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 매와 늑대와 바다뱀 (1)
-퐁!
녹색 꽃이 피어났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멈춰 서서, 그의 발치에 맺힌 꽃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한데?’
-프레이야의 신호가 아니냐? 그게 왜 이상하다는 거지?
‘지금 이런 신호를 보낼 이유가 없으니까.’
북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암묵적인 원격 신호 체계에 따르면, 녹색과 푸른색은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그 방향을 향해 걸어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교전이 시작될 때, 프레이야는 방향 지시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극도로 위험한 순간이 찾아와 경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교전 중에 이동 신호를 보낼 필요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명백한 교전 상황이었다.
“놈들을 막아!”
“제기랄, 대체 어디서!”
“저주받았다! 시체가 일어나고 있어!”
백국마족의 군영은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갑작스레 일어선 망자들이 소리 없이 칼을 휘두르고 어금니를 박아 넣으며 날뛰고 있었다.
한 개체, 한 개체의 힘과 능력은 별 볼 일 없다. 그러나 완전히 파괴되지 않으면 쓰러지지 않는 내구성과, 반쯤 부패한 망자가 가진 끔찍한 외형에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곧 다가올 전쟁을 대비하며 휴식을 취하던 병사들이 혼란에 빠져 날뛰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들의 군마를 먼저 노렸다.
겁에 질려 뛰어다니는 말들은 혼란을 가중시키고, 병사들은 비 내리는 야간에 일어난 소란으로 적의 숫자를 과대 포장하기 마련이다.
“끝, 끝이 없어!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있다!”
“시체를 태워!”
페르난데스는 혼란에 빠진 군영 사이를 걸었다. 어쨌건, 프레이야가 꽃으로 가리키는 방향과 그가 가고자 했던 방향이 일치하고 있었다. 이 군영을 정탐할 때 미리 봐 두었던, 가장 크고 화려한 게르를 향해 꽃들이 줄지어 피어올라 있었다.
-밤중에 길이라도 잃을까 걱정한 모양이지.
‘과잉 친절이라고? 글쎄…….’
프레이야는 디모니카의 육체 능력을 알고 있다. 제피스를 비롯한 디모니카들이 북부에서 보였던 활약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던 적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페르난데스의 야간 시야를 걱정해 굳이 힘을 낭비했다고?
‘감이 좋지 않군.’
영체인 페이자쉬는 미처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으나, 페르난데스의 직감이 무언가 껄끄러운 불길함을 느꼈다. 그는 칼자루를 단단히 움켜쥐고 게르를 향해 걸었다.
-하트테이커가 늦는군.
‘때에 맞춰 올 거야. 키르하스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의 계획은 무모할 정도로 단순했다. 군영에 소란을 일으켜 카라드스카르의 목전까지 잠입하고, 암살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키르하스의 병력으로 놈들의 시선을 분산시킨다.
사전에 조율한 계획이 아니었으니만큼 변수 통제가 어려웠지만, 키르하스의 곁을 지키고 있는 피엘과, 먼 거리에서 작전의 타이밍을 보좌할 프레이야의 존재까지 더한다면 실패하기가 더 어려운 작전이라 할 만했다.
-퐁!
그 순간 꽃이 피어났다. 붉은 꽃무덤이. 방금까지 녹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화려했던 덤불이 한순간에 핏빛 꽃잔디에 덮여 나간다.
‘……이게 무슨?’
-퐁! 퐁!
꽃망울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낯설 정도로 스산했다. 주위에 펼쳐진 작달막한 관목에서부터, 그의 발치에 낮게 자란 들풀에 이르기까지. 모든 풀잎 위로 마치 핏물이 터져 나가는 것처럼 붉은 꽃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꾸드드득!
어디선가 자라난 가시덤불이 관목을 으스러트리고, 지독하리만큼 새빨간 꽃더미가 그 위로 올라섰다.
프레이야의 신호 체계에 따르면, 붉은색은 적의 출현과 경고 등의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지금 이 상황을 경고 신호라 여길 수 없었다.
평범함 속에서 은밀하게 정보를 전하는 신호 체계가 아니다. 이건 경고 따위가 아니다.
-퐁!
차라리 조롱에 가까웠다. 온 사방이 붉게 물드는 광경은, 마치…….
-그 북부 잡신이 우리를 배신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어. 그리고 프레이야의 곁엔 아벨이 있다. 아벨은 설령 죽는 한이 있어도 우리를 배신하지 않아.’
프레이야가 그를 배신하고자 했다면 이보다 좋은 상황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그녀가 의도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투둑, 두두둑.
