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40화 (341/388)

340. 불멸자와 필멸자 (9)

“제피스 시라다스트는 지금 이바리스 시를 향해 이동하고 있어.”

“그걸 어떻게 알지?”

로베르의 말에 에버리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이언사이드의 총력을 기울이고도 제피스의 행방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피스는 철저히 훈련된 이단심문관이었다.

그러나 로베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모든 경우에도 변치 않는 가능성이니까.”

수천 가지 미래와 수천 번의 종말. 그리고 단 하나의 희망. 이 몇 개월간 로베르와 피엘이 계산한 ‘시나리오’의 결론이었다. 단 하나의, 극히 희박하고 운에 가까운 희망.

그리고 개중 과반 이상의 경우, 이 시기의 제피스는 이바리스로 향하고 있다. 이는 놀라운 일이었다. 어떤 단서도 없이, 아이언사이드와 샥시시, 하물며 이단심문청의 조사관들조차도 페르난데스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했음에도, 제피스는 홀로 그것을 해낸 것이니.

“예언이라. 그래, 로베르. 그럼 이다음 예언은 뭐가 될 것 같아?”

“너는 이바리스로 달려가겠지. 제피스를 만나고 싶을 테니까.”

“……그것도 예언?”

“아니, 이 정도는 보면 알아.”

로베르의 장난스러운 말에 에버리즈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시라다스트 경을 이름으로 부르지 말고, 매형이라고 불러.”

“제정신이 아니군.”

“왜? 귀르의 원로들도 감히 반대하진 못할걸?”

“지금 트레뮐레 가주는 난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 그거 박탈당했다는 소식은 예언에 없었니? 이제 내가 가주야. 네 장례식에서 정해졌어.”

에버리즈는 새초롬하게 말했다. 로베르는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날 왜 찾아왔지, 에버리즈?”

“너…… 너 찾으러 온 거 아닌데!”

“내가 실종된 순간부터 아이언사이드의 통수권은 황제 폐하께 있을 텐데, 폐하께서 네 짝사랑을 응원하려고 이 난국에 아이언사이드들을 지원할 리가 없잖아.”

말문이 막힌 에버리즈는 어어, 하고 로베르를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픽 돌리고는 투덜거렸다.

“재수 없어. 너, 재수 없어.”

“보고 싶었어, 누나.”

“……그래. 동생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로베르는 씩 웃으며 손을 뻗었다. 에버리즈도 같은 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남매의 짧고 가벼운 악수가 오가고, 둘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가 시라다스트 경을 찾아간 다음엔?”

“세르너드 경을 보름 이상 묶어 둬. 내륙의 정보를 전혀 전달받지 못하도록.”

“……왜?”

“보름 안에 동부 왕국 전역이 불타오르고, 이단심문청이 무너질 테니까.”

로베르는 스산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종말을 끝내기 위해선 종말과 마주해야 하는 법이지.”

그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서, 이천삼백 개에 달하는 시나리오가 폐기되었다. 로베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 *

핏물과 함께 살점 터져 나가는 파열음이 조용히 울렸다. 그를 발견했던 사람은 반 호흡을 들이켜기도 전에 턱 위로 허공만 남은 채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창날이 빙글 돌아 다시 그림자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사제복을 입은 사내의 손은 허공을 연신 움켜쥐려 했다. 그의 눈에 그건 그저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열한 발악에 불과해 보였다.

-피릭!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파공성이 들렸다. 사내는 어둠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창날을 휘둘러 쳤다. 검게 그을려 놓은 단검이 창대에 맞아 튕겨 나갔다. 사내는 단검이 날아든 방향을 바라보며 자세를 다잡았다.

“누가 감히…… 감히 어떤 이단이 이단심문청을 공격하느냐!!”

노기 어린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서, 사내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었다. 디모니카, 아직 수도원에 남은 디모니카가 있었군.

“조용히 지나가긴 글렀군.”

“이노옴!!”

-쾅!

저 너머에서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거구의 사내가 그의 눈앞에 들이닥쳤다. 엄청난 속력과 힘이었다. 은빛 번쩍이는 칼날이 순식간에 그의 목 바로 앞을 휩쓸고 지나쳤다.

-챙! 카앙!

그러나 단 두 번. 두 번의 검격 끝에 그의 몸을 노리던 장검이 반으로 갈라지며 튕겨 나갔다. 디모니카는 당황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서며 부러진 검신을 바라보다가, 노기 띤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그자로구나. 수도원들을 불사른 녀석이었구나!”

“내가 그랬다 한다면, 이제 이유도 알겠지?”

“네놈 홀로 감히 본청을 무너트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형제들이 외부에 집중한 지금이 네놈에게 기회가 되리라 생각했더냐!”

