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 꼭두각시들의 전쟁 (20)
“피엘, 제국의 지원은?”
“황제의 본대가 하루 거리에서 따르고 있습니다.”
“하루…… 하루라.”
키르하스는 마스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본능은 지금 당장 진격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적들이 제아무리 흩어져 있다 한들, 적의 본대는 아군의 수십 배에 달한다.
기마 대 기마로 부딪쳤을 때, 그녀는 수인족 기마병들이 놈들에게 크게 밑돌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질이 동일하다 가정할 때, 문제는 숫자다.
“대족장. 무슨 걱정을 하십니까? 제국이 진격하고 우리가 우회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상대할 만합니다.”
“놈들의 병력이 시시각각 모여들고 있어. 내일이면 놈들의 군영엔 지금의 두 배는 족히 될 병력이 모이겠지.”
놈들은 바보가 아니다. 수인 전사들이 제아무리 완벽하게 기습을 가했다 한들, 초기 교전 중 생존자가 전무할 리가 없었다. 실제로, 지금 백국마족의 본영에는 외부로 추적과 경계를 보냈던 병력들이 다시 모여들고 있었다.
-탁, 탁.
키르하스는 테이블을 두드리며 상념에 빠졌다. 테이블 위엔 꽃무리가 흐드러져 있었다. 실시간으로 피고 지는 꽃덤불을 바라보며, 키르하스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은공께서 놈들에게 접근하고 계신다.’
페르난데스를 상징하는 짙푸른 색 꽃 한 송이가 점점이 놈들의 붉은 꽃무덤 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놈들이 전투 준비를 완전히 마친 이후라면, 제국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
놈들의 수가 제아무리 줄었다 한들 여전히 이십만의 대군단이다. 놈들은 그 대부분의 병과가 기마병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재앙이었다. 저 정도의 병력을 상대로, 제국의 군단이 제아무리 대단한 위세를 떨친들 승리를 확신할 수는 없다.
‘은공께선 카라드스카르의 암살을 노리고 계신다.’
종심타격 전술. 페르난데스가 제아무리 뛰어난 전사이자 마법사라 할지라도 군단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페르난데스는 오로지 적의 수뇌부를 타격하는 것에 집중해 왔다.
완벽한 역할 분담이다. 쏘아진 화살처럼, 그는 정확히 적들의 핵심 인력만을 저격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수뇌부가 마비된 비대한 군단은 고스란히, 아군의 병력에 의해 짓밟힐 수 있도록.
그러나 지금 이 상황, 페르난데스는 그녀에게 어떤 접촉도 하지 않고 단독 행동을 하고 있다. 그 홀로 저 대군단의 내부에 파고들어 적장의 목을 취할 수는 없을 것임에도.
그 뜻은 명백했다. 그는 그녀를 믿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적의 배후에 파고들 때, 그 전면을 교란시키리라고 믿고 있다. 피엘과 프레이야가 있는 이상 반드시 그와 손발을 맞추어 줄 것이라고.
“하루를 벌어야겠구나.”
“……예? 대족장, 설마?”
“전사들에게, 오늘 저녁은 든든히 먹어 두라 일러라. 내일 아침까진 쉴 틈이 없을 테니.”
“미친 짓입니다! 지금 전사들을 모두 끌어모아 보아도 만 명이 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적들은 우리의 열 배가 넘고?”
“예! 대족장! 그저 하루만 기다리면 될 것을 어찌……?”
원로들의 반대가 심각했다. 호족 연합 내에서 키르하스가 지닌 권위에도 불구하고 원로들은 이 결정을 납득할 수 없었다.
키르하스는 이에 대답하지 않고, 피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하루를 더 기다릴 것 같으냐?”
“아닙니다. 대족장. 당신께서 바라는 대로, 오늘 저녁에 출정하게 될 것 같군요.”
“그렇다면, 우리가 승리하겠는가?”
“그건…… 모르겠습니다.”
피엘은 고개를 숙였다. 원로들은 그 말에 불안함에 떨며 웅성거렸다. 그들은 예언자가 ‘알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우리 모두 죽게 된단 말이 아닙니까! 대족장!”
“아니, 무언가가 이 전쟁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지.”
제아무리 뛰어난 예언자라 할지라도 모든 미래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언자는 보다 높은 격을 지닌 존재가 암약하고 있는 장소의 정보를 읽을 수는 없다.
[아니면, 정말 이 녀석들 전부가 죽는다는 뜻일 수도 있지.]
‘모두가 살지는 못하겠지.’
[네가 죽는다 해도 말이냐?]
‘단 하루만 은공보다 먼저 죽을 수 있다면, 난 그걸로 충분해.’
그분의 죽음을 지켜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키르하스는 단호한 눈으로 불안감에 떠는 원로들을 바라보았다.
