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 매와 늑대와 바다뱀 (6)
[이게…… 이게 무슨……!!]
혼란에 휩싸인 전장 위로, 예카세트의 진노가 휘몰아쳤다. 공황에 빠진 야수들이 저들 스스로를 할퀴고 물어뜯으며 광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피리리리릭!
-콰아아앙!!
전역 곳곳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창공에 부유하는 가이메른의 기함에서부터 포탄과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늑대의 가슴팍에 틀어박힌 대검을 힘겹게 뽑아 올리며 웃음 지었다.
“짐승다운, 후우……. 최후로군.”
[네 이놈—!!]
늑대들이 뛰어들었다. 페르난데스는 옆으로 몸을 틀며 대검을 휘둘렀다. 달려들던 늑대가 반토막 나며 끈적한 장기를 흩뿌렸다. 그러나 놈의 발톱은 끝내 그의 흉갑에서부터 복대까지 거칠게 찢어 내는 것에 성공했다.
치명상은 피했으나 가볍지 않은 상처였다. 하지만 페르난데스는 여전히 몸을 구르며 공격과 회피를 이어 나갔다.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이미 그의 전신은 갈기갈기 찢어지기 직전이었으니. 피를 흘리지 않는 곳을 찾기 더 어려울 지경이었다.
과도한 출혈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거의 본능에 가깝게 칼을 휘둘러야 했다. 다행히도, 그가 쌓아 올린 경험과 수련이 그의 목숨을 이어 주고 있었다.
“네 패배다, 예카세트. 오늘이 지난 후, 더 이상 널 두려워하는 필멸자는 남아 있지 않을 게다. 네가 삼켜야 할 경외는 저 하늘 위의 엘프들이 대신 가지겠구나. 밤의 공포 마지막 한 자락을 물리친 여명이 되어.”
영원히. 설령 지금 예카세트의 힘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더 이상 물질 세계에서 이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으리라.
“나는 네 봉인을 남겨 둘 것이다. 먼 훗날, 네게 더 이상 어떤 힘도 남아 있지 않게 된 이후에. 문명 사회의 불빛이 이 세계 가장 어두운 골목마저 비추게 된 이후에……. 그때 우리는 네 봉인을 열고 두려움에 떠는 네놈을 꺼내어 장대에 매달겠다.”
그것은 인간이 미지의 공포에 고하는 마지막 선언이 될 것이다. 그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이 될 것이다. 밤은 그저 현상에 불과하고, 겨울은 절기에 불과하다는. 자연 현상에 대한 이해를 더 이상 초월자들의 손에 맡기지 않으리라는, 공고한 이성의 상징이.
그때가 되면, 어쩌면 인간에게는 더 이상 신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뜻은, 인간에게 더 이상 악마의 위협이 없으리란 의미였다. 물질 세계의 주권이 오로지 물질 세계의 존재들에게 위임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너는…… 너는 실패할 것이다. 네 목표는, 너와 네 거짓 신들의 목표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 페이자쉬, 이 지독한 배신자. 설령 네가 오늘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너는 끝내 이 세상을, 네 거짓 신들마저 배신하게 될 것이다! 이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요, 나의 존재 그 자체로 아로새긴 저주가 되리라!]
예카세트는 발작하듯 으르렁거렸다. 곧,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던 늑대들이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그 첫 시작은 오늘이 될 것이다. 오늘, 너희들은 승리를 곱씹으리라. 즐겁게 그리하라! 하지만 나의 하수인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몰락하지 않을 것이며, 너는 반드시 이 자리에서 죽게 되리라!!]
놈의 선포와 함께, 늑대들은 일제히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저들 하나하나는 적어도 마졸, 큰 개체의 경우 마장급에 해당하는 강력한 악마들이다. 예카세트의 힘은 어둠 속 야수에 대한 공포에 기인하며, 저들이 세계 곳곳에 숨어들어 무분별한 사냥을 시작할 때, 놈의 힘이 더욱 거세어지리라.
