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44화 (345/388)

344. 불멸자와 필멸자 (13)

-퐁!

울창한 밀림 속, 꽃망울 하나가 갑작스레 터져 올라와 피어났다. 이름 모를, 그리고 각기 다른 종류의 새하얀 꽃들이 방울방울 터지며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퍽 낭만적인 초대장이다. 뒤늦은 걸음이었음에도. 페르난데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꽃을 따라 걸었다. 그때, 함께 걷던 제피스가 발을 멈췄다.

“형제님?”

“혼자 가게.”

“……예?”

“사제 된 도리로 이 함의를 무시할 수는 없겠군. 신이 직접 주관하고자 한다니, 내가 나설 일은 더욱 없겠고.”

제피스는 픽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망토를 벗어 바닥에 깔고 자리에 앉았다. 수통의 입구를 뜯어내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넉살 좋게 손짓했다.

“느긋이 다녀오게나.”

갑작스런 제피스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꽃이라. 프레이야의 초대일 것이고, 그녀가 있다는 것은 이 근방에 위협 요인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건 정말 순수하게, 살아 돌아온 동료를 맞이하며 축하하기 위함이라 여겨도 좋으리라. 페르난데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꽃이 깔린 푸른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용의 둥지를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페르난데스는 익숙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수풀 속으로 하얗게 피어난 꽃들이 점차 더 빽빽하게 자라나, 어느새 숲길 전체가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사락, 사락. 꽃이 징 박힌 단화 아래에서 밟히는 느낌이 마치 눈송이 같았다. 눈이 덮인 설원의 미답지를 걷는 기분으로, 페르난데스는 퍽 감상적인 느낌을 받으며 걸어 나갔다.

그리고 곧 공터가 나타났다. 온 사방에 폭설이라도 내린 양, 늦여름의 더위 속에서 익숙한 꽃내음을 풍기며.

“왔느냐.”

저 멀리에, 수의를 입은 여인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꾹 눌렀다.

익숙한 감각이라……. 그 옛날 인퍼머르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심상 세계의 풍경이 이곳과 닮아 있었다. 꽃처럼 흩날리는 눈송이 아래에 선혈 흘러내리는 묘비를 안고 영원 속에서 울던 여인이.

지금은, 눈처럼 쌓인 꽃 덤불 위에서 그를 똑바로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내 너를 다시 보게 되거든 하고 싶던 말들이 많았다. 너를 떠나보낸 시간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내가 어떤 심경으로 어떤 시간을 보내야 했는지…….”

아벨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손에 낡은 세인트메탈 장검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칼자루를 움켜쥐고 가슴깨로 끌어당겨 꼿꼿이 세웠다.

“하루가 흐를 때마다 희망은 적어지고, 하루만큼의 비참함이 따르더구나. 후회, 회한, 한탄, 무어라 불러도 좋았다. 단 하루의 거름 없이 너른 황야를 바라보며, 그만큼. 그만큼.”

-사락.

꽃잔디를 밟으며 그녀가 다가왔다. 두 손에 칼을 한아름 품고서.

“칼을 들어라.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아벨.”

“생각이 많고 전할 말도 많으나. 하소연으로 덧칠하기엔 우리의 시간이 아쉽다. 무릇 무사에겐 천 마디의 말보다 값진 한 수의 검로가 있지 않겠느냐?”

“미안하오.”

“그만.”

-키이잉.

아벨은 칼을 빼어 들어 곧게 페르난데스를 향해 뻗었다. 그건 명예 결투를 벌이기에 앞서서, 상대에게 예를 갖추는 낡은 예법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반사적으로 칼을 쥐고 같은 자세를 잡았다.

“페르난데스. 앞으로는 지난날을 사과할 때엔 진행형으로 표현하지 말거라.”

언제나 과거형으로. 페르난데스는 그 말 속에 품은 뜻을 알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또한 고전적인 귀족 예법이었다. 데인 왕국 귀족들 특유의.

지난날을 사과할 때 과거형으로 말하라. 단순한 문법의 문제가 아니다. 몇 번이고 잘못을 저질러도 좋으니, 그저 다시 돌아오기만 하라는 뜻의 당부였다. 전투에 나서는 기사를 향해 손수건을 건네는 레이디들의 말이었다.

이 고풍스러운 용의 마음 씀씀이에 페르난데스는 낮게 웃었다. 그는 칼을 뽑아 아벨을 겨누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고, 둘은 동시에 칼을 휘둘러 쳤다.

-카앙!

