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 불멸자와 필멸자 (6)
그녀는 용들이 하늘을 날던 시대를 기억하고 있다. 신들이 대지를 거닐었던 시절, 숲속엔 요정이, 지하엔 드워프가 살던 시대를.
하늘의 별자리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던 시절이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별들은 죽은 영웅들을 위한 태피스트리였다. 별자리가 변하는 동안 오랜 시간이 지났고, 무수한 영웅들이 죽어 갔으니까.
그녀는 오랜 시간 그들을 기억해 왔다. 그들을 애도해 왔다. 그들의 아름다운 삶을, 화려하게 타오르며 빛을 내뿜던 그들의 삶을 위해. 그녀만의 묘지에서 그녀만의 위령탑을 보듬으며 그들 모두를 애도해 왔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묘지 속엔 단 하나의 묘비만 홀로 서 있었다. 그것을 참기 힘들 때,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 보았다.
많은 신화와 전설들이 잊혀지고, 토사 속에 사라져 가는 그 기나긴 시간 동안에도. 그녀의 별자리는 여전히 저 밤하늘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한때 저 별 근처에 있던 다른 별자리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알아볼 수 있는 별자리는 오직 그녀의 것뿐이었다.
“표류하는구나.”
죽음과 망각에서 되돌아온 용은 그날, 죽음을 결심했다. 느리게 사그라드는 죽음을. 풍화되어 가는 죽음을 결심했다. 비장할 필요도, 고결할 필요도 없었으니. 그녀는 이 표류의 끝을 좌초로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 이후로 이제 몇 달이 지났다. 여전히 그녀의 몸속엔 생명력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용은 거대한 발톱으로 그녀만의 둥지 속에서 한 획을 그었다. 저 먼 하늘에 동녘이 터 오르고,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며.
“여기에 있으셨군.”
둥지 내부를 향해 걸어오는 인간의 기척은 이미 몇 시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자를 내쫓을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뿐. 그녀는 시선을 돌려, 둥지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마구잡이로 자라난 수풀을 넓적한 칼로 쳐내며, 거구의 사내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제피스 시라다스트.”
“용의 형상을 뵙기는 처음이오. 잘 지내셨소?”
“죽지 못해 살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지. 아직 도착하지 못했을 뿐.”
제피스는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눈앞에 앉았다. 용은 커다란 푸른 눈동자를 굴려 그를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제피스는 필연적으로 어떤 사내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나를 찾아왔느냐?”
“그렇소, 아벨레사스. 은거를 방해한 꼴이라 미안하군.”
“용건이 뭐지?”
“페르난데스의…….”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눈이 질끈 감겼다. 그녀는 잠시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고는 상처 입은 초식동물과 같은 소리를 냈다. 한참 끙끙거리는 소리 위로, 제피스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그의 유품을 발견한 것이 당신이라 들었소. 위치와 상황을 알고 싶군.”
“그건…… 이미…… 프레이야를 통해 전하지 않았더냐……?”
“정신 차리시오.”
-짝!
제피스는 박수를 쳐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몸이 너무 큰 탓에 뺨을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제피스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그를 잃은 것은 당신 하나가 아니오. 그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었으며, 그의 손실은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상처가 되었을 거요. 당신은 팔텐노이아에서 그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않았잖소?”
“나는…… 나는…….”
“그 사실을 타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나는 그의 죽음을 추적해야 할 의무가 있소. 적어도 그의 신변을 보다 정확히 파악해야 할 성직을 품고 이 자리에 왔소. 그대의 협조가 필요하오.”
제피스의 싸늘한 말에 아벨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제피스는 그녀의 큰 눈동자 아래에 똑바로 서서 말했다.
“더 크게 애도한다는 것이 곧 남들보다 그의 죽음을 더 비통하게 느낀다는 뜻은 아니오, 아벨레사스. 규모는 진심을 증명하지 않소.”
“제피스 시라다스트…….”
“말해 주시오. 그의 유품을 발견한 장소와 상황을. 우리가 그대의 비탄을 존중하듯이 그대 또한 우리의 비탄을 존중해야 마땅하오. 이건 우리 방식의 애도가 될 수 있소.”
아벨은 고개를 숙이고는 작게 속삭였다. 각자의 방식이라.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이가 죽었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째서 그를 찾지 않소?”