지금 이 평원에 도달한 자들은 레이아 여왕의 군단이었다. 기함의 함포는 물론 강력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저들은 대지를 디딜 수 없다.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는 짐승들을 박멸하기엔 면적 단위의 공세에서 불리하기만 했다.
-아우우우우우!!
그리고, 늑대 한 무리가 달리던 와중 멈춰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놈들의 어금니 사이에서 걸쭉한 침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붉은 안광이 일렁거리며 광기 섞인 야수성을 토해 내고 있었다.
[놈을 죽여라. 놈에게 오늘 이후의 여명을 허락하지 않겠노라!]
-아우우우우!!
늑대들이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었다. 페르난데스는 칼자루를 우득, 쥐고는 칼날을 들어 올렸다. 예카세트와의 대화 중에 최대한 추슬러 보았지만, 그는 지금 당장 쓰러지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중상을 입고 있었다.
힘들겠군. 페르난데스는 픽 웃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저건 말 그대로 발악에 불과하다.
많은 악마들이 물질 세계의 어둠 속으로 도망칠 것이다. 하지만 언제는 그렇지 않았던 때가 있던가. 지금은 모든 그림자 속에 악마들이 웃음 짓는 시대가 아닌가.
불길을 품고 어둠 속을 딛는 자들이 있는 이상, 인간은 결코 쉽게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예카세트의 계획은 오늘, 장기적인 패배를 향해 치닫고 있다. 놈의 실각으로 이제 대악마는 둘만 간신히 남아 있는 셈이다.
페르난데스는 달려드는 늑대를 향해 칼날을 내려찍으며 생각했다.
‘이제, 모든 계획이 종장을 향해 달려가는구나.’
-우리가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냐?
‘생존이 우리의 목표는 아니었으니까.’
-페르난데스. 아들의 웃음을 영원히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후회 없느냐?
‘한때, 아들의 존재가 나의 세상이었고, 아들의 죽음이 나의 형틀이었으나.’
-콰직!
묵빛 대검이 늑대의 두개골을 으스러트리고 빠져나갔다. 칼날이 놈의 부서진 어금니 사이에 끼어 잠시 머뭇거렸다. 그 틈에, 다른 늑대 한 놈이 달려들어 그의 어깨를 씹어 물었다.
‘이제 이 세상이 나의 형틀이니, 페이자쉬. 이 세상의 웃음이 내 아들의 웃음이다.’
-제기랄.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콰득!
칼날이 반 바퀴 돌아 늑대의 두개골을 내려찍었다. 이윽고, 다른 늑대들. 또 다른 늑대들이 달려들었다. 놈이 고르고 골라 준비한 병정들. 하나하나 마장급 악마에 가까운 강대한 존재들이 그를 찢어발기기 위해 덤비고 있었다.
대검이 아귀에서 빠져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연민검이 바닥에 박혀 파르르 떨었다. 묵빛 대검의 검날엔 이미 끈적한 내장과 핏물, 그리고 지방이 얽혀 번들거렸다.
끝이군, 페르난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했다. 만족스러운 결말은 아니지만, 우리의 삼 년은 우리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이었다.
‘너도 고생 많았다. 페이자쉬.’
-네 육신이 죽은 후에, 우리의 영혼은 다시 하나가 될까? 그렇다면 누가 남게 될까?
‘두려운가?’
-하하, 네가 두려워해야 하지 않겠느냐. 감히 고작 스물 어림의 나이로 나, 진홍탑의 페이자쉬의 영혼을 살라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더냐?
페르난데스는 페이자쉬의 말에 픽 웃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곧, 늑대 한 마리가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리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콰직.
* * *
“더럽게 많기도 하군.”
“생각보다 사냥이 즐겁지는 않은 모양이오, 레이아 여왕?”
“이걸 사냥이라 할 게 있겠어?”
