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18화 (319/388)

318. 꼭두각시들의 전쟁 (15)

호아티는 여전사였다. 두 아이의 어미이자 융성한 도시, 퀴이스를 수호하는 전사장이며, 호쾌한 검격으로 이름난 검사이기도 했다.

천사백여 년 전, 그녀는 퀴이스와 인근 도시 사이의 분쟁 속에 죽었다. 뭄토에 의해 깨어났으며, 뭄토가 봉인된 후 다시 지반 속에 매장되었고, 시간과 모래 속에 묻혀 잊혀지던 이름이었다.

지금 시대가 도래한 이후, 그녀의 이름과 그녀의 업적, 그녀의 삶을 기억하는 자는 그 누구도 없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 * *

“앞으로.”

* * *

마호탄은 사제였다. 적당히 부패하고, 적당히 공정했던 소시민적인 사제. 그는 노환으로 죽을 때까지 에슈라스의 신전에서 평생을 보냈으며, 새로운 유해 방부법을 발견해 도시의 석비에 이름을 남겼다.

천오백 하고 이십이 년 전의 일이다. 석비는 도시와 함께, 기나긴 시간 속에 풍화되었고, 그의 유골은 슬개골 한 조각을 제외한다면 더 이상 형체조차 남지 않았다.

하지만 뭄토의 주문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아, 수십 세대가 지나간 후에 이르기까지 세월 속에 박제해 놓았으니.

지금, 단 한 사람. 그의 말을 듣고, 그의 삶을 이해하며, 그의 인생을 존중하는 단 한 사람이. 오직 그만의 석비를 새로이 써 내려가고 있다.

* * *

“그 자리에 서서, 놈들의 눈에 띄어라. 놈들이 추격을 시작한다면 즉시 철수해 놈들을 교란시켜라.”

* * *

사람이 죽는다. 그 이후, 영혼은 어디로 향하는가. 시간은 이 세계, 아니 차원과 차원을 넘어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법칙이며, 그 아래에서 신조차도 영원하지 않다. 영혼마저도 시간 안에서 불멸하진 못하리라.

저 먼 곳에서 비추는 별들의 빛무리조차도 시간 안에 삭고 진다. 하물며 인간이랴. 그 작고 가냘픈 영혼이 어찌 영생할 수 있을까.

하지만, 누군가는 말한다. 기억되는 한 우리는 영생한다고. 낭만적인 견해이나 현실성 없는 가설이다.

“500년…….”

인간의 영혼에도 한계 수명이 있다면, 페르난데스는 마학자로서 단언할 수 있다. 그 어떤 인간의 영혼도 500년 이상 육신 없이 버틸 수는 없다. 그 시간을 넘기 위해서는, 영혼의 격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신성과 같은.

그러나, 천오백 년. 모든 것을 마모시키는 그 장대한 시간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젠 그 흔적만 있어 그저 삶의 순간을 박제해 놓은 정물에 불과할 그 영혼들이 이 황무지 위에 여전히 빛나고 있으니.

“……쿨럭……!”

그 한 사람, 한 사람, 도합 이만칠천 명 분의 영혼들이 일제히 외치고 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죽음을. 그 찬란했던 순간들을. 유사 속에 매장된 녹슬고 마모된 동전들, 그 하나하나를 다시 볕 아래에 꺼내어 문질러 닦아 빛내듯이.

이만칠천 명의 망자들이 일제히 외치고 있다. 우리는 이 순간 영원히 살고 있노라고.

영성백혼. 잘게 부서진 파편들과 조각난 기억, 바스라진 조각들을 누더기처럼 이어 놓았어도, 여전히 ‘나’는 ‘존재한다’라고.

페르난데스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내면 속에서 직접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살아 있으며, 기억되는 이상 영혼은 영원하리라. 대단히 낭만적인 견해지만—

마법사는, 낭만을 그려 내어 현실을 왜곡하는 이들이므로. 이 순간만큼은, 저들은 영원하리라.

“쿨럭!”

-멈춰라. 동조가 너무 깊다!

