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 꼭두각시들의 전쟁 (14)
다각, 다각. 말은 공포에 질린 상태로도 애써 관도를 따라 걸었다. 멀쩡한 사람이라도 소름이 끼치고 몸이 굳을 광경인데, 겁이 많은 말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 도시의 모든 백성. 아니,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천여 년 전의 망령들이다. 낡고 삭은 유해들이었다. 지금, 라비라타가 타고 있는 말조차도. 라비라타의 말은 제 주인처럼 고아하게 걸었다.
[어떠하냐?]
“아름답군.”
[후후, 그렇지? 짐 또한 그리 생각한다.]
라비라타는 관도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백성들은 생업에 열중하고, 어린아이들은 활달하게 뛰어다닌다. 노인들은 그 광경을 보며 볕을 쪼이고, 상인들은 낡은 화폐와 삭은 옷감을 교환하며 웃고 떠들었다.
모든 것이 허상뿐인 풍경이다. 천여 년간 반복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반복할 꼭두각시놀음이다. 저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나, 저들은 기꺼이 스스로를 같은 하루 속에 박제했다.
인간의 정신은 시간보다 연약하므로.
살아남고 싶어서.
죽어 있는 시체들조차도, 살고 싶다는 열망 하나만으로 저 스스로를 기망(欺罔)한다.
-명화 속 그림이 그저 현실의 모사에 불과하더냐.
뭄토의 환각 속에서, 그것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에도 페르난데스는 쉽사리 이를 떨칠 수 없었다. 장인의 화폭, 그 결이 살아 흐르는 모든 순간이 단지 현실의 저열한 모사품이 아님을. 이젠 알기 때문이다.
그는 장난치며 뛰어가는 아이들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성대가 없으며, 마력으로 음성을 전달할 수 없는 작은 영혼들.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음에도, 저들의 바싹 마른 두개골 아래에선 순수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보기 어려우냐?]
“저들의 잘못이 아니었소.”
[우리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
라비라타는 말의 발걸음을 늦추어, 페르난데스와 보폭을 맞췄다. 그녀는 허공에 천천히 손짓을 하며 말했다.
[짐이 네게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것이 인간을 죽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 정의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렇소.”
[바로 그 깨달음에서, 아시트의 비전이 시작된다. 보겠나?]
그녀의 말에 페르난데스가 눈을 떴다. 화창한 하늘, 푸르른 초원이 어느새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순식간에 매듭지어진 정교한 환각 마법이었다.
“아시트의 사제들. 매장 사제들이라 불리는 그 늙은이들은, 단지 불멸의 노동력을 얻기 위해 시체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그의 곁엔, 검고 긴 머리칼이 흑단처럼 찰랑이는 미녀가 서 있었다. 새하얀 피부와 고혹적인 눈망울이 페르난데스의 눈앞에서 싱긋 웃음 지었다.
“혹여, 매장 사제들의 신전을 본 적이 있는가? 그치들은 제 신전의 입구에 그림을 그려 놓고는 하지. 우리를 기억하라. 우리는…….”
“너희의 미래다.”
“오, 봤나 보군? 어느 도시의 유적을 보았지?”
“알타락. 마흐라스의 지하 유적에서 봤었소.”
벌써 오래전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콘클라베의 위협이 대두되기 전, 아직 이 황야가 황무지에 불과하던 시절. 50년 전쟁이 끝나기 이전의 이야기다.
평화로운 오아시스 도시 지하에 매장된 알타락의 유적지에서, 페르난데스는 그런 글귀를 본 적이 있었다.
“제법 규모가 큰 유적이었겠군. 맞아. 사제들은 기억하기 위해 망자들을 연구했었다. 그건……. 가장 높은 방식의 존중이라 할 만했지. 영원한 삶, 불멸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방법이었어. 우리의 사령술은 시체 자체보다, 그 유해가 품었던 삶의 본질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다.”
-쿠구구궁!
