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41화 (342/388)

341. 불멸자와 필멸자 (10)

[그대를 찾고자 하는 객이 있다. 페르난데스.]

라비라타가 문득 고개를 들며 그리 말했다. 망령 군주는 이 도시 전역을 자신의 눈처럼 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 자신이 불러일으킨 망자들의 눈처럼.

라비라타가 손을 들자, 시녀들이 부채질을 멈췄다.

[그러니 이젠 고집을 꺾는 것이 어떠하느냐?]

“……고집……?”

[그대는 지금 여든 노인처럼 완고하다.]

“사실이라 부정할 말이 없군.”

태양 광장에서의 사건 이후, 페르난데스는 육체 단련을 시작했다. 명목상으로는 이 새로운 육신에 더 빨리 적응하기 위한 조율이었으나, 그와 라비라타 모두가 그런 조율 따윈 필요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애초에 영혼의 형체를 물질 세계에 직접 빚어낸 것이 그의 육신이다. 영육의 결속이 오히려 그 전의 육체보다 뛰어났다. 그런 주제에, 페르난데스는 그 이후로 일주일이 다 되도록 가혹하리만큼 육체를 혹사시키곤 했다.

이는 일종의 시위였다. 자신의 상태가 온전하므로 언제든지 이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다는. 그러나 그를 살려준 것은 라비라타였고, 그녀의 허락 없이 훌쩍 도시를 떠나는 것은 목숨값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단순한 예법을 떠나서, 이는 정치적인 셈에 가까웠다. 이바리스는 키르자트와 제국 사이의 주요 교역로에 위치해 있다. 다소 과장하자면, 그녀의 진노는 새로운 50년 전쟁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었다.

[짐이 졌다. 이 말이 그리도 듣고 싶더냐?]

“그대의 후의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소.”

태양 광장의 석상을 제외한다면 말이지. 페르난데스가 무뚝뚝하게 말하자, 라비라타는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기실 고집은 짐이 부리고 있었지. 그래, 그대의 상태는 온전하다. 그대를 붙잡고 싶었던 노욕이 그대를 곤란케 했으니, 이 이상의 욕심은 오히려 무례에 가깝겠구나.]

라비라타는 그가 떠나지 않길 바랐다. 이 세상 어딘들 안전을 확신하겠느냐마는, 도시의 모든 망자들을 문자 그대로 ‘직접’ 다스릴 수 있는 그녀의 입장에서, 이바리스 외부는 위험한 세상뿐이었다.

영원히 붙잡아 둘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잠시만이라도 이 사내에게 휴식을 주고 싶다. 그것이 라비라타의 바람이었고, 페르난데스 또한 그녀의 마음을 존중하며 기다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외부와의 소식이 끊긴 일주일은 너무 길다.

마침내 외부에서 그를 찾아 누군가가 도시에 진입한 지금. 라비라타는 깨끗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이자를 더 이상 억류할 수는 없다.

[그대를 잘 아는 객이지만,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대의 생존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대를 찾았다면…….]

“실낱같은 희망을 위해 떠도는 이상주의자이거나, 정보 반사 독립체겠지. 예상하고 있었소.”

자신을 찾는 손님이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페르난데스는 이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전자라면 아벨일까. 확신할 수는 없다. 아벨의 성격상, 그녀는 그의 죽음 이후에 은둔을 택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키르하스와 르네는 아닐 것이다. 그녀들에겐 책임져야 할 이가 너무나 많다.

후자라면 피엘일까. 오르키스는 그를 찾을 이유도, 여력도 없을 것이니 당장 그를 잘 아는 ‘예언자’는 그녀뿐이다.

‘페이자쉬가 있었다면 한 소리 했겠군.’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어째서인지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 모두 여성이라, 어떻게 삶이 이렇게 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곧 이리로 올 터이니, 의복을 갖추고 채비하거라. 환송식은 단출할 것이다.]

