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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20화 (321/388)

320. 꼭두각시들의 전쟁 (17)

까마귀가 저녁놀 아래에서 활개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 이후, 뜨겁던 병사들의 피가 차게 식는 이 순간은 저들의 시간이다. 르네는 멍하니 까마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시체까마귀들은 죽음이 아닌, 삶의 상징이겠구나. 가장 치열하던 죽음의 시간을 넘어서, 산 자들이 한숨 내쉬는 시간에 찾아오니. 그것이, 못내 참으로 부럽구나.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폐하.”

“말씀을 편히 놓으시게. 오늘 제국은 그대들에게 빚을 졌으니.”

“하하, 누가 들으면 저희가 홀로 온 줄로 알겠습니다? 데인 왕국은 폐하의 지원 요청을 받아 파병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비센테는 쾌활하게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의 뺨에는 여전히 바싹 굳은 적들의 피가 묻어 있었다. 르네는 이 강건한 청년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마주 웃어 보였다.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는데, 이걸 거래라 칭하겠나?”

“글쎄요. 뭐라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 왕가는 다소 곤란해집니다만.”

“그대는 솔직한 사람이로군.”

“세상의 균형을 맞춘다 생각합시다.”

그 뼈 있는 농담 섞인 말에, 르네는 픽 웃고 말았다. 다른 이들이 너무나 음흉하니, 적어도 자신은 진솔하여 그 균형을 맞추겠다는 의미였다. 재치 있는 자로군. 르네는 고개를 저었다.

“나를 원망하지는 않나? 다른 모든 왕가라면 모르되, 그대의 핏줄은 제국을 원망할 이유가 있을 터인데.”

“제가 원망해야 할 대상은 모두 죽었습니다. 따지고 보자면, 폐하께서 제 복수를 대리하신 격이지요.”

“제국을 대표해서 사죄하고 싶군. 선황제의 악덕에 그대의 선왕과 그대가 고초를 겪은 것을 말이야.”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이제 더 이상 남지 않았고, 이 자리에 있는 저희는 지난 과오가 아닌, 앞으로의 책무에 대해 논해야 할 테니까요.”

“달변가로군, 그대는.”

르네는 눈앞의 청년이 동부 왕국의 기사왕이라는 것을 쉽사리 믿기 어려웠다. 지금 그녀에게 보이는 것은 검박하고 털털한, 시골 청년 기사의 모습이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적들을 도륙하며 진격하던 사자 같은 기사왕의 위엄은 이 자리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르네는 그런 자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분노와 감정을 기능적이라 표현하던 냉담한 사내를. 그 무뚝뚝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켠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르네는 차를 입에 머금었다.

“앞으로의 책무라. 그대가 이토록 진솔히 나를 대하여 주니, 내 솔직히 말하지. 그대는 어디까지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가?”

“어느 정도의 도움을 바라십니까?”

“지금 이 순간에, 평원 위에서 적들의 기마 부대에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이들은 그대들 정도가 전부인 실정이라네. 필요한 도움이라 한다면…… 그래. 제국의 강역을 밟았던 모든 자들이 우리의 강역 아래에 모조리 파묻힐 때까지. 그 정도가 좋겠군.”

“까마귀들이 포식하겠군요.”

비센테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어떤 제안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일국의 군주가 스스로 용병 됨을 자처하는가?”

“설마 동부 최정예 기사단을 무보수로 사용하고자 하심은 아니겠지요, 폐하?”

“황제의 관과 제국의 강역을 제외하고, 그대가 바라는 바를 말해 보게. 황금인가, 이권인가?”

동부 왕국은 오랜 시간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행정망에서부터 무역로, 보다 작게는 야장 기술과 마학 전파에 이르기까지. 제국은 명실상부히 이 대륙에서 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융성한 국가이므로.

동부 왕국 연합의 기술력과 행정망은 엄밀히 따지자면 제국에 반세기에서 한 세기가량 뒤처진다. 왕국 연합의 군사력이 지금 당장의 상비군으로 제국을 압박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제국의 진정한 저력은 ‘장기전’에서 나오므로, 군사력으로조차 상대가 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황제에게 직접 거래를 제안할 수 있는 이 순간은 비센테에게 있어 천금과 같은 기회다. 동부의 소왕국들 사이에서 그 누가 제국의 황제에게 이권을 두고 거래를 할 수 있을까.

“호의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수한 청년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호의를 바란다고. 르네는 한동안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긴, 이권과 황금을 바랐다면 라 메르티옹을 아무 조건 없이 제국에 반환하진 않았겠지…….’

그뿐이랴. 지금의 참전은 비센테에게 있어서도 대단히 큰 정치적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동부 왕국들이 마침내 제국의 영향력 밖으로 벗어나 웅비하려는 이 시점에서, 연합 소속의 군사 강국이 독단적으로 제국을 지원한 격이다.

