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 불멸자와 필멸자 (4)
밤하늘 아래에, 검게 그늘진 숲이 펼쳐져 있었다. 톡, 이슬 한 방울이 떨어져 페르난데스의 코끝을 때렸다. 움찔. 그는 미간을 살짝 떨며 재빨리 몸 상태를 확인했다.
사지가 멀쩡하고 감각에 이상이 없다. 주위에 느껴지는 기척은 전무하고, 무장은…….
‘단검 한 자루.’
품 안에서 느껴지는 단검의 뭉툭한 자루뿐. 이 정도의 가벼운 무장으로 여정을 한 것이 얼마 만이던가.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서늘한 밤바람이 머리칼을 스쳤다. 길게 자란 더벅머리가 바람결에 부스스 흩어졌다.
“이번엔 제법 구체적인 환각이로군.”
임의로 사후세계라 명명한 그 공허한 공간에서, 페르난데스는 끝없는 환각에 시달리며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간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인지의 차원에서 그는 천 년과 같은 일 초를, 그리고 일 초 같은 천 년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이제 그의 정신은 이토록 정교한 환각을 자아낼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한 것이다. 촉각과 시각을 상상만으로 구현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게 미쳐 가는 감각인가.’
그는 먼 옛날, 마약과 마력에 중독되어 죽어 가는 수많은 마법사들을 마주했었다. 전생 시절 말엽까지 살아남은 마법사들은 대개 그런 상태였다. 환각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죽어 가던 늙은 패배자들을…….
그와 같은 꼴이 되었다는 것이 더없이 우스운 일이었다. 어쩌면, 충분할 정도로 완숙한 마법사의 최후는 언제나 광증으로 귀결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저벅.
페르난데스는 수풀을 걸어 나가며 생각했다. 그는 그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제아무리 환각이라 할지라도 그가 직접 만들어 낸 것인 이상, 방향성 없는 무분별한 망상에 그치지는 않을 터였다.
이 환각 또한, 그 자신이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후회, 비탄, 고난, 상념. 그 무엇이 되었든.
-바스락.
그나저나, 숲의 형태가 생각 이상으로 익숙했다. 비록 그가 한밤, 숲속에서 방향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노련한 숲지기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어쩐 일인지 자주 보았던 것만 같은…….
“진홍탑…….”
숲의 끝에 도달해서 우거진 수풀을 헤치자, 그 사이로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용암이 노출되어 이글거리고, 지열로 유리화된 지반과 크리스털 장식이 복잡하게 그려진 기하학적인 검은 탑이 나타났다.
저 탑의 외면에 각인된 마력 세공은 가장 기초적인 토대부터 그 첨단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가 조각한 것이었다.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이 숲은 그의 근거지였으며, 이 탑은 그의 말년이자 그의 비석이었으니.
페이자쉬의 진홍탑, 그리고 비탄의 숲. 이 지역의 이름이었다. 수많은 영웅과 용사들의 무덤. 세계 멸망의 눈. ‘배신자’ 페이자쉬의 근거지. 칼름부르크 마법 학회의 초상이자 다섯 왕좌의 회랑이 위치한 대악마들의 회담장.
환각이 이토록이나 정교하게 이 장소를 재현해 냈다는 것은…… 그 의미를 숙고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장난을 벌이기 위해 지금껏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나?”
-장난이라?
-쿠구구구궁!
진홍탑의 입구가 묵직한 소음과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 두꺼운 강철 성문이 열리고, 용암이 흐르는 해자 위로 도개교가 내려왔다. 페르난데스는 멀찍이 서서 팔짱을 낀 채 어둠이 날름거리는 진홍탑의 내부를 노려보았다.
-이를 장난이라 생각한다면 너는 죽게 될 게다, 페르난데스. 뭐, 진지하게 여긴다 한들 달라질 것이 있나 싶군.
“영혼의 주도권을 요구하는 건가?”
-내 죽음 앞에서 나는 언제나 나로서 존재해 왔다. 너 또한 그랬듯이. 지난날 네가 말했듯, 너와 내가 더 이상 동일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면……. 나는 나로서 죽겠다.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도개교 위로 발을 올렸다. 그 순간, 뜨거운 바람이 문을 타고 불어닥쳤다. 귀곡성이 섞인 끈적한 마력이 그의 전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페이자쉬의 마법 따위가 아니다. 이건, 그저 존재감에 불과했다. 말년, 전성기를 맞이한 페이자쉬가 지닌 존재감.
초월자의 격에 준하는 노마법사. 단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사소한 제스처와 눈빛, 호흡과 걸음걸이만으로도 마법이 스스로 자아내어지고, 마력이 저 홀로 세공되는 수준. 그런 지고한 수준에 도달한 자의 존재감이었다.
마법사의 정점. 감히 한 학파를 스스로 개파하고, 당대 모든 흑마법들을 하나로 규합해 엔마기카라 불리우는 새로운 일맥을 창시한 대종사의 위엄이 실체화된 마력으로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걸 타인의 입장에서 느끼는 것도 참 새로운 기분이군. 페르난데스는 가볍게 어깨를 풀고는 도개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너의 과거를 마주해라, 페르난데스. 네가 너 홀로 오롯이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
“재밌군. 내 정신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건가?”