“얼마나…… 소모했나?”

-처음 사용하는 주문의 소모값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페르난데스. 하지만…… 하지만, 분명 타격이 있었을 거다. 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육체의 기능성을 유지하는 한계가 삼 년.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 따지자면 오 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을 깎아 내렸다.

페르난데스는 방금 토해 낸 핏물로 얼룩진 입가를 문질러 닦으며 일어섰다.

“키르하스와 아벨이 이 광경을 보지 못해 다행이로군.”

-지금 이 시점에 그런 말이 나오나?

“페이자쉬,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 중에 다만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시간이 얼마나 될까. 오십 년? 육십 년?”

-…….

수배 중인 흑마법사가 ‘영웅’들의 공격을 피하고, 살수들의 단검을 피하고, 이단심문관들의 로사리오를 피해 도망치던 시간들. 와일드캐스트로서 평생 떠돌며 살았어야 했던 그 시간들이 얼마나 되었을까?

페이자쉬는 대답하지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핏물 흐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다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을까. 우리 삶은 단지 살기 위한 것에 불과했나. 너도 알지 않나. 우리는 그걸 말년에 깨달았고…… 두 번의 기회를 잡은 지금에 이르면, 이젠 멈춰 설 이유를 찾을 수 없어.”

-하지만 페르난데스, 그것이 꼭 죽어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우리에겐 단지 사는 것과, 단순히 죽는 것보다 더 숭고한 목적이 있어.

“우리의 목적이 정말, 아들…… 그 아이 하나뿐이었을까.”

-뭐……라고?

페이자쉬는 페르난데스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페르난데스는 형형한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단순한…… 한 아이의 생명. 그것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 단언할 수 있냐는 말…….”

-닥—쳐라!!!

페이자쉬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라, 영체인 그의 분노가 그대로 형상화되어 심연의 업화를 뒤집어쓴 것만 같았다.

그의 들숨에 어둠이 서리고, 안저 깊은 곳에서 창백한 불꽃이 타올랐다. 전성기 시절, 엔소서리 학파의 대종사였던 페이자쉬의 모습 그대로였다.

만마를 사역하던 흑마법사, 천 번 저주받을 악당, 이름 담을 수 없는 자, ‘파괴의 페이자쉬’.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영체는, 성격 나쁜 농담을 주워섬기며 웃고 떠들던 노인이 아니다.

“부정하지 마,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우리의 삶을 우리가 형틀이라 부른 이유는, 우리의 인생이 곧 회한이었기 때문이니까.”

‘후회하시나요, 선생님?’

천 번을 되산다 한들 내가 어찌 후회하겠느냐.

‘그렇다면 제가 선생님의 후회가 되겠습니다.’

그러려무나. 착한 아리아. 네 심성이 고와서, 나 같은 자조차도 스쳐 가지 못했구나.

‘사실 거짓말이었어요,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만난 그 순간에도, 후회한 적 따윈 없었답니다.’

알고 있었다, 아리아. 너는 나를 증오하기엔 너무 선한 아이였다. 그러니 내게 남아 다오. 나를 더 연민해 다오. 가지 마라. 가지 말거라.

‘아아, 선생님. 이제 누가 선생님을 위해 울어 줄까요.’

“후회한다, 아리아. 후회하고 있어.”

페르난데스는 페이자쉬의 눈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떨었다. 그 시절의 풍경이, 싸늘하게 식은 아들의 유해 더미를 바라보던 그 순간이 이토록 선명했다. 그때 느꼈던 감정, 그 시절의 절망과 회한이 다시금 그의 심장을 좀먹어 들고 있었다.

울컥, 피눈물이 흘렀다. 대마법의 반동 탓이 아니다. 줄어든 수명 때문이 아니었다. 절규하는 영혼이 육신에 영향을 미쳐, 무너지는 육체가 흐느끼고 있었다. 페이자쉬 시절, 눈물이 모두 말라 버렸으니, 이제 그의 눈이 흘릴 수 있는 것은 혈액뿐이었다.

