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 불멸자와 필멸자 (14)
꽃길을 걸으며 아벨은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앞서 걷는 페르난데스의 등을 두어 번 두들기고는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 기대었다.
“왜 그러시오?”
“그냥, 웃음이 나는구나.”
차라리 페이자쉬가 이럴 때 무어라 한마디 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페르난데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페이자쉬라 해도 이 시점에 유의미한 조언을 해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전생에서도, 그리고 현생에서도 연인을 대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발전한 아리아와는 경우가 달랐다. 다가가는 것도, 거리를 잡는 것도.
그렇게 걷고 있자니, 아벨이 문득 입을 열었다.
“칼이 많이 늘었더구나. 이젠 기예의 영역에서 내가 대적하기 어렵겠어.”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그의 말에 아벨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검술은 결코 골방에 틀어박혀 홀로 검격을 내려 긋는다고 느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자습이 불가능한, 반드시 실습이 필요한 종류의 학문이었다.
검술이 늘었다는 것은 그 성장만큼의 피를 필요로 했다. 때때로 자신의 피까지도. 아벨은 그의 손등을 살짝 쓸어 만지며 말했다.
“고생이 많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소.”
“그렇다면 끝난 이후에 한 번 더 말해 줄 수 있겠구나.”
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 사내, 무뚝뚝하고 서툰 사내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를 담아서.
좁다란 숲길의 끝에, 제피스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불청객이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익히 아는 얼굴과, 누군지 알 것 같은 군상들이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버리즈 드 라 트레뮐레 백작 영애와 잘 무장한 사내들이었다.
의복이야 낡고 해진 단순한 경장 갑주에 불과했지만 그 근골과 자세에서 그들이 받았을 훈련들이 눈에 보였다. 은밀하고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는 종류의 무예를 익힌 자들이다.
그는 저런 종류의 사내들을 알고 있었다. 국가에서 직접 육성한 정보 요원들, 에버리즈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이언사이드일 터였다.
“오랜만에 뵙소. 트레뮐레 백작 영애.”
“놀라지 않는군요?”
“그대의 얼굴을 보고 내가 놀라야 할 이유가 있소?”
“나는 가끔 당신이 인간인가 생각하곤 해요. 감정이라곤 보이지도 않아서.”
“그이는 무척 감수성이 풍부한 사내다.”
“어…… 그런……가요?”
아벨이 문득 화를 내듯이 말하고는 다시 페르난데스의 등 뒤로 물러섰다. 그는 아벨을 한 번 힐끔 바라보고는 표정을 다잡고 에버리즈를 바라보았다.
“신경 쓰지 않아도 좋소. 트레뮐레 궁중백은 아직 정무에 복귀하지 않았나 보군.”
“……예?”
에버리즈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반문하고 말았다. 어떻게……? 단 세 마디를 나누었는데?
“사실 실종된 것이 아니라…… 어디서 정보 수집이라도 하고 계셨나요?”
“내가 그럴 이유가 있겠소?”
“없지요…… 그리고 아이언사이드의 눈을 피해 그럴 수 있을 리도 없고. 어떻게 아셨어요?”
“그대 뒤에 선 자들은 행색을 보아하니 그레이서클이고.”
그 말에 사내들이 움찔 떨었다. 행색?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옷차림을 점검했다. 완벽히 평범한 황무지 용병들의 차림새였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들은 첩보 요원들이었다. 그리 쉽게 들통날 위장 따윈 하지 않으니.
“트레뮐레 궁중백은 그대에게 직접 명령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 그레이서클이 그대와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황제 폐하의 명이었을 테고.”
“잠깐, 잠깐만요. 로베르가 제게 명령을 하지 못한다니요? 로베르는 가주인데요?”
“트레뮐레 궁중백은 자손을 낳을 수 없소. 그리고 그대는 할 수 있고, 그리하길 바라는 자 중에 교황 성하와 황제 폐하까지 있지. 그대는 트레뮐레 궁중백의 명령을 듣지 않을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오.”
“이게 칭찬인지, 욕인지…….”
선제후 가문의 여식에게 면전에 대고 정략혼과 자손 출산의 가치에 대해 말하는 그 뻔뻔함에, 에버리즈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틀린 말은 없었다. 오히려 차가울 정도로 정확한 판단이었다. 에버리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 보라는 듯 턱을 치켜 들었다.
