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22화 (323/388)

322. 꼭두각시들의 전쟁 (19)

대황야는 더 이상 과거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대악마 뭄토가 죽음의 화신이 되어 천여 년간 집어삼킨 생명력이 한순간에 터져 나온 이후로부터, 대황야는 더 이상 황무지라 부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눈에 닿는 모든 지역이 푸릇한 들풀로 덮여 있었다. 허리춤까지 길게 자라난 이름 모를 관목들이 초원처럼 넓게 펼쳐져 있었으며, 때때로 정글이, 이따금씩 폭포와 호수가, 그리고 협곡과 계곡들이 나타나곤 했다.

지형을 기준으로 지도를 그리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의 격변이다. 아니, 황무지였던 이 대지는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짧으면 몇 시간, 길게 늘여 보아도 몇 달이면 전혀 다른 지형이 나타나곤 했다.

넘쳐나는 생명력에 대지 자체가 살아 숨쉬는 것만 같다. 지금까지 억눌렸던 오랜 사멸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이.

-천구가 날뛰는군. 비가 오겠어.

페이자쉬가 투덜거렸다. 페르난데스는 관목을 꺾어 길을 트며 걸었다. 그는 여전히 꽃망울이 터 오르는 길을 똑바로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그는 별무리 흐드러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늦어도 내일 저녁이면 도착하겠군.’

-지금 네 계획의 핵심은 카라드스카르의 암살이야. 페르난데스, 카라드스카르는 암살이 불가능해. 지금이라도 계획을 선회하는 건 어떤가?

‘내가 있기 전까지는 불가능했지.’

-다리안 쉬라이크조차도 놈을 암살하는 것에 실패했다. 우리가 무슨 수로 그런 놈을 꺾을 수 있단 말이냐?

‘페이자쉬, 이런 격언이 있지. 어떤 마법사가 가능하다고 말한 것은 거의 확실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 마법사가 어떤 현상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면…….’

-마법사의 말은 높은 확률로 거짓이다? 이봐, 이건 마학 이론 수업이 아니야. 여긴 학회가 아니라고. 상식적으로, 우리가 다리안과 맞서 이긴 적이 있기나 했나?

‘서로 전성기가 달랐을 뿐이야.’

페르난데스는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페이자쉬 또한 그 말이 마냥 변명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페이자쉬의 전성기는 말년, 시기상 대전쟁의 초입에까지 닿았을 때 시작되었다. 수십 년간의 도주와 방랑으로 쌓아 올린 경험과 재능이 꽃피운 시기가 그의 노년기쯤이었다.

그러나 다리안은 전사였다. 그의 전성기는 육체의 전성기와 거의 일치했다. 경험이 완숙해지는 서른 중반에서, 육체의 기능이 퇴락하기 시작하는 마흔 초반쯤이 그의 전성기였다. 따라서, 젊은 시절 페이자쉬는 다리안을 상대로 언제나 도주만 고집했어야 했다.

그리고 말년. 드디어 페이자쉬가 한번 싸워 봄 직하다고 여겼을 때, 다리안은 이미 은퇴해 후학을 육성하고 있었다. 페이자쉬가 느끼기에 그건 비겁한 도주였다.

-그래, 그때 놈이 만약 그 시절 우리에게 덤볐다면 결코 지진 않았겠지.

‘음……. 뭐, 그랬겠지. 그리고 본산 세계의 카라드스카르는 다리안이 은퇴하기 직전에 발호했어. 녀석이 전성기, 만전의 상태에서 놈을 암살하려 했던 것이 아니란 뜻이지.’

따라서 간단한 논리가 성립한다.

전성기의 다리안과 전성기의 페이자쉬는 동시대에 있지 않았으나, 만일 상대하게 된다면 그 승패를 가늠하기 어렵다.

카라드스카르는 은퇴 시기의 다리안보다 강인하다. 지금의 카라드스카르도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때.

전성기의 편린을 끌어올 수 있는 지금의 페르난데스가, 카라드스카르를 상대할 수 없을까?

‘그리고 지금 내 조건은 솔직히, 본산 세계 시절보다 어떤 부분에선 더 낫다고 볼 수 있다.’

-허? 내게 영육이 온전했으면 네가 나를 대적할 수 있을 거라는 건가? 뭘로? 팔씨름?

페이자쉬가 이죽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곧, 자존심 강한 여든 노마법사 두 명의 논쟁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 * *

“장군, 카간께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대체 며칠째 허탕입니까?”

“카간께서는 적의 수급을 원하셨다.”

“병사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아껴 먹어도 사흘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카간께선 이 개짓거리를 벌인 개자식의 목에 굶주려 계시다. 우리가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카간께선 우리 목으로 허기를 달래시겠지.”

바얀은 지평선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지평선 너머엔 횃불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뭐라도 좋으니 흔적을 찾아보겠다고 나선 병사들의 횃불이었다.

부관은 그 광경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며칠 전, 그들이 호위하던 보급 수레가 야밤에 홀로 불타오른 일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이 황무지의 망령들이 저지른 일이다. 놈들은 소리 없이 나타나 불을 놓고는 소리 없이 사라지곤 했다.