디모니카는 쿵! 하고 발을 크게 구르며 앞으로 나섰다.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수도원의 정원에서, 디모니카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크게 외쳤다.

“오라. 너, 어리석은 이단아. 네가 신봉하는 악마는 다만 파멸만을 바랄 뿐이요, 설령 그것이 너의 것이라 할지라도 괘념치 않으리라. 너는 자기 파멸을 위해 공양하는 사교도에 불과하다!”

“말이 길군. 지원을 기다리나?”

그는 천천히 그림자 밖으로 벗어났다. 수도원 곳곳을 밝히는 등불 아래로, 한쪽 발을 작게 절뚝이며 창날을 뒤로 돌려 자세를 잡고.

디모니카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곧, 그는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성당 기사 다리안 쉬라이크!!”

“한때 그랬지. 너희 십자군 이전까지는 말이야.”

“네 타락은 만신전의 수치로 기록될 것이다!”

“만신전의 공포로 기록될 것이다. 기록할 만한 자가 남는다면.”

디모니카는 곰처럼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반으로 부러진 검과 작은 방패 하나를 움켜쥔 채로. 마치 벽이 질주하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다리안은 픽 웃으며 창을 돌려 자세를 잡았다.

“기도해 봐라, 사제. 간절히. 살려 달라고.”

“닥—쳐라!!”

-콰앙!

디모니카의 외침과 함께 창날이 그의 방패를 후려쳤다. 곧—

-퍼억! 퍽!

손목, 양팔과 어깨, 두 무릎에 이르기까지. 일곱 번에 달하는 공격이 한순간에 펼쳐졌다. 디모니카의 시력으로도 미처 가늠하기 어려울 쾌속한 일격이었다. 숨을 한 번 들이마시기도 전에, 그는 무기를 모두 떨어트리고 바닥을 굴렀다.

-쿠웅!

디모니카는 달려드는 속력에 못 이겨 바닥을 시끄럽게 굴렀다. 그는 혼란에 빠진 얼굴로 전신에서 피를 울컥이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대체 언제, 그리고 어떻게 맞은 거지? 사술인가……? 아니. 사술의 기척이었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가장 먼저 파악했을 것이다.

그의 얼굴이 공포에 질렸다. 이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단련된 무예의 편린이었다. 디모니카와 일반인, 그 육체의 차이를 초월한 검격이었다.

“두렵나, 사제?”

그의 머리 바로 앞에 다리안의 발이 보였다. 창날이 스르륵 내려와 그의 목젖을 꾹 눌렀다. 디모니카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위를 올려 보았다. 다리안의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 이 사제의 두려움은 생존 본능에 기인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다리안은 짧게 감탄했다.

이 사제는 디모니카 수준이 아니라면 그를 막으려 시도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수도원 내부에 디모니카가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그는 남은 형제들이 고혼이 되리라 예상하고 겁에 질린 것이다.

“주께서 너를 바라보신다, 다리안 쉬라이크. 네놈의 작은 승리는 네 절망을 향해 나아가는…….”

-퍼억!

디모니카의 증오 섞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다리안은 창을 내려찍어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는 창날을 털어내고 앞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발을 멈췄다.

“따라오지 말라 했을 텐데. 카를로마노.”

“쉬라이크 경이 걱정되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거짓말이 서툴군, 박사. 세이리는 어쩌고 혼자 올라왔지?”

“아, 그 아가씨는 잠시 잠들었습니다. 걱정 마시길.”

어둠 속에서 카를이 걸어 나와 빙긋 웃었다. 다리안은 창대를 움켜쥐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뒤에서 수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홀로 온 것이 아니었군. 누구냐?”

“경과 뜻을 함께하기로 한 자들이지요. 인사 나누시길.”

“이……놈…….”

다리안의 눈이 사납게 치솟았다. 카를의 등 뒤에서 몸이 기괴하게 비틀린 사내들이 나타났다. 붉게 달아오른 눈과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꺾인 몸, 그리고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끈적한 악취……. 지옥 마력에 타락한 존재들이었다.

“페이른의 이황자가 믿는 것이 맥라렌 교회는 아니었군. 카를로마노 파빌로스. 나를 이용했구나.”

“같은 목적이 있으니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여기시지요. 지금 경이 저와 정의를 논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수도원의 성벽을 타고 넘으며 나타나는 그림자들이 적지 않았다. 지독한 지옥 마력의 기척에 다리안은 코끝이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카를을 바라보다가, 대뜸 손을 휘둘렀다.

-퍼억!

