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 불멸자와 필멸자 (5)
페르난데스는 시시각각 몸의 근골이 으스러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외부의 압력 탓이 아니다. 정지 역장에 의해 고정되어 버린 몸을 강제로 움직이려 들다 보니, 그 척력에 의해 살점이 뭉개지고 있었다.
부서진 갑주 아래 드러난 팔뚝의 피부 위로 힘줄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전신에 차고 넘치던 그의 힘이 이제 역으로 그의 몸을 파괴하고 있었다.
-우드드득!
너무 강하게 악문 어금니에 금이 가고, 두 눈에 핏줄이 섰다. 그럼에도 대검은 여전히 페이자쉬의 목덜미 한 치 앞에 정확히 고정되어 있었다.
-하하하, 고작 그게 전부냐? 힘을 주어 마법을 부수어 보겠다고? 재미있는 시도가 되겠구나. 계란이라 하더라도 수십, 수백, 수천 번 치다 보면, 어쩌면 절벽을 허물 수 있지 않겠느냐?
페이자쉬는 오히려 더 베어 보라는 듯 한 걸음 다가와 이죽거렸다. 그의 눈가에서 즐거움이 떠올랐다.
페르난데스는 그 조소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이미 입을 벌리는 것조차 어려웠다. 놈의 마법은 지금 이 순간, 관념의 영역에 닿아 있다. 그건 신의 힘에 가깝다. 특정 관념을 상징하는 것이 신이라면, 이 마법은 그 본질 그 자체였다.
정지, 혹은 동결. 형체 없는 공간과 흘러가는 시간마저 멈춰 세우는 기예. 페르난데스에게 만일 마력이 무한하고, 또 준비가 완벽하다 한들 저 주문을 따라 할 수 있을까.
그는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저건 그의 가능성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현된 정수였다. 같은 지식을 쌓아 올렸다 한들, 저런 기예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저 주문을 온전히 이해한 것도 아니었다.
정지 역장이라는 저급한 주문 속에서 ‘고정’이라는 관념만을 추출하여, 동일한 주문을 겹쳐 올려 뜰채처럼 여과하고, 최후의 최후까지 남은 순수한 관념을 구현한 행위다. 작동 논리는 이해할 수 있어도 따라 할 수는 없었다.
거장의 명화, 그 화폭을 보며 사용된 도료나 캔버스 따위를 파악할 수는 있다. 하지만 완벽히 동일한 재료를 가져온다 한들 거장의 손길을 단 한 번이라도 재현할 수 있을까. 아니, 가능하다 한들 그건 단순한 복제, 열화된 모조품에 불과할 것이다.
시그니처 스펠은 창작자의 정수다. 동일한 주문을 따라한다 하더라도 온전히 창작자와 동일한 효과를 가져올 수는 없다. 시전자의 삶 그 자체를 오롯이 투영한, 그의 인생 그 자체다.
그러므로, 페르난데스는 페이자쉬가 분화된 이후에 만들어 낸 저 주문을 따라 할 수는 없었다.
대단한 일이다. 살아서 신에게 도전하고, 죽어서 신이 되었구나. 페르난데스는 저 늙은 마법사를 진심으로 경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어떤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고정이라는 관념을 온전히 내게 투사했다면, 나는 왜 멈춰 있지 않은가?’
페르난데스는 지금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피부의 가장 작은 조직마저 동결된 상황이다. 폐는 더 이상 숨을 들이켜지 못하고, 눈동자는 오직 페이자쉬의 얼굴만을 응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혈류는 여전히 거칠게 맥동하고 있으며, 근육은 찢어질 듯 긴장하고 관절을 움직이려 들어 그의 몸을 시시각각 파괴하고 있었다.
이건 이상한 일이었다. 관념의 투사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페이자쉬가 사용한 저 마법, 그가 이해한 저 마법의 원류가 ‘고정’이라면, 지금 페르난데스는 사고조차 할 수 없는 석고상이 되었어야 했다.
‘……미완성……!’
지금 그들은 지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환각 속에서 투쟁하고 있었다. 이건 일종의 사고 실험에 가깝다. 두 영체가 같은 환각 속에서 벌이는, 한 사람의 사고 실험.
페이자쉬의 마법은 분명 완벽에 가깝다. 그의 주문은 성공적으로 페르난데스를 고정시켰다. 이 늙은 흑마법사들의 사고 실험은 너무나 정교하여, 영체에게조차 살았던 시절 그대로의 피륙을 입힐 수 있었으나—
‘이건 내 살과 내 피, 내 근육이 아니다.’