카간은 목을 가져오라 명했다. 그것이 적장이든, 망령이든, 또는 평원의 동족이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투로. 바얀은 그 명령을 듣는 즉시 습격당한 모든 보급 물자들의 이동 경로를 분석해 적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게 벌써 며칠 전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지금 이 평야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당연히 사기는 바닥을 쳤다. 전투에서의 패배보다 형체 없는 적을 추적하는 무의미한 이 며칠이 더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탈영병들이 속출했으며, 피해 입은 보급 수레로 인해 식량이 고갈되기 시작한 것이다.

“애초에 그른 일이었습니다! 놈들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벌써 닷새는 족히 되지 않았습니까?”

“놈들은 우리가 방심하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추적과 경계를 포기하고 돌아간다면, 그다음 피해는 지금까지보다 더 치명적일 수도 있고.”

“장군……. 우리도 투르비 장군을 따라감이 어떻겠습니까?”

바얀은 부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대화가 끊겼지만, 부관은 그 유리알 같은 눈 아래에 잠든 살의를 느끼며 뒤로 움찔 물러섰다.

“네가 탈영한다면 네 목은 내가 직접 치겠다.”

“우린 형제입니다. 같은 피를 섞어 마셨다고요! 장군…… 아니, 제기랄. 형님! 이건 개짓거리고, 카간은 미치광이고, 우린 지금 굶어 뒤지거나, 굶은 병사들에게 뒤지거나, 형님이 그리 따르는 카간에게 뒤질 일만 남았습니다!”

“네가 내 형제가 아니었다면 지금 네 목을 쳤을 것이다.”

바얀은 낮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부관은 곧 고개를 저으며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어르신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형님을 무사히 데려오라 말씀하시지만 않았어도, 저도 형님 목을 쳤을 겁니다.”

“……네놈이?”

“형님. 정신 차리십쇼. 그 작자가 약속한 위대한 전쟁이나 화려한 약탈도, 무슨 세계의 거대한 흉터도 다 허상 아닙니까? 놈은 제 아들이 뒤진 걸 복수하고 싶을 뿐입니다. 놈이 말한 그 대단한 전쟁이 지금 어디에 있답니까?”

“모든 일엔 순리가 있는 법이…….”

-피이이잉!!

그때, 지평선 끝자락에서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얀은 재빨리 고개를 틀어 등자에 곡예처럼 매달리며, 안장에서 칼자루를 움켜쥐고 뽑아 들었다.

“형, 형님?!”

“적습이다!! 놈!! 놈들이 왔구나!!”

바얀의 눈에 활기가 돌아왔다. 성과가 있었다. 이 근방이 놈들의 야영지였거나, 거점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의동생을 바라보며 외쳤다.

“병사들을 불러들여라! 당장 놈들을 친다!”

“뭔가, 뭔가 이상합니다. 형님! 망령들은 지금껏 화살 따윌 쏜 적이 없었습니다!”

-터어어엉!!

부관은 인상을 와락 구기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곧,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부관의 방패에 화살이 박혀 핑, 하고 울렸다.

그의 말에 바얀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횃불들이 지평선 너머에 넓게 깔려 있었다.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동쪽에서부터 소란이 몰려오고 있었다.

“형님, 저 방향은……. ‘도시’가 아닙니까……?”

“제기랄. 망령이 아니구나……!”

바얀은 그제야 소란스러운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땅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들의 병사들 대부분은 야영지에 말을 묶어 둔 채 이 근방을 도보로 수색하고 있었다.

적을 마주칠 것이란 예상 자체를 하지 않은 탓이다. 방심이라 불러도 좋았고, 전략적 오판이라 불러도 좋지만, 바얀으로서는 억울할 따름이었다.

망령들은 닷새가 넘는 시간 동안 나타나지 않았고, 살아있는 저항 세력은 모두 동쪽 저 너머 도시에 가로막혀 있었다. ‘뷜랑’이라 불리는 제국 것들의 도시는 이미 그들의 전초기지였다.

즉, 뷜랑에서 황야로 이어지는 드넓은 평원은 아군의 완벽한 안전지대가 되어야 정상이었다. 감히 정면 대결을 펼칠 만큼 간이 큰 적 따윈 없었고, 기껏해야 보급 수레를 노리는 소극적인 파상 공세가 전부였다.

“망령 놈들은 결코 우리들을 직접 타격한 적이 없다. 이건…….”

“놈들이 망령이 아니란 뜻이겠지요! 압니다, 저도!”

“아니! 머저리! 놈들의 정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놈들이 배후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 보다 더 큰 문제지!”

“……예?”

“너는 지금 당장 카간께 가서 이 사실을 알려라! 놈들이 도시를 점거했다고!”

배후에 평원의 기병대를 둔 채로 이런 소란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백국마족의 기병대가 평원에서 보이는 무위를 생각한다면, 결코 포위 섬멸의 위협을 무시할 수 없을 테니.

즉, 저들의 이 과감한 공세는 단 한 가지를 의미했다. 그들의 전초기지, 뷜랑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뷜랑을 무너트릴 수 있는 세력이 지금 서부에서 공세를 시작했다면, 이건…….