라비라타가 손짓하자 복잡한 마력 매듭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 모든 감각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페르난데스는 주의 깊게 그녀의 수인과 마력 패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빚어진 자는 현실의 모사에 그치지 않지. 존중받는 전사이며, 사람이며, 인생 그 자체다. 따라서 짐은, 짐과 짐의 백성들을 연민하지 않는다. 페르난데스.”
라비라타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짓에, 지반이 흔들리며 초원이 갈라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빛나는 강철 갑주를 차려입은 전사들이 하나하나 일어서고 있었다.
그런 광경이 눈에 닿는 모든 곳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키도, 생김새도 각자 다른 수십, 수백…… 아니, 수천 명의 군인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햇살 아래 번쩍이는 창칼을 곧게 세우고는,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태양이여 영원할지라!!
“우리의 옛 신화 속 태양은 동쪽 끝에서 태어나 서쪽 끝으로 죽어 가지. 사람처럼 늙고 병들어 스러지지만. 석양의 마지막 빛 무리는 내일 터 오를 동녘을 암시한다. 그것이 삶이며—”
-빛이여 영원하소서!
“그 사이를 걷는 우리들은, 우리 망령들은. 밤이 아닌 낮을 영원히 살아가는 시간 속 박제품들이다, 페르난데스. 가장 찬란하던 정오의 태양처럼, 죽은 자의 가장 화려했던 순간을 영원히 존중하고자 했던 우리들의 노력이다.”
그러니, 연민하지 말거라. 라비라타는 그녀의 말대로, 정오의 태양처럼 찬란하게 웃었다.
“우리가 바보처럼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연민하지 말거라. 그건 우리의 삶이었으니. 그 대신, 우리가 그 장구한 시간 속에서도 소중히 지켜 낸 그 눈부신 순간을 경외해야 마땅하리라.”
“내 생각이 짧았소. 미안하군.”
“뭐……”
-짝!
라비라타가 싱긋 웃으며 손뼉을 쳤다. 곧, 거친 바람이 페르난데스의 얼굴을 스쳐 갔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도시의 정경이 다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황금 마스크를 쓴 망령 군주, 라비라타는 가면 아래에서 말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뭄토의 꼭두각시로 남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그것을 연민한다 한들 우리가 그대를 어찌 타박하겠는가? 사실, 긴 변명이라 치부해도 좋다.]
가자. 공간이 협소하구나. 라비라타는 다시 다각, 다각 말을 몰아 관도를 빠져나갔다.
* * *
“한 번만 더 보여 주시오.”
[후후, 아무리 그대라 하더라도 어렵겠지? 아무렴. 아시트의 비전은 그 역사만큼이나 길고 까다로우니. 좋다. 짐이 얼마든지 그대에게 지혜를 전수해 주겠노라.]
라비라타는 다시 수인을 짚어 허공에 마력을 이어 나갔다.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그 모든 광경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세 번. 라비라타가 시연한 ‘망령 세우기’는 이것으로 세 번째였다. 처음에는 열 사람, 그다음엔 열다섯 사람, 그 후에 스물두 사람. 페르난데스가 요구한 대로 그 수를 늘려 가며, 라비라타는 열심히 마법을 축조했다.
그들 앞에는 삭은 갑주를 차려입은, 갓 깨어난 망자 마흔일곱이 묵묵히 도열해 있었다.
-외변 삼 항은 개수 변수 조항이로군. 이거 참 묘수야.
‘내항의 구성절에 겹쳐 있는 도형은 아시트 상형 문자의 모식도였군. 다섯 개의 글자를 굳이 겹쳐 그려 놔 쓸데없이 복잡해졌어.’
-매듭의 마력 소모 효율을 늘리기 위한 것 같은데…… 뭐, 저건 개량할 여지가 아직 남아 있군. 차라리 문자행을 현대 제국어로 개행해 보는 것은 어떤가?
