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27화 (328/388)

327. 매와 늑대와 바다뱀 (4)

-크르륵, 크륵.

피가 끓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카라드스카르는 혼란에 휩싸인 채 바닥에 허물어져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찮은 마력이 섬광처럼 번뜩이는가 싶더니, 그의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러나 단 하나,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자신의 패배였다. 그는 쓰러진 채 눈만 돌려 다가오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죽음이 다가온다. 그의 손에 쥐인 묵빛 대검이 달빛 아래에서 요사하게 빛났다. 입가에 잔뜩 묻은 피나, 절뚝이는 다리를 볼 때 그의 몸도 온전하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어쨌건 상황을 뒤집을 수단 따윈 보이지 않았다.

“내가 진 건가?”

“그래.”

페르난데스는 헐떡이는 카라드스카르의 얼굴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거친 숨결 사이로 피 냄새가 났다.

“허무하군.”

“정신이 돌아왔나?”

“난 언제나 제정신이었어. 사람 살점을 구워 먹고, 피를 마시고, 어린아이를 수레바퀴에 걸어 굴릴 때에도. 변명할 생각 따윈 없다, 제국인. 나는 그 모든 행위를 내 선택으로 해냈으며, 다시 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생각이니까.”

페르난데스는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붉은 안광이 일렁이는 두 눈. 악마의 타락과 마력 침식으로 영혼이 흔들려 인간의 영성이 허물어진 흔적이 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순간에도 그가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영혼이 얼마나 강건했는지, 운명이 따랐다면 그가 어떤 인물이 되었을지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마도 비루하고 가난한 백국마족의 평원을 통일했을 것이다. 어쩌면 강대한 세력을 만들어 내어 북부의 문명 사회와 올바른 외교로 제 민족을 부흥시켰을지도 모른다.

백국마족의 병력은 곧 고스란히 그들의 백성이다. 다른 문명국과는 달리 저들의 민족 구성원 거의 대부분은 즉시 활용 가능한 전투원으로 분류되므로. 즉, 그의 명령에 따라 봉기한 군단은 그들 민족의 전부라 할 만했다.

이 전쟁이 어떤 식으로 끝을 맺게 되더라도. 저들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았으리라. 전투 중에 소모된 백성과 사라진 기반, 그들의 머릿수로는 정복할 수는 있어도 통치할 수는 없는 광활한 대륙과 시시각각 일어서는 반군들을 마주해야 한다.

건국과 통치는 전혀 다른 문제다. 카라드스카르의 힘과 권위로 다스릴 수 있는 지역은 한정적이며, 믿을 수 있는 부하들을 파견해 통치를 대리한다 한들 그건 자신의 민족을 흩어 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닌 병력에 비해 인구가 부족한 국가의 말로가 펼쳐져 있다. 카라드스카르는 정복자다. 그러나 그는 결코 통치자가 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는 이 전쟁이 결국 대륙의 공멸로 이어지게 됨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예카세트가 그걸 바랐겠지.

‘이자에게 남은 것은 멸망뿐이었어.’

-우리와 같이. 맞아. 죽은 아들은 결코 돌아오지 않으니.

그건 마치, 영혼의 내면이 폐허로 변한 것과 같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폐허를 곧 이 세계에 투영하고자 한다. 페르난데스는 그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항변은 끝났나.”

“…….”

카라드스카르는 아무 말 없이 페르난데스를 올려보았다. 그는 품속에 손을 넣고, 곧 로사리오를 꺼내 들었다. 촤르륵, 쇠사슬이 그의 손목에 감기며 장절한 마찰음을 내었다.

“불법 침입, 민간인 학살, 식인, 방화와 절도, 살인, 사유지에 대한 불법 점거. 그대의 전쟁 범죄 행위를 나열하자면 그 끝이 없겠으나…….”

“나를 문명 사회의 잣대로 심판하겠다는 건가?”

“아니.”

-차륵.

로사리오가 그의 머리 위에서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 너머, 핏발 선 페르난데스의 짙푸른 눈이 반짝였다.

“악마 숭배와 사교도 집회, 성당을 향한 적대 행위와 무차별적 공격. 그로 인해 발생한 무고한 자들의 죽음. 이 죄악에 대한 변론을 하겠나?”

“너희 문명 사회의 종교가 우리에겐 사교도이며, 너희 성당이 저지른 악업이 우리에겐 악마 숭배와 같다, 제국인. 무고한 자의 죽음을 논하느냐? 네가? 네 명령에 의해 죽은 나의 아들은! 그 아이의 목숨에 어떤 악업이 있어 그리 떳떳하더냐!”

“없다.”

“뭐……?”

“그 아이에겐 오직 미래에 대한 혐의만 있었을 뿐, 그 아이는 무고했다. 카라드스카르. 나는 비록 더 큰 비극을 막아 내고자 작은 비극을 묵과했으나, 내 죄악에 대해 변론하지는 않겠다.”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말하며, 로사리오를 늑대의 머리 옆에 떨어트렸다.