“고맙소.”

[서운하구나, 떠나보냄이 그다지도 간절했더냐?]

“그대의 모든 후의에 고맙다는 뜻이오. 지난 은혜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까지도.”

페르난데스가 외투를 찾아 걸치며 말하자, 잠시 침묵하던 라비라타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가 여난이 많은 것은 다만 여복 탓이 아니로다. 짐은 산 자가 아니나, 산 자의 입장을 고려해 조언하겠으니 황금처럼 들으라. 그대의 여난은 그대의 외모가 아닌, 혀에서 나왔으니. 향후의 처신에 주의하는 편이 좋겠다.]

“……숙고하겠소.”

[그럼 기다리고 있거라.]

라비라타는 큭큭 웃으며 자리를 비켰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뒷모습을 일별하고는 옷을 걸쳐 입고, 대검을 챙겨 안장에 묶었다. 라비라타가 공수해 온 이 살아 있는 말은 갑작스레 늘어난 두 자루 대검만큼의 무게에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 * *

제피스는 이것이 꿈이기를 바랐다. 물론 페르난데스가 살아 있을 거란 생각으로 돌고 돌아 찾아온 망자들의 도시였지만, 그가 보고 있는 광경은 현실에 존재해선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도시의 정경이 지평선 너머에서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는 멍하니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음. 신기루가 다소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군.”

형제의 얼굴이 신기루처럼 도시 외부에 보이고 있었다. 단지 죽었다고 여겨지는 형제를 그리워한다고 보기엔 과하게 악취미적인 신기루였다. 외벽 너머로 얼굴만 보이는 것은 우선, 보기에 좋지 않으니까.

“신기루가 상당히 현실감 넘치는군…….”

이바리스의 드높은 외성이 훌쩍 다가왔을 때, 정확히 외성이 가까이 보이는 만큼 신기루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쯤, 제피스는 본능적으로 저것이 신기루 따위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디모니카였고, 그의 거리 감각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부분에 있었다.

저건 신기루나 허깨비 따위가 아니라, 진짜 실존하는 석상이다. 그의 본능이 담담하게 그렇게 분석해 왔다.

“형제가 이 도시에 없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군.”

페르난데스의 성격이라면 저 꼴을 보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지 않았을까. 그는 말을 몰아 외성 입구로 다가가며 중얼거렸다. 곧, 외성 입구의 보초가 그를 발견했다.

[멈추어라. 이방인. 그대는 위대한 태양의 도시에 접근하고 있다. 목적과 행선지를 말하라.]

“나는 알베르트라고 한다. 이 도시엔 나의 형제를 찾아 왔다.”

[이 도시엔 산 자가 없다. 필멸자.]

번쩍이는 갑주를 잘 차려입은 망자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제피스는 한숨을 내쉬며 말 위에서 고민했다. 도시에 진입하는 것조차 쉽지 않군. 그러나 저 석상까지 본 이상, 최소한 단서라도 얻기 위해선 도시 내부로 향해야 했다.

-삐이이익!!

그때, 도심 방향 창공에서 매 한 마리가 날아들어 병사의 등 뒤의 군기 위에 앉았다.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군기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제피스에게 말하던 병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가만히 기다렸다. 매는 황금 조각이 올라간 장신구를 부리로 콕콕 쪼며 병사를 내려 보았다.

-퍼드득!

잠시 후, 매가 날갯짓하며 다시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병사는 도심을 향해 크게 절을 올리고 일어서서 도심 대로로 향하는 길을 비켜섰다.

[궐이 보이는 방향으로 대로를 따라 곧장 나아가, 태양 광장으로 향하라. 이바리스의 왕중왕께서 너를 기다리신다.]

제피스는 대로 너머, 빽빽하게 올라간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휘황찬란한 궁궐을 바라보며 말을 몰았다.

* * *

[아, 그대의 객이 오는구나.]