‘원전의 침해율이 높아질수록 지하 마력석 광맥의 왜곡에 변수가 생길 수 있어. 좋은 방법이 아니야.’
-쯧, 단순 암기는 재미가 없거늘. 낭만이 부족해진 시대로다. 요즘 젊은 마법사들은 이래서 문제야. 마법을 이해하지 않고 암기하려고만 하잖아?
‘너랑 내가 나이가 같다는 것을 잠시 생각해 보실까?’
-정말 그랬나? 오…… 미처 몰랐군그래, 페르난데스. 난 니가 꼭 스물 먹은 젖먹이인 줄 알았지 뭔가?
‘일단 스물이면 젖은 떼는 나이야. 늙은 영체라 영혼-치매라도 온 건가?’
-아하하! 한 방 먹었군그래! 애송이한테 말이야!
‘아…… 정말 네놈한테 몸이 있었으면 몇 대는 쳐 주었을 텐데.’
라비라타의 마력을 해석하던 두 마학자들이 투닥이기 시작했다. 페이자쉬는 페르난데스의 말에 낄낄거리며 음산하게 말했다.
-내게 육체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지, 페르난데스. 항상……. 항상 말이야. 내게도 몸이 있었다면 너는 실험체가 될 운명이었어.
‘말을 말지.’
페르난데스는 굳이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던 탓이다. 페이자쉬의 본신이 그대로 넘어왔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니.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휘휘 젓고는 라비라타를 향해 손가락을 펼쳤다.
“이제 내가 해 보겠소.”
[아직 이르지 않겠나? 필요하다면 더 보여 줄 수도 있는데.]
“충분하오.”
수인을 짚는 방식과 팔을 펼치는 각도, 그 모든 것이 현대의 마법과는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마법이라기보단 차라리 기나긴 역사를 지닌 제사에 가까웠다.
신이 아닌, 자연에 비는 오랜 기원. 지금은 ‘마라칼라이 학파’라 불리는 한 마법 학파의 원전. 드루이드 주술 계열처럼, 자연 자체를 신성시하여 섭리에 간청하는 기원이었다.
그리고 페르난데스는, 아니 페이자쉬는 이미 엔소서리 학파의 창립 당시 마라칼라이 학파의 주문 또한 통달했던 대마법사였으며—
“모든 주문은, 그 결과가 같다면 같은 방향성을 지니지.”
-화르륵!
만류귀종. 아니, 수렴진화에 가까운 산물이다. 마법의 양식이 다르다 한들 같은 결과를 위해 연구된다면, 같은 결을 필연적으로 띨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아시트 비술의 도해 자체는 이미 익숙하다. 다만 목적지에 닿는 방식이 돛단배를 타고 가는가, 혹은 말을 타고 가는가, 비유하자면 그 정도의 차이일 뿐.
수인이 허공을 짚는다. 정교하고, 빠르고, 아름답게. 천려의 일실조차 허용되지 않는, 절제된 미학의 끝에서—
장인의 화폭. 단 한 치의 움직임조차 수십 가지 수법이 고려된 심도 깊은 한 수. 그리고 다시 한 수. 수화를 하듯, 말을 걸듯이, 자연 그 자체에.
섭리에 간구하는 마음으로.
-화르륵!
청동 왕좌의 마력 회로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주 오랜만에 사용하는 대마법이었다. 망령을 일으켜 세운다는 것은 단순한 네크로맨시가 아니었다. 현대의 네크로맨시와는 그 결 자체가 전혀 다른 주문이었다.
아니…… 아마도. 지금 시대의 네크로맨시는 이 위대한 학문의 열화품에 불과하겠지. 망자를 다루는 학문들의 정점이자 원류. 아시트의 비술은 그 정도의 무게가 있었다.
‘존중.’
망자의 삶을 긍정하고, 망자의 전성기, 그 찬란했던 순간을 존중하며, 영원토록 망자의 이름이 이 세계에 남길 바라는 기원. 그 안에서 발달한 위대한 학문이다. 마법이라기보다는 간구에 가까우니.
