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부그르륵.
페르난데스는 문득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액체를 가로질러 거품이 피어오르는 듯한 소리를. 언제나처럼, 그는 눈을 뜨기 전에 몸 상태를 확인해 보려 시도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부유감뿐. 텅 빈 허공을 부유하는 감각만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아니, 이걸 감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단적으로 말해 신경과 통각이 모두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닐까?
‘페이자쉬.’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파편처럼 흩어진 기억들을 짜 맞추기 시작했다. 예카세트를 대적했고, 카라드스카르를 막아냈으며, 탈진한 상태로 악마들의 공세를 받아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두개골을 파고드는 송곳니의 끔찍한 파괴음뿐.
그렇다면 죽은 것인가. 자문할 필요도 없다. 그 누구도 그런 부상에서 회복할 수는 없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그는 아들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게 저승인가.’
지옥의 나락도, 만신전의 회랑도 아닌 공간. 지독한 침묵과 망망대해 같은 공간. 이것이 사후 세계인가?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눈을 떠 보았다.
‘하하…….’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새카만, 정녕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는 손과 발을 내려다보았다. 흉터 가득했던 몸이 지금은 어떤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했다.
‘마지막 도박이 실패했나. 어울리는 최후로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옥의 영원한 고문은 그 자극만큼 페르난데스에게 실재감을 줄 것이다. 만신전의 달콤한 꿀물은 그에게 새로운 영감과 기력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공간, 기약 없이 영원히 떠돌며 끊임없이 자문자답을 이어가는 공간은.
‘천천히 바스라져 사라지겠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까. 여든의 삶에 삼 년의 인생을 더한 영혼이 어떤 자극도 없는 공간에서 스스로 붕괴해 흩어지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까. 그리고, 존재가 표백되는 그 과정을 견딜 이유는 있는가.
다른 그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겐 차라리 더 참된 지옥의 표상이나 다름없었다. 이 노회한 흑마법사에게 사후의 징벌을 내리겠다면, 이보다 적합한 공간 따윈 없을 것이다.
끝없는 반성과 후회, 한탄과 비난, 자조만을 반복하며 보잘것없이 흩어지는 최후가 지옥의 악마들이 들이미는 녹슨 고문 칼보다 더 끔찍할 테니까.
‘아들아…….’
그래서, 페르난데스는 스스로 그 고통을 짊어지기로 했다. 그에게 내려진 형벌이 영원한 후회 속에 짓눌려 죽는 것이라면, 그는 회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것이 사유뿐이라면, 가장 가치 있는 생각을 해야 했다.
공간 위에 색체가 얹어진다. 천천히 형상을 띠고. 외부의 자극 없이 고도로 집중된 그의 정신이 자신의 눈에 형태를 투사하고 있었다. 실체 없는 형상이지만, 천천히. 천천히 정성스럽게 형태를 빚어 내며—
짙푸른 눈과 곧게 솟은 눈썹, 잘 빗어 다듬은 검은 머리칼. 섬세한 콧등과 날렵한 턱선. 오랜 시간 단련해 단단한 체형과 탄력 있는 근육들까지.
젊은 시절 자신의 얼굴을 반절, 그리고 그날 낡은 헛간에서 그에게 따듯한 우유를 건네던 그 여인의 얼굴을 반절 섞어. 자칫 냉혹하게 보일 수 있는 날카로운 눈매엔 온화함이, 삐뚤게 솟은 입매엔 부드러움이 담긴다.
언제나 애환에 차 있고, 항상 유약했으며, 꺾인 자존심과 비탄에 고개를 들지 못했던 그때 그 청년의 모습을 다시 손질해서.
만일, 네가 정상적인 환경에서…… 아니, 부족하더라도 행복했던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 그런 치기 어린 상상을 하며,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자신을 마주 본 청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들아, 네 어미가 살아 있었다면. 아리아도 너를 자랑스러워했을 게다. 언제나 그랬듯이, 네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우리의 행복이며 자랑이었단다.”
올바른 환경에서 아이를 키웠다면, 어쩌면 그는 이런 말을 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 속의 아들이 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하지 못했던 일들보다 해내 온 일들이 먼저 떠오르는구나. 내가 해 온 그 모든 고난은 오직 너를 위한 것이었으며, 내게 업적이라 부를 만한 것이 단 하나 있다면 네 아비가 되었던 것이었다.”
늙은 흑마법사의 고백이 이어졌다. 허상을 향해 뱉어 내는 공허한 말에 불과하며, 그것이 결국 자기 자신을 무너트리고 말 것임을 누구보다 명확히 알고 있었음에도.