엄밀히 따져 묻자면 지금 페르난데스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영체다. 영체는 자신의 모습이 기억하는 가장 온전한 시기를 떠올려 덧씌웠다. 페이자쉬와 페르난데스 모두에게.
만일 현실에서 저런 주문을 시전했다면, 페르난데스에겐 저항할 수단조차 없었을 것이다. 저건 결코 막을 수 없는 종류의 주문이다. 오직 주문의 완성 전에 훼방해야 하는 종류의.
그러나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그의 몸은 피륙으로 덮여 있지 않다. 그와 페이자쉬가 투쟁하는 까닭은 단순히 서로의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최후의 발악에 있지 않다. 그보다 더 높은 가치에…… 더 숭고한 가치에.
서로의 영, 혼, 백, 성을 내걸어 판돈으로 쌓아 올리고. 오직 서로의 본질과 본질을 부딪쳐 그 정수를 견주려는 것에 있다. 검술? 마법? 그건 수단에 불과하다. 방향성의 차이라. 그것조차도 성향에 불과했다.
그저 기호라. 주문에 통달한 늙은 대마법사와, 검술로 정점에 도달한 젊은 전사의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가치를 걸고 서로의 영혼을 갈아 저 자신의 정수를 쌓고 올려—
“페이자쉬.”
-……!
페르난데스의 입이 움직였다. 그는 흐려진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천천히, 쇠사슬이 벗겨지듯 그의 몸 위에서 주박이 사라져 간다. 페르난데스는 단단히 바닥을 짚고 칼자루를 움켜 쥐었다.
-어떻게……? 힘으로 풀었다고……? 그건…… 그건 불가능할 텐데?
“나는 뜻이요, 형상이 아니며. 나는 진리요, 주해가 아니니.”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사제인 척이라도 하겠다는 게냐? 이 자리에서 신의 힘은 너를 도울 수 없으며, 우리는 언제고,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노예가 되길 자처한 적이 없었다! 실망스럽구나, 페르난데스. 진심으로!
“이단심문청의 사제, 페르난데스 세르너드도 나였고.”
페르난데스는 눈을 감은 채 빙글, 칼자루를 돌려 칼날을 치켜 세웠다. 인체의 정중선, 올곧게 하늘을 향해. 검술은 그저 기예일 뿐, 그 뜻을 펼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니.
지금 그가 뻗어 올린 것은 검이 아니요, 칼날을 떠받친 것은 근골이 아니다. 딛고 선 바닥, 이 진홍탑의 회랑은 대지가 아니며 그가 가리킨 곳은 하늘이 아니다.
모든 것은 수단이며, 현상이며, 관념에 불과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오롯이 나 자체를 의미할 수 있는 것은 나 하나뿐이다. 페르난데스는 감은 눈을 뜨며 말을 이었다.
“데인 왕의 원탁 기사도, 대족장의 암중 책사도, 저 대황야의 악몽을 죽인 것, 저 먼 북부의 광기를 잠재우고 제국의 내분을 막아내어 황제를 시해한 것까지. 그 하나하나가 모두 나였다.”
격이란 것은 필멸자의 일생, 그 업적의 궤도에 따라 쌓아 올라간다. 필멸자의 삶은 하늘을 향해 뻗은 사다리와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상과 지상 사이에서 떨어지며 삶을 마감하지만, 그럼에도 누구라도. 한 발자국씩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발을 내딛는다.
포기할 수도 있다. 낙담할 수도 있다. 안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지상 위에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모두들, 인생이라는 사다리 위에서 첫 발자국을 디뎌 올린다.
천상 위로 올라간 격의 수준이 일정 이상 쌓였을 때, 사람들은 그 존재를 구도자라 불렀다. 인간의 탈을 벗어나 준신의 위치에 스스로 올라섰다는 의미로. 하지만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가 구도자들이다. 각각의 방향성이 다를 뿐, 그 본질은 같다. 비원을 향해 지혜를 쌓아 올리는 마법사들. 기예를 닦아 검기의 정점을 노리는 검사들. 신앙 속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자기 자신이 아닌, 만인을 향해 몸을 굽히는 사제들까지.
이들 모두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구도자들이다. 거리의 아낙, 길가의 행상인, 대장간의 장인과 웃으며 뛰노는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각자의 삶을 불태우며 한 걸음 나아가는 구도자들이라.