르네는 다소 차갑게 그를 바라보았다. 호인이고, 선인이며, 어쩌면 영웅이라 불러 마땅한 이지만…… 좋은 군주가 되긴 어렵겠군.

“데인의 비센테 왕. 그대가 내게 진실되었고, 나 또한 그대의 조력에 감사하고 있으니 마지막으로 조언하겠어.”

“경청하겠습니다. 폐하.”

“내가 바란다면 동부 왕국 연합의 이름을 데인 연맹으로 바꿀 수 있네. 내가 바란다면 페이른 왕가의 강역이 데인의 것이 될 수도 있고, 그대의 나라 주위 소왕국들이 그대의 변경백이 되길 자처하게 만들 수도 있네.”

르네는 서늘하게 말했다. 이건 황제의 오만함이 아니라 담담한 사실 명시에 불과했다. 제국은 오랜 시간 동안 동부의 소왕국들에 첩보 인력을 파견해 왔다.

어떤 한 국가가 득세하면, 다른 국가를 지원한다. 지원받은 국가가 융성하면, 내부에서부터 파괴하기 시작한다. 사보타주와 정치 모략, 때때로 암살과 흑색 선전을 동원하여. 제국은 국경선을 마주한 하나의 강대국이 나타나길 바라지 않았으므로.

그런 현실 속에서, 동부 왕국 연합은 여전히 소왕국들의 어설픈 연맹체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데인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가장 최근에 제국의 암수에 당했던 국가였으므로.

비센테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잠시 르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끙, 하고 짧게 신음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가, 곧 들어 올렸다.

“폐하께서는 저희 왕가에 빚을 지고 계시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지. 제국은 그대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혔으며, 도리어 지금 그대의 조력에 활로를 얻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저희 왕가가 그때의 일로 얻은 것을 알지 못하시는군요.”

“얻은 것……?”

“선황제의 공작에 선왕께서 서거하고, 제 목숨마저 위협받았으며 제 조국의 기틀이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폐하. 저와 제 신하들이 어찌 그 순간을 이겨 낼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비센테의 눈동자에서 빛이 타오르는 듯했다. 석양이 막사의 창을 통해 길게 늘어져, 그의 그림자가 마치 불꽃처럼 일렁거렸다.

“전설이 도래하고, 신화가 일어나는 나날이었습니다. 저와 제 신하들은 죽는 순간까지 그날을 잊지 못할 테지요. 데인께서 직접 일어나시어 당신의 검을 하사하시고, 왕국의 대모께서 돌아와 망령과 거인을 물려 내셨으며, 한 성자가 스스로 칼을 쥐어 왕가의 그림자를 걷어냈으니—”

비센테는 부드럽게, 그러나 단단하게 웃었다.

“우리는 그날 정의가 도래함을 보았습니다. 바른 것을 바르다 말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용기와 신념을 넘어선 믿음. 신화 속 조상들의 믿음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니, 감히 제국의 폐하께 말씀드리기를.”

르네는 물론 저 먼 동부에서 일어났던 소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는 것과, 그 당시의 일을 직접 겪은 자의 소감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비센테는 이 순간, 동화 속 기사왕처럼 올곧은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어리석다고 말할지라도, 저희는 그 하찮은 가치를 가장 숭고하게 따르기로 서원한 기사들입니다. 데인의 원탁 회의는 정의를 바랐으며, 저는 지금 이 자리에 기사 비센테가 아닌, 데인의 정의로 진군했습니다. 그러하니, 세상의 균형을 맞춘다 여기시지요.”

그는 정치적인 자를, 또는 흉계를 꾸미는 자들을 악인이라 정의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자의 행동 양식을 긍정하며…… 세상의 균형을 맞추겠노라 천명한 것이다. 누군가가 저울추 너머에 악의를 쌓는다면, 그 반대항에 스스로 올라서겠노라고.

머저리. 머저리들. 이용당하기 딱 좋은 멍청이들. 르네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대와 같은 바보들을 싫어하지 않네, 비센테 왕. 내 사과하지. 그대의 뜻을 욕보인 셈이 되었군.”

“과찬이십니다. 폐하.”

“하지만, 다른 조언을 하나 더 하자면……. 임자 있는 여인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아.”

“하하, 폐하. 저는 아들도 있습니다.”

“왜 내 주위 남자들은 자기가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지 못해 안달인지 몰라…….”

르네는 픽 웃으며 손을 뻗었다. 비센테는 그녀의 손을 맞잡고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천 마디의 조항이 적힌 계약 서류보다 공고하게. 이 순간, 두 군주가 하나의 적을 영원히 상대하겠노라는 협정이 맺어졌다.

“해서, 이제 어쩌실 요량이신지요?”

“뷜랑을 수복하고, 선제후 소집령을 다시 제청해야지. 뷜랑의 강역을 회복한다면 선제후들은 더 이상 방관하지 못할 것이네.”