“놈들의 반격이다! 카간께 알려라!”

“제기랄! 형님은요!”

“저기서 싸우는 머저리들을 수습해서 뒤따라가겠다! 먼저 가라!”

“꼭 살아 돌아오셔야 합니다! 어르신께 제가 죽어요!”

“라트라야, 이 꼬맹이가 어느새 내 걱정을 다 하는구나! 먼저 가! 나도 여기에서 죽고 싶진 않으니!”

부관은 어금니를 뿌득 갈며 등자를 찼다. 곧 기마가 황급히 야영지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바얀은 칼을 들어 올린 채 곧장 반대편을 향해 달려 나갔다.

횃불들이 보였다. 지평선 너머에서.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검게 옻칠한 화살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피이이이잉!

“끄아아악!”

비명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 번에 날아드는 화살의 개수와 방향, 그리고 솜씨를 볼 때 적들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그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놈들은 뷜랑을 점거한 이후 역공을 시작한 것이다.

“예케 테타이 울루스의 케시크, 바얀 타타라이다! 누가 내 검을 받을 테냐!!”

그는 질주를 멈추지 않고, 어설픈 제국어로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그 순간, 그의 병사들을 유린하던 화살들이 마법처럼 멎었다. 사방에서 부상에 신음하는 병사들의 소란이 들렸지만, 바얀의 귀엔 그것이 고요한 긴장과 침묵으로 느껴졌다.

곧, 멀리에서 다각다각, 기마 한 필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부하들은 지금 말에 타고 있지 않았다. 즉, 기마는 적이란 뜻……!

“기개가 출중하군.”

“겁쟁이처럼 무방비한 자들을 야습한 주제에 당돌하게 나서다니! 이 몸이 너를 죽여 그 죗값을 받아 내겠다! 네 이름을 밝혀라!”

시간을 끌어야 했다. 적어도 그의 의제가 도망칠 시간을. 카간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내부의 불안을 일거에 진압하고 본격적인 전투를 준비할 여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얀의 날카로운 눈에 마침내 적 기마가 온전히 드러났다. 거대한 검은 말에 올라탄 실루엣이 호리호리했다. 버들가지처럼 낭창한 팔다리와 번쩍이는 화려한 가면, 그리고 그 뒤에서 삐죽 솟은 두 귀가 보였다.

‘수인족…… 계집……?’

-다각, 다각.

적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접근했다. 마치 이 자리의 모두가 이 장면을 보길 바란다는 듯이. 곧, 칼날이 검집을 빠져나가는 서슬 퍼런 소리가 들렸다.

-다각, 다각…… 두두두두!

기마가 달려들었다. 민첩한 움직임이었지만, 바얀은 코웃음 치며 칼과 방패를 들어 올렸다. 수인들이 제아무리 기마에 능하다 하더라도, 감히 백국마족의 케시크를 상대로 마상재를 시도하다니?

기마 격투는 그의 장기였으며, 그는 케시크 중에서도 기골이 장대한 편이었다. 모든 종류의 격투는 당연하게도, 기교보다 힘이 더욱 중요한 법이었다.

저 작고 연약한 수인족 계집이 감히 칼을 빼어 들고 덤벼든다니? 바얀은 사납게 웃으며 달려드는 기마를 향해 마주 질주했다.

-스겅!

곧, 칼날이 번뜩이며 허공을 갈랐다. 바얀은 스쳐가는 수인 계집을 보며 눈을 크게 치켜떴다.

출수부터 격검까지의 궤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트테이커.”

휘릭, 그는 등 뒤에서 칼날이 빙글 돌아 칼집에 납도되는 소리를 들었다. 곧, 핏물이 오른쪽 목어림에서부터 가슴까지 길게 터져 나가며 그의 거구가 말 아래로 허물어져 내렸다.

* * *

“도망친 녀석은?”

“잡았습니다. 심문할까요?”

“사슴을 심문하는 사냥꾼이 있더냐?”

“하하, 그럼 어찌할까요?”

“이 개자식들이 지난번 퇴각 당시 포로로 잡은 우리 가족들을 어찌 대했더냐?”

그녀의 말에 골든투스는 어금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수레바퀴에 묶어 굴렸었다죠.”

“카단께서는 같은 죗값에 같은 보복을 원하신다. 그분의 저울에 놈들의 심장을 달아라.”

“예, 대족장!”

그는 곧장 말을 돌려 군영을 향해 떠났다. 곧 비명 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려왔다. 키르하스는 귀를 잠시 쫑긋거리다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비 냄새가 났다.

“비가 오겠군.”

[빗속의 사냥 또한 운치 있지.]

“카단. 너는 이번 전쟁에 우리가 승리하리라 생각하나?”

[승리를 확신하게 되는 순간, 그건 사냥이 아니라 학살이야. 내 분야는 아니지.]

“쓸모없기는.”

[네 수하들을 다스릴 때 나의 권위를 사용하는 주제에, 그것 참 상처 되는 말이로구나.]

키르하스는 시끄럽게 쫑알거리는 황금 마스크를 벗어 들어 안장에 걸고는, 수통을 뜯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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