빗방울이 페르난데스의 콧대를 치고 흘러내렸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 수많은 정보와 가설들이 퍼즐처럼 펼쳐지며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 대지 위에서는 신성이나 그에 준하는 ‘권능’, 또는 지맥을 활용한 고대 비술을 제외한다면 일반적인 마법을 사용하기 어렵다.’
대지 위로 절기에 맞지 않는 꽃들을 피워 올리는 것은 명백한 이상 현상이다. 그러나, 마법은 아니다. 고대 비술을 사용한다면 그가 사전에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이 상황은 프레이야가 의도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지금까지 프레이야의 경고나 신호가 전무하다는 것은, 프레이야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상황에 개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와 같다.’
여신의 권능을 모방하고, 여신의 신성을 봉쇄할 수 있는 수준의 존재가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지금 이 순간, 공교롭게도 내가 잠입한 지금 이 순간에 발맞춰 현현했으며 그 과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볼 수는 없다.’
즉, 지금 이 현상을 보인 존재는 기척을 숨긴 채 이 자리에 잠복해 있었다는 뜻이다.
‘프레이야의 신호 체계를 모방했다는 건. 나와 프레이야의 사이를 인지하고 있었으며 나의 행적과 동선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의미.’
백국마족의 침략을 대대적으로 막아내고, 공세의 흐름을 원천봉쇄하여 이제 대국적인 포위망이 완성되기 직전이다. 지금까지 그 모든 작전을 주도했던 페르난데스를 미리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지금까지 그저 관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시선을 분산시킨 이후, 적의 종심을 타격해 수뇌부를 마비시킨다……?’
그건 페르난데스의 기본 교범 수칙. 종심 타격 전술이다. 이 전쟁은 카라드스카르를 제거하면 승기를 굳힐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백국마족의 수많은 부족들은 오직 그자 한 사람의 카리스마 아래에 복속된 엉성한 집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자면. 만일 그가 카라드스카르나, 이 군영의 지도부에 위치한 존재이며, 동시에 페르난데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그 책략을 사전에 파악할 수 있는 존재라면.
만일 페르난데스가 그 위치에 있었다면, 가장 합리적인 책략은. 정확히 동일한 수를 사용하는 것이다.
데인-레바인테르 연합군, 수인 호족 연합군, 라비라타와 아포타자르 망령 군벌, 저 서부 어딘가에서 지원 병력을 파견하고 있을 알’하쉬르까지.
그들 모두가 다국적 군단이라는 점을 두고 보았을 때, 프레이야의 신호 체계를 탈취하는 것마저 가능한 존재라면, 만일 페르난데스가 그런 위치에 있었다면. 반드시 적의 종심을 타격해 지휘부를 마비시킬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적군의 총괄 참모를 죽임으로써.
‘그걸 지금 내게 알려 준다는 건…….’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숙여, 빗물에 젖은 붉은 꽃을 바라보았다. 조롱이 가득한 이 꽃더미를.
‘함정이다.’
-함정이군.
확장된 사고가 빠른 속도로 닫혔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 페르난데스의 머릿속에 펼쳐진 가설의 퍼즐이 완성되며 하나의 형상을 빚어 갔다.
대악마가 있다. 적어도 사다르켈리사에 준하는. 그리고 지금까지 침묵하며 그 저력을 숨길 수 있었던 존재가.
누굴까?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타이반의 봉인지는 아직 견고하다. 애초에, 놈이 봉인된 장소를 처음 발견한 것도 전생 시절 페이자쉬의 업적이었다. 세계선이 얼마나 뒤틀렸든, 타이반의 봉인지를 발견하고 봉인을 해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르카시아는 지금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 대악마가 거의 전력을 다해 타락시켰던 하수인을 죽이고, 대악마의 주문을 해체했다. 마법의 백래시는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피해 갈 수 없는 법. 우르카시아는 당분간 행동 불능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로 좁혀진다. 오래전부터 그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었던, 그리고 이런 교묘한 함정을 파고, 가장 완벽한 순간이 올 때까지 침묵할 수 있는 존재.
“예카세트…….”
이 년여 전, 메를린포트의 워커 사태. 그 배후를 추적하던 과정에서 그는 기안-켈을 참살하여 예카세트의 이목을 끌었다. 기안-켈은 예카세트의 사도였으며, 악마의 하수인들은 제 주인과 같은 시야를 공유하는 법.