매장 마법사들이 아니라, 매장 사제들이라 불리는 것이 옳으리라.
-쿠구구구궁!!
[이…… 이렇게나 빨리……?]
라비라타의 당혹감이 공기를 매질로 넘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어찌 이런 속도로…… 아시트의 비술을 익히고 매장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족히 수십 년의 연구가 필요했다.
단순히 주문술사가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등한 학문이었다. 그걸 그저 몇 수의 주문 시연을 통해 파악하고 모사한단 말인가?
-화르륵!
마지막 한 수가 허공을 짚으며, 서른 명의 망자가 지반 밑에서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눈을 감고 손을 뻗은 채로 깊은 숨을 내쉬었다.
[히, 힘드느냐? 그렇지. 그렇겠지. 누구나 처음엔 그렇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하지 말고…… 위험하니, 천천히. 천천히 손을 내리거라. 네 주문은 짐이 이어받겠다.]
“잠시.”
페르난데스는 눈을 뜨지 않고 왼손으로 수인을 짚었다. 더블 캐스팅. 한 손으로 펼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주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으되, 이토록 복잡한 대마법이라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완성된 주문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 유지하며, 다른 한 손으로 다른 마법을 펼치는 것 정도는. 숙련된 마법사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화르르륵!!
등 뒤에 떠오른 검은 헤일로가 불길하게 빛을 내뿜었다. 라비라타는 엉겁결에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찬란한 태양 아래에서, 헤일로의 검은 화염이 얽히며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져서 마치—
마치, 날개가 돋아 나오는 것처럼…….
아니, 손이. 메마르고 뒤틀린 손들이 그의 등 뒤에서 솟아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 손들이 저마다 다른 각도와 방향으로 움직이며 한 수.
다시 한 수.
그렇게 다섯 개의 수인이 일말의 오차 없이 정교한 매듭을 얽어 나가고.
화염 속에서 일그러진 공기. 그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두 개의 얼굴이 허공에 마력을 매듭지어 나가니.
-쿠구구구구궁!!!
드넓은 초원에 실금 같은 거미줄이 그어진다. 유리가 깨어져 부서지는 것처럼 한순간에.
[이게…… 대체……!]
그리고 그 사이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망자들이 일어선다. 그 수가, 다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도합 수천 구는 넘을 대군이었다.
일어선 군단이 순식간에 열을 맞추고, 대오를 갖추어 도열한다. 그제야, 페르난데스는 눈을 떠 자신이 만들어 낸 주문을 바라보았다.
삼두육비. 세 사람 분의 주문 동시 사용. 같은 주문을 직렬로 이어 그 주문의 효과를 거듭해 증폭한 결과.
첫 주문이 만들어 낸 망자는 삼십 구.
두 번째 주문은 구백 구.
세 번째 주문이 완성되며 일어선 망자들은…… 이 대지 위에 도합 이만하고도 칠천.
주문이란 수로와 같고, 마법사는 수로의 끝에 매달린 배수관과 같다. 제아무리 마력이 무한정하다 한들 마법사의 실력과 주문의 정밀함이 부족하다면 한 번에 펼칠 수 있는 주문의 총량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한한 마력을 다루는 순간에도 단 한 조각의 유실조차 없는 정교함과 무결함. 유수와 마찰이 전혀 없는 거대한, 압도적인 배관. 그것이 페이자쉬의 마법이었으므로.
지반 밑에 매설된 막대한 마력석 광맥의 보조를 받아, 그 마력이 무한하다고 가정할 때 그가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군세가, 지금 그의 눈앞에 도열해 있었다.
[그대가…… 짐의 시대에 살았다면.]
라비라타는 긴장으로 바싹 마른 목소리로 자그마하게 신음했다.
[뭄토의 이름이 그대였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