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 꼭두각시들의 전쟁 (11)
아마르 카간의 케시크, 젠밧발은 무료한 얼굴로 끌려온 사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놈이다. 밤중에 갑작스레 튀어나와 아군의 보급 수레에 불을 놓고 도주하는 것들.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따금 이놈처럼 목숨을 걸고 깊숙한 군영까지 파고들어 불을 지르는 것들이 있다. 그런 놈들은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해 금방 끌려오곤 했다.
“……!!”
“재갈을 풀어 줘라.”
그가 알기로, 대황야는 수인들의 땅이었다. 북쪽의 큰 나라 둘이 서로 물고 뜯어 대다가 상잔하고, 그 이후로부터 이 땅의 터줏대감이던 수인들이 이 땅을 지배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잡혀온 놈들은 하나같이 맨들맨들한 인간들이었다. 동부의 인간들.
“—!!”
“이봐, 이 자식 뭐라 하는 건가?”
“제국이여, 영원하라. 이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장군.”
“하, 제기랄.”
단 한 번을 다른 말을 하는 자를 본 적이 없었다. 이걸 기개가 가상하다 해 주어야 할지, 짜증난다 해 주어야 할지.
젠밧발은 미간을 감싸 쥐며 한숨을 쉬었다. 이 짓거리를 하는 놈들 중 성공하는 자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매일 밤마다 불을 지르러 뛰어 들어와 죽어 버리니 경계를 소홀히 할 수도 없고, 그 탓에 진군 속도에 차질이 생긴다.
거기에, 그가 이끄는 군사들은 지금 북부로 향하는 지류 중 하나에 불과했다. 만일 북부로 향하는 길목 모두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면, 그땐 귀찮은 것을 넘어 끔찍한 일이었다.
“고문을 할까요?”
“아니, 놔둬라. 지금까지 고문으로 입을 연 놈이 없었다.”
“하오면……?”
“이 도시 놈에게 내 말을 전해 줘라.”
그는 다각, 하고 말을 이끌어 무릎 꿇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의 바로 눈앞에 말의 발굽이 쿡 박혔다. 그 위로 젠밧발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섰다.
“이 땅이 영원하길 바라나? 네가 내일 동녘을 볼 수 없을 텐데도?”
“—!”
“이놈 말이…….”
“아니, 필요 없다. 대충 이해는 가니까.”
그는 손을 휘저어 통역병의 말을 끊었다. 어차피 하는 말이야 뻔했다. 이놈이 처음 잡힌 제국병은 아니었으니까. 자신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또 제 나라가 얼마나 강대한지 설명하고 있겠지. 들을 필요도, 가치도 없다.
“너희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
“우리가 너희를 역사로 만들어 줄 테니. 패배자의 역사로. 사람도, 도시도, 문명도 영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남길 역사는 영원한 흉터가 되어 이 땅 위에 남으리라. 축하한다. 그 시대의 일원이 된 것을.”
“—!!”
사내는 포승줄 안에서 거칠게 몸부림치며 무어라 외쳤다. 자주 들었던 단어들이다. 아마도 욕설일 것이었다. 젠밧발은 큭큭거리며 웃었다. 버러지들, 입만 산 버러지들다운 짓이다.
“너희가 우리에게 대항해 이룬 것이 있느냐?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거나, 너처럼 붙잡혀 뒤지거나. 그중 하나였지. 왜 우리 조상들이 지금껏 너희의 그 물렁한 땅덩어리를 넘어오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우리의 카간께서 너희의 죽음을 바라시니 그리되리라.”
“—!!”
“이젠 이 짓거리도 지루하군. 이놈을 바퀴에 묶어라. 기름진 놈이니, 마차가 미끄럽게 구르겠구나.”
젠밧발은 손을 휘저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고함 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울렸다. 제국민 특유의 우스운 발음이 들렸다.
그리고 곧, 그 외침은 비명으로, 그리고 다시. 신음으로 바뀌었다. 이것 또한 익숙하고, 또 지루한 일이었다.
“귀찮은 버러지들……. 야영을 준비해라!”