가장 가까이 다가오던 괴물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걸어오던 카를이 멈칫하자, 어둠 속의 형체들도 일제히 발을 멈췄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착각하지 마라. 같은 길을 걷는다고? 짐승을 잡아먹는다 해서 사람과 들개가 같은 종이라 할 수 있나?”

다리안은 카를의 얼굴을 사납게 노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뱉듯 말했다.

“네가 오늘 죽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이후 내 눈앞에 모습을 보인다면 오늘과 같은 자비는 없으리라. 꺼져라. 불멸자의 썩은 살점을 집어삼키려 든다는 점에 있어서, 너는 이 작자들과 다를 바 없는 들개다.”

“하하…… 그 또한 좋겠지요.”

카를은 픽 웃으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굶주린 짐승을 대하듯이, 등을 보이지 않고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헌팅 스쿨의 교수는 어둠 속에서 하얗게 웃으며 사라졌다. 다리안은 고개를 털고 사제들이 쓰러진 문간을 넘어 수도원 내부로 진입했다.

* * *

“세계의 종말……? 대체 어떤 존재가 더 남았다는 거야?”

“어떤 존재라. 하하, 그레이서클의 내부 문서들을 제법 읽은 모양이군?”

“나는 지금 트레뮐레 궁중백이니까. 로베르.”

에버리즈의 물음에 로베르는 부드럽게 웃었다. 피로에 찌든 그의 눈에, 색색거리며 잠에 든 피엘의 모습이 비쳤다. 그는 잠시 걱정스럽게 피엘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몸 위로 담요를 덮어 주었다.

“대악마라 분류될 법한 존재가 셋 남았지. 그건 알고 있겠지?”

“……그래. 하지만 그중 둘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다는 평가가 있던데.”

“힘을 잃고, 추종자들마저 몰살당했으니 서서히 영락하겠지. 우리 세대엔 불가능하더라도 언젠간 반드시.”

불멸자들, 신성을 품은 존재들은 필멸자의 경외를 삼키며 성장한다. 지옥의 악마들이, 그리고 천상의 대신들이 물질 세계에 그토록 영향력을 행사하려 안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만신전 교회들은 악마들의 존재를 감춘다. 단지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만으로도 놈들의 세력이 비대해지는 탓이다.

반대로, 지옥의 하수인들은 교회를 불사르려 노력한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 만신전의 공고한 권위를 무너트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경외를 살 수 있으므로.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대악마라 불리는 저 불멸자들에게 남은 미래는 오직 느릿한 소멸뿐이다. 추종자들 대부분을 잃었으며,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 필멸자에게 패배했으므로.

그레이서클은 지옥의 하수인들이 복구 불가능한 치명상을 입었다 판단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로베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그것을 아는데, 저들이라고 모를까.”

하나하나가 적어도 천여 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물질 세계의 문명이 쌓아 올린 역사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낸 고대의 악령들이,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종말을 과연 느끼지 못했을까.

로베르는 우묵한 눈으로 에버리즈를 바라보았다.

“신이 성자를 내리듯이, 대악마들 또한 사도를 내보내지.”

“그 사도가 죽어서 실각했고. 그래, 그건 알고 있어.”

“그렇다면 신들은 자신의 힘을 내린 성자가 죽었을 때 아무런 타격이 없겠어?”

“……뭐?”

“본질적으로 지옥의 놈들과 천상의 대신은 다르지 않아. 방향성이 다를 뿐, 모두들 신성을 품은 불멸자란 뜻이지. 사도가 죽을 때 악마들의 힘과 영향력이 상실된다면, 성자가 죽을 땐 어떤 일이 일어나겠어?”

에버리즈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서 그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 갔다.

“사도와 성자가 모두 죽은 이 상황. 천천히 소멸될 운명만 남아 있는 놈들에게,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 여겨지겠지.”

다행히, 아직 우리 성자 나리는 죽지 않았지만 말이야. 로베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놈들이 어떤 짓을 할 수 있을까. 궁지에 몰린 쥐조차 고양이를 무는 법인데. 놈들은 과연 무슨 짓을 하려 할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로베르.”

“에버리즈. 인류 역사상 가장 강한…… 아니, 가장 강했어야 할 한 사람의 몸에 지옥의 모든 역량이 집중된다면. 선신 만신전 모두의 축복을 받는다 해도 막아 낼 수 있을까.”

로베르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감았다.

“사천육백 번의 가설. 그중 삼천칠백오십 개의 시나리오는 같은 종말로 달려가더군.”

그가 아니더라도, 그다음. 그리고 그다음에 언제든 반드시. 그러니까, 차라리 예측할 수 있는 명확한 목표를 잡아 두고.

“놈들의 전력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그 순간을 노려야 해.”

그것이 수천 가지의 묵시 중 유일한, 그리고 완벽한 승리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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