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28화 (329/388)

328. 매와 늑대와 바다뱀 (5)

장내는 고요했다. 드넓은 초원 위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야수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나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않았다.

짐승들의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페르난데스는 전신을 저미는 듯한 살기 속에서 어떤 감정을 포착할 수 있었다. 당혹감. 예카세트는 지금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 애쓰는 듯했다.

천상 전쟁 이전부터 살아온 오랜 악령. 첫 번째 사냥이 시작된 이후, 그리고 지성체가 어둠 속 야수들을 두려워한 이후로부터 존재해 온 태고의 대악마.

하지만 페르난데스는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 모든 악마가 그 역사에 비례하여 강력해지는 것은 아니다. 신성을 품은 존재는 그 자신을 신봉하는 하수인들의 수와 질에 따라 힘이 나뉘기 마련이다.

대악마와 천상의 대신들은 경외를 삼키며 성장한다. 필멸자의 경탄과 외경을 삼키고, 존경과 두려움으로 제 영육을 살찌운다. 신과 악마는 인간 이상의 존재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그들은 기생충에 가깝다. 필멸자의 영자에 기생하여 힘을 불리는 기생충.

그러므로, 페르난데스는 그들의 힘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애초에 저 불멸의 존재들과 필멸자들은 상하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상호 호혜적인 거래 관계가 된다면 그럴 수 있어도.

[하…… 하하…… 하! 그래. 네 말이 맞다, 페이자쉬. 내 힘이 온전하지 않으며, 내 봉인은 여전히 저 증오스러운 천상의 쇠사슬에 묶여 있지. 하지만, 그것이 네 승리를 보장한다 여기느냐?]

페르난데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당혹감과 수치심,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격렬한 분노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필멸자여, 네가 몇몇 어린 족속들을 죽였다 하여 네 스스로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구나. 나는 이 세계에 첫 번째 생명이 움틀 때부터 존재했으며, 이 세계의 마지막 숨결이 끊어질 때까지 존재하리라!!]

사방에 도열한 늑대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기나긴 하울링에 지진이 난 듯 땅이 떨렸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미 진작 공포에 절어 광기에 굴복했을 존재감이 저 먼 창공에서 내리쬐고 있었다.

하지만 페르난데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고요히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육체 성능은 절반 이하, 마법은 사용할 수 없으며, 로사리오를 던지고 사제임을 포기한 순간 기적은 기대할 수 없다.

‘애초부터 기적에 연연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렇다면 놈의 약점은 무엇인가. 허술하게 해방된 봉인과 약해진 진신 능력, 이는 물질 세계에서 정면 대결을 가정할 때에야 고려할 만한 사항이다. 놈의 본체가 저 나락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이 순간, 놈을 죽이기 위해선 지옥으로 향해야 한다.

또는, 놈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선 이 자리의 모든 하수인들을 처리해야만 한다. 이십만 대군, 전원이 놈의 악마로 탈태한 일개 군단을 격살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불가능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페르난데스는 인정했다. 지닌 패가 없다. 거의 완전할 정도로. 하지만…….

“너 또한 다를 것 없구나.”

[뭐라고……?]

“카라드스카르의 존재……. 네가 물질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겠지. 이제 네게 남은 수가 없구나.”

[눈을 떠 네 앞을 보아라. 네 앞을 가로막은 수십만의 군세 하나하나 나의 혈육이니라. 물질 세계에 간섭을 해? 무슨 의미가 있더냐?]

페르난데스는 그 말에 비로소 눈을 떴다. 섬짓한 살기를 줄줄 흘리는 광기 어린 야수들이 그 하나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자세를 다잡고 천천히 허리를 펴, 칼날을 들어 올렸다.

-키이잉…….

검끝이 잘게 떨린다. 그 맑은 소리에 뜨겁게 달아오르던 혈관이 잦아드는 것만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자신을 노려보는 야수들을 향해 단언했다.

“네게도 남은 수가 없다. 예카세트.”

신성을 품은 존재들은 필멸자의 경외를 삼킨다. 그 뜻은 달리 말해, 필멸자들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 힘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와 같다.

천상 전쟁이 끝나고 천여 년이 흘렀다. 샤를 대제가 제국을 세우고 문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인간은. 악마와 천상, 엘프와 드워프, 용과 괴수들이 즐비한 시대를 넘어 기어코 살아남아 이 대륙에 자신의 터전을 펼쳐 나갔다.

그렇게 천여 년. 가장 오지에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도 문명의 불꽃이 피어나는 지금 이 시대.

“너는 너무 늦었다.”

이따금씩, 늑대가 방목장의 양을 물어가곤 한다. 사냥꾼들이 늑대를 소탕하기 전까지는.