제국의 징병창이 다시 정상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르네는 그 기간을 한 달가량으로 보고 있었다. 적들의 선발대가 무너진 지금, 후속 병력이 제국 전역에 흩어지기 전에 그 물꼬를 움켜쥐어야 했다.

“우선, 호족 연합과 선을 대어야 하네. 우리 중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놈들을 대적한 이들이니. 하지만 오늘은 우선…….”

가세나. 르네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막사 밖을 빠져나갔다. 전투가 끝난 서부 팔츠에 하나둘, 모닥불이 올라오고 있었다. 병사들은 죽은 자들을 애도하기에 앞서서, 살아남은 하루에 기뻐하고 있었다.

“산 자들을 위한 연회를 열어도 좋겠지.”

* * *

“이봐.”

속삭임이 들렸다.

“이봐, 일어나 보게.”

깜빡 졸았나. 페르난데스는 눈가를 어루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피로에 찌들어 희미해진 시야 속에서, 한 노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넓은 평원, 라비라타의 가호 아래에 감춰진 이 평원에서. 그는 며칠 밤낮을 지새우며 망자들을 일으켜 전투를 강행하고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망자들에 모두 동조하여, 그들 전부를 일일이 제어해야 했던 탓에. 그 며칠간의 전투 피로는 가히 이만칠천여 명 분량의 피로도에 상응했다.

그 수준의 대마법은 심신의 피로에 그치지 않는다. 육신을 조금씩 살라 먹는 끔찍한 고통을 수반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지친 기색 없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노인이 어렴풋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 같았다.

“나를 모르겠나?”

“다가온다면 베겠다.”

“자네답지 않군. 엄포를 놓다니?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자네는 경고 대신 선제공격을 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나.”

멍한 머릿속에, 비로소 노인의 목소리가 인지되었다. 아는 목소리였다. 페르난데스는 그제야 칼자루를 놓았다.

“오르키스. 여긴 어쩐 일인가.”

어떻게 찾아왔냐는 물음 따윈 하지 않았다. 이 시대 최고의 정보 반사 독립체가, 바라는 자를 찾지 못할 리가 없었으므로.

그의 물음에 오르키스는 설핏 웃으며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몇 갠가?”

“내 질문은 그게 아니었는데.”

“말해 보게. 중요한 일이니.”

“……하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군. 내 잠시 보겠네.”

오르키스는 거침없이 다가와 페르난데스의 팔뚝을 쥐고, 천천히 그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곧,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죽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군, 페이자쉬. 근골이 상했고, 영성백혼 전부가 흔들려 있어. 제아무리 준신의 격을 갖췄다 하더라도, 자네는 아직 불멸자의 계단을 온전히 디딘 것이 아니야.”

“신이 될 생각은 없어.”

“아직 때를 놓친 것은 아니니, 정양한다면 그대의 천수는…… 음. 아니, 남은 수명은 보전할 수 있겠지. 삼 년 정도…… 오래 산다면.”

“나를 찾은 이유가 날 진찰하기 위함이었나?”

“그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 내 지난날 자네에게 세계의 멸망이 여전히 변치 않았노라 말했던 것을 기억하나?”

페르난데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키스는 그의 곁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쉽게도 그 미래는 변치 않더군. 하지만…… 기이한 것이 보였네.”

“기이한 것?”

“겹쳐 있어, 페이자쉬. 멸망과 희망이. 이따금씩, 운명은 죽음과 삶을 교묘하게 흐트려 놓아 우리의 눈을 속이곤 하지. 세계의 멸망이란 그 크나큰 사건 또한 그런 실타래 속에 얽혀 있어.”

페르난데스는 눈을 감고 그의 말을 곱씹었다. 희망과 멸망이 얽혀 있다라?

“멸망 끝에 희망이 있는가, 희망 끝에 멸망이 있는가. 무엇이 먼저가 될지 알 수 없군. 그게 내 한계였네. 하지만 페이자쉬. 아니……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단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면—”

오르키스는 그의 팔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대의 삶이 그 운명에 휘말려 있네. 그러니 죽지 말게. 세계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 순간이 머지않았으니.”

“응원을 하기 위해 그 먼 길을 가로질렀나. 오르키스?”

“하하, 차갑기는. 그럴 리가 있겠나.”

-화르륵!

오르키스가 움켜쥔 팔에서 뜨거운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본능적으로 팔을 빼내려다가, 적의가 없음을 알고 멈췄다.

그의 바스라진 영성, 그 조각난 틈 사이사이에 거미줄처럼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오르키스…….”

“응급처치 정도는 되겠군. 불멸자로 남아 있어 보아야 세계가 멸망하면 도루묵이니, 이건 자네에게 내 전재산을 걸었다 생각하게나.”

오르키스는 털털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페르난데스는 떠나는 그를 붙잡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3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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