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번외 : 남겨진 자들
-뎅—.
교회 종탑에서 묵직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르벨리에 여제의 치세가 시작되며 팔텐노이아는 놀라울 만큼 빠르게 맑은 대기질을 회복해 가고 있었으나, 이날만큼은 빗물 머금은 먹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뎅—.
그날, 타종은 매 시각 아홉 번씩 울렸다. 심지어 자정에도. 전통적으로 황제의 서거에 울리는 타종이 열 번이므로, 카르벨리에 여제는 최고 국빈의 장례 절차에 준하는 예의를 보이고 있는 셈이었다.
황실 귀족과 제국 군병들은 예복을 갖춰 입은 채 궁정을 거닐었다. 완전한 종전과 선제후들의 확고한 복종을 얻어낸 직후에 보이기엔 적절하지 않은 예법이었다. 그러나 여제는 적어도 일주일간, 귀족들의 복식을 강제했으며, 이에 대해 반발하는 자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 귀족이 아닌 자들 중에도 상복을 갖춘 사내가 한 사람 더 있었다.
“제피스 형제님.”
“키르하스 자매. 오랜, 오랜만이군.”
“예, 형제님.”
르네 필리파가 제위에 오르기 전까지 기거하던 카르벨리에 저택은 이제 수인 호족 연합의 대사관저로 사용되고 있었다. 황제의 초청에 따라 팔텐노이아에 상경한 키르하스는 그날 아침 이른 시간에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제피스였다. 그는 머뭇거리며 손을 뻗으려다가, 몇 차례 헛짚고는 가만히 내렸다. 지금 눈앞의 여인을 쉽사리 위로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키르하스는 여전히 살풋 젖어 있는 눈으로 제피스를 올려다보았다.
“다소 이른 시각이군요. 제피스 형제님.”
“그가, 형제가 남긴 것이 있다 하지 않았나. 이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네.”
“……예, 형제님.”
키르하스는 입술을 꼭 깨물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는, 화려하게 치장된 함에서 작은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책자의 겉표지에 붉은 밀랍 봉인이 발려 있었다. 너무나 익숙한 문장이었다. 그건 페르난데스의, 세르너드 남작가의 문장이었다.
제피스는 조심스럽게 책자를 건네받고는 잠시 쓸어 만졌다. [미승인 작전 제안서 : 도굴]. 그 무뚝뚝한 글귀를 보자마자, 제피스는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뿌드득.
그리고, 웃음이 번졌던 것만큼 빠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디모니카의 악력은 바윗돌을 맨손으로 으스러트릴 수 있을 정도였으므로, 제피스는 하마터면 보고서를 책자 그대로 찢어버릴 뻔했다. 그는 가까스로 손아귀에 힘을 풀며 뒤로 물러섰다.
“내가 못난 꼴을 보였군. 이해해 주게. 자네가 더 야속할 텐데.”
“저는 괜찮습니다.”
누구보다 괜찮지 않아 보이는 얼굴로, 키르하스는 고개를 슬슬 저었다. 제피스는 내심, 언제나 어리게만 보였던 그녀가 대견했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페르난데스의 옷소매 뒤에 숨어서 삐죽거리며 돌아다니던 철부지 같았는데.
그토록 따르던 페르난데스가, 죽는 순간까지도 그녀에게 어떤 말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서운한 일이 될 터였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상이라도 한 듯 이렇게 보고서까지 남기지 않았던가.
제피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페르난데스의 마지막 작전 보고서라면, 이 서류에는 종이 이상의 가치가 있다. 원칙적으로 성자가 남긴 마지막 물품은 성유물로 시성될 것이다.
설령 원칙을 내려놓고 판단하더라도 이 보고서의 저자는 페르난데스다. 지금껏 그가 해 온 일들, 그가 앞으로 하려 했던 일들을 고려할 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성자가 남긴 마지막 문장은 천금보다 큰 가치가 있을 것이었다.
이 서류는 그 어떤 보고서들보다 빠르게 교황청에 가야 한다. 그 자신은 더 이상 사제가 아니었으나, 이건 인간으로서의 의무였다.
“제피스 형제님. 도리를 벗어난 행동이란 것을 알지만,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그 물건을…… 저는, 저는 도저히 혼자 열어 볼 수 없었지만…… 그 물건을 제 앞에서 개봉해 주실 수 있습니까……?”
키르하스는 물기 젖은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페르난데스의 마지막 유언이 남겨져 있을 이 책자를, 그녀는 도저히 혼자 열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그 누구에게도 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서류를 개봉해서, 혹시라도 그 안에 ‘페르난데스의 죽음’ 암시라도 되어 있다면 무너질 자신을 감당할 수 없었다. 키르하스는 아직 그가 죽었다고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보고서였다. 그녀의 주군이 남긴, 교황청으로 발송하길 바랐던. 그러므로 저 물건은 반드시 교황청에 발송되어야 했다.
