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19화 (320/388)

319. 꼭두각시들의 전쟁 (16)

르네 필리파 드 카르벨리에. 제국 역사상 최초의 여황제이자, 선대 황제의 폭정을 종식시키고 백성들을 구원한 대영웅이며 아비의 복수를 스스로 이루어 낸 여걸.

그것이 지금 백성들 사이에서 떠도는 그녀에 대한 풍문이었다. 가십은 모든 소문 중에 가장 빨리 퍼지는 법이며, 더군다나 아이언사이드의 여론 조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끝에 만들어진 이미지였다.

그래서, 르네 필리파는 자신의 제위를 ‘기증’받았다고 여겼다. 이 월계관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 생각이 그녀의 마음을 언제나 깊게 누르고 있었다.

‘황제다워야 한다.’

황제란. 군주들의 군주가 되어야 한다. 일국의 군주가 백성들의 어버이라면, 황제는 그 군주들 속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야기 속의 황제들은 언제나 그랬다. 실제 제위를 이양받는 자들은 대개의 경우 정치력이 뛰어난 능구렁이들이었겠으나, 적어도 르네는, 자신의 정치력으로 입지를 다진 것이 아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일어나라.”

그녀는 주저앉아 헐떡이는 병사를 직접 일으켜 세웠다. 농민병으로 보이는, 추레한 외모의 사내는 찬란하게 빛나는 르네의 갑주와 황금 월계관에 겁을 집어먹고 움츠러들었다.

“일어서라. 제국의 아들아. 네 창을 들고 네 조국을 지켜라.”

“저, 저, 전하!!”

전하라는 호칭은 황제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무지한 농민병은 반사적으로 그렇게 외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르네는 자신의 망토가 더러워지는 것에 아랑곳없이 무릎을 꿇어, 그를 부축했다.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다.”

충격과 두려움에 덜덜 떠는 농민병을 일으켜 세우고, 르네는 기마에 올라 군영을 훑었다. 전장에 내려앉은 절망이 그들 위에 도사리고 있었다.

“기병 원수. 다음 공세는 언제쯤일 것 같나.”

“놈들의 빈도가 점차 잦아지고 있사옵니다, 폐하. 지난 간극이 반나절이었으니, 적어도 그보단 빠르리라 예상합니다.”

“정보가 부족하구나.”

“트레뮐레 백작의 부재가 치명적이었사옵니다, 폐하. 이번 전쟁이 끝나고, 아이언사이드의 조직망을 개편해야 하옵니다.”

“이번 전쟁이 끝나고? 하하…… 경의 마음가짐이 올곧군.”

르네는 밝게 웃으며 기병 원수의 등을 팡팡 쳤다. 무릇 뛰어난 지휘관이라면 전쟁 이후의 일에도 집중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한결 부담을 덜어낸 르네는, 기병 원수를 잠시 바라보다가 곧 기마를 돌렸다.

“제장들을 모아야겠군. 십 분 후에 보지.”

“예, 폐하.”

* * *

르네의 야전 회의엔 단지 고위 귀족만 모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모든 야전 지휘관들을 동시에 보길 바랐으며, 따라서 원수에서부터 일선 부대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휘 계통이 이 자리에 모였다.

백이십 명. 지금 서부 팔츠에 모인 지휘 장교들이 그 정도가 되었다. 대단히 많은 인원이었지만, 르네는 그들이 모이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른 명인가.”

지난 회의에서 사라진 인원이 서른 명. 그들이 황제의 명을 거역했을 리가 없으므로, 그들의 부재가 뜻하는 바는 명징했다. 부재한 지휘 장교들의 이름은 전사자 명부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송구하옵니다. 폐하.”

“그대가 왜? 내가 경들에게 죄스럽구나. 그대들은 잘해 주고 있어.”

“폐하…….”

씻을 수 없는 짙은 암운이 회의실 안에 내려앉아 있었다. 이는 전장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였다. 황제의 어전에서도 이런 상태라면, 탈영병이 지극히 적은 지금이 오히려 기적적일 정도다.

“놈들의 공세가 점차 빈번해지고 있다. 경들은 이것이 무슨 의미라 생각하는가?”

“놈들의 본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폐하. 그리고 뷜랑의 세포르 공작은…….”

“수인 호족들이겠지. 경들도 세포르 공작가가 호족들의 괴뢰에 불과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 않은가?”

“크, 크흠……!”

제국의 선제후 가문이 황무지 출신 무지렁이들에게 점거되었다는 이야기를 공적인 자리에서 하긴 쉽지 않았다. 제장들은 낯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하트테이커 대족장은 내 친구이며, 믿을 수 있는 군주야. 또한, 대족장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세르너드 경은 나의 혼약자이기도 하지. 경들은 호족 연합이 제국의 변경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을 걸고 외적을 막아내고 있다는 점을 잊기라도 했나?”

