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 불멸자와 필멸자 (2)
[다섯 대지와 삼천 강하의 지배자시여. 검은 이리의 대의례가 성사되었습니다.]
[시그마트의 단지를 가져오라. 침착히, 조심해라. 영혼에 상흔이 남아선 아니 된다.]
라비라타의 말에 사제는 조심스럽게 청금석으로 치장된 단지를 가져왔다. 마력석을 개어 빚어진 단지에선 은은한 청록색 빛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라비라타는 천천히 단지의 표면을 쓰다듬으며 주문을 속삭였다. 고대의 사제와 지배자들에게 예를 표하고는, 그녀는 창생의 관 위로 단지를 기울였다.
-화르륵!
단지 내부에서 푸른 불길이 쏟아져 내리며 어두운 홀을 밝혔다. 물결처럼 흘러내린 불꽃이 관의 겉을 따라 복잡하게 그려진 마력 회로 세공 내부로 스며들었다. 곧, 타닥이는 불꽃이 잔류하는 관 위로 라비라타가 고개를 드리웠다.
[이제 거의 다 되었다. 영혼의 본질을 투영해 육체가 빚어지기 시작했구나.]
[놀라운 속도입니다. 위대한 태양이시여.]
[그래. 놀라운 속도지. 그 속도만큼 온전히 나타나길 바랄 뿐.]
관의 토기 바깥으로 내부의 상태가 희미하게 투영되고 있었다. 푸른 마력이 관 내부에서 유영하고 있는, 고정된 영혼과 천천히 조립되어 가는 육체를 보여 주었다.
그건 그저 나뭇가지처럼 보였다. 가늘고, 부산스럽게 덩굴을 뻗어가는 가지처럼. 그러나 라비라타는, 생전의 페르난데스를 기억하는 그녀는 그 형상 위로 너무나 손쉽게 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섬유가 이어진다. 이내 섬유와 섬유가 맞닿아 근육이 되고, 그 내부에 뼈가 자라나기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건 사제들의 연구실에 비치된 인체 해부도처럼 보였다.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구나. 이 속도와 정확도는…….]
그건 육체에 대한 완벽한 이해. 단순히 근육을 움직이고 관절을 구동시키는 것을 넘어서, 혈관과 내분비계, 내장 기관의 위치와 역할, 움직임과 구동 환경까지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오랜 흑마법사가 갖는 그 드넓은 지혜에 덧붙여서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직접 가장 완벽한 컨디션을 조율하고 극한까지 육체를 활용해 본 경험이 이어진 총체였다. 그의 영혼은 자신의 육체가 갖는 최선의 한계를 온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범상한 이들을 부활시키던 기존의 대의례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육체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건 마치, 그의 영혼이 제 육신에 대한 갈증을 성급히 해갈하는 듯한 형상이었다.
[의례가 길고 고되었습니다. 부디 침전에 드시지요.]
[하하, 너희들조차 마치 산 자들처럼 말하는구나. 되었다. 이자가 완벽히 안정기에 들 때까지 짐이 직접 이 자리를 지키겠다.]
[옥체에 수면이 필요치 않다 하더라도, 대의례는 심력을 소모하기 마련이옵니다. 벌써 닷새가 지났습니다.]
[근심이 과하면 불충이다. 과례는 그만하고, 태양 광장의 진행 상황을 말해 보아라.]
[아, 신상 건축 말씀이옵니까.]
라비라타는 후, 하고 웃는 소리를 냈다.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 빨리 이자를 깨워 그 광경을 보여 주고만 싶었다.
[그래, 신상 건축 말이다.]
[이바리스에 유래 없는 위대한 조형이 될 것입니다. 이바리스의 가장 높은 성벽 밖에서도 그 신상의 형상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위대한 태양이시여. 백성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축조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예정대로 움직이겠지?]
[이를 말씀이옵니까. 하명하신다면 당장이라도 청옥궁을 향해 절을 올릴 준비가 되어 있나이다.]
[좋다. 아주 좋구나.]
라비라타는 부드럽게 웃으며 창생의 관을 내려 보았다.
[그러니, 온전히 일어나기만 하거라. 짐이 너를 위해 준비한 것이 참으로 많으니. 이것이 짐이 네게 바라는 첫 번째 소원이다.]
* * *
평화의 시대가 열렸다. 가장 높은 귀족부터 가장 빈곤한 소작농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이에 대해 반기를 드는 자가 없었다. 오랜 전쟁이 끝났고, 거의 모든 국가들은 전쟁 동력을 잃어 저 자신을 추스르기에 바쁜 시기가 도래했다.
몇몇의, 극소수의 인물들을 제외한다면 모두가 그리 느끼고 있었다. 여기에, 그렇지 못한 극소수의 인물 중 하나가 있었다.
르네 필리파 드 카르벨리에. 죽은 아비의 복수를 위해 홀연히 칼을 빼어 들고 타락한 황제를 참살해 제국을 구원한 영웅이며, 50년 전쟁의 주연이었던 아비의 대를 이어 제국 분열기와 남서부의 야만인들을 스스로 격살한 전쟁 군주다.