“너를 품은 나날을, 네가 내 곁에서 웃어 보였던 그 순간들을 후회한다. 너와, 네가 남긴 것들을 지키지 못한 나의 나약함을 후회한다. 살기 위해 살았던 그 모든 순간들을 후회한다. 죽기 위해 죽었던 나의 선택조차도.”

-페르난데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삶 자체가 후회였으며, 그 마지막 회한을 되잡을 수 있는 기회를 마침내 얻었거늘!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이제 와 수명을, 이제서 목적을 생각하라고? 개소리하지 마!”

-…….

페이자쉬의 눈에서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비틀린 얼굴을 지닌 바싹 마른 노인이, 힘없이 그의 곁에 내려앉았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의 목적이었다. 살아 있는 것, 숨을 쉬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어! 후회를 되돌려 다시 시작하는 것. 첫 삽을 뜨는 순간부터 마지막 흙더미를 쌓아 올리는 순간까지도!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봉분에 올라갈 묘비명이 실패라 하더라도?

[죽음은 종착역도, 새로운 시작도 아닌. 과정에 불과하지.]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페르난데스는 눈가를 찡그리며 뒤를 돌았다. 드넓은 초원에 홀로 앉아 있었으나, 지금 이제 그의 뒤에 라비라타가 다가와 서 있었다.

라비라타는 피 흘리는 페르난데스를,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서 있는 페이자쉬를 바라보았다.

-나를 눈치채고 있었나. 파라오?

[그렇다. 뭄토를 죽이기 위해 영혼계를 넘어갔던 그 순간부터, 짐은 너를 볼 수 있었다.]

-다행이로군. 내 존재가 페르난데스의 정신분열로 만들어진 환각은 아니라는 뜻이니.

[그렇게 생각한 적 없으면서, 재미난 소리를 하는구나. 주문술사.]

라비라타는 페르난데스의 곁에 다가가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짐이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으나, 지금은 좋은 시간이 아니겠구나. 하지만, 우리의 거래에 대해 맹세하겠느냐?]

“……맹세?”

[언약은 숭고한 것, 신전 앞에서 나눈 우리의 거래는 이미 그 자체로 계약이 되었으나, 짐은 그대에게 직접 듣고자 한다. 당장 그대에게 바라는 바가 있으나, 그대에겐 시간이 필요한바. 짐은 그대의 약속 이행을 유예하고자 한다.]

“그게 무엇인가.”

[그대가 죽은 후에, 짐의 조건 세 가지를 들어 다오. 짐이 말했듯이 죽음은 그저 과정에 불과하니. 짐은 산 페르난데스의 시간이 아닌, 죽은 페르난데스의 시간을 구매하고자 한다.]

라비라타는 황금 마스크 아래에서 조용히 웃었다.

[이는 짐이 그대에게 보이는 경의로다.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그대가 한 일이 어떤 것인지 알겠는가?]

아시트 사령술을 익힌 이후, 페르난데스는 초원에 앉아서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이 일주일이었다. 이 대지 지반 아래에 갇힌 영혼계와 직접 소통하여, 망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군율을 맞추어 적의 진로를 방해했다.

때론 진군하고, 때론 퇴각하고, 때로는 노출되며. 페르난데스는 적들을 교란시켰다. 카라드스카르의 군세는 지금 이 순간 황무지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본디 하나의 흐름이 되어 제국을 향해 진군했어야 했을 그 강대한 군세가 대지 위에 흩어져 있었다. 이따금 등장해 기습하고, 소리 없이 사라지는 망령들에 의해서.

드넓은 초원이 미로처럼 변해 있었다. 들불처럼 번지던 놈들의 군세는 지금 초원 위에 정체되어 있었다.

