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 불멸자와 필멸자 (17)
어두운 가도를 불태우듯 횃불들이 늘어지고 있었다. 수인들은 더 이상 두려움 따윈 없다는 듯 당당히 등을 들고 가도를 따라 전진했다.
그들은 저마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번쩍이는 창칼과 쇠스랑 따위를 손에 쥔 채 가도를 전진했다. 그 기세에 도시의 시민들은 창문의 격창을 닫거나 커튼을 치며 두려움에 떨었다.
내란이 일어났다. 수인들에게 가장 호의적인 시민들마저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의 관심사는 저 흉포한 폭도들이 강도로 돌변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뿐이었다.
“멈추시오!! 지금 다들 미치기라도 했소?!”
야경꾼 하나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며 외쳤다. 선두에서 폭도들을 지휘하던 파르탁이 후드를 슬쩍 젖히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야경꾼의 투구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인간의 것이었다.
파르탁은 비릿하게 웃었다. 더 이상 눈치 볼 필요 따윈 없지. 그는 작게 속삭이고는 손가락을 휙 저었다.
“죽여라.”
-크르르륵!!
수인 하나가 벼락처럼 뛰어들어 야경꾼에게 질주했다. 야경꾼은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피가 담장 위로 길게 비산하고, 후각 좋은 수인 전사들은 혈향을 맡고는 점차 더 격렬하게 고조되기 시작했다.
예카세트의 잔재. 야수성을 증폭시키는 이 마력이 점점 더 농밀하게 퍼지며 수인들을 격동하고 있었다.
-삐이이익!!
-폭동이다!!!
야경꾼들의 비명 섞인 고함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갔다. 호적이 시끄럽게 울리고 곧 세포르 성 방향에서 뿔나팔 소리가 들렸다.
-부우우우우!!
파르탁은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웃었다. 대북진 이래, 사방으로 흩어진 카라드스카르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뷜랑에 주둔한 제국군들은 영지 전역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지금 세포르 성에 주둔 중인 병력이라 해 봐야 하트테이커의 직속 친위대, 이른바 ‘하트시커즈’뿐이었다. 놈들은 젊고 혈기왕성한 영웅주의자들이다. 그 수가 많지도, 특별히 정예화되지도 않은 우둔한 광신도에 불과했다.
저들은 대족장의 권위만을 믿고 나대는 머저리들이다. 전통에 의해 대족장의 권위를 꺾는다면, 이 뷜랑 인근의 모든 수인들은 그의 손아귀 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파르탁— 블랙팽!!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말을 탄 수인 전사 하나가 달려와 소리쳤다. 세포르 성이 지척이었다. 성의 입구엔 다급히 모여든 병사들이 엉성한 방진을 만들고 농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긴급한 소집이었던 탓에 놈들의 무장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반면 이쪽은 만전에 가까웠다. 대악마의 가호까지 등 뒤에 얹은 상황. 파르탁은 여흥 삼아 이들에게 잠시 어울려 주기로 했다.
“전통에 입각해 대족장에게 도전하고자 한다!”
“전통?! 이 달밤에 네 부하들을 모조리 이끌고 전통을 논해? 네놈이 전통을 존중한다면 내일 낮에, 원로회를 통해 기별해도 되는 일이 아니더냐!”
“우리의 전통에 낮과 밤이 상관 있던가? 응?”
파르탁이 비죽거리며 웃고는 뒤를 돌아보자, 그의 뒤에 도열한 수인 전사들이 일제히 하울링을 내뱉었다. 광기 어린 울음소리가 새벽녘, 뷜랑 시 전역에 울려 퍼졌다.
“대족장!! 나 파르탁 블랙팽이 입회하오! 여기에 젊은 전사가 그대의 자리에 도전코자 하니! 전통에 따라 결투를 받든가, 아니면 겁먹은 쥐처럼 도망치시오!!”