“폐하, 트레뮐레 궁중백이 입궐을 청합니다.”
“들라 하라.”
반파되었던 황궁은 급히 재건을 이어 나가고 있었으나, 황제는 자신의 집무실을 가장 늦은 시점에 완공하라 명했다. 황궁의 외관은 곧 황실의 권위와 직결되는 것이었으므로 미룰 수 없었으나, 황제 개인의 공간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르네의 집무실은 무기질적이라 느껴질 만큼 살풍경했다. 아직 미처 벽지를 바르지 못한 벽은 흉한 구조물들이 튀어나와 있고, 시공이 끝나지 않아 울퉁불퉁한 바닥엔 융단을 깔아 대충 다져 두었다.
낡은 책상 위에 온갖 서류들을 쌓아 올린 채로, 르네는 피로한 눈을 들어 문가를 바라보았다. 곧, 문이 열리며 부드러운 드레스가 팔랑거렸다.
“트레뮐레 궁중백. 대체 왜 귀르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오?”
“얼굴 보고 하신다는 소리가 그것부터 나옵니까, 폐하?”
“그대의 방문 목적이야 둘 중 하나일 테니, 더 들을 필요가 있겠나? 아쉽지만 둘 다 아직이오.”
화사한 금발이 너울지며 흩어졌다. 고개를 살짝 숙였던 궁중백이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큰 눈에는 슬픔이 짓눌려 있었다.
“그대의 오라비와 그대의 부군, 둘 다 아직 찾지 못했다는 뜻이오. 애초에 아직 혼례도 치르지 않았으니 부군이라 하기에도 어렵군. 그러니 그대는 그대의 오라비가 남긴 일을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소?”
“저는 평생 귀르의 통치에 무지했는데, 이제 와서 궁중백이 되라 하신들 제가 어찌 하루아침에 백작 위를 자랑하겠습니까, 폐하.”
“짐은 그대의 투정을 받아줄 만큼 한가하지 않은데.”
“저를 박대할 만큼 제 가치가 적지 않을 텐데요.”
에버리즈는 서슴없이 황제의 맞은편에 앉았다. 선대 황제가 트레뮐레 제후공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자가 르네의 아비를 죽인 장본인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퍽 이상한 그림이었다.
서로의 아비를 죽인 두 가문의 수장이 마주한 셈이었으니까. 르네는 문득 그 사실을 떠올리고는, 그리고 맞은편의 순박한 귀족 여식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그녀는 찻잔을 꺼내 따듯한 찻물을 따라내고는 천천히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래, 에버리즈. 오늘은 또 왜 왔어. 정말 모른다니까.”
“로베르 그 아이는 그리 쉽게 죽을 사내가 아니었어. 분명 저 어딘가에 있을 거야.”
“전쟁이 끝나고 그 말을 입에 담는 아낙들이 몇이나 될까. 통계를 잡으려면 우리 행정 재원들 모두가 달려들어도 일 년은 넘게 걸리겠군.”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진심이니까. 로베르는 살아 있어. 난 백작위를 잇지 않을 거야. 내가 바란 삶은 이런 게 아니었어.”
“바란 삶? 지금 이 자리에 그 누가 자신이 바랐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 에버리즈?”
한숨을 내쉬던 르네의 눈이 차갑게 굳었다.
“내가 바란 삶이 정말 제위에 올라 이 서류 더미를 읽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두 사람 모두가 일 년 사이에 악마의 손에 죽어 나갔어. 이게 내가 원한 삶이라 생각해?”
아비와 연인. 그 둘 모두 악마에 의해 죽어 사라졌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두 사람 모두 시체조차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는 그녀에게 애도하고 내려놓을 마지막 기회조차 앗아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따라서 르네는 이제 하루하루를 고독으로, 그리고 그 고독조차 잊혀질 수많은, 제국에 산적한 병폐들을 처리하는 일들로 버텨 내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보았을 때 황제는 만인지상의 대귀족이지만, 그 자리에 앉고 난 후의 감상은 그저 제국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일을 방기하고 부패와 향락을 즐기려 든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황제의 자리가 갖는 특수성 탓이다. 업무에 태만한 황제는 필연적으로 제국의 몰락을 가져오지만, 제국의 성패는 역설적으로 황제 본인의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하루에 내게 올라오는 서류가 이 정도고, 내가 제위에 오르고 처리한 서류들은 지금 문서고를 절반 이상 채우고 있어. 거르고 걸러 내 결재를 받아야 한다는 그 서류들 내용이 어떤 건지 알아? 누가 어디에서 몇 명 죽었다. 어느 지방에 어떤 사건이 발생해 몇 명이 굶주렸고 잠재적 사망자가 몇이다.”
“르네…….”