밤이 늦었다. 평소라면 얼마든지 달려도 좋을 체력과 상황이었지만, 최근 빈번한 이런 야습 탓에 야간 행군이 꺼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문제될 것은 없다. 그보다 앞서 간 케시크는 카간의 대전사 출룬이었다. 그가 고작 이런 전투에서 패배할 것이라곤 생각조차 되지 않았으므로, 다소간의 지체는 얼마든지 허용 범위 안에 있었다.
천천히 나아가더라도, 이 굼벵이들보다 세 배는 빨리 이동할 수 있다.
* * *
“……전하.”
“제국의 별이 또 하나 졌구나.”
로베르는 망원경을 접으며 한탄했다. 그는 뒤를 돌아 도열한 병력들을 보았다. 적들의 보급망이 분산되어 북상하는 탓에, 그가 직접 이끌고 있는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 이 황야 전역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하나씩, 제국의 열사들이 몸을 바쳐 적들의 진군을 훼방하고 있었다.
방파제다. 적의 피로도를 높이고, 아군에게 시간을 벌어 줄 자살 임무. 그 임무를 입안한 자로서, 로베르는 황무지 위에서 죽어 가는 모든 병사들의 목숨값에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편히 쉬기를.”
“그는 끝까지 명예로운 기사였습니다. 전하.”
“우리 모두가 그렇지. 그렇게 될 것이고.”
로베르는 귀르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온 부관을 바라보았다. 높은 충성심과 의지를 필요로 했던 작전이었으므로, 다른 지역의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이런 임무를 맡길 수는 없었다.
설령 이 작전이 끝날 때까지 로베르가 무사히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권세를 누리진 못하리라. 귀르의 군사력은 반토막 날 것이고, 하나하나 육성하기 지극히 까다로운 기사 계급은 지금 부나방처럼 적진에 쏘아져 나가 산화하고 있었으니.
“……다음 야습을 준비하라.”
“예, 전하.”
“귀르의 자식들, 제국의 아들들, 제국의 별들아. 함께 유성 되어 빛나자꾸나.”
“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황제 폐하 만세.”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전하.”
귀르의 기사들이 다시 출정을 준비했다. 모든 병력을 동시에 짓쳐들 수는 없다. 제아무리 야습이라 할지라도, 평야에서 저들과 맞서는 것은 개죽음에 불과했으니.
그러므로 그들은 소규모의 별동대만을 투입해 오직 물자 방화에만 전력을 투자했다. 모두가 가서 전멸하는 것은 개죽음이지만, 기사 하나가 저들 한 부대의 열흘 치 식량을 불태울 수 있다면 합리적인 희생이다.
전쟁의 목숨은 숫자보다 가볍다. 로베르가 짧게 손짓하자, 기병 다섯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넓게 우회하여 적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군의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다섯 명은 또다시, 그날 저들의 손 아래 고혼이 되었다.
* * *
심상치 않다. 검은 연기가 저 멀리에서도 모락모락 치솟는 것이 보일 정도이니, 성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있으리라. 출룬은 인상을 찌푸리며 지평선 끝자락에 걸쳐 보이는 도시를 마주했다.
“젠밧발이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것인가?”
“그건…… 아닐 겁니다, 장군. 카간께서 지원을 보내신다 전하셨던 것이 고작 닷새 전이었습니다.”
“그렇지. 제아무리 교전 없이 왔다 한들 닷새 만에 대황야를 가로지를 수는 없지.”
그렇다면 저 도시는 대체 왜 불타고 있단 말인가?
“내분인가?”
“놈들이 우리의 병력에 지레 겁을 먹어 자멸이라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너, 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와라.”
출룬이 짧게 턱짓하자 부관 하나가 “하!” 하고 화답하며 기마를 이끌고 나아갔다. 놈들의 성이 온전할 때야 자살행위였겠으나, 지금 저 성벽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멀쩡하진 못했다.
