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 꼭두각시들의 전쟁 (10)
지평선 끝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로베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새파랗게 빛나는 초원의 둥근 외곽을 노려보았다.
회중시계를 의미 없이 꺼내 확인하는 것이 벌써 몇 번째일까.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 이제 올 때가…….
“옵니다!”
“적이냐?”
“기마 한 필입니다. 깃발은…… 검은색! 검은 깃발을 들고 있습니다!”
“제기랄! 이리 내놔!”
로베르는 관측병의 망원경을 빼앗아 들었다. 남루한 행색, 초췌한 기병 하나가 그가 있는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화살인가? 팔뚝과 등에 가느다란 가시가 돋아나 있었다.
그럼에도, 기병은 여전히 형형한 눈빛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다. 그가 직접 보낸 정탐꾼이었다.
“의사를 불러라! 어서!”
“예, 전하!”
로베르의 말에 부관이 바쁘게 떠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탐꾼이 그의 앞까지 도착했다. 정탐꾼은 로베르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구르듯이 말 아래로 뛰어내려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전하, 신 바르됭. 임무를 완수하고 당도했나이다.”
“장하다. 장하구나!”
로베르는 단숨에 말 아래로 뛰어내려 수통을 뜯었다. 늦여름의 초원을 질주한 그의 몸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로베르는 그의 머리와 등허리에 찬물을 붓고는 말했다.
“보았느냐? 놈들을 확인했느냐?”
“예, 전하. 놈들은…… 놈들은 지금 서쪽 50마일 지역을 기준으로 북상하고 있습니다.”
“북상……? 북상이라고?”
“예, 전하.”
“제기랄!”
로베르는 땅을 박차고 일어섰다. 그는 다급하게 부관을 찾았다. 그는 의원과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이런, 뷜랑이다!”
“네?”
“놈들은 리뷔에를 무시하고 달려가고 있어! 제기랄. 황제 폐하를 내가 무슨 낯으로 봐야 할지 모르겠군. 아이언사이드의 수장이란 작자가 이런 오판을 하다니!”
로베르는 급히 기마 위에 뛰어올랐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의 부관을 향해 외쳤다.
“리뷔에는 속 빈 강정이다! 뷜랑은? 드넓은 농토를 보유한 부유한 영지고! 놈들은 리뷔에의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이다!”
백국마족의 공세를 유추하고 황실에 보고한 이후, 한발 앞서 방어군을 준비한 것까지는 완벽한 판단이었다. 실제로 백국마족의 군세가 대황야에 진입했을 때, 이미 리뷔에는 방어 병력을 완비하고 있었다.
놈들의 군단이 진군할 가장 유력한 지역이 어디인가? 정보 수급의 속도가 놈들의 진군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이 시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예측뿐이었다.
놈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정탐꾼이 정보를 전할 때 이미 놈들은 그 지역을 벗어나고 있었으므로.
‘괴물 같은 것들!’
전력으로 행군할 때, 놈들은 기마 위에서 잠을 잤다! 그런 이야기는 전쟁 역사 속에서 단 한 차례도 나타난 적 없었다. 놈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쟁사를 새로 집필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도시. 놈들의 그런 강행군이 오래 지속될 수 있을 리는 없으므로, 백국마족의 평원과 가장 인접한 도시를 지켜야 했다. 리뷔에. 50년 전쟁 당시 최전방의 대영지. 이곳을 지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다.
“뷜랑으로 진격합니까?”
“아니! 늦다!”
뷜랑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뷜랑이 함락된다면, 그다음은 팔텐노이아다. 다른 선제후들의 군대가 완비되어 집결하기 전에, 놈들의 속도를 고려한다면 곧장 수도를 향해 달려들 터였으니.
그는 회중시계를 꺼내 들어 힐끔 바라보았다.
“뷜랑과 리뷔에를 버린다. 군을 둘로 나누어 반절은 팔텐노이아를 지켜라! 선제후들의 군단이 집결할 시간을 벌어!”
“전하, 하오면 전하께서는…….”
“나는 남은 반을 이끌고 대황야로 향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최선이다. 선제후들의 군단은 다소 봉건적인 전시 징집 체제를 이루고 있으니, 그 군단이 모두 집결해 적들을 틀어막을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놈들이 대체 어떻게 알았지?’
백국마족의 병력에게 있어서 제국의 영지 사정은 미지의 것에 가깝다. 제국은 놈들과 거의 어떤 교류도 하지 않았으니. 리뷔에를 점령하는 것에 노력 대비 수율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어떻게 내렸을까. 뷜랑이 부유한 도시라는 것은 또 어찌 알았단 말인가.
아군의 정보가 노출되었다. 설령 샥시시들이라 하더라도 제국 내에서 아이언사이드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을 텐데……?
“이미 지나간 일이다.”
로베르는 각오를 다졌다. 추측을 버리고 남은 정보로만 판단을 해야 했다. 놈들은 아군의 사정을 알고 있으며, 그들은 놈들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지금 뷜랑을 향해 진군해 봐야, 놈들의 속력을 고려할 때 폐허만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가장 합리적인 행동은—
“우린 이제부터 방파제가 될 것이다.”