“아사했다. 교사했다. 익사했다. 분사했다. 이 나라 이 땅 위에 일어나는 죽음이 하루에도 수천 건. 그것조차 내가 직접 보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들만 추려내어 그 정도야. 실제로는 그 열 배는 넘지 않을까?”
르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보고서를 옆으로 밀어내었다. 그녀는 머리를 감싸고 탁상 위에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이제 이들의 죽음이 숫자로 보여. 이게 정상일까.”
“정상이야.”
“그래?”
“그래. 넌 잘하고 있어. 르네 필리파 드 카르벨리에.”
“그렇다면 이 죽음을 예쁘게 포장하기 위해 황실의 사금고를 열고 국재를 털어내 물자를 풀어내는 것도?”
평화의 시대가 열렸다. 제국은 여전히 공고하고, 황실의 권위는 뭇 제후들의 절대적 충성 위에서 군림한다. 동부의 소왕국들과 먼 서부의 부족 연합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민들이 제국의 태양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 이미지를 심어 주기 위해. 제국은 그 뿌리가 말라비틀어지고 기아와 빈민이 속출하는 와중에도 금고를 열었다. 가뭄 속 마른 논에 물을 뿌리는 것과 같다. 외부인들은 이 극심한 가뭄 속에도 여전히 찰랑이는 수심을 보며 감탄하겠지만, 농부는 알고 있다. 이것이 그저 한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일이 지나면 바닥이 드러날 것이다. 내일이 오면 마른 논밭의 흙더미가 갈라지고 풀뿌리가 드러날 것이다. 그러니, 르네가 해야 할 일은 언제나와 같았다.
그 내일이, 정말 내일 오지 않게 미루는 것. 밤잠을 설쳐 가며 근심하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집무실에 틀어박혀 사무를 처리하고, 매일 아침과 매일 저녁에 회의를 열어 각지의 보고를 수렴하는 것.
제국의 톱니바퀴가 되는 것. 그리고, 심장을 가지지 않는 것. 사람의 죽음에 무감각해지고, 보고서의 글귀를 그저 잉크 자국으로 여겨야 하는 것. 자신의 감상을 완벽히 말살한 채, 무미건조한 붉은 직인을 찍어 보고서를 결재하는 것.
그것이 통치자의 미덕이었다. 그러나 그건, 삶이 아니었다. 그녀가 바라던 삶이.
“로베르는…… 로베르 베나티에 드 라 트레뮐레 궁중백은 전사했어. 그 사내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고,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돌아와 자신의 업무를 수행했을 사람이야. 지금까지 아무런 보고도 없었다는 건, 죽었다고 보는 것이 나아.”
“하지만, 황야에 아이언사이드들을 파견할 필요가 있어.”
“헛된 희망 때문에 지금 가뜩이나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부서를 움직일 수는 없어.”
“헛된 희망이 아니야, 르네. 로베르와 페르난데스, 그리고 어쩌면 그 이상의 가능성이 보였어.”
르네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에버리즈……?”
그녀가 익히 알던, 엉뚱하고 철없던 귀족 영애의 모습이 아니었다. 거기엔, 알 수 없는 존재감이 어린, 광휘 내린 형상이 비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눈을 뜨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자, 평범한 에버리즈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너무 피곤했나.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잠시 찻잔을 쓸어 만졌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한 사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녀 이상의 존재요.’
페르난데스. 그가 폐허가 된 황궁에서 한 이단심문관과 저 귀족 여식을 대동한 채 돌아왔을 때 했던 말이 있다. 그때 당시엔 그것을 그저 정치적인 의미로 받아들였었으며, 그 이후로도 에버리즈의 말과 행동은 그저 철없는 귀족 영애에 불과했었지만…….
헛된 희망이란 것을 알지만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라면 해선 안 되는 감상이나, 절박한 사람은 쉽사리 미신을 믿기 마련이었다.
그녀는 잠시 찻잔을 만지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귀르엔 섭정공을 파견하지. 딱 세 달이야.”
“르네?”
“세 달 이상은 줄 수 없어. 그럴 인력도 부족하고, 자원도 부족해. 키르자트 방면으로 파견된 외부 인력을 회수해 네 아래에 달아 줄게, 에버리즈. 트레뮐레 백작가는 오랜 시간 그들의 주인이었으니까, 그자들도 반발하지 않을 거야.”
“정말…… 정말 고마워!”
에버리즈는 감격에 눈을 글썽이며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르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턱짓했다. 에버리즈는 연신 고개를 꾸벅이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혼자가 된 순간, 르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녀는 탁상 아래 서랍에서 교황에게 직접 받은 묵주를 꺼내 손 안에서 굴렸다. 신실한 신도는 아니었으나, 교황이 직접 축성한 물건이라면 분명 무슨 신통력이라도 있기를 바랐다.
“이건 말씀인가요? 거기 계신 분들, 대답을 해 주세요. 정말 그이가 살아 있나요?”
신들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르네는 싸늘하게 웃고는 묵주를 내려놓았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죽은 자들을 위한 숫자 놀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