“폐하, 하오나…….”

“그만. 이 이야기는 그만하지. 이번 전쟁이 끝난다면 세포르 공작가의 멸문을 명문화하고, 하트테이커 대족장에게 선제후관을 내리도록 할 것이니.”

“폐, 폐하! 제국의 천 년간 선제후관이 다른 이들에게 이양된 역사가 없습니다!”

“우린 지금 역사를 새로 써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제장들은 들으라!”

르네는 옥좌의 팔걸이를 강하게 내려치며 외쳤다.

“제국의 역사 동안 황제가 제 백성들을 잡아먹고 악마의 농간에 놀아났으며, 교회가 황실을 적대하고 제국의 백성들을 심문하며, 분열된 제국의 제후들이 서로를 향해 창칼을 드리운 적이 있던가?”

“…….”

“제국이 영원할 수 있던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역사, 귀족, 제후, 황제. 그 따위 허울 좋은 위명이 아니라, 제국에 살아가는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이야. 우리는 제국의 백성이다! 그리 자랑스럽게 외칠 수 있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경들에게 지금, 제국은 자랑스러운가?”

“폐하……!”

“내게는 아니다! 위대한 샤를 대제 이래로, 이토록 제국의 기틀이 무너진 날 따윈 없었다! 외무서경!”

“예, 폐하!”

르네가 외치자, 군영 속 법복귀족 하나가 일어서 깊게 고개를 숙였다. 르네는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하라! 지금 선제후 소집령에 응한 제후들이 얼마나 되는가!”

“그리모아르 후작은 보병 이만육천을 이끌고 팔츠로 향했다 전합니다.”

“그리고?”

“……송구하옵니다, 폐하.”

“이것이 현실이다!”

적들의 공세가 초기 예측보다 적었다. 아마도, 대황야에서 지금도 분전 중인 로베르의 공이 있을 것이며, 또한 팔텐노이아로 향하는 길목을 막아 선 호족 연합의 공도 있을 것이다.

초기 정보로 이십만 대군이라 했던 이들이 지금에 오면 오천, 육천, 또는 만여 명의 기병들로 파상적인 공세를 해 오고 있었다. 적들은 지금 규합하지 못하고 있다.

기적적인 일이다. 해일이 방파제 위에 부서져, 항만에서 마침내 잔물결이 되는 것처럼. 적의 본대와 팔텐노이아의 사이에 놓인 모든 지역에서 지금 제국의 방파제가 일어서고 있다는 뜻이다.

정보가 마비되었다. 아이언사이드들은 점조직이며 이들을 총괄하는 것은 로베르의 역할이었다. 그런 자가 지금 황무지에 직접 뛰어들어야 했을 지경이니, 얼마나 다급한 상황이겠는가.

그런 와중에도, 제후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제국은 무너지고 있다. 황실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창칼로 제위를 이양받은 선례가 있는 이상, 저들 또한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법도가 없기 때문이다.

뭇 제후는 승냥이들이다. 황실은 결코 그들의 앞에서 약점을 드러내선 안 된다. 그러나 르네의 제위 초기는, 비록 영웅적인 거사였으나 결국 무력 찬탈이라는 오명을 완전히 벗어 내긴 어려웠다.

“그대들이 ‘선제후와 상관없는 외부인’이라 부른 저 호족 연합의 수인들조차도 제국의 수호를 위해 목숨을 걸고 막아 내고 있다! 그런데, 제국민이란 자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그대들이 그리 지키고자 하는 ‘선제후관’을 쓴 위대한 대귀족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나?”

“폐하……!”

“그대들의 눈에서 절망이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 포기하긴 이르다! 선제후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오히려 나와 그대들이 백척간두의 상황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희망을 가져라. 침묵하는 선제후들조차도 우리의 희망을 전해 느낄 수 있도록!”

선제후들의 생각이 손에 잡힐 듯 읽혔다. 황제가 무너지고 팔텐노이아가 불타오르면 이를 명분 삼아 국토 회복을 기치로 올려 수도로 진격하리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저들은 적들의 군세를 모른다. 정보 불균형이 가져온 뼈아픈 현실이며, 지금 그녀가 이 정보를 전달한다 한들 그대로 믿을 제후 따윈 없으리라.

저들은 적들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외적에게 패배한 황제가 약한 것이며, 그 외적을 격퇴한다면 자신들의 권위가 드높아지리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니다. 황제가 무너진 이후, 수도가 함락된 이후에. 일차적 목적을 달성한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다. 그건 메뚜기 떼의 침공과 같이, 걷잡을 수 없는 재난이 될 것이다.