여기서 더 정신이 무너진 이후엔 지금처럼 진솔하게 말할 수 없으리라. 그러니, 조금이라도 이성이 남아 있을 때 하는 것이 맞다.
“천 번을 되산다 해도 네 아비가 되고 싶다. 천 년을 살아간다 한들 그 하루보다 못하다. 나는……. 나는 네게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었다.”
-화르륵!
꿈결처럼 아들의 형상이 사라졌다. 상상은 때때로 걷잡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상상이 그대로 눈앞에 투영되는 지금이라면 더욱이.
-아리아. 울지 마라. 내가, 내가 너를 살리겠다.
-선생님, 이제 누가 있어 선생님을 대신해 울어 줄까요.
-모자라고 하찮은 놈. 너는 네 어미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구나.
-아버지, 다음엔 반드시 당신께 부끄럽지 않은 결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마구잡이로 솟아오른 상상들이 기억을 빚어 낸다. 팔십 년. 후회와 비참함, 비통과 한탄만 가득했던 그날의 기억들이 하나씩하나씩 그의 눈앞에 진열되어 가고 있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페르난데스는 묵묵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회피할 수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그의 형벌이고, 그의 지옥이라면. 그는 기꺼이 감내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 * *
[바시르, 검은 이리의 대주술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반절 정도 완성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태양이시여.]
[서둘러라. 이 사내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타라산, 투텝 왕은 깨어났는가?]
[고왕의 묘실의 저항이 거세어 어렵습니다.]
[투텝 왕의 붉은 말벌 침이 필요하다. 반드시 오늘 안에 그자를 깨워라. 정 필요하다면 다소 거친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좋다.]
화려한 금세공과 보석이 장식된 석주들이 원형을 그리며 늘어서 있는 이 거대한 홀엔, 라비라타의 맑은 목소리와 이에 대답하는 망령 사제들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려 퍼지고 있었다.
본디 망자들은 어느 순간에도 고요한 법이지만, 지금만큼 이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던 때가 없었다. 약제와 토기, 항아리와 보석들이 그 움직임에 따라 부딪치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열세 개의 석주와 그 석주의 표면에 발라진 향료, 그리고 세공된 보석들 위로 지맥의 마력이 흐르며, 홀의 중심을 향해 뻗어 나간다. 라비라타는 그 흐름을 정교하게 조율하며 눈앞의 거대한 관을 바라보았다.
창생의 관. 이바리스 내부에 잠든 수많은 고유물 중 가장 위대한 유물이며, 상 아시트 시대, 그녀가 이 대평원을 온전히 지배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것 중 하나였다.
지금 시대의 마법으로는 감히 재현할 수조차 없는, 천상 전쟁 이래 사라져가는 신들의 힘이 파편이나마 남아 있던 고대의 유적이다.
[살아야 한다. 페르난데스.]
창생의 관 위에 손을 얹으며, 라비라타는 조용히 속삭였다. 이 유물은 죽은 자를 되살리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사라진 육체를 새로이 빚어내는 것에 가깝다. 영체를 물질 세계에 묶어 두고, 영체가 기억하는 육신을 짜 올려 그 내부에 덧입히는 종류의 유물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단 하나.
[짐은 너를 믿는다.]
이 유물로 부활한 자들 중 온전한 정신을 지녔던 이가 없었다는 것. 생전의 기억과 영혼을 보존하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그 누구도 만들어진 육체를 입는 순간에까지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상 아시트의 오랜 역사 동안 수많은 망령 사제들이 이 유물의 결함을 분석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극도로 발달한 네크로맨시와 마력 용접 기술로도 이 유물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모든 사제들은 이 유물에 결함이 없다 단언했다. 유물의 구동 원리와 마력식은 완벽한 황금률을 그리고 있으며, 시행 절차와 시순을 적은 서판에서도 흠결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제들은 인정해야 했다. 기술적으로 이 유물은 완벽하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완벽하지 않다. 결함이 있는 쪽은 필멸자의 영혼이며, 따라서 이 유물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다.
지독한 역설이다. 라비라타는 그 사실에 다시 한번 조소할 수밖에 없었다. 불멸자에겐 이런 유물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 유물은 필멸자가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영성이 신성의 길로 접어든 ‘구도자’는 어떨까. 준신의 격에 달하는 영성을 쌓아 올린 존재라면 어떨까. 그런 영혼이라면 이 과정을 견뎌 낼 수 있을까.