“어째서 카르벨리에 여제께서 그대에게 직접 그레이서클을 대동해 나를 수색하라 명했을까. 트레뮐레 궁중백이 정무를 담당하고 있었다면 그에게 명령하는 편이 더 쉽고 간단하며 확실한 방법이었을 거요.”
“내 능력이 믿음직스럽지 않기 때문에?”
“그대의 능력은 제국 첩보부를 이용하는 쪽에 특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인정할 만한 말이었다. 로베르는 거의 평생을 첩보부의 수장으로 지내 왔으며 개인의 기량마저 압도적이었다. 그를 가장 가까이서 봐 온 그녀였기에, 에버리즈는 흔쾌히 인정할 수 있었다.
“왜 제국 귀족들이 그대를 두려워하는지 알 것 같군요. 저와 그레이서클을 보자마자 그걸 먼저 생각했나 봐요?”
“여기까진 별것 아닌 추론에 불과하오.”
“더 남았나요?”
“트레뮐레 궁중백이 살아 있소?”
“……예. 제법 멀쩡히.”
“카르벨리에 여제께서는 아직 제국의 통치자시고?”
“몇 개월 만에 세상이 바뀔 리가 있나요? 아, 바뀌기도 하지. 실수했네요. 네, 황제 폐하께선 여전히 황제 폐하시지요.”
에버리즈는 그녀의 눈앞에 있는 사내가 반년 만에 제국을 갈아치우고 내전을 일으킨 이후 다시 종식시키고 그녀의 아비를 암살한 희대의 모략가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것을 깨닫고 나자, 그녀는 눈앞의 사내를 더 이상 같은 인간으로 여길 수 없었다. 황궁을 일격에 파괴하는 흑마법과 일신의 무력, 거기에 판단력과 정치력까지.
인간이긴 한가? 어떻게 저런 인간이 있을 수 있지? 이자가 몸을 담고 있는 만신전 교회에서는 그저 이자를 ‘성자’ 정도로 여겨 납득한 모양이었지만, 글쎄.
이건 성자의 능력이라기보단…….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페르난데스가 툭 던지듯 말했다.
“무슨 일이 생겼군. 뭐요?”
“당신이랑 대화하다 보면 맥락이 자꾸 끊겨요. 거기 당신, 당신도 동의하죠?”
“이이와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긴 하지.”
하지만 그 편이 더 좋지 않으냐? 에버리즈의 말에 아벨은 웃으며 대답했다. 콩깍지가 단단히 씐 모습이었다. 에버리즈는 한숨을 폭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지 말고 잘 들어요. 지금 페이른 왕실이 무너지고 있어요.”
“그건 놀랄 일이 아니긴 한데.”
“다리안 쉬라이크 경에 의해.”
“……음.”
음.
다리안?
다리안 쉬라이크? 황제의 눈? 그자의 이름이 여기에서 왜 나온단 말인가. 페르난데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장 논리적인 이유라 한다면…….
“혹, 페이른 왕실이 샤일드 교회를 압박했거나, 배교 행위를 저질렀거나……. 아니, 아니지. 그랬다면 이단심문청이 나섰을 테니. 그리고 다리안은 카르벨리에 여제 치하에서 이제 더 이상…….”
“그래요. 황제의 눈이라 불리는 기관은 사라졌어요. 요원들 대부분은 실종되었고요. 쉬라이크 경은 제국의 뜻과 상관없이 행동하고 있죠.”
“대체 왜? 다리안 쉬라이크는 오만하고 멍청하고 독선적인 머저리일 수는 있어도, 적어도—.”
타락시킬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페르난데스는 그 말을 삼켰다. 수십, 수백, 아니 수천 번을 시도해 얻은 결과다. 다리안은 전생 시절 그의 가장 강력한 적수이자, 인류의 가장 빛나는 희망이었으므로.
죽이는 것은 차선이다. 최선의 결과는 놈의 손으로 놈의 백성들을 도륙하는 것이었다. 페이자쉬는 진심을 다해 다리안에게서 도망치며, 또한 진심을 다해 그를 타락시키고자 노력했다.
모든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적어도 단 하나, 도주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것이 장장 삼십 년이었다. 중년 시절엔 대적할 수조차 없었고, 황혼기에 접어들어서는 간신히 몸을 빼냈으며, 노년기엔—
‘수명을 다했지. 놈이.’