-뭐라고?
“자살하기에 너무 오만한 늙은 마법사가 최후의 순간 영원을 견디지 못하고 할 법한 생각이야. 이런 복잡한 자살 방법이.”
-하하, 이를 자살이라 여긴다면 저항 없이 내게 영혼을 내어 줄 텐가?
“이봐, 페이자쉬. 나는 내가 너였던 시절에도, 포기한 적 따윈 없었어.”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회랑의 높은 계단참 위에 한 노인이 그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마주 웃었다. 두 사람의 비틀린 미소가 거울처럼 동일하게 그려졌다.
“항상 궁금했지.”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 둘 중 어느 쪽이 더 강한가?
“누구의 전성기가 진정코 더 정결하여, 어느 삶이 더 올바른 궤적을 그리고 있었는가?”
-그건……. 그래, 이렇게 표현하자면 보다 명료하겠지.
-“내 선택이 정녕 나의 최선이었나.”
그 시절 나의 선택, 그리고 지금 나의 선택. 완전히 다른 두 갈래의 끝에서. 서로의 가능성을 정점까지 피워 올린 그 총화에서. 과연 누가 더 옳았다 자신할 수 있을까.
페르난데스는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는 칼자루를 쥐고 빙글, 한 바퀴 돌렸다. 생각이 그에 닿자, 그의 손에 잡혀 있는 단검이 어느새 거대한 대검으로 변해 있었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오랜 세월, 수많은 격전 끝에서도 결코 상하지 않은 이 고대의 무구. 이제 그의 영혼 그 어딘가에 깊게 새겨진 검기의 총체. 데인 왕의 연민을 그대로 녹여 만들어진 검술.
벌써 몇 년 전. 데인 왕의 시험을 통과하며 서로의 영혼이 섞였던 그때부터,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발아한 그 정수가 지금 그의 손 아래 잡혀 있었다.
그 심상의 의의는 불패라. 어떤 고난이 놓여 있더라도 굽히지 않을, 결코 부러지지 않을 의기라. 페르난데스는 그날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를 잊은 적 없었다. 그가 지닌 삶의 태도를 뛰어넘어서, 그가 계승받은 데인 왕의 영혼은 그의 삶에 방향성을 지시하는 좌표와 같았다.
“그래, 페이자쉬. 자살해 보자고.”
동일한 태동에서 쌓아 올린 전혀 다른 두 가능성이, 이곳 오랜 과거의 회랑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 * *
황금 자수가 복잡하게 새겨진 붉은 로브와 갖가지 사악한 아티펙트들, 전신을 빼곡히 둘러 그려진 기하학적인 문신들. 저 모든 장신구와 문양 하나하나가 저마다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 마도구들이다.
손을 들어 휘두를 때, 한 손이 짚어낸 수인의 수가 넷. 싱글 캐스팅으로 쿼드라 스펠.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마법의 대종사라 부르기에 부족함 없는 수준이었으나—
-짤랑!
그 손목 어림에 감긴 수정 팔찌가, 로브 끝자락의 장신구와 마찰하며 새로운 주문을 빚어낸다. 마력이 섬전처럼 장신구 사이를 타고 흐르며 서로의 움직임에 교차해 각기 다른 도식을 그려 올린다!
-쿠구구궁!
그리하여 단 한 번의 손짓에서 불러낸 마법이 도합 일곱 가지. 화살처럼, 또는 벼락처럼. 공중에서 그 궤적을 비틀어가며 페르난데스의 몸을 향해 도약하고—!
-카앙!
그 틈에 묵빛 궤적이 파고들었다. 붉은 섬광 사이를 깨끗하게 양단하며 한 수! 그대로 페르난데스의 몸이 빙글 돌아 다시금 한 번, 궤적을 이어 나갔다.
-콰드드득!
쏟아지는 마법이 그 격발의 정점에 달해 현계하기 직전. 마치 마력 쐐기를 박아 넣는 감각으로 하나하나 파괴했다. 페르난데스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페이자쉬의 얼굴을 바라보며, 단 한 차례도 멈추지 않고 질주하고 있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폭풍과 같다. 질주하는 궤적에 따라 검은 잔상이 남을 것만 같은 파괴적인 돌격이었다. 마법이 쏘아지고, 저주가 몸을 얽매도, 그 모든 순간 페르난데스의 검이 마법의 구성 직점을 찔러 부수고 찢으며 달려들었다.
-멧돼지 같은 녀석!
“그 말 언제 했던 것 같은데?”
-하하, 누가 디모니카 아니랄까 봐!
-콰아앙! 쾅!
각자의 영역에서 경지에 도달한 탓일까, 두 사람은 여유롭게 웃고 농담하며 칼을 휘두르고 마법을 빚어냈다. 주문과 강철의 격돌이 이어질수록 두 사람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닿으면, 이 간격 안으로 들어온다면 죽일 수 있다. 페르난데스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페이자쉬는 그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마법전을 칼끝으로 펼치다니. 과연 나답군.
