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 꼭두각시들의 전쟁 (13)
페르난데스는 초원 위를 나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너른 뜰과 초원, 그리고 변덕스럽게 나타나는 정글 지대가 혼잡하게 뒤엉킨 대황야로.
죽음의 땅에서, 창생의 땅으로 변모한 이 변화무쌍한 땅 위를 천천히.
“내가 왔다. 라비라타.”
강물이 경계처럼 흐르는 너른 평지에 서서, 페르난데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대황야의 너른 지반 아래에는 막대한 마력석이 흐른다. 뭄토의 승천이 만들어 낸 마력흔이다. 제아무리 철저하게 지맥을 뒤튼다 하더라도, 대악마의 승천이 만들어 낸 흉터를 덮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마력 흐름보다 더 깊고 농밀한 저 아래의 마력은 카라드스카르의 훼방에 온전한 지류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는 고대 상 아시트 시절의 영웅이다. 인류가 이제 막 국가 체계를 잡아 가기 시작한 문명의 태동기에도 이미 제국을 세워 외적을 막아 내던 고대 국가의, 최전성기 시절 영웅.
수호의 라비라타. 그녀가 만들어 낸 봉인이 천천히 페르난데스의 눈앞에서 기나긴 휘장을 걷어 내며 나타났다.
-후우우웅!!
뜨거운 열풍이 몰아쳤다. 페르난데스는 놀란 말을 진정시키며 고삐를 바싹 움켜쥐었다. 평범했던 들판 위로 신기루가 내려앉듯이 천천히 도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웅장한 황색 건축물과 대리석으로 쌓인 거대한 제단, 오색 아마포와 꽃들로 화려하게 치장된 성벽, 탑처럼 높이 솟은 석상들까지.
-저거 뭐냐……?
그때, 페이자쉬가 김빠진 소리를 냈다. 페르난데스는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그곳에는, 한창 건축이 진행되고 있는 어떤 석상이 보였다.
대리석을 솜씨 좋게 조각하여 올리고 있는, 도시에서 가장 거대한 석상이었다. 이미 거의 완성되어 머리칼과 그 위에 얹힌 관, 그리고 장식품들이 조각되어 가고 있었다.
드러난 외형은…… 그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와, 진짜 살다 살다. 진짜 추하다, 제기랄!
‘어…… 음…… 이건 할 말이 없네……. 내가 잘못했다.’
-여든 평생 저런 뇌물을 본 적이 없다, 이 녀석아. 말이 안 나오네, 정말.
페이자쉬와 페르난데스는 동시에 말을 잃고 우뚝 서 버렸다. 그는 내심, 일행을 키르하스와 함께 수인 호족 연합에 먼저 보낸 것에 안도했다.
저걸 다른 사람들과 함께 봤다면, 제아무리 뻔뻔하기로 자신 있는 그였다 하더라도 수치심 속에 자결을 고려했을지도 몰랐다.
곧, 성문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밖까지 꽃잎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건 뭔…….
-쿵! 쿵! 쿵!
움직이는 석상과 해골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바닥에 찍으며 꽃잎을 뿌려 대고 있었다. 넓은 융단처럼, 꽃잎이 바람에 따라 그가 있는 방향으로 길게 깔렸다.
“하…….”
페르난데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정말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해골 병사들의 환대를 따라 성 안으로 향했다.
* * *
[그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과……하군. 라비라타.”
[자아, 보거라. 이것이 우리 아시트 제국의 성의다.]
라비라타는 표정 없는 황금 마스크 안에서도, 어쩐지 의기양양하게 외치며 손을 번쩍 올렸다. 화려한 비단과, 보석으로 장식된 액세서리들이 그녀의 손짓에 따라 찰랑거렸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성 내에 있는 거대한 석상이었다. 그녀는 당당히 외쳤다.
[먹고 마시지도 않는 짐의 신민들이 몇 주, 몇 달간 오직 이 과업에만 매진했다. 한마음 한뜻으로, 우리의 구원자를 기리며……. 자아, 보아라. 상 아시트의 위엄을…….]