예순 살. 정점에 도달한 무사가 죽기엔 너무 이른 나이라 할 수도 있을 그 나이. 다리안은 마지막 제자의 품속에서 눈을 감았다. 페이자쉬에게 설욕의 기회를 남기지 않은 채.
페르난데스는 빠르게 추억에서 벗어났다. 과거야 어쨌건, 다리안이다. 그 다리안. 저 스스로 믿는 정의를, 설령 목숨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심전력으로 불태우던 그 찬란한 영웅이다.
“아, 이 말을 먼저 해야 했군요. 저도 로베르와 어울리다 보니 선후 관계를 짚어 주지 못하네요. 정정하자면 아직 페이른은 멸망하지 않았어요. 한 달 후에 멸망할 예정이지만.”
“예언이군. 오르키스? 아니면 피엘이요?”
“……전 당신이 예언자 같긴 해요. 후자 쪽이에요.”
에버리즈는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 무녀가 말하기를, 한 달 후. 다리안의 모든 공세가 마무리될 때쯤엔 페이른 왕가가 저 스스로 무너진다 하더군요.”
“……모든 공세라?”
“다리안은 지금 페이른 국내에 위치한 모든 수도원들을 불태우고 있어요. 수많은 수도원들이 무너졌고, 지금쯤이면…….”
잠시 뜸을 들인 후, 에버리즈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 이단심문청이 무너졌겠군요.”
그 선언에, 페르난데스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멍하니 에버리즈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 * *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이 무너졌다. 그 말을 듣는 즉시, 페르난데스는 절반쯤 충격에 굳었고 남은 절반은 맹렬히 사고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달뜰 정도로 수많은 추측과 가설이 그를 스쳐 갔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당연하게도, ‘어떻게’였다.
만일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전생 시절, 이단심문청은 천천히 기능을 잃어 갔다. 그들의 인력은 지극히 제한적이었고, 문명 사회 말기의 악마 사건들은 너무나 빈번했으므로. 수많은 요원들을 잃고 사지가 끊어진 채 고사한 기관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 이 시점의 이단심문청은 대단히 강력한 무력 집단이다. 지금의 본청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개인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나라면 우선, 본청 내부의 전력을 유출시킬 것이다.’
근처의 수도원, 혹은 인근의 마을들을 불태우고 악마 사건을 조장할 것이다. 본청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도,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된다. 그리고 동시에, 각 사건들의 발생이 너무 밀접한 거리에서 일어나서도 안 될 것이다.
너무 가깝다면 일을 마무리하고 자신의 정체를 은폐할 때까지 시간이 부족하다. 이단심문관들은 유능하니까. 너무 멀다면, 놈들을 꾀어내는 것엔 성공해도 본청을 공격할 시간이 부족하다.
그리고 동시에, 각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별개의 이단 준동 사건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 부분이 가장 어렵다. 단독으로 저지르기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은폐를 위한 물증을 만들어야 할 것이고, 각자 다른 이단 사건임을 꾸미기 위한 사전 준비도 필요했다.
하지만 그건…….
‘흑마법사의 논리다. 다리안에겐 불가능해.’
수도원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첫 번째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각각의 공세가 전혀 다른 사교 집단에 의한 이단 사건으로 접수되기 위해선 악마숭배자들과 실질적인 연결이 있어야 했다.
다리안에겐 불가능하다. 그리고 악마숭배자가 다리안을 꾀어내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다리안이 만신전 교회를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오?”
“제국 내전 당시, 교회의 십자군 선포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글쎄요. 정말 그런 이유였을지,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
“그가 신전 기사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군.”
전생 시절 다리안은 트레뮐레 황제의 수족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 트레뮐레 황제는 지금 이 세계와는 달리 타락하지 않았었다.
따라서, 만신전 교회와 다리안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트레뮐레 황제의 타락과 그로 인해 저질러진 수많은 악행, 그리고 그것을 수습해야 했던 다리안의 상황에—
신전 기사 출신으로, 교회가 민간인을 ‘성전’이란 이유로 불태우는 광경을 마주한다면. 억측이긴 하나 가능한 일이다. 페르난데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그래, 예상치는 못했으나 가능한 일이다.
다리안이 마주해야 했을 성전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수준보다 더 큰 광기를 내포했었으니까. 선제후들의 공포심을 자극해야 했던 페르난데스가 만신전을 충동해 일으킨 결과다. 더 크고, 더 끔찍하고, 더 강렬한 광신의 물결을.