레이아는 거친 바람이 휘몰아치는 갑판 위에서 팔짱을 낀 채 저 먼 아래 지평선을 내려보고 있었다. 콰앙, 포환이 떨어져 불을 밝힐 때마다 혼비백산해 흩어지는 악마들이 보였다.
“아직 그를 찾지 못했소?”
-저쪽 어딘가에서 그의 존재감이 느껴지고는 있다. 하지만…… 그래. 아직 찾지는 못하겠구나.
머리 위에서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벨이었다. 그녀는 있는 힘껏 날개를 휘저으며 이 거대한 기함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었다.
본디 용의 감각은 수백 관의 황금 속에서도 단 한 장의 금화를 골라낼 수 있을 만큼 정밀하다. 그러나 지금 지상은 수만 마리 악마들의 존재감으로 바글거렸으며, 심지어 창공 위에선 대악마의 기척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한 인간의 기척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벨은 숨결을 뿜어 악마들을 불태우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러다 자칫 힘이라도 빠져, 함선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이 기함 위에 승선한 엘프들은 전멸하고 말 것이다.
“잠깐. 저기……?”
“세상에…….”
함포의 불빛이 지상을 밝힌 순간, 레이아는 악마들이 밀집된 한 구획을 찾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수많은 악마들이 모여 한 지점을 향해 뛰어들고 있었다. 원양에 발생한 폭풍처럼, 물결 같은 악마들이 모여들어 바글거리고 있었다.
레이아의 손짓에 제르올렌이 고개를 내밀어 바닥을 살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필멸자가 지닐 법한 무위가 아니군.”
“저리 둘 수는 없어. 구해야 해.”
“내가 직접 가 보지. 라그라스!”
“예, 전하!!”
“기수들을 이끌어라! 내 그리핀을 가져와! 저 영웅을 죽게 둘 수는 없구나!”
“예, 전하!!”
곧, 갑판 위로 그리핀들이 쏟아져 내렸다. 제르올렌은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그리핀의 등허리 위로 단숨에 뛰어올라서 고삐를 콱 움켜 쥐었다.
삐이익, 그리핀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창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제르올렌의 기수들이 일제히 그를 따라 뛰어올랐다.
* * *
얼마나 싸웠을까. 몇 초? 몇 분? 몇 시간? 아직 하늘이 어두운 것을 보니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다. 두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아, 그 탓에 어두운 것일지도 모르니까.
-캉!
키르하스는 부러져 반토막 난 칼을 휘둘러 늑대를 후려쳤다. 그 충격으로 몸이 움찔 떨렸다. 이제 더 이상 고통은 없었다. 그저 본능만 남았을 뿐. 어떻게 지금까지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움직이는 이상,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칼날을 휘둘러 다가오는 늑대를 후려쳤다. 이걸로는 모자라다, 아직 살 길이 보이지 않는다.
어둠만 가득한 이 순간. 어둠 속에 일렁이는 붉은 안광들만이 적들의 존재를 알려줄 뿐이다. 그녀의 눈은 이미 피로와 충격으로 탁하게 흐려져 있었다. 칼을 휘두르고, 몸을 던지고, 다시 휘두른다.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위협이 되지 않는다. 최적의 동선과 최선의 움직임을, 이미 몇 초쯤 전에 인지하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극한까지 단련된 그녀의 감각은 어떤 초월적인 육감마저 해방한 듯 보였다.
따라서, 푸른 잔상이 일렁이는 방향을 향해 몸을 던지고, 그 잔상이 보여 주는 대로 움직인다. 그렇게 하면 다시 일 초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일 초, 일 초를 모아 생을 연장하는 지독한 곡예를 펼치고 있었다.
그녀의 몸과 영혼, 둘 중 하나가 완전히 마모되기 전까지. 그녀는 멈추지 않을 터였다.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거친 충격이 주위 늑대들을 덮쳤다. 키르하스는 반쯤 잘린 귀를 쫑긋거리며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늑대들의 움직임이 일순간 해소되었다.