성뿐만이 아니었다. 지평선에 걸린 다른 마을들, 아마 마을이 있으리라 예상되는 모든 지역에서 희미하게 검은 선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백국마족의 기병들은 눈이 좋았고, 화창한 여름날에 새카만 매연은 봉화처럼 선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관이 돌아왔다.
“장군! 성이 비어 있습니다!”
“……교전 흔적은?”
“없습니다! 급히 철수한 흔적이라면 있었으나, 시체도, 핏자국도, 파손된 병장기도 없이 멀끔합니다!”
“아, 제기랄.”
그제야 출룬은 적들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그는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겁쟁이들. 도망쳤구나!”
“제 도시를 버리고 가 봐야 얼마나 갔겠습니까, 장군. 놈들은 백성 전부를 끌고 갔을 테니 멀리 가진 못했을 겁니다! 추격할까요?”
“당연히 그래야지! 하만! 하만!”
“네, 장군!”
“전사들에게 식량이 얼마나 남았나!”
“건량뿐이지만 열흘은 족히 버틸 겁니다!”
열흘, 열흘이라. 출룬은 혀를 찼다. 오늘 밤은 도시의 식량을 약탈하고 저들의 단 술로 축제를 벌일 예정이었다. 이 며칠간, 전사들이 거의 탈진할 정도의 강행군이었으므로, 그는 불만이 쌓이기 시작한 전사들을 다스릴 때 축제를 약속했었다.
“가서 전사들에게 전하라. 도망친 놈들을 사냥하고 그 후에 축제를 열겠노라고. 각 전사들마다 한 자루 이상의 포도주와, 한 마리 이상의 암소와, 세 명 이상의 계집을 내려주겠다!”
“예, 장군!”
쯧, 하고 혀를 차며 턱짓하자 부관이 황급히 내달려 그의 말을 군영 전체에 전하기 시작했다. 후한 보상을 약속했음에도 전사들 사이에선 불만이 터져 나왔다.
황무지를 거의 돌파하다시피 온 것이 보름이었다. 교전을 우회하기 위해 동선을 다소 꼬아야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놀라온 진군 속도였다.
그의 휘하에 있는 전사는 기병으로만 사만 명에 이르는 대군이었고, 그 강행군 속에 낙오가 없는 것은 오직 백국마족 전사들의 뛰어난 기마 실력 덕이었으나.
그럼에도 그들 또한 사람이라, 먹고 마시고 쉬지 못한다면 싸움을 계속할 수가 없다. 남은 건량이 열흘 치라는 것은, 이제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곱게 죽이진 않으마. 도시 것들아.”
출룬은 짧게 혀를 차고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만 명의 대군이 그를 따라 뷜랑을 향해 진군했다.
호족 연합과 세포르 공작가가 뷜랑 인근 모든 도시와 영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리고 청야 전술을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 * *
“폐하, 트레뮐레 궁중백의 급사이옵니다.”
“들라 하라.”
르네 필리파는 옥좌에 앉아 어전의 융단을 밟고 다가오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로베르가 리뷔에로 떠난 지 이제 막 보름이 지난 시점이었다. 처음 그가 귀르에서 급히 군사를 끌고 내려와 그녀를 알현했을 때, 대신들은 그의 터무니없는 주장에 코웃음 쳤었다.
오직 르네만을 제외하고. 그녀는 로베르가 허언을 일삼는 자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믿을 만한 사내였다. 백국마족이 진군할 것이라는 예측은 곧 진실로 드러났다.
다행이었다. 리뷔에가 또다시 전화에 휩싸이기 전에 전쟁을 준비할 수 있었다는 점이. 그녀는 다가오는 급사가 낭보를 가져오길 빌며 그를 바라보았다.
“신성 레바인테르 제국에 무궁한 영광 있기를. 황제 폐하 만세!”
“되었다. 궁중백의 전언이 무엇이냐.”
“황제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궁중백께서 선제후 소집령을 상신하셨나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품에서 봉인된 서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시종이 그의 서한을 받아 들고 르네에게 전했다. 트레뮐레 백작가의 봉인이 박혀 있는 서한이었다.