실종은 죽음보다 고통스럽다. 상실의 슬픔을 인정할 수 없게 만드니까. 하지만 아벨은 페르난데스를 추적하길 포기했다. 그가 정말로 죽었다면, 그 죽음을 눈앞에서 마주하게 된다면 더 이상 참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나약함이다. 아벨은 무던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너무나 사랑해서, 섣불리 사랑한다 말할 수 없는 마음이 잘못이란 말인가. 때때로 단어는 흔함 속에서 가치를 잃는다. 그녀는 이 마음이 쉽게 산화될까 두려워 그저 가만히 품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감히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장례식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녀마저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만다면 이 세상에 누가 그의 삶을 증명할까. 오직 그녀뿐이다. 아벨은 고집스럽게 둥지를 짓고 그 안에 틀어박히길 택했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그러나 천천히 죽어 가며. 죽음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만일 그렇다면 그 끝을 함께할 수 있기만을 바라며.
“……좋다. 말해 주겠다.”
저 사내는 슬픔이 규모로 증명되지 않는다 했다. 더 화려하게 슬퍼한다 한들 그것이 타인의 비통함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아벨은 이 논리에 수긍했다. 저 사내 또한 페르난데스를 아끼던 인간이었고, 저 사내에겐 대답을 들을 권리가 있었다.
* * *
베오른은 집무실 테이블에 앉아 서류 정리에 몰두해 있었다. 최근 사교도 발호 사건이 기이할 정도로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페이른의 동부권 지방에서 시작된 무분별한 사교 행위가 이제 동부 왕국 전역으로 슬금슬금 번져 나가고 있었다.
인력 부족에 시달리던 이단심문청은 과로사 직전에 놓여 있다. 베오른은 철두철미한 사람이었고, 그는 언제나 최소한의 인력을 수도원 내부에 대기시키길 바랐으나, 지금 이 상황 속에서 그런 것은 사치에 불과했다.
몇 차례 정도의 긴급 대응을 위한 인력은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여세가 이어진다면 그조차도 불투명했다. 베오른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시름에 잠겨 있었다.
“누군가가 있군.”
그것이 결론이었다. 누군가 이 중대 규모 이단 사건의 배후일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리고 어떻게?
페르난데스가 생전에 남긴 새로운 조직, 말레디카는 그의 사후에도 여전히 건재했다. 교회에 투신하기를 거부한 악성 조직들은 대부분 격멸되어 가는 도중이었다. 적어도 제국은 이제 거의 완전히 정화되었다.
그러나 동부 왕국. 말레디카의 영향력이 희미한 이 지역 배후에서, 전혀 다른 방파의 이단 조직들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행정력이 제국에 집중된 시기를 노린 것인가? 단지 그것만으로 해석하기엔 과도하게 적극적이었다.
같은 계열의 이단들이 아니다. 각지에서 실시간으로 검거되는 이단 조직들은 제각기 다른 강령을 지닌 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이 한뜻을 품고 일시에 드러난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이 조직들의 난립 그 배후에는 누군가가 있다. 동부 왕국, 페이른 동부권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사교도들을 규합해 낼 수 있는…….
규합……?
“……제기랄.”
생각이 거기에 닿자, 베오른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레디카는 교회의 이름 아래에 투신한 흑마법사들의 집단이다. 그들은 발호 직후부터 고작 반년이 지나기 전, 제국 전역의 이단 조직들을 소탕해 냈다.
성향이 완전히 다른 사교도 점조직들의 결집이 갖는 힘이다. 선신 만신전이 이단과의 전쟁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이유는, 사교도들의 난립에 있었다. 저들은 결코 서로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각자가 믿는 신앙, 신앙을 이루기 위한 제의, 각자의 신념이 전혀 다르다. 저들 개인에게 서로는 만신전 못지않은 적수에 불과하다. 그런 자들이 하나로 규합되었다면, 보통의 문제가 아니다.
베오른은 눈을 가늘게 뜨며 테이블 한구석을 두드렸다. 페이른 동부권에서 시작되었다라…… 이 역병의 무리가 저 어딘가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고 가정해도 좋을까……?
-똑똑.
“수도원장님. 베니시오입니다.”
“들어오게.”
뺨 위에 큰 흉터가 있는 호리호리한 중년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서류 뭉치 하나를 가져와 베오른에게 건넸다.
“긴급 타격 지원 요청서입니다. 수도원장님.”