이십만 대군이라. 결코 이만여 명으로 막아 낼 수 있는 수가 아니다. 그러나, 산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적들의 움직임은 카라드스카르의 진격에 혼란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건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이십만 기병을 고작 이만여 명으로 막아 낸 것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겠지만, 페르난데스는 이 초원에 가만히 정좌한 채로 기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한계를 넘어선 주문의 사용으로 깎여 나가는 수명과, 영혼 하나하나를 직접 대면해 조율하는 섬세한 술식의 활용. 저 자신의 영성조차 그사이 마모되어 가는 고통을 오롯이 감내하며—

“내가 한 일……?”

[그렇다. 그대는 지금 그대만의 왕조를 만들어 내었다.]

라비라타는 부드럽게 웃었다.

[파라오는 그저 직책이 아니며, 단순한 군주가 아니다. 그 자체로 신이자, 오롯한 태양이자, 영원히 지지 않을 빛이며, 동시에 만백성의 어버이가 된다. 파라오의 존재는 그 백성들을 영원토록 기억될 수 있게 하지. 그러니 하나의 파라오는 그 치세 동안 시대의 이름이 된다.]

지금 이 대지 위에 그대가 일으켜 세운 자들이, 누구의 이름을 부르며 싸우고 죽는가?

[그대다. 그대가 저 아래 묻혀 삭아 가던 저들에게 삶을 주었으니. 저들은 그대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 가리라. 단순한 주문술사들은 결코 하지 못할 일이다. 그대는 저들 하나하나를 직접 불러 세워 저들의 삶을 존중했노라.]

이제 그대가 저들의 존중을 받을 시간이로다.

[그대는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저들이 그대로 하여금 그리되었으니. 짐은 이바리스의 신이다. 그리고 이제 짐은 대황야의 신을 마주했구나. 그대가 저들의 태양이 되었도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페르난데스는 그제야 자신과 연결된 이만여 망령들의 외침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 대지 저 아래의 마력석 광맥, 그 흔적을 따라 그와 연결되어 지금도 일사불란히 적들을 짓밟는 저 망령들의 외침이.

하나하나가 작고, 아스라한 외침. 그것들이 모여 메아리치는 소리가.

자신들의 영원을 기억하는 자에게 바치는 경의. 그 존재를 영원히 기억하리라는 다짐이.

-세르너드!

한 망령이 그렇게 외치며 적들의 야영지를 향해 진격했다. 또 다른 장소, 다른 전장에서도.

-세르너드!!

망령들이 그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나갔다. 적들의 수레와 보급품에 불길이 치솟고, 사람과 군마가 비명을 내지르며 공포에 떨고 있었다.

[올곧고 바르다. 그대의 과거가 어찌 되었든, 그대의 현재는 그렇지 않다. 봉분 위에 쌓아 올릴 묘비명을 실패라 부르겠느냐? 짐은 그 묘비명을 ‘노력’이라 부를 것이며, 그 무덤가를 뚫고 다시 일어서 도래할 존재에게 그대의 이름을 붙이겠노라. 삶이 그대에게 형틀이었다면, 그대의 형기는 곧 끝나리니. 자유를 찾아 해방된 이후, 그대는 비로소 짐과 같은 시야 속에서 짐의 계약을 상기하리라.]

라비라타는 피로 속에 비틀거리는 페르난데스를 부축했다. 그녀는 반쯤 눈이 감긴 페르난데스를 안아 올리며 핏물로 얼룩진 얼굴을 쓸어 닦았다.

[그대의 나날은 저물어도, 그대의 시대는 이제 시작되었다. 그대는 충분히 노력했으니, 지금은 잠시 눈을 붙이거라.]

이십만 대군의 진격이 이 순간 멈췄다. 대북진이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지금과 같이 정체된 날이 없었다.

키르자트는 카라드스카르의 진군 경로에서 벗어나 전황을 다스릴 시간을 얻었다.

제국의 징병창이 정상적으로 가동되어, 제국 전역에서 병력이 모이고 있었다.

수인 호족들은 절망적인 산개 전투 속에서 물러나 태세를 정비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다만 유예를 얻었을 뿐. 전황은 여전히 아슬하게 승패의 경계면 속에서 걸려 있었지만—

반격을 준비할 시간. 그 짧은 시간이 필요했던 문명 사회에,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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