지긋지긋할 정도로 이쪽의 수법을 모두 통달하고 있다. 수인을 짚기도 전부터, 팔이 올라가는 각도와 궤적을 읽고 완성될 주문을 미리 파악해 칼을 찔러 넣고 있었다. 정확히 주문의 취약점을 찾아 핀포인트로!
이건 고도의 경지에 도달한 마법전과 같다. 다만 마력 쐐기를 대검이라는 무식한 병기로 대신할 뿐. 페이자쉬는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페르난데스. 네가 나를 파악한 것은 경험이지만…….
-쿠구구궁!
양손에 수인이 짚인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손이 뻗어 올라왔다. 삼두육비. 전성기의 페이자쉬가 펼치는 저 보조 주문은 반드시 시그니처 스펠에 준하는 대마법의 전조였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다리를 튕기며 뛰어올랐다. 앞으로 남은 거리는 고작 오 미터 안팎. 페르난데스의 도약력으로라면 숨 한 번 쉬기 전에 도달해 베어낼 수 있는 거리였다.
그 사이로, 페이자쉬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너를 대처하는 것은 분석이다.
페르난데스가 기억하는 페이자쉬는 과거의 망령이자, 그가 온전히 품고 있는 기억의 일부에 불과하다. 경험의 산물로서, 그는 페이자쉬의 수법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페이자쉬가 그의 전생이었으니.
그러나 페이자쉬가 페르난데스를 보는 것은 관찰이었다. 삼 년이 넘는 짧은 시간은, 격변하는 검술과 기교, 저 육신으로 낼 수 있는 극한을 관찰자의 시점으로 냉정히 분석할 수 있는 시간이란 뜻이었다.
언제나 죽음을 경계에 두고 달렸기에, 저 몸이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그 누구보다 확실히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온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전투는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 것인가.
그 누구보다 마법사를, 페이자쉬의 마법을 적확히 파악하고 있는 정점에 도달한 검사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분석과 예측, 그리고 연구의 산물.
즉, 마법사의 영역이다. 오직 마법사들만 할 수 있는 기예다.
-쿠구구구궁!!!
공중에서, 페르난데스의 몸이 우뚝 멈췄다. 서로의 숨결마저 닿을 것 같은 지근 거리. 페르난데스의 검이 페이자쉬의 수염 끝을 살짝 자르고 들어가, 그의 목까지 단 한 치의 거리에서.
“정지…… 역장?”
페르난데스의 입이 우득, 하고 비틀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혀를 억지로 움직여 말을 이었다. 페이자쉬는 그 모습을 보며 큭, 하고 웃었다.
페이자쉬의 오른손이 펼친 주문은 정지 역장. 시그니처 스펠이라 하기엔 저속하고, 파괴하기 어렵지 않으며, 심지어 페르난데스의 수준에 달했다면 거의 저항조차 하지 못할 단순한 방어 주문이다.
페르난데스의 눈이 재빨리 다른 편으로 움직였다. 그의 몸을 멈춘 주문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저게 방어 주문이었다면 이건—
-정지 역장.
왼손이 짚은 수인 또한 정지 역장. 그리고.
그의 등 뒤에 뻗은 네 개의 영체 손. 삼두육비의 보조 주문이 이루고 있는 수인 또한 모두 동일한, 정지 역장.
페이자쉬의 몸에 감긴 마도구들이 얽히며 만들어낸 마법진이 가리킨 주문 또한…… 정지 역장.
-육중 증폭 정지 역장. 각각의 주문을 병렬로 연동해 모든 구성점이 정교하게…… 서로의 시작과 끝을 물고 이어지도록.
단순히 증폭이 아니다. 동일한 주문을 겹친다 한들 그 위력이 배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주문의 시작과 끝, 그 순환절을 무한히 반복하도록 잇고, 잇고, 또 이어서—
마침내 주문 자체가 하나의 언령이 되도록. 빚어낸 마력이 너무나 정순해, 차라리 신성을 품을 수준으로. 그 시절 만들어진 그 어떤 시그니처 스펠보다 순수한, 마력을 이용해 현상을 빚어내는 마법 그 본질에 한없이 가까운 주문.
늙고 완숙한 마법사가 죽음을 딛고 일어서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만들어 낸, 마력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총화.
-페이자쉬의 지평선.
정지라는 관념을 한없이 여과하여, 시간마저 고정시킬 정도로 정순하게 빚어낸 주문이다. 페르난데스는 허공에 멈춰 내심 웃고 말았다.
이 괴물. 죽은 뒤에도 발전하는구나.
그의 다른 시그니처 스펠들이 오직 파괴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이 주문은 그 결이 전혀 다르다. 이건 거의 마력을 통해 쌓아 올린 예술에 가까운 경지였다. 페르난데스는 저도 모르게 눈앞의 노인에게 탄복하고 말았다.
마법으로 신의 영역에 도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마법이란 개념이 신비를 담아 신성을 품게 된다면, 이자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페르난데스? 넌 나보다 약해.
신이 장난스럽게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