“종교재판 사법권, 이단즉결 처형권, 구마용 군이양지권, 교단성사 대리지권……. 만신전이 보장하는 위 권한을 행사하지 않겠다. 적어도 내겐 그대에게 그 권한을 행사할 자격이 없으니 사제의 신분으로 그대를 대하지 않겠다. 그러니 본 법정엔 원고와 피고가 없다.”

“그게 무슨 소리…….”

“즉, 나는 제국인도, 만신전의 사도도,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의 사제도 아니오, 다만 한 무고한 아이를 암살한 살인자로 그대 앞에 서 있다. 그대의 삶과 영혼, 그대가 누렸어야 했을 미래를 앗아간 죗값을. 그대는 내게 물을 권리가 있다.”

콰직, 페르난데스는 로사리오를 짓이겨 부수었다. 그는 대검을 바닥에 꽂은 채, 죽어 가는 카라드스카르의 두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한 편의 연극과 같다. 짜맞춰진 대본 위에서 대사를 낭독하는 허술한 희극인의 대화와 같았다. 카라드스카르도, 페르난데스도. 죽음이 목전에 닿은 지금 이 순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왜 죽었어야 했나.”

“먼 훗날, 그대처럼 문명 사회를 향해 진군했을 사내다. 황야의 카간이 되어 수십만 명의 무고한 자들을 수레바퀴 아래에 갈아 버렸을.”

“역설적이군.”

“……그래.”

그 아이의 죽음으로 결국 같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더 없는 역설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침잠한 눈으로 죽어 가는 카라드스카르를 내려보았다.

그는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속삭였다.

“너도 잃었군. 그래……. 아들이었나, 딸이었나?”

“……아들이었다.”

“네가 하지 않았다면, 너와는 술잔을 나눌 법도 했겠구나. 너를 용서하지 않겠으나, 너를 이해하겠다.”

“……나 또한. 그대에게 사과하지 않겠다. 후회하지 않으니. 하지만, 그대를 이해하고 있다.”

그 말에 카라드스카르는 바람 빠진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친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같은 행동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후회 없이 같은 일을 저지르고 말 테니.

수평선이다. 그들 둘은 이 세계 어느 누구보다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많은 대화가 오고 간 것은 아니지만, 그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늑대들이 울지 않는군.”

“뭐?”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나? 자네와 내가 한바탕 싸우는 이 순간에도 내 병사들이 자네를 노리지 않는다는 것을?”

카라드스카르는 핏물을 헐떡이며 말했다. 페르난데스는 칼자루를 콱 움켜쥐며 고개를 들었다. 주위는 바람 한 점 없는 차디찬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하.”

“어째서 자네 한 사람을 위해 이렇게까지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망치게. 이건 함정…….”

-콰직!

그 순간, 카라드스카르의 머리가 크게 꺾였다. 제아무리 악마화했다 하더라도 그의 육신은 영체가 아니다. 피와 살, 근육과 뼈대가 이루고 있는 산 육체가 결코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뒤틀렸다.

페르난데스는 칼자루를 끌어 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우득, 우득. 끔찍한 마찰음과 함께 카라드스카르의 몸이 으스러지며 살더미로 변하고 있었다.

[네겐 익숙한 광경이겠지?]

“예카세트…….”

[아니 그런가, 페이자쉬? 우스운 이름이야. 우리들의 언어로 제 이름을 짓고, 감히 우리에게 칼날을 돌리다니. 배신자. 그래, 그 이름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잘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우드득!

살더미로 변한 카라드스카르의 유해에서 쇳조각이 부딪치는 듯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듣는 것만으로도 뇌수가 끓어오를 것 같은 지독한 음색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피가 흐르는 입가를 쓱 닦았다. 전투로 상했던 내장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건만, 디모니카의 혈액이 대악마의 기척에 반응해 다시금 끓어올라 기혈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도망쳐야 한다, 페르난데스. 우리 손에 남은 패가 많지 않아.

‘도망칠 수 있나?’

페르난데스는 차가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 깔린 지평선 끝자락까지. 노랗게 뜬 안광이 빽빽하게 모여 일렁이고 있었다. 야수로 변한 병사들이 어둠 속에 몸을 도사리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도주를 시작한다 한들 저들 중 몇이나 돌파할 수 있을까.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부러진 오른 발목, 힘줄이 끊어졌는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오른팔, 간신히 칼자루를 쥔 왼팔, 터지고 찢어서 숨쉬는 것만으로도 피가 역류하는 장기 상태까지.

청동 옥좌가 끊어진 이상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마법을 사용할 다른 수단을 연구하기 전까지는 불가능했다. 가진 패를 모두 털었다.