“그만…… 제발……. 그만.”
[요즘 젊은 인간들은 부끄러움이 많구나! 자, 우리 백성들의 기억은 모든 장면을 왜곡 없이 남기지만, 그럼에도 위대한 영웅에게 그에 걸맞은 기념비는 하나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만…….”
페르난데스는 떵떵거리며 외치는 라비라타를 슬쩍 외면하며 고개를 감싸 쥐었다. 라비라타는 ‘하하!’ 웃고는 외쳤다.
[이 도시 최고의 석공들이 만들어 낸 이 거신상. ‘죽음을 죽인 신, 페르난데스’의 숭배상이 달가운가?]
“이름마저 최악이오, 라비라타.”
[더 나은 이름을 지어 주겠는가. 죽음을 죽인 자여?]
-네 작명 센스도 저 여자와 비슷해. 일단 저 여자를 죽이고 자살하자. 다시 시작해 보는 거야, 우리.
‘개……소리하지 마…….’
페이자쉬마저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는 허공에 뜬 채로 라비라타의 목을 조르려 노력하고 있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늙은 흑마법사 영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이었다.
그는 그 광경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가 앉자마자 마스크를 쓴 미이라들이 그에게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자들도 치워 주시오.”
[가라. 지금 우리의 구원자께서 중한 말씀을 하려 하심이라. 사관을 불러라. 오늘의 만남은 단 한 글자도 빠짐없이 위대한 서판에 기록되어야 마땅하니.]
“성격이 바뀐 듯하오……?”
[시간은 시체 또한 뒤틀어 놓지. 우리라고 다를 것 있겠느냐.]
라비라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듯 말했다. 그녀는 휘적거리며 걸어가 페르난데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 도시엔 식량이란 것이 없다.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맑은 물뿐이며, 우리가 소모하는 사치품들은 대부분 산 자들이 먹을 수 없는 것들이다. 양해해 주겠느냐.]
“끼니를 위해 찾은 것이 아니니 걱정 마시오.”
상 아시트의 망자들은 살아 있을 시절의 행동을 복기하며 인격을 유지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먹고, 마시고, 놀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따라서 그들이 소비하는 포도주와 구운 짐승들, 흠뻑 뿌리는 향신료들이 이 도시에도 충분히 비축되어 있지만, 그건 일반적인 산 자들이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부패하고, 오염된 식량과 음료들이었다.
그저 형식만을 위해 만들어 낸 껍데기. 그것이 망령들의 정체성이었다. 화려하게 차려져도 여전히 부패한 음식들처럼. 화려한 치장 속에서 말라비틀어진 저 자신의 몸을 감추는 망령들의 정체성.
[자아, 그렇다면 말해 보거라. 짐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포타자르와의 사이는 어떻소?”
[타니스의 아포타자르? 녀석과의 교류는 거의 없다. 녀석은 짐의 시대 이후의 파라오였으므로, 짐이 바란다면 감히 거역하진 못하리라.]
라비라타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저었다. 파라오들이 어디 연공서열로 급을 나누는 존재들이던가? 그들은 하나하나 자기 자신이 유일신이라 생각하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었다.
라비라타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라비라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 말했다.
[녀석의 도움이 필요한가?]
“그렇소.”
[아마도, 그 말 탄 야만인들과의 싸움 때문이겠지?]
“맞소.”
[그렇다면 어려운 일일 것이다. 타니스의 아포타자르. 그 녀석의 가치는 ‘생존’이니라. 아포타자르는 생존율이 낮은 자의 말을 듣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편을 바꿔 설 수 있는 기회주의자다.]
실제로, 제국의 득세 이후 아포타자르는 꾸준히 제국과 교류하며 살 길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제국의 울타리가 허물어진 지금에도 그가 그런 자세를 유지하리라곤 생각할 수도 없었다.