“연합의 전사들을 한낱 도박수에 던져 넣을 수는 없습니다! 대족장! 이리 성급히 행동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이건 미친 짓입니다.”
“한쪽 추에 종말이 있고, 다른 방향에 생존이 있다면. 방법이 도박뿐이라면 당연히 목숨이라도 걸어야지.”
“대족장!”
원로들의 반발에 키르하스는 탁상을 거칠게 내려찍으며 외쳤다.
“이 전쟁의 승패가 우리의 하루에 달려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전쟁의 끝을 위해 목숨을 건 자들이 수도 없이 많아! 죽음이 두려운가? 그대들이 가장 비참하게 죽게 되는 그 순간에도, 그대들의 신과 그대들의 대족장이 그대들과 함께할 것이다!”
-철컥!
키르하스는 황금 마스크를 올려 머리 위에 장착하며 외쳤다. 그 기백에 원로들이 움찔 떨며 시선을 깔았다.
“더 이상 이견은 받지 않겠다. 돌아가서 부족 전사들에게 일러. 오늘 저녁 해가 질 때에, 대족장의 군기를 따라 달리라고!”
* * *
해가 지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수풀 속에 몸을 낮추고 순찰을 도는 병력의 시선을 피했다.
-다각, 다각.
“제기랄, 놈들이 몰려오고 있다는데 카간께선 대체 무슨 생각으로 틀어박혀 계시는지……”
“쉿, 죽고 싶어?”
경비 병력들은 투덜거리며 페르난데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굳이 마법의 도움을 받을 것도 없이, 적당히 훈련받은 병사들의 시선 정도를 돌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병력이 오고 있다라……. 말단 병사들마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하루에서 이틀 안에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군영의 삼엄한 분위기가 이를 증명하는 듯했다.
페르난데스는 경계석 아래로 몸을 숨기며 천천히 칼자루를 움켜 쥐었다.
-퐁!
그가 엎드린 장소 바로 앞에서, 녹색 꽃봉오리가 터졌다. 방금까지 노랗게 말라 있던 꽃망울이었다. 프레이야의, 이제 안전하다는 의미였다.
-스스슥.
놈들의 군영은 대강 주위 잡초들을 정리해 두긴 했으나, 자리를 옮겨 가며 야영하는 유목민들답게도 놈들은 조경 활동에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애당초, 경계 병력이 이토록 조밀한데, 어디에나 널려 있는 관목 따위에 신경을 쓸 자들이 아니기도 했다.
페르난데스는 그 사이를 누비며 은밀히 놈들의 야영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비린내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놈의 유물이 이 근방에 있군.’
-마력 간섭이 대단히 강력해. 이 정도의 유물을 본 적이 있나?
‘이번 생엔, 없었지.’
-아무리 일러도 천상 전쟁, 그 시절에 유실된 마법 중 하나야. 탐이 나는걸.
‘뭐가 되었든 끝난 이후에 보도록 하지.’
청동 옥좌에 가해진 부하가 심상치 않았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주문 시전을 엄두조차 내지 못할 터였다. 마법 영창의 실패는 필연적으로 시전자에게 백래시를 가져오기 마련인데, 이런 환경에서 마법을 성공할 수 있는 마법사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찾았다.’
-제기랄.
예상한 광경이 눈앞에 있었다. 수많은 시체들이 구덩이 안에 파묻혀 있는 광경이었다. 구덩이 바로 앞까지도, 끈적한 핏물이 여전히 말라붙지 않은 채 번들거리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짧게 혀를 찼다.
저것보다 더 끔찍한 광경쯤은 얼마든지 봤다. 하지만 발달한 후각이 피비린내로 마비되는 것은 짜증 나는 일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구덩이 바로 앞에 자리를 펴고 앉아 손가락을 우득, 풀었다.
‘키르하스, 널 믿겠다.’
모두가 도박을 해야 하는 순간이다. 적진 한가운데에 파고든 페르난데스라면 더욱이. 다른 이들과 달리, 페르난데스에겐 능동적으로 정보를 수급할 방법이 전무했다. 따라서 지금은 분석하고, 설계하는 것이 아닌. 도박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화르륵!
수인이 허공에서 매듭지어졌다. 검은 헤일로가 그의 머리칼 뒤에서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그는 한 손으로 노련하게 수인을 짚으며, 다른 한 손을 품 안에 집어넣었다.
“무슨……? 웬 놈이…… 으억!”
-쉬익! 탁!
근처를 지나던 경비병 하나의 이마에 단검 한 자루가 칼자루까지 박혀 들어갔다. 페르난데스는 손을 털어 단검을 던지고는 다시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마력 왜곡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구조가 복잡한 대마법은 그조차도 감히 시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단순하고 순수한, 가령 아시트 사령술과 같이 지맥 깊은 곳의 마력으로 빚어내는 마법 정도는 가능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저 소란뿐이었다. 망자의 전성기를 이끌어내어 하나하나 동조하는 고등한 술식이 필요하지도, 이만여 구의 망자들을 동시에 불러올 이유도 없었다.