처음은 단순한 견제. 올곧은 검로를 유지하며, 상대가 막을 것을 예상한 일격. 사전에 합이라도 맞춘 양, 검신이 가볍게 서로를 두드리는 즉시 다시 칼을 뒤로 물려 그다음 일격을—

-챙!

칼이 검날을 눕혀 휘두르듯이 얽혔다. 상대의 몸을 상하게 할 의도가 없다는 뜻의 검로였다. 이 또한, 합을 맞춘 듯 동시에 출수하고 또한 동시에 거두며 다시금. 일격.

-캉! 카득! 챙!

페르난데스는 처음 두 수의 교환 이후 방어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검격의 모든 공세는 아벨의 손에서 나오고 있었다. 점점 더 빠르게, 점점 더 격정적으로.

-캉! 캉! 카드드득!

칼날이 서로를 물고 어금니를 박으며 뜯어낼 듯이!

얼마나 슬펐는지, 얼마나 한탄했는지, 그 시간. 그 몇 개월이 그녀에게 어떤 지옥을 보여 주었는지. 애원하듯이, 마치 투정을 부리듯이 검로가 이어진다. 칼이 얽히고, 튕기고, 다시 섞이며 검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카앙!

그리고 페르난데스는 여전히 그저 방어에 집중하고 있었다. 모든 검격을 받아 내어 품에 안는 것처럼. 마침내, 점점 그녀의 공세가 잦아들 때쯤에.

-키이이잉…….

검끝이 페르난데스의 코앞에 멈춰 서서, 낮게 떨리며 울었다. 페르난데스는 그 서늘한 칼날을 힐끔 바라보았다. 격렬한 검무로 인해 사방의 꽃봉오리들이 튕겨 나가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눈앞, 고요히 선 검신 위로 꽃잎 한 장이 나풀거리며 내려앉았다.

“받아 주겠느냐.”

“후회하지 않으시겠소?”

“너를 놓친 날 이후로 내 평생의 후회는 이미 다 쓰고 없다, 페르난데스. 더 이상 덜어 낼 것이 없으니, 네가 채워 주길 바라마.”

“항상 곱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입고 먹게 되진 못할 거요. 그럴 능력도, 운수도 되지 못하는지라.”

“항상 너를 볼 수는 있지 않겠느냐.”

키잉, 하는 소리와 함께 아벨은 뻗었던 검을 우아하게 돌려 칼집에 납도했다. 그녀는 떨어지는 꽃잎들을 잡으려다가 멈칫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구나. 보통 일반적으로, 사내가 먼저 레이디에게 청하는 것이 아니더냐? 어찌 내가 네게 코를 꿰여 가는 기분이 들지 않느냐. 나는 고백을 하는 쪽도, 받는 쪽도 처음인데…… 좋지 않구나.”

“그리하리다.”

칼을 섞으며 한탄과 서운함을 풀고, 칼을 뻗으며 마음을 전달했으니.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검을 등에 차고 오른손을 뻗어 허공을 짚었다.

마력회로 한 가닥이 그의 수인에 반응해 기동을 시작했다. 곧, 그의 손끝에서 가지가 뻗어 나오며 새하얀 꽃을 피워 다발을 만들었다.

그는 꽃다발을 그녀에게 건네며 웃었다.

“이제 그대를 떠나는 일은 없게 하겠소. 함께해 주시오.”

“기꺼이.”

아벨은 눈물을 글썽이며 마주 웃었다. 그녀는 가는 손을 뻗어 그의 손에 쥐인 꽃다발을 받아, 품에 안았다.

-펑!!!

그들의 머리 위로 꽃잎이 사방에서 정신없이 터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페르난데스는 와락 인상을 찌푸리며 저 멀리 구석을 바라보았다.

“프레이야.”

“엣헴. 그래, 주례와 하객과 장식물을 담당하고 있는 여신이다. 덤으로 꽃과 봄과 새 생명 같은 몇몇 다른 것들도 담당하고 있지만, 지금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여신은 지금은 풍경이다.”

프레이야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팔을 활짝 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나뭇가지라도 된 양 몸을 천천히 흔들었다.

“자, 여신은 무시하고 신랑 신부는 입을 맞추거라.”

“이것들을 좀 멈춰 주시겠소?”

“왜 그러느냐? 너희 남부인들은 혼례에 꽃잎을 뿌리는 전통이 있지 않더냐?”

“그건 어디서 보셨소?”