“전언을 보낸다면 얼마나 걸리겠소?”
[사흘이면 충분하다. 시체까마귀에 서한을 달아 보낼 수 있으니.]
“그렇다면 이렇게 전해 주시오. ‘우리와 함께할 경우 패배 후에 멸망하겠지만, 놈들과 함께한다면 승리 후에 멸망할 것이다.’라고.”
카라드스카르는 모든 문명 사회에 적대적이다. 그들이 망령 왕조를 방치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편에 선다면 당장은 시간을 벌 수 있겠지만, 제국이 무너진 이후 아포타자르는 결코 그들의 침략을 홀로 막아 낼 수 없을 것이었다.
“놈이 진정코 생존을 위해 사고한다면 누구 편을 들어야 그 가능성이 높을지는 잘 알겠지.”
제국은 50년 전쟁이 한창이던 몇 해 전에도 아포타자르를 비롯한 망령 왕조들을 적대하지 않았다. 말이 통하고 교역이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왕국으로 인정하고 그 권역을 존중했다.
제국 입장에선 잃을 것 없는 일이긴 했다. 망령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위치한 곳은 대황야. 주인 없는 땅이었으므로. 그들의 묘실에 매장된 부를 섣불리 탐내고자 벌집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아포타자르에게 제국은 말이 잘 통하는 이웃이다. 굳이 친교를 나눌 이유는 없더라도 적대해 얻을 것 없는 이웃 국가란 뜻이다.
[합리적인 생각이기는 하군.]
“그가 동의할 것 같소?”
[결정적으로 패배하기 전까지는 따르겠지. ‘비합리성’은 산 자들의 특징이니까. 우리들은 언제나 합리적인 선택만을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대와 그대의 나라가 결정적으로 짓밟혀 더 이상 저항 의사를 잃는다면…….]
망령들은 굳이 공기로 숨을 쉬지 않는다. 그 말은 곧, 그들의 매장 도시와 묘굴들을 다시 사토 속에 파묻더라도 아무런 피해가 없다는 의미와 같았다.
모든 파라오들은 대황야와 인근 문명에 대한 지배욕에 시달린다. 그건 뭄토의 저주가 있기도 전, 그들의 생전부터 이어진 천형이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아포타자르는 조용히 대지 위를 거닐며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건 살아남은 이후의 일. 아포타자르는 살기 위해서라면 이 몇 해간 노력한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서라도 지하에 파고들 인물이었다.
“그대도 그렇소?”
[무슨 말을 그리 서운하게 하느냐? 그대는 짐의 백성들을 두 번 살렸다. 그러니 적어도 짐은 그대를 위해 두 번 죽겠다. 이미 죽은 자가 하는 말이니 그 무게가 새삼스럽지 않느냐.]
라비라타는 맑게 웃으며 말했다. 마스크 너머에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시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청량하고 깨끗해서 마치 악기 소리처럼 느껴졌다.
생전의 모습을 환각 주문 속에서 보아 알고 있는 페르난데스로서는, 눈앞의 존재가 죽은 자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는 라비라타가 따라 준 맑은 샘물을 마시며 말했다.
“내가 준비한 것이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좋소?”
[예상이 된다.]
라비라타의 눈빛이 반짝였다.
[짐과 아포타자르를 모두 필요로 하는 일…… 그리고 대적의 침공이 목전에 닥친 상황에서의 일이라면 모른 척하기가 더욱 어렵구나. 그대처럼…… 주문에 능한 마법사가 우리를 필요로 한다면 더욱이.]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세 개의 손가락을 펼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니 짐이 그대의 목적을 모두 맞힌다면 짐의 소망을 들어주겠나?]
“세 가지나 된다 보시오?”
[적어도 그대는 한두 가지만을 위해 행동할 범상한 자들과 다르니. 범인은 하나를 보고, 영특한 자는 그 뒤의 일을 고려하며, 그대는 세 방면의 일을 조합하지.]
“나를 너무 높게 띄워 주시는군.”