그러니, 알려 주어야 한다. 황제는 능히 이 상황을 이겨 낼 수 있으며, 그 후에 황제의 창칼은 그대들에게 가리라고. 다행히, 제위 찬탈로 인해 황제의 명분은 실추되었어도, 전쟁 군주로서 황제의 권위는 여전히 드높았다.

“폐하, 폐하!!”

그때, 군영 막사의 휘장이 걷히며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달려와 넙죽 엎드렸다. 어전에서 보이기에 대단한 무례였으나, 대신들은 그를 타박하지 않았다. 병사가 건넬 정보가 어떤 것일지 예상이 된 탓이다.

“놈들이 왔는가?”

“예, 예! 폐하! 적들의 군단이 진군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빨랐군. 점점 더 빨라지고 있어.”

-절그럭.

르네는 자리에서 일어서 무장을 챙겨 들었다. 카르벨리에 영지의 규중 여식으로, 고작해야 단검 한 자루를 쥐어 본 것이 전부였던 그 시절 르네는 이미 없었다. 그녀는 장검을 허리춤에 차고 일어서서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다음 회의 때에도, 경들 모두가 참석하길 바란다.”

죽지 마라. 그런 단순한 말 한마디보다 더 큰 격려였다. 지휘 장교들은 진심으로 그녀의 뒤에 부복하며 외쳤다.

“신성 레바인테르 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 * *

-막아라! 막아! 물러서지 마라!!

서부 팔츠는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적들은 어설프게 쌓은 목책과 방진들 사이를 유린하며 너무나 쉽게 보병들을 학살해 나갔다.

그 사이에서도 제국군 일선 장교들 중엔 영웅적인 활약을 보이는 무장들이 있었다. 기병의 돌격에 앞서 맞서서도 방진을 유지하며 전열을 굳히는 종류의 활약이었다.

그러나 보다 넓게 전장을 바라보자면, 그건 어떤 비극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 개인의 무용은 집단의 폭력 앞에서 무참히 꺾여 나간다.

서부 팔츠는 시시각각 병력을 충원받고 있었으나 고작 그것으론 부족했다. 제국 전역의 징병창들 중에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지역은 황제의 권위가 닿는 팔텐노이아 인근에 불과했다.

선제후들은 침묵했다. 서부 팔츠는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황제는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아니, 그들 모두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제국 천 년간 그 자리를 지켰던 위대한 수도. 샤를 대제가 직접 쌓아 올린 팔텐노이아의 토대가 코앞에 있었다. 제국의 몰락을 상징하는 것처럼 위태롭게.

서부 팔츠가 무너진 이후 더 이상 팔텐노이아로 향하는 방면을 수비할 요새가 없었다. 이곳은 일종의, 최후의 보루나 다름없었다.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

-장군께서 전사하셨다!

-도망, 도망쳐!!

전열이 무너진다. 르네는 기마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적들의 병력은 어제보다 많았다. 그 전날에 비하자면 두 배에 가까웠다.

뷜랑이 마침내 무너졌는가. 수인 호족들의 저항이 끊어졌단 말인가. 호족 연합이 방어를 포기했으니 남은 것은 적들의 본대뿐이다.

“끝인가…….”

황무지에서 달려오고 있을 이십만 대군 중 선봉. 최초 집계로 오만여 병력의 기병대들. 그중에서도 뷜랑의 방어선을 뚫고 수도로 진군한 일만에서 이만여 명가량의 적병.

고작 그 수를 막아 내지 못했다. 대비가 부족했다. 시간이 모자랐다. 수많은 변명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뒤헝클었다. 그 꼬이고 꼬인 실타래 끝에 나온 결론은 언제나 하나였다.

여기가 끝인가? 제국 최후의, 망국의 황제로 역사에 남을 일만 남았단 말인가?

“폐하, 옥체를 보중하소서.”

“보르아 경.”

“신은 기꺼이 두 분의 군주를 섬겼으나, 세 번째 주군을 섬길 생각은 없사옵니다.”

보르아는 털털 웃으며 투구를 썼다. 선대 카르벨리에 공작에서부터 지금까지, 보르아는 두 명의 카르벨리에를 섬겼다. 세 번째 주군은 기사의 수치가 아닌가. 그는 고개를 흔들며 기병창을 들어 올렸다.

“선대 공작 전하께서 지난 전황 속에 제게 하명하신 일이 있사옵니다.”

“그게 뭐지……?”

“백성을 지키지 못한 나의 나약함을 두려워하라.”

-철컥.

보르아는 바이저를 내렸다. 투구의 틈 사이로 그의 굵은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공작 전하께서는, 제 자신의 나약함만을 두려워하라 하셨으니, 신 리뷔에의 보르아. 적의 군세 앞에 한 점 두려움 없으오리다.”