“대지를 딛지 마라! 창만 뻗어!”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습지만, 마치 기마대의 돌격을 정면으로 지켜보는 감각이었다. 하늘에서부터 기마대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콰아아앙! 쾅!
“이봐! 내 말이 들리나!”
무언가가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늑대를 후려쳤다. 늑대가 캥, 하는 신음을 내며 떨어져 나갔다. 키르하스는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며 충격을 피해 달렸다.
“멈춰 봐! 잠깐! 나는 그대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다!”
-콰아앙!
“제기랄, 듣지 못하는 모양이군! 저런 녀석들이 있었지. 검귀에 들렸구나!”
키르하스는 다가오는 것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짧았다. 그녀의 예상보다 더 크게 상했던 칼날은 결국 칼자루만 남긴 채 바스라지고 말았다.
그녀의 멱살이 콱, 하고 잡혔다. 공중으로 떠오르는 감각에, 그녀는 재빨리 칼을 던지고 두 다리로 자신을 잡은 팔뚝을 감았다. 다리가 교차해 교묘히 비틀리며 단단한 팔뚝을 꺾어 들어갔다.
“제기랄, 진짜 검귀에 들렸군! 하하, 이 시대에 이런 자가 남아 있다니!”
-후웅!
팔뚝이 그녀를 쥔 채로 크게 휘둘러졌다. 키르하스는 엉겁결에 다리를 푼 채 간신히 팔뚝에 매달려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잠잠해지자, 팔뚝이 재빨리 그녀를 들어올려 어딘가에 앉혔다.
“잠깐 쉬라고, 고생 많았어.”
더 이상 단어가 귓가에 들어오지 않는다. 키르하스는 잠시 발버둥 치려다가, 곧 뒤통수를 얻어맞고 축 늘어지고 말았다.
* * *
“네 말이 맞았군. 꽃을 따라 달리라고. 재미있는 술수야. 그래, 그대 이름이 무엇이라고?”
“파르탁 블랙팽이라고 합니다, 폐하. 저희 대족장께서 사용하던 방식이었습니다.”
“오늘 너와 너희 수인 연합의 조력을 제국은 잊지 않을 것이다.”
“영광입니다.”
동이 튼다. 영원 같았던 밤이 지나간다. 드넓은 평야, 그 위로 내려앉았던 어둠이 물러선다.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달은 여전히도 저 하늘 위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찬란히 터 오르는 여명에 그 음산한 달조차 희미하게 빛이 바래고 있었다.
“제길, 난장판이로군. 폐하, 저것 보이십니까? 저거 아무래도 엘프 왕가의 배 같습니다.”
“그래. 그런 것 같군, 보르아 경. 아, 비센테 왕. 그대의 땅에서 보았던 배가 저렇게 생겼던가?”
“……유사합니다. 하지만 폐하, 그보다 먼저 청코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음? 무엇인가?”
“부디 선봉을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늑대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파랗게 타오르는 동녘 하늘 아래에서, 그건 햇살에 물러서는 땅거미처럼 보였다.
“이유를 들어 보아도 좋겠나?”
“저희의 대모께서 저희를 지켜보고 계시니, 원탁 기사 된 도리로 물러설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래. 그랬지. 저 용은 그대들의 큰 스승이었지. 좋네. 그렇게 하게.”
북동쪽 능선에서, 깃발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용과 검과 원탁이 그려진 낡은 깃발이 푸른 하늘 아래에 펄럭이고 있었다.
-부우우우우우!!
뿔나팔이 동녘 너머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곧, 지평선 가득 흙먼지가 올라오며—
-두두두두두두!!
기마대가 각자의 깃발을 한 손에 들어 올린 채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 * *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홀로 악마 군단의 한가운데에서 반나절을 버티는 데에 성공했다.
도주한 수인 호족 연합은 진군하던 제국군에 합류했으며.
프레이야의 지휘 아래, 제국군은 예정보다 반나절 이르게 전역에 도달했다.
카라드스카르의 대북진이 끝나던 날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