‘하, 결국 내가 해내긴 했군.’
그는 자조 섞인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전생 시절, 그 어떤 방식으로도 불가능했던 다리안의 타락이 이렇게 이루어졌단 말인가?
‘머저리. 멍청한 것……. 너는 인간을 더 믿었어야 했다.’
페르난데스는 혀를 차며 생각했다. 그는 곧 고개를 들고 에버리즈를 바라보았다.
“페이른 왕실에 악마 숭배자가 숨어 있겠군.”
“당신…….”
“페이른을 전복시키고 싶어하는 왕가 자손이라면, 그래. 이왕자가 되려나. 저 나름대로 유능한 녀석이긴 했소만.”
이제 에버리즈는 페르난데스의 사고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페르난데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단단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도원들을 불태워? 홀로도 가능한 일이나 들키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지. 적어도 다리안에겐 더욱이. 누군가가 그를 도와주었고, 그것이 모두 페이른 국내에서 벌어진 일이며, 페이른은 곧 왕위 계승식이 일어날 국가요. 지금 이 정국에 혼란을 바라는 자가 있다면 이왕자 정도가 될 것이니…….”
이단심문청의 병력을 외부로 빼돌리고 본청을 불태운다? 물론 그것 또한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 본청으로 다시 돌아올 이단심문관들은 어찌 처리할 생각일까. 홀로는 불가능하다. 제아무리 다리안이라 하더라도.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 이 판 전체를 짜고 있었던 누군가가, 다리안이라는 강력한 팻감을 그리 쉽게 저버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서. ‘만일 그라면 이 상황에 어떤 수를 놓을 것인가?’
페르난데스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어둠이 깔린 저 너머, 드넓은 체스판 위로 체스말이 움직인다. 팻감을 쥔 새하얀 손을 의식하며,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수의 가능성들을 계산하고 있었다.
‘일왕자의 병력을 본청으로 파견한다.’
페이른 왕실의 일왕자는 베이타서스 교회의 신자다. 적어도 지난 페이른 왕실 정화 작전에서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그랬다. 그리고 이왕자는 맥라렌의 신자였으니, 이단심문청의 방화를 진압하기 위한 작전엔 일왕자가 나설 것이다.
그리고 일왕자와 그 인근의 병력이 외부로 빠져나간 이후엔, 본청에서의 일이 왕궁에서 벌어질 것이다. 그가 이왕자라면 이 순간을 결코 놓치지 않을 테니.
병력을 동원해 본청으로 향하는 일왕자의 병력을 제거한다. 그 이후, 왕세자의 타락과 수도원의 붕괴를 공표한다. 맥라렌 교회를 등에 업고, 베이타서스 교회를 배격한다. 그리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두 교회의 거리가 멀어지겠지.
맥라렌 교회는 가장 세속적인 교회 중 하나였으니. 샤일드 교회가 몰락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선신 만신전 교파들의 분열에 가장 유의미한 수가 될 것이다.
교회의 분열과 이단심문청의 기능 정지를 이용해, 그 시류를 타고 타락이 퍼져 나간다. 멀리, 더 멀리. 동부 왕국 전역을 불사르며 더 멀리까지—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막을 것인가?
“트레뮐레 영애.”
“예, 예?”
“체스를 둘 줄 아시오?”
“교양…… 정도로는요?”
“외통수에 몰렸을 때에도 승리할 수 있는 방도가 두 가지 있소. 무엇인지 아시오?”
“체크메이트에 몰렸을 때 승리하는 방법이요? 글쎄요, 그런 방법이 있나요?”
이 갑작스러운 물음에 에버리즈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페르난데스는 픽 웃고는 말을 이었다.
“하나는 판 반대편에 있는 자의 손목을 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판을 뒤집어 버리는 것이오.”
“그게 무슨……!”
그건 체스도 뭣도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그녀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런 대화를, 아니, 이런 생각을 가진 사내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어떤 환영이 그녀의 눈가를 스쳤다. 화려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인피로 엮은 마도서를 손에 쥐고, 검은 마력을 몸에 두른 노인의 모습이…….
그제야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까 전의 물음이 다시 떠올랐다. 이게 사람의 능력인가? 아니, 이게 성자의 능력이라 할 수 있나?
이건, 성자의 사고방식이라기보다는.
흑마법사의 것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