“키르하스 자매.”
“제게 교황청 비밀 인가가 없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의 마지막 말씀을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내겐 이 문서를 열거나 공유할 권한이 없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이제 더 이상 사제가 아닐세.”
“저도 더 이상 토치맨이 아닙니다. 저는 그날 이후 환속하길 결심했습니다. 애초에, 제가 교회에 귀의한 것은 그분의 뜻 때문이었으니. 이제 더 이상 교회에 머무를 이유가 없더군요.”
만일 제피스가 여전히 사제였다면 당장 신성모독죄를 물었을 발언이었다. 그러나 제피스는 그녀의 굳은 눈을 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네가 지금껏 세상을 위해 보인 헌신이라면, 주께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을 돌려 주시겠지.”
제피스는 짧게 성호를 긋고는 후드를 뒤집어썼다. 주의 앞에서 불경을 저지를 수 없으니 그림자 아래에 숨겠다는, 낡은 관습이었다. 그는 천천히 보고서 겉장의 밀랍 봉인을 떼어내고 서류를 펼쳤다.
* * *
[미승인 작전 제안서 : 도굴]
작전 지역 : 제국 동부 디안 지방 르빌 산맥 자크시 광산
작전 개요 : 광산 내부 14번 갱도 초입 우측 내벽에서 이어지는 비밀 통로 탐색 및 고대 유적 발굴.
작전 상세 :
1) 해당 광산의 내부에 고대 드워프 유적, [다라프 아짐]의 존재가 확인됨.
2) 다각적 조사 결과, 해당 유적은 강력한 고대 존재를 봉인하고 있음을 확인함.
3) 천상 전쟁 시절의 고대 사료와 엘프 왕가의 사료를 취합해, 그 존재가 악마임을 특정함.
4) 대악마에 준하는 존재가 봉인된 차원이 해당 유적 내부에 관문 형태로 남아 있음을 파악함.
5) 뭄토, 사다르켈리사, 우르카시아, 예카세트의 위치 및 상태가 특정된 상황이므로, 해당 유적에 봉인된 존재는 고대의 대악마, [진홍대공]으로 유추됨.
6) 봉인의 상태 점검 및 강화, 또는 직접적인 근원 제거를 시도 요망.
작전 지원 요청 :
1) 최소 더블 캐스팅이 가능한 3급 이상의 엔마기카 30인.
2) 3급 이상의 디모니카 20인.
3) 자결에 준하는 금제가 걸린 말레디카 40인.
4) 라비라타 왕조의 유물 [주홍색 홀]과 해당 유물을 활용할 망령 사제 10인.
5) 30세 이후의 다리안 쉬라이크.
6) 유적 외부에서 봉인 해주의 이차적 피해 확대를 저지할 무장 병력 및 통솔 역의 헤레티카 40인.
7) 각 인종과 연령이 다른 무고한 일반인 다섯.
8) 가이메른 왕조의 유물전에 위치한 [백색 갈기창]과 해당 무구를 다룰 수 있는 하프엘프 1인.
작전 수행 예상 손실 :
1) 엔마기카 전원의 사망
2) 디모니카 전원의 사망
3) 말레디카 전원의 사망
4) 망령사제 전원의 사망
5) 작전 실패 이후 제국 동부 디안 지방에서 동부 왕국 연합에 이르는 대단위 면적의 항구적 손실.
작전 실패 후 대응 프로토콜 :
1) 교회 1급 성유물 [열쇠검]을 제물로 바쳐 천상의 봉문을 해주.
2) 마지막 대천사의 행보를 확보.
3) 대천사 확보에 성공할 시, 교황 주재 기원. 천상 만신전의 회랑에 ‘역천’을 요구.
작전 입안자 : 디모니카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악마를, 이단을, 마녀를 불태우리라.
* * *
제피스는 천천히 보고서를 닫았다. 그 뒤는 여러가지 붙임 문서와 작전 지도, 타임라인별 개요도 따위가 첨부되어 있었다.
“혹시, 페르난데스 형제가 생전에 대천사나…… 역천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인지…….”
“성하께서는 무언가 알고 계실 수도 있지. 적어도 이 서류가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닌 것 같군.”
도저히 뜻을 알 수 없는 지시 사항들이 길게 붙어 있는 보고서를 닫고서, 제피스는 잠시 보고서의 겉면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은 언제 유언을 남기는가. 자신의 후인들, 자신의 지인들에게 못다 한 말을 글줄로나마 전하고자 할 때가 아닐까. 하지만 이건, 이 보고서는…….
그는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미련이 없었군. 형제.”
“……네?”
“아니, 아닐세. 언제가 될지 모르겠으나, 다시 볼 수 있었으면 하네. 시간 내어주어 고맙네.”