“선제후 소집령을? 백작이 패전했단 뜻이오?”
“허! 그에게 주어진 병력이 몇이나 되었는지 아시오? 팔텐노이아의 전군이었소!”
“‘거의’ 전군이지요. 출납국장.”
“그 정도면 전군이라 할 만하지! 여기 남은 이들이라 해 보아야 겨우 치안 유지가 그만 아니오!”
“그만! 황제 폐하의 어전일세!”
대신들이 목청 높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로베르의 말은 패전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녀는 천천히 로베르의 서한을 읽고, 곧 내려놓았다.
“백작은 전사했는가?”
“아닙니다, 폐하. 귀르의 본대 전원을 이끌고 대황야로 나아가 적들을 요격하겠다 말하였나이다.”
“지금 팔텐노이아의 출정 병력이 그대로 귀환하고 있고?”
“예, 폐하. 하오나 시간이 충분할는지는…….”
“뷜랑의 세포르 공작가가 있지 않소? 그 치가 제아무리 나약하다 한들 며칠은 버텨 주겠지! 폐하! 귀환하는 병력을 뷜랑으로 출정시켜야 합니다. 이건 트레뮐레 백작의 오판이옵니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르네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로베르가 대체 왜 그런 판단을 했을까? 그녀는 영민한 사람이었고, 곧장 로베르의 취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적들의 군세가 막강해 뷜랑 홀로는 결코 버티지 못하리라 판단한 것이다. 로베르는 적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 대황야로 진군한 것일 터였으며, 적군이 뷜랑에서 진격하면 곧장 팔텐노이아로 이어지므로, 그 사이를 방비하란 뜻이겠고.
-탁, 타닥.
르네는 옥좌의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 정도인가? 적들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지만, 뷜랑이 정녕 그 며칠을 버티지 못한단 말인가?
듣자 하니 적들 전원은 기병대라 했다. 기병은 유지하는 것에 대단히 많은 보급을 필요로 하는 병과다. 보급선을 끊을 수만 있다면 적들의 위세가 크게 줄겠지.
하지만 뷜랑이 버티지 못한다면. 놈들은 새로운 물자를 갖추고 다시 진군을 시작할 것이다. 그런 그들을 야전에서 마주한다면 결코 승리할 수 없다. 팔텐노이아의 출정군은 그 수가 많지 않다.
선황제와의 내전으로 팔텐노이아의 병력은 거의 대부분 리뷔에의 병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황제 직속 병력들은 라비라타 출정 당시 전멸했던 탓이다. 병력이 부족하다. 병력이…….
“선제후 소집령을 내려라.”
“폐하!!”
“트레뮐레 백작이 옥쇄를 각오하고 진군하며 남긴 서한이다. 이 작은 종이 하나가 그의 피와 목숨으로 쓰여 있는 것이니, 이를 중히 여겨야 함이 옳다. 대신들 중 누가 있어 목숨으로 서한을 남기겠나?”
“……폐하, 하오나 냉철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선제후 소집령은……!”
“그래. 나도 안다. 황실의 권위에 타격이 오지.”
선제후의 병력은 언제든 불러 사용할 수 있는 무보수 용병대가 아니다. 제후들에겐 거부권과 자위권이 있었다. 황제는 그들의 대표자일 뿐이며, 결코 전제군주가 아니었으므로.
그러니 선제후를 소집하여 그 병력을 각출하기 위해선 황실에서도 타협점을 내어 주어야 했다. 그들이 내걸 대부분의 조건에는 황실의 정치력 약화가 걸려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로베르를 믿었다. 적의 보급망을 끊어?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선두 행렬의 적병이 진군 경로를 반전하면, 보급대와 선발대의 사이에 끼어 압사당하는 위치에 스스로 나선 것이다.
로베르 정도 되는 사내가 목숨을 걸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그건 정보 이전의 신뢰였다. 함께 선황제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제국을 세웠던 영웅들 사이의 신뢰.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믿는 것이다.