때때로, 바위 트롤이 나타나 가도를 망가트리곤 한다. 기사들이 트롤을 사냥하기 전까지는.

광랑증 환자가 어디선가 나타나 사람을 물어 죽일 때도 있다. 도시 경비들이 광인을 체포하기 전까지는.

이 세계가 언제 인간에게 우호적인 적 있던가. 설령 엘프도, 드워프도, 용도, 신들도 없어진 세계가 도래했다 한들, 더운 사막과 차디찬 고원, 깊은 정글과 사람이 사라지는 안개 속 숲까지. 인간은 언제나 나약했고, 세계는 언제나 험준했으니.

그러나 문명의 빛이 닿지 않는 가장 으슥한 곳에 이르더라도. 인간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 마침내 이 대륙의 패권을 그러쥐었으며, 이제 이 시대. 사람이 살지 않는 땅 따윈 없는 지금 시대에 이르러서는—

“포식자의 위협, 어둠 속의 짐승이라……. 이젠 아이를 겁주는 동화 속 악당에 불과하지 않던가.”

그는 전생을 기억한다. 전생 시절 대전쟁이 도래했던 시점에 이르러서는, 그는 대륙 공적에 이름을 올린 대악당이었다.

광기가 만연한 시기, 사다르켈리사의 군단은 대륙 북부를 유린했다.

오염된 폐수가 도시 지반에 흐르던 때, 우르카시아의 황충들이 마지막 남은 농가를 휩쓸었다.

인간의 죽음이 숫자로 기록되는, 흔한 사건이 되던 날. 뭄토의 망자들이 황야를 찬탈했다.

그리고, 파괴가 절대적 공포로 군림하던 때. 타이반은 홀로 지옥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예카세트. 가장 오래된, 늙은 늑대는 그 시기 그 어떤 문명의 영웅들에게도 경외를 삼키기에 부족했었다. 페르난데스는 전생을 기억한다. 그 어떤 대악마도 손쉬운 상대라 평할 수는 없는 노릇이나. 차라리 지금 시점에 남은 대악마가 놈이라는 것은 호재에 가깝다.

[놈……!]

놈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과포장해 지레 겁을 먹을 이유 또한 없다. 놈이 문명 사회를 파괴하고자 하는 것은, 그럼에도 인간들을 절멸시키지 않는 이유는. 어둠 속 미지에 대한 고대의 공포를 다시 불러일으켜 그 경외를 삼키기 위함이니.

아직은 아니다. 놈이 성공하지 못한 이상, 놈의 세력과 힘은 천상 전쟁 시절의 위대함에 비하면 그 격이 과히 떨어진다.

“이제 늑대를 풀어라. 대화가 더 필요하더냐?”

[너는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던가.”

카라드스카르의 죽음이 확고해진 이상, 문명 사회의 유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끝났다. 대악마 중 본신의 힘을 유지한 채 남은 자는 타이반뿐이며, 놈의 봉인지는 그가 아니라면 풀어낼 수조차 없을 테니. 이제 문명 사회는 악마의 위협에서 자유로우리라.

“죽여야 할 필요만 보이는구나.”

-아우우우우우!!

극화된 분노로 광란에 휩싸인 늑대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페르난데스는 설핏 웃으며 칼자루를 들어 올렸다.

예카세트가 물질 세계에 개입할 수 없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해 보아도 하수인을 이용한 물량 공세에 불과하다. 지금 페르난데스에겐 그조차도 치명적이지만…… 페르난데스는 칼자루를 단단히 움켜쥔 채 곧게 내려 그었다.

-카앙!

달려드는 첫 늑대의 가슴팍이 세로로 갈라지며 걸쭉한 핏물이 사방에 비산했다.

* * *

숨결에서 쇠 비린내가 났다. 사방이 어둡고, 으르렁거리는 괴성이 자신의 목에서 들리는지 달려드는 늑대들에게서 들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키르하스는 맹수처럼 날뛰고 있었다. 한계까지 혹사당한 근육이 이젠 너덜거리고 있었다. 당장 칼을 한 번 더 휘두를 힘조차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팔이 움직였다. 어쩌면 기적이라 말할 수도 있으리라.

[물러나야 한다.]

머리를 누르고 있는 황금 마스크에 흉터가 깊다. 그녀는 거의 투구처럼 마스크를 혹사하고 있었다. 그래도 신의 유물이라, 악마의 발톱에도 쉽사리 찢어지지 않았다.

키르하스는 대답 없이 몸을 놀렸다. 놈들의 발톱이 허공을 으스러트릴 듯 휘저었다. 그녀는 몸을 깊게 숙여 간신히 피하고는 다시금 칼을 휘둘렀다. 억센 털이 돋아난 굵은 팔뚝이 하늘로 치솟았다.