인간에겐 신이 필요하지 않다. 인간을 가장 사랑하는 신은 제 신성을 포기한 채 자살해야 마땅하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기대어 평화를 보장받아야 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인간은 저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페르난데스는 감았던 눈을 치켜뜨고, 두 손으로 칼자루를 무겁게 움켜 쥐었다.
“너 또한 나였다.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아니,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서로의 지향점, 방향성, 사상과 사고, 그런 모든 것들은 다만 수단에 불과하므로.”
-우리의 영체가 갈라진 이후로 있었던 모든 대립들에도 불구하고 말이냐?
“그래. 그 또한 수단과 과정일 뿐, 본질이 아니다.”
-하하…… 이거.
페이자쉬는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반칙이군. 체스판을 뒤엎으려 드는구나. 페르난데스.
“규칙은 승리를 위한 조건에 불과하니.”
-달변가가 되었구나. 그래, 이제 나라는 수단이 없더라도 해낼 수 있으리란 뜻이렸다?
“적어도 포기하진 않겠지.”
언제나처럼. 페르난데스의 말에 페이자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페르난데스의 검이 하늘을 갈랐다.
-콰드드드득!!
탑의 골자가 붕괴하고, 홀의 크리스털이 비산한다. 수많은 아티펙트로 무장된 이 강대한 홀이 산산이 으스러지며 파편이 사방을 자욱이 덮기 시작했다.
그 위로, 먹물로 한 획 긋듯이 검의 궤적이 지나쳤다. 화려한 화폭 위를 가로지르는 단검처럼. 캔버스를 찢듯. 공간을, 상념을, 환각을 부숴 내며—
“지금까지 고생이 많았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로는 적이 초라한 위로를 입에 담았다. 페르난데스는 뻑뻑해진 눈가를 잠시 꾹 누르고는 서 있었다.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저갱 속에서, 이제 정녕코 그 홀로.
이번 생을 시작하고 단 한 순간도 홀로 선 적이 없었다. 언제나 페이자쉬가 함께 있었고, 악의 섞인 농담과 조롱, 이따금씩 날카롭게 들어오는 조언 따위가 그의 곁을 함께했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것 따윈 없다. 하늘을 향해 뻗은 그만의 사다리 위로,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혼자 올라간 듯 앞으로도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 지독한 공허함이 그의 마음을 휘감아 옥죄었다. 눈앞에 저 먼 하늘이 보이는 듯했다. 팔을 아무리 높게 뻗어도 닿지 않을 저 하늘의 천구가.
“적어도, 포기하진 않으마.”
전생의 형틀을 향해 고하는 그의 일별은 다짐이었다. 무한한 시간과 전무한 자극, 이 무저갱 속의 고통을 오롯이 감내한들 결코 포기하진 않으마. 여든 살, 죽는 순간까지 저 스스로를 불사르던 흑마법사의 위령비에 페르난데스의 숨결이 닿았다.
프레지아 한 줄기를 그 묘비 위에 얹고, 페르난데스의 정신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육신의 형성이 압도적입니다! 지금 당장 눈을 뜨더라도 이상한 점이 없나이다.]
[두 상극이 하나가 되었구나.]
[예……?]
[아니, 아니다. 그대들의 일에 집중해라.]
라비라타는 창생의 관 내부에서 휘몰아치는 영혼을 가만히 내려보며 한탄했다. 그의 삶이 저 스스로 재현되고, 파괴되고, 다시금 융합되고 있었다. 이제 그는 진정한 의미의 독존자가, 아니 영속자가 되었다. 적어도 그의 영혼은.
진주는 조개의 상처 속에서 맺힌다. 영혼의 정수 또한 삶의 흠을 딛고 피어오른다. 지금 저 사내의 영혼 또한 그와 같았다. 메마른 황무지 위로 피어오른 꽃이요, 드넓은 진흙 속에서 솟아오른 진주와 같다.
그 찬란한 빛에, 라비라타는 아쉬움을 표했다. 살아 있는 육신이 있었다면 이 순간 눈물을 흘릴 수 있었으리라. 그녀는 그 대신, 가만히 자신의 가면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저 사내에게 바랐던 첫 번째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다.
[두 번째 소원부터는 보다 더 이기적이고, 짓궂을 것이다. 구원자여. 어서 일어나 짐을 마주하라.]
라비라타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홀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