[그대의 가치를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게 판단한 군주가 짐이다.]
라비라타는 그리 말하고는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강한 강줄기도 굽이 돌아 흐르다 보면 그 유속이 잦아들지. 우리에게 강물 속 바윗돌이 되길 바라지 않나.]
그건 로베르와 피엘이 하고 있는 전략과 동일한 것이었다. 적들의 공세를 최종 국면에서 약화시키기 위해 방파제 역할을 수행하는 것.
적들의 전투 수행 능력을 소모시켜 공세 종말점을 앞당기는 행위다. 맞다.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놈들은 지금 제국을 향해 곧게 진격하고 있는데, 굳이 그보다 북쪽에 있는 아포타자르와, 그 공세와 전혀 상관없는 남쪽의 짐이 필요하다는 것은 포위를 상정하고 있음이라. 그대는 이 전쟁이 끝난 후에 놈들이 단 하나도 이 땅을 빠져나가지 않길 바라고 있군.]
카라드스카르는, 지금의 아마르 카간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어떤 운명적인 힘이 카라드스카르의 대북진을 30년 당긴 이 시점에서, 30년 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있을까.
에리크의 침공이 불식된 지금, 남은 위협 요인은 오직 카라드스카르뿐이었다. 30년 뒤엔 그가 없으며, 지금의 영웅들 대부분이 얼마나 살아남을지 알 수 없고, 문명 사회의 상태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백국마족은 단 하나도 남김 없이 섬멸되어야 한다. 그것이 대학살이 되더라도 결코, 결단코 반드시.
단 하나도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그렇게 하기 위한 치밀한 포위 진형이었다. 지금 라호트 요새에서 적들의 파상 공세를 막아내고 있을 키르자트, 팔텐노이아 인근에서 적들과의 최종전을 준비하고 있는 제국. 그리고 두 망령 왕조의 조력까지.
삼각 포위망이 조밀하게 놈들의 목젖을 옥죄어 가리라.
[마지막으로. 강력한 주문술사인 그대와, 주문 자체를 억류하는 놈들의 묘기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주문이 없는 공간에서, 백병전으로 놈들을 막아내야 한다면……. 그대는 주문을 포기하고 새로운 전략을 짜는 대신 다른 방식을 생각하겠지. 상 아시트 제국의 마법사인 짐을 찾은 이유가 그것이 아닌가? 고대의 비전을 얻어내고자 함이 아닌가?]
사령술. 적들의 수와 아군의 열세에 상관없이, 어떤 공포도 없이, 전투 피로도 없이. 그저 적들을 향해 진군하는 망자의 물결.
이 대황야 지반 아래에는 그런 존재들이 수없이 잠들어 있으며, 그런 자들을 일깨우는 주문 중 가장 선진적인 주문은 상 아시트 제국 시절의 매장 사제들이 사용하는 사령술이었다.
단순한 백병전으로 카라드스카르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당장 차출할 수 있는 병력이, 보병과 기병을 모두 합쳐도 놈들의 기병 총력을 밑도는 탓이다.
그를 위한 변수 하나를 더 넣어 보자면, 반드시 사령술의 지원이 필요했다.
“모두 맞소.”
[그렇다면 짐이 그대에게 지금 당장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적지 않겠군. 지난번과는 크게 다르겠어. 저 석상부터 주문의 전수까지, 짐은 그대에게 아낌없이 모든 지원을 베풀고 있다.]
“……굳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고대 상 아시트 제국의 지엄한 법률에 따라, 그대에게 세 가지 소원을 요구할 권리를 얻었다.]
“……정말 그런 법률이 있소?”
[없다. 하지만 짐의 말이 곧 이 나라의 법이지. 짐을 누구라 생각하느냐?]
라비라타는 시원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그녀는 페르난데스를 향해 손짓했다.
[따라오거라. 짐의 소망이 무엇이 되었든, 그대에게 주문을 전해 주는 것이 우선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거래가 아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