라비라타는 광장 입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페르난데스는 애써 신상을 등지고 서서, 한낮의 아지랑이가 올라오는 광장을 바라보았다. 곧 말을 탄 실루엣이 보였다. 누가 봐도 여성은 아닌, 체구가 장대한 사내가 로브를 휘날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내의 시선이 맞닿았다. 아직은 먼 거리였지만, 둘 모두가 이 정도 거리는 눈앞에 있는 듯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제피스 형제님?”

“형제……! 살아, 정말로 살아 있었군!”

-다각, 다각.

말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광장을 반절 넘게 가로지르자, 제피스는 곧장 안장에서 뛰어내려 달려왔다.

“정녕코 주께서 가호하심이라.”

[그대들의 ‘형제’를 구한 것은 그대들의 신이 아니라 짐이었네만.]

“그 또한 주의 길이라. 교회를 대신해 감사를 드리오.”

[허! 짐에게 덕담을 하는 산 사제는 처음 보는구나. 벌써 마음에 들어.]

라비라타는 하,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피스는 그녀에게 짧게 목례를 하고 페르난데스의 두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정말 살아 있군.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 유언장은 또 뭐고?”

“유언은 아니었습니다만, 유사시를 대비하는 가안 정도는 되겠지요. 형제님, 그 말이 나와 그런데 혹여 계획은 어느 정도 진행이 되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성물을 그대가 지니고 있었던 탓에 계획 자체는 진행되지 않았네만, 자네가 돌아왔으니 일이 어렵겠는가.”

페르난데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 위에 뛰어오르며 라비라타를 향해 말했다.

“가겠소. 라비라타.”

[짐과 그대가 다시 만날 날에도, 그대가 살아 있었으면 싶구나.]

“최선을 다해 보지.”

페르난데스는 제피스와 함께 말을 몰아 떠났다. 광장에 나와 그들과 파라오를 바라보던 망자들이 그의 걸음에 맞추어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조용한 침묵이 메마른 도시 위에 내려앉았다. 문명 사회 그 어떤 도시보다 고색창연한, 지금은 잊혀진 염료와 모직으로 치장된 이 거대한 도시 사이에서 두 명의 산 사람이 떠나고 있었다.

환송이 화려하지 않을 것이라 했던가. 페르난데스는 오히려, 가장 화려했던 축하연보다 이 순간을 더 오래 간직할 것 같았다.

“아시트 비술의 근간은 존중이라…….”

그는 침묵으로 천금을 대신하는 망자들을 바라보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산 자에겐 산 자의 시간이 있는 법. 이들은 침묵으로, 산 자들의 시간을 존중하고 있었다.

저 멀리, 이바리스 시의 높다란 성벽 아래로 성문이 보였다. 성문 위의 갤러리에 상 아시트의 쐐기 문자가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너희의 미래다.] 처음 저 문구를 보았던 도시에서, 그는 저 말을 위협이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저 문장은 위협이나 암시 따위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지금은 너희의 현재다’라는 말을 고대인답게 돌려 표현한 셈이었다.

산 자들이 망자들의 도시를 벗어난다. 그들은 다시금 생명력 넘치는 저 대지 위로 떠났다.

* * *

“망자들이 형제를 퍽 좋아하는 모양이더군.”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내 생전에 그토록 높은 석상은 처음 보았네. 저들이 형제를 신으로 여기던가?”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군요. 형제님.”

제피스는 조용히 투덜거리는 페르난데스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언제나 애늙은이 같던 청년이 그제야 그 나이 또래로 보이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흔쾌히 끄덕이며 고삐를 쥐었다.

“교회로 곧장 돌아갈 참인가?”

“몇 군데 들러야 할 곳이 있습니다. 제국과 교회는 제가 없더라도 무탈하겠으니, 그렇지 않은 이들을 먼저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형제의 안사람‘들’ 말이로군.”