“보르아 경.”

“그러니 폐하께오서도 두려움 없이 보전하소서. 폐하께선 병사들의 죽음이 아닌, 백성들의 생존을 더욱 중히 여기셔야 하옵니다. 노신의 마지막 충절이니, 부디 귀 기울여 주소서.”

“그대를 기억하겠다.”

“신 또한 폐하의 기사였음을 기억하겠습니다.”

보르아는 리뷔에의 기사들을 이끌고 군영을 넘어 진격을 준비했다. 카르벨리에 가문의 수족이라 할 수 있을 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녀를 향해 짧은 경례를 올렸다.

르네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마음 속에 깊은 절망이 내려앉았으나, 그녀는 도저히. 죽음을 향해 진군하는 그녀의 가신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웃었다. 이 전장 속에서 또 다른 영웅 서사시를 그려 낼 그들에게, 그리고 비극으로 종결될 저들의 분투에 대한 최선의 경의로.

그 순간.

-부우우우우—!!

뿔나팔이 동쪽 너머에서 들렸다. 군영의 모든 자들, 아니. 이 전장의 모든 이들은 동녘이 터 오르는 언덕 너머로 순간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 *

“팔리아메인 경, 알트카이른의 기사들과 함께 동쪽을 맡으라.”

“예, 전하!”

“파프나르메어 경, 알트하이스의 기사들과 함께 서쪽을 우회해 진군하라.”

“예, 전하!”

“알트베르트의 기사들은 나의 군기를 따라 정면을 돌파한다. 들어라!”

-철컥!

-철컥!!

그의 말에, 도열한 모든 기사들이 일제히 창칼을 움켜쥐었다. 철컥, 강철 건틀릿이 칼자루를 움켜쥐며 시끄러운 마찰음을 내었다.

동녘 터 오르는 언덕을 배경으로, 검은 망토를 두른 젊은 기사가 군기를 높이 들었다. 강철의 도시, 알트베르트의 깃발을!

“경들은 기억하는가? 경들이 서원했던, 그 맹세를 기억하는가? 나의 앞에서, 나의 검 앞에 맹세했던 그날을 기억하는가!”

-세상 모든 불의를 구원할 수 없어도, 병들고 지친 자가 뻗은 손길을 무시하지 않으리라!

“법도와, 외교와, 정치와, 현실이 그대들을 가로막는다! 때때로, 정의는 가장 하찮은 동편 조각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그런 순간에도 기사 됨을 포기하지 않은 머저리들이다!”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정의는 드높지도, 숭고하지도 않다! 이제 우스운 농담으로 취급되는 값싼 동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경들은 기억하는가? 그 가벼운 말 한마디에 목숨을 걸어 일어선 우리의 선조들을 기억하는가!”

-데인이여, 가호하소서!

망토를 두른 기사가 고삐를 움켜쥐며 외쳤다. 기마가 앞다리를 들고 일어서 길게 투레질하여, 망토가 바람결에 거칠게 흩날렸다. 기사는 군기를 높게 쳐들고 외쳤다.

“경들의 왕을 따르라. 나는 결코 경들의 뒤에 서지 않으리니. 데인이여, 진군하라! 적들에게 죽음을!”

-원탁의 기사들이여! 적들에게, 죽음을!!

-부우우우우!!

-두두두두두두!!

능선을 따라, 한 무리의 기병들이 햇살을 등지고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며, 르네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바보들…….”

동부 왕국은 결코 제국의 환란에 응답해선 안 된다. 적어도 데인 왕국은 결코. 라 메르티옹의 양보로 데인 왕국은 이미 동부 왕국 연합 전체의 권위를 잃어버린 참이었다.

왕국의 권위, 외교적 실책, 정치적 견제…… 그 모든 것들을 방기하고, 젊은 청년 기사가 자신의 가신들을 이끌어 지금 여기에 도래했다.

바보들. 저들에게 어떤 이득도 없는 타국의 고난일 뿐인데…… 이 전장의 성패는 저들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인데도. 저들은 단지, ‘도와 달라’는 그 허무한 말 한마디에 목숨을 걸어 이 자리에 달려왔다!

“보르아 경…….”

“예, 폐하……!”

르네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자신의 투구 바이저를 내려 썼다.

“저 멍청이들을 지원한다. 나와 함께 출정하겠는가?”

“영광입니다, 폐하!!”

“우리는 제국이다, 보르아 경. 저 머저리들에게 본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신이 직접 외칠 수 있는 영광을 하사하시겠나이까?”

“기꺼이 그리하라.”

“송구합니다, 폐하!”

보르아는 투구 너머로, 물기 젖은 목소리로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적들에게 죽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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