예카세트의 봉인은 다른 악마들과는 달리 관념적인 영역에 있었다. 특정한 일곱 가지 의식을 수행하면 자연스럽게 해주되는 식이다. 일곱 명의 무고한 종속을 살해한 불신자의 심장을 제물로 바치는 것처럼.
놈의 봉인지는 물질 세계에 위치해 있지 않다. 물질 세계에서 놈의 봉인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 위해서는 특정 장소나 특별한 유물이 아닌, 관념적인 제의를 벌여야 했다.
-투둑, 투두둑…….
빗방울 속에서 온갖 악취들이 섞여 들어오고 있었다. 물비린내, 달큰한 꽃향기, 혈향, 그리고 짐승의 털가죽에서 나는 듯한 지독한 악취가.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낮게 숙였다. 그의 속삭임을 들은 것일까. 저 천막 아래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점점 또렷하고 강렬해져 갔다.
-쿠구구구궁……!
싯누런 광휘가 하늘에서 내려 쪼이고, 대지가 낮게 신음한다. 지독한 존재감이 대지를 살라 먹으며, 사방에 만개한 관목들이 하나둘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하늘 아래로 빗방울을 흩뿌리는 무거운 먹구름, 그 사이에서 짙은 황색 불빛이 어른거렸다. 달이 기괴할 정도로 부풀어올라, 먹구름 저편에서도 또렷하게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뭄토의 현현은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는 죽음의 시선이 뒤따르고, 우르카시아의 현현에서는 만물을 부패시키는 유독성 호우가 불어닥쳤다. 그리고 예카세트의 현현에서는—
-아우우우우!!!
맹수의 울음소리와 야수성 감도는 지독한 광란이 저주처럼 내려와 앉는다. 대지가 들끓고, 전사들이 피부를 벗고 있다. 망자들의 야습에 소란스럽던 군영이 한순간 고요해졌다. 사냥감을 노려보는 포식자들의 도사림이, 그 살기 어린 시선이 그를 옥죄어 오고 있었다.
[너를 보니 비로소 확신이 생기는구나. 주술사가 옳았다. 네가 나의 아들을 죽였구나.]
-콰득!
발톱이 게르를 찢어 발기며 튀어나왔다. 그림자 내려 어둡게 짓무른 게르 속에서, 네 쌍의 붉은 눈이 이글거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거짓 신들의 개야. 나의 아들을 죽이고, 나를 불러낸 것이 너였구나.]
“아직 완전히 삼켜지진 않았구나. 카라드스카르.”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세를 다잡았다. 대악마의 것에 가까운 존재감에, 놈의 힘이 아니라면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카라드스카르는 필멸자의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걸 이성이라 부를 수 있다면.
-콰드드득!!
[나를 네놈과 같은 꼭두각시 따위로 여기지 마라! 목줄 찬 개처럼 헐떡이며 너희의 거짓 신들에게 아양 떠는…… 놈들의 먼지를 받아 마시는 버러지들아!!]
게르가 무너져 내리며 그 잔해가 튀어 올랐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칼을 휘둘러 날아드는 잔해를 쳐냈다. 칼날에 부딪치는 충격이 예사롭지 않아, 그는 두어 발자국 밀려난 끝에야 자세를 다잡을 수 있었다.
그 너머에 놈이 있었다. 싯누런 달빛과 검은 빗물들을 배경 삼아서, 놈은 웅크렸던 몸을 천천히 펼치며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내가 이 세계를 찢어발기고, 저 하늘 위의 오만한 위선자들마저 조각 낼 것이다. 나는 너와 네 세상의 종말이니, 버러지 같은 것들아. 누구도 나를 피해 도망칠 수 없다!]
“하.”
페르난데스는 카라드스카르의 얼굴을 바라보며 짧게 웃었다. 놈은 이제 거의 광랑증에 걸린 것처럼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네 쌍의 붉은 눈이 매달린, 거대한 늑대 인간의 형상 위에 사람의 것이었던 살점들이 붙어 흩어지고 있었다. 피부 아래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광기가 그대로 살점을 찢어서 일그러진 형상을 부풀리고 있었다.
“앞서 그런 말을 했던 자들이 여럿 있었다. 카라드스카르.”
동질감마저 느껴지는군. 페르난데스는 짧게 투덜거렸다. 힘에 취했을 때, 그도 종종 저런 말을 입에 담고는 했다. 자신에게 덤벼드는 속칭 ‘용사’들을 향해서.
그 반대 입장이 되리라곤 상상해 본 적도 없었는데……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젓고는 칼을 빙글 돌렸다.
“이제는 너 하나만 남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