제피스가 짓궂게 말하자, 페르난데스는 잠시 그를 노려보았다. 곧, 페르난데스 또한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근자에 밝아지셨으니 보기 좋습니다. 형제님.”

“형제가 돌아와 기뻐 그런가 보군.”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형제님의 ‘안사람’ 덕을 크게 보았겠지요.”

제피스는 아무 말 없이 고삐를 당겨 마속을 높였다. 페르난데스는 하하,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이런 소일거리로 농담을 나누는 것은 정말 오랜만인지라, 페르난데스는 그제야 비로소 살아 돌아왔음을 느꼈다.

그건 생각 이상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그 자신도 놀랄 정도로.

* * *

“린드부름.”

프레이야가 잠든 용의 콧잔등을 부드럽게 쓸어 만졌다. 뜨거운 숨결이 훅, 하고 바닥의 먼지를 흩어냈다. 그녀는 거의 그녀 자신의 몸만큼 거대한 눈동자가 천천히 그녀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을 보았다.

“놀라지 말고 들어라. 그의 기척이 느껴진다.”

“위치를 보아하니, 아마도 망령 도시에 잠적했었던 듯싶다. 이 땅 도처에 뭄토가 가두었던 생명력이 뒤늦게 개화하고, 망자들은 유별날 정도로 보이지 않는지라 내 미처 찾지 못했다. 왜 그 생각을 먼저 하지 못했을까.”

“듣고 있느냐? 린드부름. 그자가 살아 있다. 그리고…… 지금 이 방향으로 오고 있다. 그리 멀지는 않은데, 찾아가 볼 테냐?”

프레이야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녀를 내려다보고만 있는 용에게 속삭였다. 용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입을 열어 조용히 속삭였다.

“얼마나…… 얼마나 걸릴까? 여기에 올 때까지 말이야.”

“속도를 보건대…… 두 시간이면 족하지 싶구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열풍이 몰아 닥쳤다. 프레이야는 주춤거리며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그 자리에, 수의를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나타나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둥지 한켠으로 달려가 무언가 뒤적이기 시작했다.

“뭐…… 뭘 하고 있어?”

“칼.”

“뭐? 칼은…… 칼은 왜 그러느냐?”

그녀가 보관하고 있던 낡은 짐들이 둥지 안으로 이리저리 튕겨 나갔다. 그녀는 짐을 한참 뒤적인 끝에야 먼지 뽀얗게 얹은 장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살아 있었으면서, 한 마디도…… 단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는 말이구나. 페르난데스…….”

“무슨 사정이 있지 않았겠어……?”

그 흉흉한 기세에 프레이야가 침을 꿀꺽 삼키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아벨은 검신에 얹은 먼지를 후 불어 닦고는, 검날에 얼굴을 비췄다.

“뭐 이상한 거 없지? 지금 내 모습이 많이 이상할까?”

“……거울이 필요한 것이었더냐……?”

“용의 형상엔 거울 같은 것이 필요치 않으니까.”

아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곧 그녀는 꽃이 피어나는 듯 웃으며 납도하고는 둥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두 시간이라. 지난 몇 개월에 비하자면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그리고 앞으로 남을 수십 년에 비하자면, 비교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찰나에 불과하다. 그녀는 용이며, 장생종은 기다리는 것에 익숙하다.

그럼에도, 그 두 시간이 평생에 걸친 기나긴 삶보다 더 무겁게 느껴져서, 아벨은 그 사실이 우스워 미소 지으면서 두 손으로 눈가를 눌렀다.

“벌써 울면 직접 만났을 때 어쩌려고 그러느냐, 린드부름.”

“그땐…… 웃어야지. 기쁘니까…….”

“지금은 슬퍼 우는 게냐?”

“아니, 기뻐서……. 기쁜데, 고마워서. 고마운데, 보이기 싫어서.”

낡은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오랜 용의 더께 덮인 시간이. 산 자들의 시간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