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 불멸자와 필멸자 (1)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비아노의 일과는 언제나와 같았다. 열성적으로 기도하며 신체를 단련하고, 이따금씩 악마 사건이 접수되면 파견 나가 근원을 제거했다. 새벽 첫닭이 울기 전에 일어나고, 늦은 새벽까지 성경을 읽거나 사건철들을 분석했다.
일상적인 디모니카의 삶이었다. 그들을 관리하기 전까지는. 파비아노는 요즘, 진심으로 환속을 고민하고 있었다.
“어…… 음……. 밀리안 형제님. 그러니까…….”
“지금 벨자인 시의 이단 사건 접수와 비카레 호의 실종 사건 간의 연관성을 조사하던 중에 발견된 정황 증거들입니다. 파비아노 형제. 헤레티카 둘이 실종되었고 사망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벨자인 시로 디모니카 파견을 요청하는 겁니까……? 맞죠?”
“아뇨, 형제님. 비카레 호는 벨자인 시와 팔론 시의 경계에 있습니다. 두 지역의 영주인 발리에스 남작과 팔레스 남작은 페이른 왕실에서 1왕자와 2왕자의 파벌에 각각 속해 있습니다. 자칫 사건이 두 파벌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수도 있는 시국입니다.”
파비아노는 지도를 찔러 가며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엔마기카 형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듣자 하니 대단히 예민한 정치적 사안 속에 이단 사건이 발생하여 난관을 겪는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최근 동부 왕국 연합 내에서 교회의 입지가 다소 불안정합니다. 얼마 전 북부 십자군 원정 요청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이때 세속 왕가의 정치적 균형에 개입한다는 이미지를 심어 줄 수도 있는 노릇인지라…….”
절반 정도의 말이 파비아노의 귓가에서 튕겨져 나갔다. 그는 두꺼운 손가락으로 뒤통수를 긁고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제피스 형제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명령이 내려온다. 명령을 수행한다. 그 지역의 악마가 죽는다. 더 좋은 세상이 다가온다. 사건 해결!
이것이 파비아노와 모든 디모니카들의 기본 논리였다. 그 바탕에는, 제피스의 고뇌와 슬픔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았다. 이건 어쩌면 자식이 성장해 또 다른 자녀를 낳고, 그제야 부모의 마음을 깨닫는 과정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
오오, 생명 순환의 경이로움이란. 파비아노는 감탄하며 성호를 긋고는 조용히 주를 찬미했다.
“……막토.”
“듣고 있습니까. 형제님? 디모니카 파견 요청은 정식으로 헤레티카 성소에서 공문을 올린 사안입니다. 그 형제님들도 이 지점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감하다더군요. 악마 제의의 정황은 확실한데, 아직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단과 사교 활동을 조사하고 그 근원을 제거한다. 이것은 헤레티카들의 업무였다. 하지만 악마의 소환 정황이 확정되고, 해당 지역에 악마가 도사리고 있음을 파악한다면 헤레티카들은 그 즉시 해당 사건에서 손을 떼게 된다.
축성을 받은 디모니카들과는 달리, 헤레티카들은 훈련받은 일반 사제들에 불과하다. 그 의지와 지혜는 물론, 숭고함으로 따져도 일반 사제로 칠 수는 없겠으나. 그들은 지옥 마력의 타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때부터는 이에 대해 어느 정도 면역력을 지닌 디모니카들이 직접 나서서 사건을 해결해야 했다. 지역 조사와 탐문, 그리고 지역 정화에 이르기까지. 디모니카들은 단순히 힘만 센 바보들이 아니다.
‘진짜 그렇겠지……?’
엔마기카, 밀리안은 멍하니 성호를 긋는 파비아노를 바라보며 자신의 상식을 점검해야 했다. 진짜 단순히 힘만 센 동네 바보는 아니겠지……? 사제의 법의를 입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상식 시험 정도는 치러야 하니까……?
“형제. 듣고 계십니까?”
“아, 물론입니다, 밀리안 형제님. 주의 경이로움을 찬미하는 중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요?”
“우리가 어디, 상황에 따라 주를 경외하던가요, 형제님?”
맞는 말이긴 했다. 맞는 말인데…….
“그래서, 형제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지금 해당 지역은 헤레티카 형제님들에 의해 감시받고 있으나, 지금 이 순간에도 각 도시와 인근 지역의 유동 인구를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두 도시 중 하나를 먼저 수색해야 하고, 그건 디모니카 형제들로 해야 하는데 어느 방향으로 진출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오…… 예! 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마냥 바보는 아닌 것 같다. 밀리안은 저도 모르게 성호를 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요약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곰 같은 사내가 드디어 요지를 파악한 것이다.
“주께서 이르시길, 너는 마음을 다하여 주의 역사하심을 신뢰하고 네 명철에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주께서 네 길을 인도하시리라.”
“……형제님?”
“참으로 옳은 말씀이 아닙니까? 밀리안 형제님. 주께서는 답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 답을 저희의 미욱한 마음으로는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지상의 저희는 지상의 근심을 고뇌해야지요, 형제님. 도피하시기 위해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악덕입니다.”