“아직……!”

푸른 선이 벼락처럼 흩어졌다. 적들의 위치, 자신의 자세, 공격의 방향과 퇴각로. 그 어떤 것들도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전신에 잘게 흩어진 상처에서 이미 출혈이 심각해, 그녀의 시야는 극단적일 정도로 축소되어 있었다.

그러나 푸른 선이 깜빡이며 흩어지는 방향을 향해 한 발자국 더.

-콰앙!

그녀가 딛고 선 바닥에 긴 흉터가 생겼다. 늑대 한 마리가 그 자리를 할퀴고 있었다. 빈 땅을 긁어 댄 늑대는 재빨리 몸을 틀어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칼날이 허공을 긋고, 늑대의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미 전설적이라 표현해도 좋을 전투였다. 양 떼를 도륙하듯 나아가 베어낸 적의 숫자가 세 자리는 넘었다. 멈춰 선 허수아비에 백 번의 검격을 넣는 것조차도 중노동일진대, 한 번, 한 번에 목숨을 걸고 뛰어올라 휘두른 참격이 그 세 배에 달했다.

당연히, 평범하게 단련한 수인 전사의 육체로는 버틸 수 없는 활동량이다. 그녀의 육신은 파멸 직전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단 하루, 아니. 단 반나절만이라도 페르난데스보다 먼저 죽으리라.

그 믿음이 그녀를 움직이게 만드는 유일한 동력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 있는 이상, 페르난데스가 죽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근거 없는 맹신이나, 지금 그녀를 붙잡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캉!

칼날이 달려드는 어금니를 찍어 내고 그대로 나아가 늑대의 머리를 양단했다. 다시금 푸른빛이 점멸한다. 승리를 향한 희미하고 가느다란 가능성 한 줌. 오로지 그 방향을 향해 몸을 던졌다.

칼날의 춤사위가 마치 폭풍과 같다. 달빛을 요사하게 반사하는 검격이 휘몰아치는 듯 늑대 무리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대악마의 하수인이며 가장 나약한 마졸에 불과하더라도 한 마을의 악몽이 될 수 있을 존재들이었으나, 키르하스는 이 순간 그들 모두를 뛰어넘어 움직이고 있었다.

‘하루……를…… 더 벌어야 해.’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달뜬 머리와 혹사된 육체, 극한까지 밀어붙인 생존 본능으로 그녀는 온전히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희망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전진할 뿐.

[키르하스. 피해!]

“……!!”

한순간 세상이 환하게 물드는 감각에, 그녀의 머리칼이 비쭉 솟아올랐다. 그녀는 거의 튕겨지듯 뛰어올랐다.

승리를 의미하는 빛. 오로지 그녀의 눈에만 비치는 그 천부적인 본능이 지금 그녀의 발치에서 피어올라 넓은 지역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방향을 알 수 없다. 어디로 향해야 하는 것일까, 또는 어디로 몸을 피해야 하는 것일까.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자성을 잃고 빙글 맴도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혼란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향해 늑대들의 공격이 이어지지 않았다. 늑대들은 분노와 광기를 잊은 듯 멍하니, 하늘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리리리릭……!

그녀는 반쯤 감긴 눈으로 늑대들의 시선이 닿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누렇게 부푼 달의 맞은편, 저 동쪽 너머에서 새파란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오는 것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창공의 먹구름이 만들어 낸 어두운 그림자가 갈기갈기 흩어지며, 공기를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예포……? 하지만 어떻게……?”

키르하스의 귀가 쫑긋 섰다. 그건 그녀도 아는 소리였다. 항구에서, 경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들렸던 그 시끄러운 포성!

-콰아아아아앙!!!

몰려든 늑대들의 한복판을 강타하며 시뻘건 화염이 치솟았다!

“하늘을…… 날았어……?”

구름이 찢어지며 드러난 거대한 성벽, 그 위에 도열한 석주와 첨탑. 휘몰아치는 바람에 나부끼는 거대한 바다뱀의 깃발—

엘프 서펜트 킹, 가이메른의 기함이 창공에 부유하고 있었다!

“……아벨…… 당신!”

구름 너머로 거대한 형체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두 마리 용이, 마치 솔개가 양을 낚아 올리는 듯한 형상으로 기함의 양측을 붙잡고 활개 치고 있었다.

-피리리리릭!

다시금 포대의 격발음이 창공을 수놓으며—

-콰아아아앙!!

이번엔 예포가 아닌 묵직한 포탄이 예카세트의 악마들 사이에 처박혔다. 화염이 기둥처럼 피어올라 사위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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