파르탁이 마력을 섞어 고함쳤다. 전통과 결투, 그리고 입회. 그 세 단어가 강조된 문장이 시 전역에 울려 퍼졌다. 이것으로 제국군은 지금의 결투에 섣불리 개입할 수 없게 되었다.
수인 호족 연합은 제국의 위기를 두 번 구한 자들이다. 지금의 카르벨리에 여제는 수인 연합을 동등한 격의 국가로 인정해야 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파르탁의 도전은 선제후 섭정에 대한 불법적인 민란이 아니라, 수인 전통에 따른 대족장 결투가 되었다.
세포르 성의 친위대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파르탁의 말에 분노로 몸을 떨면서도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고 있었다.
파르탁은 그 광경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이제 한 걸음. 고작 그 한 걸음만 더 내딛는다면 대황야 전역에서부터 이 뷜랑 시에 이르는 거대한 권역이 그의 손아귀 안에 들어온다.
운이 정말 미치도록 좋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
아벨은 페르난데스의 등 뒤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세포르 성 입구가 한눈에 내려 보이는 상가 건물의 옥상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팔짱을 낀 채 파르탁의 행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굳이 그래야 하오?”
“키르하스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냐. 지금 상황이 퍽 위험해 보이는구나.”
“그녀를 믿지 못하시는군?”
“그런 뜻이 아니다. 그 아이는 홀몸이고 저들은 그 수가 많지 않더냐. 저 마법사의 존재도 위협적이고, 저기 병사들에게서 악마의 냄새까지 난다 하지 않았느냐.”
“내가 직접 개입해 저 상황을 정리한다면 키르하스는 수인 연합의 신망을 잃을 것이오.”
사전 공작을 얼마나 벌여 두었든, 외관상 지금 이 상황은 적법한 결투다. 페르난데스가 지금 뛰어나가 파르탁을 정리한다 한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상황에서 뒷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나 더, 그가 개입을 꺼리는 이유가 있다.
“키르하스는 바라지 않을 거요.”
“네 도움을?”
“그렇소. 그녀는 바보가 아니요.”
정치적인 균형 감각은 전혀라고 좋을 정도로 없는 아이였지만, 키르하스의 본능은 미래 예지에 가까울 정도로 발달해 있다. 전투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방면으로.
페르난데스는 가만히 세포르 성을 바라보았다. 뷜랑은 엉망이었다. 경비와 업무 전반은 인간에게 떠넘기고 있으면서 대족장의 지배를 공공연한 사실로 만들었다.
이는 인간과 수인 모두에게 불만만을 가져올 최악의 정책이었다. 인간들은 수인의 지배를 반기지 않을 것이고, 수인들은 인간 행정가들의 차별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으므로.
어째서 이런 악수를 두었을까. 키르하스가 바보가 아닌 이상 분란의 여지를 짐작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분란을 예상하면서 방치하는 자는 두 부류 중 하나다.
‘너무 사람이 좋아서 언제나 선인으로 남고자 하는 경우나…… 아니면, 잠재적인 위협 요인을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리겠다는 함정.’
페르난데스의 죽음은 파르탁과 키르하스의 동행에 언젠간 파국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파르탁의 야망을 억제하는 유일한 목줄이 페르난데스의 존재였으므로.
그러니, 키르하스는 파르탁을 정당하게 숙청할 기회를 기다린 것이다. 페르난데스의 명령으로 인해 파르탁이 원로회의 정국을 완전히 휘어잡고 있었으니, 어지간한 사태가 아닌 이상 그에게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을 테니까.
페르난데스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공교로운 우연이었으나, 이 사건 자체는 언젠간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다. 키르하스가 의도하든, 파르탁이 주도하든 그 무엇이 되었건 간에.
그러니 페르난데스는 가만히 기다리기로 했다. 개입은 최악의 순간에 해도 늦지 않을 테니, 우선 키르하스의 수를 마저 읽어 보고 싶었다.
전생 시절, 카라드스카르의 대북진을 직접 틀어막은 위대한 황야의 대방패, 불패자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그녀의 전성기를 어느 정도 회복했는지에 대한 지표가 필요했다.