“어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제님. 자자, 주께선 제가 가야 할 길을 제가 갈 때 일러 주시는 분이시니, 참으로 그리될 것입니다.”
“……막토.”
엔마기카는 성호를 긋고는 일어섰다. 그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시렵니까, 형제여. 헤레티카 형제님들에게 그 반대 방향을 일러 주어 만일을 대비해야 합니다.”
두 지역이 동시에 의심받고 있으며, 파견 인력이 부족한 현 상황에서. 한 지역에 디모니카가 파견된다면 반대 지역의 감시망이 보다 공고해져야 했다. 동시에 엔마기카들은 지역 귀족 사회를 안정시키고 혹시 모를 이변을 대비해야 했다.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 이단심문청은 하나의 조직이다. 세 분파는 각기 다른 위상을 지니고 있으나, 그것이 상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철저한 연계를 통해 단 하나의 이단조차 용인하지 않는 것이 이들 소명이었다.
따라서, 디모니카의 수장이 변한 지금. 엔마기카와 헤레티카는 갑작스레 바뀐 업무 환경에 혼란과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파비아노는 그런 밀리안 형제의 고민에도 활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막토 수페를라우도. 두 지역 모두 디모니카를 파견하겠습니다.”
“……예? 하지만 지금 인력이…….”
“저도 디모니카입니다. 하하, 이따금 제피스 형제님께선 스스로 작전에 나서곤 하셨지요. 그 본을 받아 저 또한 직접 현장으로 나서겠습니다. 율리아노 형제가 마침 성소에 있으니, 그 형제는 팔론 시로 향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한 지역은 제가 직접 나서지요.”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물론 제피스는 오랜 경력과 그 자질로 지휘에 익숙한 사내였으며, 디모니카 병력 운용에 빈틈이 없었기에 때때로 현장 업무를 직접 처리하곤 했다.
파비아노가 그런 식의 완벽한 조율을 보일 것 같지는 않았으나, 당장 교회에 접수된 급박한 사건이나 정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해당 지역의 악마 사건을 실수로 놓치거나 지역구에 이단 사교도들이 활개치는 것보단 차라리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감수하는 편이 나으리라.
엔마기카는 그렇게 납득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선택…… 아니, 파비아노의 경력을 보자면 최선의 선택일지도 몰랐다.
* * *
다리안은 빛 한 줄기 들어오는 어두운 오두막에 앉아, 벽에 기대어 놓은 창을 바라보았다. 태양창. 한때 성유물이었던 그 창은 지금 그의 손길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분노도, 억울함도 없었다. 그는 그저 조소할 뿐이었다. 옹졸한 천상 만신전의 위선자들이 보이는 태도에. 그들은 자신의 물음에 답하지도, 약속대로 세상을 구원하지도 않았다.
최선을 다해 사람을 구해 보았다. 작은 악을 방기하고 더 큰 생명을 추구했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는 없어도, 절대 다수의 죽음을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황제를 죽이면 모든 일이 끝났던가. 그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 황제가 뿌린 악의는 제국 전역에 퍼져 있었고, 이를 깨달았을 때 이미 사태는 극단에 몰려 있었다.
황제를 죽인다면 내전이 시작될 것이었다. 그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 와류를 막아 낼 수 없었다. 전쟁은 단순한 병력과 병력의 충돌이 아니다. 수만 명의 병사들이 죽는다면, 수십만 명의 아사자와 피난민들이 가도에서 죽는다.
병력의 준동은 국가의 자원을 누출시킨다. 50년 전쟁의 타격으로 제국은 그 뿌리부터 말라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을 막아야 했다. 절개하는 순간 환자를 죽이게 될 종양이라면, 차라리 종양의 확대를 막아 내는 수준의 수술이 최선이리라.
그렇게 믿었다. 그의 형제. 그가 잔을 나누었던 또 다른 사내는 그렇지 않았고.
“그게 옳았다는 뜻이더냐.”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대황야의 성자. 성화를 그림으로 그려 낸 듯한 위업과 아름다운 미담. 다리안은 그 내면에 잠든 깊은 어둠을 알고 있었다. 그 청년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종류의 사내였다.
차라리 공평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 청년은 자기 자신마저 수단으로 삼았으니. 그러니 성자라 불리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정의로운가?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다. 제국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자기 파멸을 목전에 두고 있다. 최근의 승전과 당대 황제의 위엄으로 유지되고 있는 이 거대한 연합국가는, 작금의 황제가 죽는 순간 허물어지리라.
이제 선제후들은 서로를 믿지 않는다. 백성들은 귀족을 신뢰하지 않는다. 국가는 굶주린 백성을 다독일 동력을 잃었다. 지금 황실의 권위는 그 직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단지 카르벨리에 여제의 능력에서 비롯되었을 뿐. 다음 황제가 그녀만큼의 재능을 보일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역대 황제들은 대단히 노련한 정치가들에 불과했다. 황실의 권위는 거품처럼 빠르게 사그라들 것이며, 제후들은 이제 자신의 권위를 위해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천년 제국의 종말이 머지않았다.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페르난데스.”