귀르의 항구엔 겨울철 북해의 파도가 몰아친다. 북해상에서 발생하는 겨울 폭풍은 항만 전체에 지대한 피해를 입힌다.
하지만 귀르가 그럼에도 부동항, 제국의 황금 항구라 불리는 이유는, 귀르가 보유한 방파 시설 덕분이었다. 귀르의 백작으로서, 로베르는 그 즉시 새로운 작전을 입안했다.
방파제는 파도를 완벽히 막아내는 거대한 철옹성이 아니다. 방파제는 파도의 위세를 소모시키는 암초군이었다. 암초 하나하나에 부딪칠 때마다 파도의 위력이 줄어들고, 항구에 도달할 때 파도는 잔물결에 지나지 않게 되니.
팔텐노이아로 향하는 군단은 놈들의 선봉일 뿐이다. 백국마족의 평원에서 몰려오는 수만 명의 군대는 아직 완전히 제국의 강역을 범하지 못했다.
그 길을 끊는다. 조금씩 피해를 누적시켜, 제국으로 향하는 길을 험지로, 방파제 가득한 암초군으로 바꿔야 했다. 그러므로, 대황야다. 대황야로 향하는 길에서 놈들의 군사를 줄여야 한다.
보급로를 막고, 지원 병력을 끊어내야 했다. 그러나 그건 자살 작전에 가까운 일이기도 하다. 놈들의 군세와 사정을 전혀 모르는 입장에서 벌이는 막연한 자살.
“전하, 그건……!”
“다른 방도가 있나?”
“뷜랑이 버텨 낼 수도 있습니다! 이 시기에도 뷜랑은 아군의 조력을 필요로 할 수 있습니다!”
“아니라면? 우리가 또다시 한발 늦어, 뷜랑의 폐허만을 목도한다면. 그렇다면 제국의 중심은 누가 지킬 수 있지?”
시기에 맞게 뷜랑에 도착한다면 적들은 리뷔에의 병력과 뷜랑의 병력 사이에 으깨질 수 있다. 하지만 놈들이 아군의 정보를 파악하고 있다는 정황이 있는 이상,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지대했다.
놈들이 뷜랑을 불태우고 제국 내부로 진격한다면, 그 뒤를 쫓아가는 것은 악수 중의 악수. 팔텐노이아의 방어 병력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므로.
“황제 폐하께 선제후 소집령을 내리라 전해라. 그리고 팔텐노이아 인근을 요새화시키고 장기전을 대비해! 나는 대황야에서 산발적인 교전을 준비할 것이다. 거기 너!”
“예, 전하!”
“너는 키르자트로 향해라. 세르너드 경과 하트테이커 대족장을 모셔라. 그리고 너! 너는 라비라타, 그리고 아포타자르. 두 망령 왕조와 접촉해라! 놈들의 지원을 받아내야 한다! 서둘러라! 너희의 손에 나와, 이 군단과, 그리고 제국의 명운이 달려 있으니!”
“받들겠나이다, 전하!”
부관들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로베르는 참담한 심정 속에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뒤로 리뷔에 영지 앞에 주둔 중인 거대한 군영이 드러났다.
귀르와 황실에서 파견할 수 있는 거의 전 병력.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상비 병력의 절반이 그의 명령 아래에 있었다. 이들이 여기에 있다는 건, 팔텐노이아의 주둔 병력은 최소한에 가깝다는 의미였으므로.
“내 말을 전군에 알려라. 아직 포기하지 마라!”
로베르는 어쩌면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외쳤다.
“적들의 수는 알 길 없고, 적들의 속력은 따라갈 방도 없으며, 적들의 군세는 아군을 압도하고 있다. 하지만, 포기할 텐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해 창을 놓고 한탄할 텐가!”
“그럴 수는 없다! 그대의 가족이, 그대의 주군이, 그대의 농토와 자식들이 저들의 칼날 아래 도륙되리라! 제군들! 그대들은 제국의 창이며, 꺾이지 않는 창이며, 가장 앞서 나아가는 창날이로다! 그대들 하나하나는 제국의 군병이기 전에, 제국의 자식들이니. 어버이를 지켜라!”
“제국의 천 년은 결코 안온하지 않았다!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그대들과 같은, 그대들의 어버이들이 지금의 제국을 유지했으며, 그대들의 자손 또한 그대들의 두 손으로 안전하리라! 포기하지 마라! 제국의 천 년간 이보다 큰 고난은 얼마든지 있었다! 오늘 이후의 천 년 또한 결코 평화롭지 않을 것이나—.”
“명심하라. 그 사실은, 우리의 강역이 그 이후로도 천 년을 더 나아갈 수 있으리란 찬사에 불과하다! 천 년 제국의 자식들아. 다시 한번 그 시간을 버틸 자식들아. 그건 모두 너희의 두 손에 달려 있노라! 포기하지 마라! 제국의 명운을 너희의 손으로 쌓아 올려라! 제국의 아들딸들이여!”