조각나고 찢어진, 이미 심장까지 싸늘하게 식어 버린 시체를 발견했을 때, 라비라타는 너무나 강대해진 영혼이 육체를 미처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곧장 창생의 관을 떠올렸다.
이 정도의 영혼이라면 어쩌면, 창생의 관에서 부활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녀는 그 순간, 어쩌면 자신이 건넨 말이 예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고대의 왕들이 으레 그랬듯이.
‘살아서 인간이며, 죽어서 신이 되리라.’
그 의미가, 진정코 사후에 그 권위와 업적을 인정받아 신격에 오른다는 뜻이 아니었단 말인가. 라비라타는 이 역시 역설적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그저 이 사내를 네크로맨시로 부활시키는 편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인간의 본질에 그 누구보다 강박적이었던 사내를, 심지어 제 자식을 망자로 되살린 것에 후회하며 떠돌던 사내를 어찌 망령으로 되살릴 수 있단 말인가.
* * *
페르난데스의 시복 절차를 끝내고, 교황은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잠시 보고서를 뒤적였다. 한참 보고서의 마지막 장을 반복해서 읽던 그는,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
-똑똑.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집무실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철두철미한 사람이군. 교황은 부드럽게 웃으며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성하, 신도 제피스 시라다스트가 입청을 청합니다.”
“어서 모시게.”
-끼이익.
곧 문이 열리며 예복을 곱게 다려 입은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들어섰다. 그는 정확히 다섯 걸음을 걸어와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 모습에 교황은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부르셨습니까.”
“그대가 해 주어야 할 것이 있네. 제피스 형제.”
“형제라니요…… 저는 이미 수도복을 내려놓은 죄인입니다. 말씀 편히 하십시오.”
“내 눈엔 아직 한 사람의 디모니카가 보이는군. 앉게. 이야기가 길어질 수 있으니.”
교황은 테이블에 다기를 올리고 따듯한 찻물을 부으며 말했다.
“성자의 보고서를 혹 먼저 보았나?”
“……예, 성하. 다만 제 죄를 물으소서.”
“상관없네. 혹여 이상한 점이 없던가?”
“이상한 점…… 말씀이십니까?”
제피스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베이타서스 교회의 교황은 결코 허언을 입에 담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천천히 보고서의 내용을 떠올리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제 배움이 짧고 아둔하여 미처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대의 배움이 짧다면 우리 중 누가 감히 학식이 있다 자부하겠나. 겸양하지 말게. 제피스 형제, 이 보고서에 소위…… ‘실패 후의 프로토콜’이라 적힌 행간이 이상하지 않던가?”
“역천…… 대천사…… 그런 단어들 말씀이십니까? 예, 하지만 성하께선…….”
“사제의 표현이 아닐세.”
“……예?”
“사제의 표현이 아닐세. 역천. 하늘을 뒤집는다라…….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땅과 하늘이 뒤바뀐다는 뜻이 될 것이요, 하늘이 발 아래에 있고 땅이 머리 위에 있어 우리가 땅을 디디듯 저 구름을 딛는다면. 자, 무슨 뜻일 것 같나?”
제피스는 교황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땅과 하늘이 뒤집히고, 하늘을 땅처럼 디딘다? 땅이 곧 하늘이 된다면 땅 위에서 하늘을 볼 때, 그건 사람들이 땅으로 솟는 것과 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제피스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그는 천천히 테이블 위에 손을 얹고, 흉터 덮인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제법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교황도, 제피스도 그 행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고, 제피스는 신음하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휴거…… 입니까?”
“그렇네. 정황상 이를 뜻하는 것이 자명하지. 대악마의 봉인이 풀려나고 이를 막기 위한 모든 행위가 실패한 이후에라면 지상이 지옥과 다름없어질 테니. 만신전의 봉문을 깨고 휴거를 청하라는 뜻이 되겠지. 하지만 여기서 이상한 점이 더 있다네.”
“그게…… 그게 무엇입니까.”
“휴거를 역천이라 설명했다는 것. 단순히 의미를 꼬아서 만들었다기엔 적이 이상한 활용이지. 하늘로 향하는 것을 현상 그대로 설명했다 보기에 어렵네. 역천이라. 의미를 곧이곧대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이는 ‘순리를 뒤집는다.’라는 뜻. 사람이 하늘로 향하는 것이 순리를 뒤집는다는 뜻은 곧…….”
“사제의 도리가 아니다…… 그 뜻이군요.”
“그렇네. 나는 페르난데스 형제가 어쩌면…….”
“그는 이단이 아닙니다.”