“저잣거리의 로망스들은 항상 이런 분위기에서 끝을 맺곤 하더구나. 기사가 용을 무찌르고 레이디와 결혼하는 식이었다.”

그걸 지금 결혼하는 용 앞에서 말하는 것이 맞는지, 페르난데스는 잠시 머뭇거리며 생각했다. 아벨은 그저 다소곳하게 웃고만 있었다. 그녀의 귀에는 지금 혼례라는 단어를 제외하곤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순간이 너무 멋쩍어서,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휘휘 젓고는 얼굴에 달라붙는 꽃잎을 털어 내며 말했다.

“나는 용을 무찌르지 않을 것이고,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소. 프레이야, 그대 또한 함께해 주시겠소?”

“……세상에, 린드부름……. 나는…… 나는 모른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이 사내는 바람둥이다!!”

“그게 무슨……?”

프레이야는 갑작스레 창백하게 질리며 퍼덕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세상에! 새신부에게 고백한 말을 그대로 하객에게 또 하는 신랑이 있다니! 여신은…… 여신은 이제 남부가 두렵다!! 북부의 우직하고 강건한 문화가 그립구나!!”

* * *

페르난데스를 떠나보내고, 제피스는 잠시 웃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품에서 성경을 꺼냈다. 그건 그만의 시간을 가장 유의미하게 보내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때, 그림자가 그의 눈앞에 길게 늘어섰다. 제피스는 성경을 덮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이미 사람들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다시 만나 뵙는군요. 트레뮐레 영애.”

울창한 숲 사이로 뚫고 들어오는 햇살을 등 뒤로 가득 받으며, 에버리즈는 앉아 있는 제피스에게 그림자를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시라다스트 경. 그리 갑작스레 자리를 비우시니 서운해요.”

“영애의 호의에 답해 드리지 못해 참 죄스럽습니다.”

“급한 용무가 있음을 이해하니 괜찮습니다, 경. 혹 세르너드 공이 이 길 끝에 있을까요?”

“예, 하지만 저도 기다리는 중입니다.”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함께 지루하지 않을 수는 있겠네요.”

에버리즈는 슬픈 듯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제피스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성경을 덮어 품에 넣고는 자리를 비켰다.

두 사람은 햇살을 맞으며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에버리즈는 손가락을 조물거리며 제피스를 바라보았다.

단단한 턱선과 강직한 눈매. 제피스는 아무런 내색 없이 그저 하늘을 올려 보고 있었다. 불퉁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버리즈가, 툭 던지듯 말했다.

“볕이 좋군요.”

“그렇습니다.”

“경께서는 혹 정결의 서약을 하셨나요?”

“……예?”

“아니면 남색가이신가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혹 이미 혼인을 하셨거나, 마음에 둔 여인이 있으시거나, 혼외자가 있거나. 그 외의 기타 사유가 있으실까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사제였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흘렀다. 짧은 고요 끝에, 에버리즈는 조용히 말했다.

“에버리즈 시라다스트는 어떨까요?”

“……예?”

“아니면 제피스 드 트레뮐레도 좋아요. 사실 저는 이쪽이 더 좋긴 해요. 제 동생은 아무래도 아이를 갖지 못할 듯하니.”

혼란에 휩싸인 제피스를 바라보며, 에버리즈는 품 안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서류의 봉투 겉면에는 그도 익히 아는 인장이 발려 있었다. 베이타서스 교황청의 인장이었다.

에버리즈는 당당하게 웃으며 서류를 건넸다.

“우리 결혼했어요.”

그는 바보가 아니다. 당연히 이 철부지 백작 영애가 그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에둘러 거절하기도 했고, 몸을 피하기도 했다.

그녀에게 부족함이 있거나 싫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피스는 이단심문관이었고, 설령 파문당했다 하더라도 평생 악마와 그 추종자들을 사냥할 것을 서원한 사내였다. 그런 가시밭길에 동반자를 대동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잠시 멍하니 그녀의 말을 되새겼다. ‘했다?’ 하자가 아니라 했다고?

에버리즈는 그런 그의 모습에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 그 아이에게 자식이 없다면 차기 트레뮐레 궁중백은 제 아이가 되겠지요. 황제 폐하와 교황 성하께서도 이 혼인을 달갑게 허락해 주셨어요.”

제피스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지금껏 그녀에게 해 온 평가를 수정해야 했다. 성실하고 선량하나 순수한 귀족 여식이란 생각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듯싶었다.

그녀는 어엿한 레바인테르 제국 궁중 귀족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정치적 올가미를 미리 준비해 두는 부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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