“그리모아르 후작은 비교적 인근에 있으니 잘되었군. 서부 팔츠에 집결하라 전하라. 푸아티에 공작과 아르낭 공작에게도 같은 조건을 전하고. 블랑퓌네르는 뷜랑으로 향하라 전하라. 장송이 뷜랑과 가까이 있으니, 뷜랑의 상황을 파악하고 팔텐노이아로 향하는 적들의 뒤를 치라 전하라.”
“……말씀을 받들겠나이다, 폐하.”
“그리고, 바레스 공작에게 전하라.”
르네는 탁, 하고 팔걸이를 쳤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 숙인 대신들을 훑었다.
“동부 왕국 연합에 지원을 요청하라고. 바레스 공작가가 데인의 비센테 왕에게 자비를 얻어 영지를 회복했으니. 그에게 직접 찾아가 다시 한번 지원을 요청하라 해라.”
“폐, 폐하! 그건……!”
“이 서한에 적힌 적들의 수가 선발대만 기병으로 사만이라 했다! 지금 제국 전역의 기병대를 모두 모아 본들 그 수가 어찌 되는가!”
“……”
“내가 대신 대답해야 하겠나? 재무상서! 팔텐노이아 출정군의 총원을 말하라!”
“신 재무상서 비뫼르 말씀 올리나이다. 하명하신 출정군의 총원은 기병 삼천, 보병 육천, 중장보병 삼천에 기사 삼백이었습니다.”
“그렇다. 들었는가? 다 합쳐도 만이천 명이 간신히 넘는군. 기병 전력은 말할 것도 없고, 보병 하나가 적 기병 셋을 잡아도 모자란 숫자다! 그렇다면 선제후들의 병력을 총동원한다면 어떤가?”
“……”
“지난 내전에서 기병대만 추리고 추려 만육천이었다! 징집병을 모두 포함한다면 보병 전력이 십만을 넘겠지. 그러나 징병창을 열어 백성들을 수습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나? 한 달? 반년?”
르네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 대신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다른 전제군주정과는 달리 제국은 그 병력이 하나의 통수권자에게 일임되지 않는다. 각 제후들의 사정에 따라 상비 병력의 수가 얼마든지 널뛰는 것이다.
제국의 강력함은 마르지 않는 자원과 그로 인해 투입되는 징집병들의 수에 있었다. 보병 전력으로 따지자면 제국은 대륙 최강이라 자부할 만했다. 일반 백성들을 징집한 민병대라 할지라도 그 장비의 질과 훈련 사정이 다른 문명국들에 비해 압도적이었으므로.
그러나 이런 종류의, 속도의 전쟁을 벌여야 할 참이라면 제국의 약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각 제후들의 상비병을 ‘협상을 통해’ 구해 와야 하며, 그들의 군사 행동 또한 지극히 자율적으로 진행되는 탓이다.
50년 전쟁은 장기전이었고, 그건 제국의 주특기였다. 그러나 지금 적은 고작 보름 만에, 제국이 50여 년간 침략했던 대황야를 관통하여 제국의 도시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그 단순한 정보조차 예상할 수가 없었다.
정치 놀음 이전의 문제다. 르네는 페르난데스가 줄기차게 주장했던 ‘백국마족의 위협’에 대해 간과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기병장관에게 말했다.
“내 투구와 기마를 대령해라!”
“폐, 폐하!”
“그대들이 싸울 생각이 없으니, 적어도 제국을 지킬 생각 있는 나는 직접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당장 출발하라! 이 시간에도 트레뮐레 백작은 목숨을 걸고 있지 않는가! 어서!”
“예, 폐하! 말씀 받들겠나이다!”
대신들이 뛰어나가고 사절단이 제국 전역으로 흩어지는 것을 본 뒤에야 르네는 자리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내전이 끝난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전쟁이라니. 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전쟁을 일으킨 군주로 기록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르너드 경. 원정을 나가지 말고 나와 혼인을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말이 통하는 귀족 하나가 궁중에 있는 셈일 텐데 말야. 르네는 픽 웃고는 다짐했다. 그 자식이 돌아오면 그땐 묶어 두고 혼례를 올릴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