제국의 몰락은 단순히 오래된 국가의 분열로 끝나지 않으리라. 키르자트가 다시금 준동할 것이며, 교역로는 황폐화되고 더 많은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다. 동부 왕국이 제국을 넘어 일어설 것이며, 그 이리들조차도 서로를 물어뜯을 것이니.
대전쟁의 서곡이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인류 문명은 종말을 향해 쏘아 올린 포환과 같다. 막을 수 없고, 멈출 수 없는 결과가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지금 세대에서, 몇몇 강력한 지도자와 영웅들이 보인 선전은 인류 문명의 마지막 불꽃이 되리라.
그것이 황제의 죽음이 가져온 결과다.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그자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환부를 절개해 종양을 제거한 이후, 환자에게 느리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물한 것이다.
“그런데, 왜 너희는 대답하지 않지?”
그는 빛줄기를 향해 물었다. 햇살이 낡은 오두막의 틈을 통해 내리 쪼였다. 태양창의 표면을 묶은 쇠사슬 위에서, 먼지가 부유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겁을 먹었으니까.]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쇳소리에 가까운 소리가. 다리안은 벌써 몇 달째 들리는 그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너도 알지 않나? 그들은 인간을 위하는 것이 아니야. 다만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이 보낼 영혼을 수확할 뿐. 저들의 목적은 더 크고 많은 영혼들에 불과해. 그리고 종말은, 저들에게 더없이 즐거운 순간이 되겠지. 수많은 인간들이 저들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죽어 갈 테니.]
목소리는 쉿쉿거리는 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환자가 없다면 의사는 굶주리겠지. 망자가 없다면 장의사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어린아이야, 우리 모두가 봉인되어 저 지옥 아래에 속박된 지난 천년간. 천상의 위선자들이 어째서 우리를 근절하지 않았는지 알고 있느냐? 우리의 존재가 저들의 신앙을 배부르게 하기 때문이다.]
부정해야 했다. 이 목소리가 진짜 악마의 것이든, 그의 미혹이 만들어 낸 환상이든.
[바로 보라. 이 진리를 깨달은 자가 역사간 적지 않았으나, 그자들 모두가 저들의 손 아래에 죽어 갔노라. 그 증거가 네 눈앞에 있다. 저 위선자들이 네게 넘긴 무구를 보라. 대답 없는 신들이 너를 두려워한다는 증거다.]
다리안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태양창을 만지려 들었다. 그 순간, 쇠사슬이 붉게 달아오르며 그의 손끝을 그을렸다. 치익,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다리안은 손을 물리며 잠시 창날을 노려보았다.
[악마는 인간의 멸망을 바라지 않는다. 인간이 멸망한 그 이후에, 천상의 위선자들이 향할 창끝이 자신들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지. 하지만 저들은? 인간을 미혹하고, 모든 방법을 다해 착취하여, 끝내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신들에게 간구하도록 교묘히 조작하지. 돼지치기와 돼지. 목자와 양 떼의 관계와 같다. 성실하게 기르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며, 잡아먹지.]
그러니, 신들은 자신을 목자라 부르는 것이 아니더냐. 목소리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너희는 신들에 의해 빚어진 것이 아니다. 천상 전쟁 시절, 신들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었다. 저들은 너희의 성장과 발전에 어떤 이바지도 하지 않은 외부의 초월자들에 불과해. 강한 자들을 동경하는 것은 본능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예가 되길 자처하는 것을 우리는 신앙이라 부른다.]
기대어 놓은 창날이 천천히 식어 가는 것이 보였다. 먼지가 열기에 부산스럽게 흩어지고, 다시 모여들었다.
[인간에겐 신이 필요하지 않다. 신에게 인간이 필요한 것일 뿐. 그러나 어째서 너희는 스스로 노예가 되려 하는가. 사슬을 끊어라. 인간의 신은 인간의 품속에서 탄생해야 옳은 것이 아니겠는가. 다리안, 나의 손을 잡아라. 나는 너의 스승도, 주인도 아니요, 다만 동행자로서 네게 길을 인도하여 주겠노라.]
“닥쳐라.”
다리안의 눈이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났다.
“인간에겐 신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악마가 필요하다는 뜻이 되지 않는다. 너는 나약한 속삭임과 허깨비에 지나지 않으며, 나의 길과 나의 선택, 나의 오점은 오롯이 나의 것이 되어야 하리라. 꺼져라. 내가 신을 적대한다면, 그와 같은 무게로 너희를 적대하리라.”
[그 또한 좋겠지.]
웃음소리가 멀어졌다. 다리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다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불타버린 교회와 사제들의 시체가 즐비한 공터가 나타났다. 한때 숲속의 작은 수도원이었던 이 장소는, 이제 묘지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리라.
사슬과 멍에를 끊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이들의 희생이라면, 얻을 수 있는 것은 인류 전체의 온전한 자유가 되리라. 다리안은 쇠사슬에 감긴 태양창을 끌어 올려 등에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