“이번엔 어딘가?”
“성 안타리우스 수도원입니다. 해당 지역에 파견된 헤레티카는 올리베르 형제였고, 수도원의 완전한 파괴와 사교도 준동의 흔적을 발견해 추적 중에 있다 합니다.”
“사교도 준동의 흔적이라? 메르디스 컬트 쪽인가? 페이른 북서부라면 놈들의 활동 지역이었을 텐데.”
“아뇨, 수도원장님. 브렌다르 형제단의 상징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기랄. 놈들이 페이른 북서부까지 진출했다는 의미인가?”
“예, 수도원장님.”
“놈들은 자체적인 악마 소환 의식이 가능한 것들일세. 디모니카에 지원 공문을 돌리고 인력을 확보하게.”
베오른은 인명첩을 꺼내 펼쳤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눈가를 찌푸렸다.
“셋…… 지금 가능한 형제가 셋 있군. 타격 요청이 두 번만 더 들어온다면 본청 기능이 정지하겠어…….”
베오른은 고개를 젓고는 베니시오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베니시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도원장님께서도 이상한 점을 느끼셨군요.”
“그렇네. 놈들은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날뛰고 있어. 원인이 무엇일 것 같나?”
사교도의 대규모 준동은 위협 요인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거대한 기회이기도 했다. 이단 방파들이 위협적인 이유는 그들이 문명의 그림자 뒤에서 암약할 때였으므로. 놈들이 제 모습을 드러낸 채 날뛴다면 일거에 소탕할 절호의 기회라 볼 수도 있었다.
당장 인력이 부족하고, 사태가 급박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단심문청의 인력 전원을 외부로 투사한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모습을 드러낸 놈들은 결국 꼬리를 밟히게 되어 있었다.
지금 이단 종파들은 대대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사방에서 활개치고 있다. 마치 자살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문제가 있다면, 저들의 의도와 규모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베오른에겐 병력 차출 외의 선택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놈들의 의도대로 끌려가는 기분에, 베오른은 끈적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오랜 시간 헤레티카를 이끌었던 요원으로서의 본능에 가까웠다. 그는 그와 함께 긴 시간 복무한 형제에게 의견을 구하려 했다.
그러나 베니시오는 고개를 저었다.
“마냥 기꺼운 일은 아니지만, 어쨌건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수도원장님.”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 내가 너무 과민한 것일지도…….”
“항상 의심하라. 이건 수도원장님께서 제게 가르쳐 주신 강령입니다. 저 또한 다른 형제들을 가르칠 때에 종종 하곤 하는 말이기도 하고요. 수도원장님께선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금칠은 됐네, 베니시오 형제. 디모니카 형제 한 사람을 대동하고 해당 지역으로 타격대를 꾸려 나가게. 그리고…….”
“예, 수도원장님. 최대한 빠르게 복귀하겠습니다.”
“아니. 최대한 안전하게 복귀하게. 형제들의 희생 없이.”
“막토.”
“막토 수페를라우도, 형제여. 가게.”
베니시오는 짧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베오른은 베니시오가 건넨 서류를 펼쳐 읽으며, 손 안에서 묵주를 꺼내어 굴렸다.
[너는 의(義)를 구하라.]
로사리오 표면에 음각된 글귀를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며, 베오른은 이 폭풍 끝에 남을 광경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했다.
[그리하면 너의 천부께서 네게 정(正)을 더하시리라.]
석양이 지고 있었다. 드래곤스파인 산맥의 드넓은 산자락 아래로 그림자가 길게 너울졌다. 그의 집무실엔 타닥이는 모닥불과 작게 빛나는 양초만 남아 그의 곁을 밝히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베오른은 오랜 시간 아무 말 없이 지도를 노려보았다.
그의 한쪽 남은 눈이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경고, 귀하는 교황령에 출입 중입니다.
-체포 시 화형될 수 있음.
-성 바오톨로메오 수도원.
깊은 밤, 숲속의 작은 소로에 올라간 표지판이 끼익, 거리며 으스스한 소리를 내고는 흔들렸다. 한 사내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잠시 발을 멈췄다.
-파삭!
잠시 빛 무리가 번쩍이고, 반으로 갈라진 표지판이 진창 위를 굴렀다. 사내는 표지판의 떨어져 나간 조각을 발로 짓밟고는 산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경고…….
-화형…….
-수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