제피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는 문을 닫은 채, 텅 빈 복도를 거닐며 속삭였다.
“우리 중 가장 밝게 빛나는 이 거두시니, 이는 세상의 별이 되게 하심이라.”
-뎅—!
* * *
평원을 가득 채운 시체들을 치우고 매장하고 불태우길 열흘. 황제와 왕, 대족장과 서펜트 퀸, 그리고 용의 요구에 따라 단 하나의 시체, 단 한 조각의 단서라도 찾기 위해 전장 전역을 뒤적인 시간이 그 정도였다.
고된 행군과 전투 피로로 녹초가 된 병사들 사이에서 슬슬 불만이 피어오를 때쯤 마침내 수색이 마무리되었다. 결국 평원에선 그 어떤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끔찍한, 비참한 전투의 흔적뿐.
“오늘도? 오늘도 없었어?”
“린드부름. 이제 포기할 때가 되었다.”
“포기……? 프레이야. 나는 오백 년 전에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아벨은 프레이야를 날카롭게 쏘아보고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체와 핏자국이 즐비했던 이 평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잡초가 무성해져 있었다. 이 땅이 품은 지독한 생명력 탓이었다.
아벨과 프레이야는 전쟁이 끝난 이후 이 지역 전체를 모두 뒤집을 기세로 수색을 이어 나갔다.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차라리 비극에 가깝다. 죽음을 인지하면서도, 이별을 인정할 수 없게 하니까.
공식적으로 페르난데스의 상태는 ‘실종’이었다. 결코 ‘전사’가 아니었다. 적어도 아벨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늑대가 삼켰다면 내장에서 그이의 물건이라도 나오지 않았겠어? 프레이야. 다시 한번만 더 찾아보자. 저 어딘가에, 내 도움을 기다리며 추위에 떨고 있을 수도 있어. 그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아벨은 고개를 숙이고 떨며 말했다. 프레이야는 내심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이 지역 전체는 엘프 기함의 포화에 한 차례 불살라졌고, 그 위로 수많은 시체들이 쌓였으며, 다시 한번 그 시체들을 불태웠으니.
그 후에 저렇게 들풀마저 자라난 지금까지 그가 살아 있다면 그건 얼마나 괴롭고 힘든 시간이 될 것인가. 생명이 감지되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도, 천에 하나라도 그가 그리 희박한 숨결을 품고 살아 있다면 그는 차라리 죽기를 바랄 만큼의 고통을 견디고 있으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벨에게 말해 줄 수는 없었다. 다만 살아 있길 바라는 여인에게, 살아 있다면 지옥보다 큰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라 말하는 것은 결코 사려 깊지 않은 언행이 될 것이다.
“그래. 그러자꾸나. 한 번만 더 찾아보자.”
아벨은 대답 없이 초원으로 나섰다. 막사 너머로, 검푸른 밤하늘 위로 달과 별이 흐드러져 있었다. 아벨은 아무 말 없이 저벅저벅 초원 한복판을 향해 걸어 나가다가, 잠시 하늘을 바라보고는 갑작스레 허물어졌다.
“린드부름!!”
무언가를 찾은 것일까? 프레이야는 깜짝 놀라 아벨에게 뛰어갔다. 그러나 그녀에게 얼마 다가가지 못하고 멈춰 서야 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던 방향, 저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 사이에 파란 별이 보였던 탓이다.
아벨레사스 자리. 천상 전쟁 이전 시절, 그녀가 숨결 한 번에 드워프 도시를 불사르며 날뛰던, 고룡의 광기에 잠식되어 가던 시절에 만들어진 그녀를 위한 별자리였다.
그리고 언젠가 그녀가 했던 말이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모든 여정을 끝내고 평화를 되찾게 되면, 자신의 별자리 아래에 그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리라고. 수줍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프레이야는 참 주책 맞은 고백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지금, 그녀는 바닥에 허물어져 들풀을 쥐어뜯으며 흐느끼는 아벨에게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차라리, 차라리 나를 데려가지 그랬느냐. 나를…… 나를 데려가지 그랬느냐. 나는 익숙하다. 나는 먼저 떠나는 것이 익숙했단 말이야……. 페르난데스. 나는, 남겨지는 것이 낯설어 두렵구나…….”
아벨은 부서지고 그을은, 낡은 로사리오를 움켜쥔 채 흐느꼈다.
* * *
아벨에 의해 페르난데스의 마지막 유품이 확인되었으나, 그가 지니고 있던 성유물들은 회수되지 않았다. 교회는 공식적으로 성자가 소천했다 기록하고, 페르난데스를 시복한다.
시성자문단은 만장일치로, 성 페르난데스 소천일을 축일로 공표했다. 그는 대황야의 수호성인으로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