무지에 가까운 지역이었고, 그 동쪽의 동부 왕국 연합과 그 북쪽의 제국의 비옥한 영토로 향하기 위해선 넘어야 하는 고비들이 있다.

대황야의 방패, 리뷔에.

뭄토의 콘클라베. 망령 군단의 라비라타.

“놈들이 대황야를 넘어 가장 먼저 간 곳이 어디라 생각해?”

“거길 넘었으면 리뷔에가 가장 가까이 있지 않나요?”

“뷜랑을 먼저 쳤을 것이다.”

“……네?”

“리뷔에는 황제의 권역이지. 지금, 결코 군사력이 적지 않은 도시야. 거기에 문제가 있다면, 군사 거점 도시로 발달했다는 점이야. 그건…….”

페르난데스의 말에, 알 하쉬르가 말을 이었다.

“자체적인 식량 생산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 그 탓에 50년 전쟁이 끝난 후 리뷔에가 그토록 빈곤해진 것이었고.”

리뷔에의 부흥, 그 뒤에는 대황야를 향한 황실의 전쟁 물자 교역이 있었다. 그것이 끊긴 이후 리뷔에는 빠른 속도로 자산을 상실했다.

지금은? 카라드스카르 이전, 대황야는 역사상 그 어떤 순간보다 안전한 지역이 되었다. 리뷔에는 여전히 가난한 지방이다. 아직 르네 필리파 황제의 제위가 반년도 채 되지 못한 지금까지는.

그리고, 라비라타는…….

“놈들은 라비라타를 점령하고 대황야로 향한 것이 아니야.”

“그럼……?”

“라비라타는 봉문했고, 놈들은 의도적으로 그녀를 우회한 것이지. 점령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해골밖에 없는, 메마른 사막의 묘굴을 굳이, 보급물자와 식량, 그리고 시간 모두가 부족한 군대가 점거하기 위해 공성전을 벌일 리가 없지 않나.”

라비라타를 무시하고, 대황야를 불태우고, 리뷔에를 스쳐 지나가면. 그 위로는…….

“뷜랑에서, 단 한 번만 버티면 된다. 키르하스. 놈들의 숨을 단 한 차례만 막아내면 돼.”

맞불. 키르자트의 라호트 요새, 외곽의 다섯 도시, 라비라타, 그리고 동부 왕국 연합의 원정군 파견까지.

전 세계 모든 문명들이 각자의 지역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불길을 마주 놓는다.

카라드스카르. 위대한 흉터. 그 위를 덮을 더 크나큰 화상으로.

이 재난은 반드시 막아 낼 수 있다. 막아 낼 것이고, 막아 내야만 한다.

‘이번 고비만 넘긴다면, 문명 사회에 가시적인 위협은 더 이상 없다.’

에리크가 죽었고, 다섯 대악마 중 둘은 격살되었으며 하나는 봉인되었다.

엘프 왕가는 하나가 되어 인류의 동맹이 되었고, 북부는 안정화된 상태.

전생의 모든 위협들이 이제 통제된 변인으로 전락한 이상, 남은 변수는 카라드스카르 하나뿐이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