-우득, 우드득!
시체 구덩이에서, 아직 완전히 부패되지 않은 팔뚝이 올라왔다. 말라붙은 상처와 찢어진 피부를 가진 망자들이 하나둘 기어 나오고 있었다.
‘삼백 구 정도가 한계겠어.’
-성능이 변변찮군. 현대 사령술로 일으킨 녀석들보다 못해.
‘저열해도 상관없으니, 정신력을 아껴 보자고.’
페르난데스는 목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들은 생전의 기억을 갖춘 ‘망령’들이라 부를 수 없다. 그저 명령에 따라 비척거리며 움직이는, 굼뜬 시체에 불과했다.
꼭두각시. 그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지. 페르난데스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시체들의 전진 방향을 조율하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 * *
“으윽!”
“프레이야? 갑자기 왜 그러느냐?”
두 눈을 꼭 감고 정좌한 채 의식을 집중하던 프레이야가, 갑작스레 머리를 움켜쥐며 쓰러져 헐떡였다. 아벨은 황급히 그녀의 곁에 다가가 천천히 그녀의 등을 쓸어 만졌다.
하늘하늘한 드레스가 땀에 푹 절어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프레이야는 아벨의 품에서 파르르 떨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너무 힘든 의식이었어? 잠시 쉬고…….”
“린드부름…….”
“그래. 프레이야. 나는 여기에 있어.”
프레이야와 아벨은 대황야의 깊숙한 곳에서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며칠간, 대황야 전역에 시야를 확보하여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건 북부에서 그들이 해 온 일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오히려 더욱 수월했다. 이 대황야는 북부와는 달리 생명력이 넘치는 땅이었고, 프레이야가 지켜봐야 하는 지역이 북부의 전역보다 협소했으니.
“보이지 않는다. 린드부름.”
“……신성을 잃었다는 의미야?”
“여신은 여전히 여신이다. 하지만…… 린드부름, 보이지 않는구나. 페르난데스가 틀렸어. 이건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프레이야는 덜덜 떨며 물기 젖은 눈으로 아벨을 올려 보았다. 그녀의 두 눈엔 공포가 스며 있었다.
“함정이다. 이 여신을…… 아니. 우리들을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무언가’가 설계한 함정이야. 페르난데스에게 전해야 한다. 지금은 물러나서, 계획을 정비해야 해!”
“……우리를 잘 알고 있는……? 그게 무슨……?”
“페르난데스가 잠입한 지역, 이제 곧 키르하스가 진격할 그 지역에 ‘무언가’가 있다! 그자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어.”
“카라드스카르라는 인간이? 그자가 대체 어떻게 우리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말이야?”
“아니! 아니야. 고작 인간이 아니야! 악마가 있다, 린드부름. 요르문간드보다 오래되고, 사악한 존재가 저 이면에 도사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 요사하게 빛나던 네 쌍의 붉은 눈. 그리고 대지 전역을 파고들어가 살라 먹는 거대한 존재감. 그 외에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프레이야는 입술을 깨물며 흐느꼈다.
“여신은 이 땅에서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다. 네가…… 네가 가서 그를 도와야 해. 그의 목숨이 위험해.”
“대악마가 이 땅에 현현했다면 그이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어, 프레이야. 그건 불가능해.”
뭄토가 승천할 때의 충격으로 이 땅은 대황야가 되었다. 천상 전쟁 시절을 기억하는 아벨은 고개를 흔들며 프레이야의 말을 부정했다. 대악마, 신의 격에 달한 존재가 현현한다는 것은 그 정도의 파급력을 가져오기 마련이었다.
저 먼 아스가르드에서, 사다르켈리사가 단지 봉인을 뚫고 나오는 것만으로도 세계수가 불타올랐다. 하물며 이곳은 물질 세계다. 관념적 존재가 차원의 틈을 깨고 도래한다면, 이 대륙 위의 모든 이들이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아야 했다.
그러나 그런 전조가 전혀 없었다. 이건 너무나 갑작스러운, 그리고 불가능한 일이다. 아벨의 말에, 프레이야는 떨리는 숨을 애써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니야, 린드부름. 놈은 페르난데스의 존재를 안다. 그리고 그가 지금 자신의 손아귀 안에 들어왔다는 것도…….”
이전까지 일어난 모든 전쟁은, 꼭두각시들로 춤추는 인형 놀이에 불과했어. 개미귀신이 땅굴을 파고 들어가 먹잇감을 기다리는 것처럼, 자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자들이 한자리에 모이길 기다리면서.
프레이야는 말을 맺으며 잘게 떨었다.
-투둑, 두두둑.
빗방울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벨은 먹구름이 짙게 내려앉은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