“샤를 대제께서는 창칼로 이 강역을 수호하셨고, 수백, 수천만의 영웅이 그 뒤를 따랐으니. 이 시대의 영웅들이여, 신성 레바인테르의 천 년을 지켜라!”
로베르의 외침은 마법사들의 손에 의해 군영 전체로 울려 퍼졌다. 전쟁을 준비하던 병사들, 병사들을 지원하던 아낙들과 두려움에 떨던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이들이 허리를 곧게 펴고, 로베르가 외치는 평원. 그 드넓은 지평선을 향해 꼿꼿이 서서. 지금, 한목소리로 외친다.
-신성 레바인테르여, 영원하라!
“황제 폐하 만세! 가라!”
그날, 리뷔에에 주둔 중인 군단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나는 북동쪽, 팔텐노이아를 향해서. 남은 반절은 대황야. 저 넓은, 적들이 산개한 초원을 향해서.
* * *
“리뷔에의 지원은 오지 않을 겁니다. 블랙팽.”
“우리만으로는 적들을 막아 낼 수 없다! 제기랄. 제국이 우리를 버렸단 말인가!”
파르탁은 탁상을 내려찍으며 외쳤다. 그러나 피엘은 여전히 정좌한 채 조용히 눈을 감고만 있었다.
“이보게, 대무녀! 대답해 보게! 우리가 이 땅을 지켜서 이길 미래가 보이느냔 말이야!”
“아뇨. 그렇지 못할 겁니다.”
“제기랄. 대황야로 돌아가야 했어. 그 땅은 넓으니, 놈들의 군세가 잦아들 때까지 숨어 있을 수는 있지 않았겠나. 제기랄. 주군께선 어찌 연락 한 번 없단 말인가!”
파르탁은 페르난데스와 꾸준히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무용지물이었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그의 마법이 번번이 실패했다.
대지 전체가 마법을 거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게 고작 며칠 전이었고, 그 며칠 사이 적들의 군세는 이미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근접하고 있었다.
그들의 예언자는 이 시기를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우리는 성을 끼고 싸우는 것에 무지한 놈들이야. 우리 병사들은 말을 타고 달리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것들이라고! 수성을 한다 한들 며칠이나 버티겠나!”
“하루도 버티지 못하겠지요.”
“……뭐?”
“하루를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래야만 하고요.”
“그게 무슨 소린가.”
지금껏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골든투스가 입을 열었다. 피엘은 그제야 눈을 뜨며 말했다.
“우리는 뷜랑을 포기할 겁니다. 장로님들.”
“대황야에 몸을 숨기겠단 뜻인가?”
“그래서야 사냥감이 될 뿐. 흩어져선 아니됩니다.”
“답답하군! 속 시원히 말을 해 보게!”
“우리는 위대한 카단. 사냥 신의 후예들입니다. 어찌 사냥꾼이 사냥감의 돌격을 정면으로 맞서려 하십니까. 신께서 예측하시길, 사냥터는 이곳이 아닙니다.”
제국 내부. 피엘은 손을 뻗어 팔텐노이아로 향하는 길목들을 짚었다.
“사냥감은 평원에서 강인하니, 산역을 끼고 놈들을 요격할 겁니다. 성벽을 잠그고, 놈들의 발을 묶고, 이 땅의 모든 식량을 불태우며 물러나야 합니다.”
놈들에게 필요한 것은 식량과 보급 물자이므로. 가져갈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불태우고 놈들이 이 근방을 수색하는 데에 시간을 소모하게 만들어야 한다.
굶주림이 시작될 때, 더 이상 참지 못한 놈들이 제국의 중심부를 향해 진군한다면.
뷜랑의 세포르 공작가가 그랬듯. 뷜랑에서 팔텐노이아로 향하는 거의 모든 지역들은 험준한 산맥에 가로막혀 있다. 그 장소가 놈들의 무덤이 되리라.
“제국의 영웅이 방파제라는 작전을 세웠군요. 그가 직접 평원에 나서 방파제로 산화하겠노라 천명했으니. 우리 또한 그에 맞춰, 우리는 제국 내부의 산역에서 방파제가 될 겁니다.”
“시간 벌이에 불과하지 않나!”
“사냥감이 지치면, 사냥꾼의 시간이니. 믿으시지요, 블랙팽 장로님.”
카라드스카르의 군세가 제국의 심장부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한 지 열흘.
리뷔에와 뷜랑. 서로 어떤 정보도 주고받지 않은 그 먼 도시에서. 출신도, 종족도 다른 두 군단은 동시에 같은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사흘 후, 적들은 뷜랑에 도착한다. 폐허뿐인 뷜랑에.
그 시기, 리뷔에의 병력은 팔텐노이아의 외곽 팔츠에 집결을 시작했고.
집결 시간을 벌기 위해, 호족 연합의 군단은 팔텐노이아로 향하는 모든 관문에 병력을 산개했으며.
대황야에서 라비라타와 아포타자르를 비롯한 저항군들이 웅거하기 시작했으니.
“반격이 머지않았습니다.”
뷜랑의 예언자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