교황의 말에 제피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자칫 불경이나 이단에 대한 죄목으로 화형될 수도 있는 언사였다. 그러나 교황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이단 종파 출신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네.”
“……예?”
“그 청년은 예언자였네. 그것도 아주 세밀하게, 거의 완벽할 정도로 강력한 예언자였지. 때때로, 나는 그 청년이 제출한 보고서를 볼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네. 이자가 사제가 되지 않았다면, 무엇이 되었을까. 하고.”
“…….”
그건 제피스 또한 종종 해 온 생각이었다. 이런 업적을 남길 수 있는 존재가 사제가 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자가 되었을까. 세속 왕가를 불사르는 정복자나, 위대한 학자, 또는…….
“이단 사교도가 되어 흑마술과 비술을 사용하는 자신의 미래를, 어쩌면 심취할 정도로 깊게 알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가정하고 보니, 성자 형제의 행보가 하나둘 이해되기 시작했네. 강력한 예언 능력과 이를 통해 개화한 흑마법에 대한 조예. 그 둘을 합치고 본다면 성자 형제의 이 업적들을 설명할 수 있지. 대단히 철두철미하고, 아주 냉혹하며, 극단적일 정도로 경제적인 사내라고.”
이단과 이단사냥꾼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악마를 추종하느냐, 또는 추적하느냐. 이따금씩 외부에서 보기에 이 둘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따라서 강력한 이단은 곧 위대한 이단사냥꾼의 가능성 또한 내포한다. 어쩌면 먼 미래에 이 청년은 대단히 강력한,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로 강력한 이단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미래를 깨닫고, 그 과정에서의 성취를 미리 엿본 청년이. 이단사냥꾼을 선택했다면…….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보니, 이 보고서가 다시 보이더군. 열쇠검. 성자 형제의 신성을 보증하는 주의 성유물. 여기에 언급된 대악마를 봉인할 때 반드시 필요하다 나열된 목록에 있었지.”
“……예. 성하.”
“그 성유물은 지금 성자 형제의 소천과 함께 사라져 도저히 찾을 수가 없네. 교회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고 있음에도,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어.”
그 말에 제피스는 입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쥐었다. 그 위로 교황의 단호한 목소리가 울렸다.
“다른 이들이 이 보고서를 보고 유언장이라 여겼겠지. 자신이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해 달라는 고인의 유언이라고. 숭고한 뜻이며, 더불어 신성한 뜻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네. 이토록 강력한 예언자가 최후의 순간에 남긴 기록은, 다시 말해 우리의 손으로 반드시 이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될 테니.”
어떤 종류의, 지고한 경지에 도달한 예언자들의 말은 자기 실현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미 말과 행동 그 자체가 예언의 일부가 되고 마는 것이다. 고대의 예언자들, 역사나 신화 속에 기록된 예언자들의 행보를 본다면 보다 명징해진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페르난데스와 같은 예언자가 최후의 예언서를 기술했는데, 정작 그 예언서에 실현될 수 없는 것을 적어 놓는다는 건 자가당착적인 행동이다.
열쇠검은 페르난데스와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대악마의 봉인을 풀고 놈을 격살하기 위해선 열쇠검이 필요하다. 심지어, 격살에 실패할 경우 휴거를 시도할 때에조차도.
이토록 중요한 물품을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건. 그리고 페르난데스의 유해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건.
“성자 형제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입니까?”
“그리고 이건 자신의 손으로 일을 마무리할 수 없는 상태가 될 테니, 그 일처리를 부탁한다는 식의 제안서가 되겠군.”
“하지만…… 대체 어디에…….”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곳에, 그리고 우리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는 상태로 있겠지. 황야의 대악마와 격돌하는 순간에.”
제피스의 손에서 떨림이 멎었다. 그는 차분하게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려, 품 속의 묵주를 꺼내 들었다. 천천히 묵주를 굴리며 상념에 빠져든 그를 바라보고, 교황은 조용히 말했다.
“힘든 여정이 될 것이네, 형제여.”
“……가로되, 누가 있어 나를 위해 갈 것이며, 누가 우리를 위해 행할 것인가. 하시니.”
“주여,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막토.”
“막토 수페를라우도. 형제여. 형제의 앞길에 주의 평강이 함께하길.”
제피스는 감았던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뒤로, 교황의 말이 울렸다.
“그대의 성직을 복권하겠네.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의 2급 심문관 제피스 시라다스트. 그대는 이 순간부터 다시 주의 종으로 일념을 다하게.”
“성은을 받들겠나이다.”
-끼이익, 탁.
닫힌 문을 바라보며, 교황은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