카라드스카르는 그 정도의 준비가 필요한 적수였다. 당년 다리안조차 단독으로 암살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대악당을 홀로 꺾었다는 것에 비하자면 적절한 소비를 한 셈이다. 그러나, 대악마라면.

사다르켈리사를 상대할 때 그에겐 수많은 팻감이 남아 있었다. 뭄토를 참살할 때엔 베이타서스의 신성과 콘클라베의 영혼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무력한 몸과 사라진 마력 사이에서 대악마를 홀로 마주하고 있었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나. 우리 모두가 영원히 네 연극 속 놀잇감으로 속아 넘어갔다 생각했나? 페이자쉬, 이 영악하고 한심한 인간……. 너는 너무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그를 둘러싼 늑대들이 같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거대한 존재감이 저 하늘의 거대한 달로부터 내려와 지상 전체에 흩어지고 있었다.

뇌수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다. 그의 몸속 혈액들이 일제히, 눈앞의 악마를 쓸어 없애라 외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떤 신성한 의무감이 아닌, 그저 단순한 파괴 욕망으로. 정신 오염의 초기 증상이었다.

[자, 페이자쉬. 이 모습을 보고 떠오르는 게 있나?]

-우드득!

카라드스카르의 유해가 여전히 뼛조각이 으스러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더 이상 사람의 형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진 살 더미, 그 속에서 붉게 충혈된 안구 하나가 데굴거리며 피어올랐다.

페르난데스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죽은 시체.”

[하하, 그럼 굳이 대화까지 따라해 주어야 네 낡은 기억에 얹은 녹이나마 흩어지겠군.]

살 더미가 음산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곧, 살 더미 속에서 가늘고 자그마한 신음과 애원이 흘러나왔다.

[죽여 줘…… 죽여 주세요. 아버지, 아버지, 죽여 주세요.]

-우득.

칼자루를 쥔 페르난데스의 손에 문득 힘이 들어갔다. 이성을 경동시키려는 것이 저 악마의 속셈인 것을 알았어도, 끓어오르는 혈관을 타고 분노가 그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

[이제 기억이 나나? 페이자쉬. 우리는 너를 보았다. 우리 중 여럿이 네 손에 스러졌지. 이제 더는 아니야. 이제 우리는 너를, 그리고 저 저열한 천상의 거짓 신들의 속셈을 알고 있다! 너희는 또다시 늦었다. 너희의 수작은 이제 끝이며, 이 세계는 다시 한번 우리 아래에서 즐겁게 불타오르리라!]

“말이 많아졌군.”

페르난데스의 차가운 말에 살 더미에서 울려 퍼지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페르난데스는 데굴거리며 그를 바라보는 안구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아직 힘이 돌아온 것이 아니군, 예카세트. 그렇지 않나?”

[…….]

“아니, 진신을 현현한 것조차도 아니었군. 아……. 그래. 네 그 우스꽝스러운 봉인의 마지막 조건이 사도의 심장이었겠지. 이거 아쉽게 되었어. 자발적으로 심장을 뽑아 바칠 사도가 이성을 품은 채 죽었으니.”

[이놈…….]

“반대로 묻지. 잘 숨겼다고 생각했나? 내가 눈치채지 못하리라고? 내 과거를 안다면, 내 전생을 보았다면 너는 나를 더욱 경계했어야지. 예카세트. 일곱 왕관의 예카세트. 진홍탑의 페이자쉬를 기억한다면, 더욱 조심했어야지!”

페르난데스의 눈이 불타는 듯 이글거렸다.

그는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갔다. 부러진 발목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에도, 균형이 무너져 절뚝이는 발걸음에도 멈춤 없이!

대기를 불사르는 대악마의 존재감과, 혈액 속에서 뜨겁게 끓어오르는 광기에도 머뭇거림 없이 타오르는 눈으로 살 더미를 노려보며, 페르난데스는 한 글자, 한 글자 끊어 말했다.

“죽여 달라 했더냐? 내 전생을 모사하고 싶었더냐? 나를 경동하고 싶었던가? 그렇다면 성공했으니, 기대해도 좋다.”

칼자루를 빙글 돌려 치켜세웠다. 달빛을 찌르듯 곧게 뻗어 나간 칼끝이 창공을 찌르고, 페르난데스는 그대로 살 더미를 향해 칼날을 내려찍었다.

“네가 진심을 다해, 그 말을 반복하게 만들겠다.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진홍탑의 다섯 왕좌를 다스리는 마법사의 이름으로 맹세하마.”

-콰직!

칼날이 살 더미를 파고들었다. 그를 노려보던 안구가 터져 나갔다. 주위에서 음산하게 속삭이던 늑대들이 일제히 침묵하고, 달빛 아래에 꼿꼿이 서 있는 그를 노려보았다.

페르난데스는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구름 낀 하늘 너머, 부패한 듯 부풀어오른 달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놈은 결단코 오늘보다 오랜 시간 살아남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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