‘전성기 대 전성기로 맞수를 둔다면, 다리안보다 반 수 정도 아래.’
서로가 빛을 발했던 시대가 완전히 달랐으므로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대강 그 정도의 수준이라 볼 수 있다.
‘지금 이 시대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패가 될 수 있다.’
처음 그녀를 지하수로에서 건져 올렸을 때 그가 했던 생각 중 하나였다. 인류 문명 최강의 영웅 중 하나를 수족으로 부리는 순간이 오는 것.
언젠간 대적해야 할 타이반의 무위 앞에서 한순간이라도 시간을 벌어 줄 영웅을 구해 놓는 것. 그 자격 증명을 해야 할 때였다.
* * *
“대족장!! 내란입니다! 지금 폭도들이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쉿, 아이가 잔다.”
“대족장!!”
어둠 속에서 청록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매서운 눈길에 문을 열고 소리치던 전사는 바싹 굳어 버리고 말았다.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살점이 저며지는 것만 같은 예기가 방 내부의 어둠 아래에서 치밀어 올랐다. 전사는 저도 모르게 덜덜 떨며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조용히 하라고 말했을 텐데. 우리 아나는 밤귀가 밝다.”
“대족장……. 지금 이러고 있으실 때가 아닙니다. 폭도들의 기세가 흉흉합니다. 저희가 시간을 벌겠으니, 잠시 몸을 피하시고 황야의 골든투스 원로와 합류하소서.”
“너희가 시간을 벌겠다고?”
키르하스는 진심으로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냐?”
“그야……! 블랙팽, 그자가 정녕코 공정한 결투를 위해 저리도 많은 병력을 이끌어 오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래, 그렇겠지. 그자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들을 모아 왔겠지.”
그리고, 그래야지.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쉬, 쉬.” 하며 칭얼대는 아이를 얼러 주고는, 키르하스는 창가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가벼운 나이트가운 차림으로, 그녀는 하늘 높게 떠오른 달을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시선이 내려가며 성을 향해 진군하는 폭도들의 행렬을 보았다.
익숙한 기척에 그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달밤, 수인, 전사들, 악마.
* * *
카라드스카르의 대북진을 막아내던 그날. 예카세트의 달이 떠오르고, 다시 저물던 그 새벽.
-은공은……?
저 하늘의 새파란 달빛을 받으며 그녀가 간신히 눈을 뜨고, 찢어진 입술을 떼어 내며 그 말을 입에 담았을 때. 참람하게 일그러지는 프레이아와 아벨의 표정을 보았을 때.
그리고, 자신의 복중에 태동하는 아이의 기척이 느껴질 때. 키르하스는 결심했다. 은공에게 다하지 못한 충의는 이 아이로 완성하겠노라고. 많은 이들이 그녀의 정신을 걱정했으나, 페르난데스가 죽은 이후 그녀는 오히려 더 강건해져 갔다.
잃을 것이 없어 자포자기한 아벨과는 달리, 그녀에겐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페르나데스가 남긴 유산들이. 수인 연합, 대족장의 직책, 대황야의 평화, 제국의 안위, 그리고—
아나 페르난다 세르너드. 그가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 사랑의 증표가 그녀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누구도 보지 않는 깊은 밤, 늦은 새벽은 그녀에게 애도가 허락되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그날 이후로 새벽에 절규하고,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무장하고, 저무는 일몰 이후 수의를 입는 시간을 보내 왔다.
페르난데스의 죽음은 수인 연합의 정치에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 파르탁의 독주가 점차 심해지고, 골든투스는 결국 비둘기파 부족들을 이끌고 황야로 돌아가야 했다. 키르하스는 뷜랑의 선제후 섭정이자 수인들의 중심으로 남아 홀로 파르탁을 견제해야 했다.
내란은 초읽기에 들어와 있었다. 그 시간이 언제가 되었든, 어떤 방식이 되었든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다. 그렇다면 다신 재발하지 않도록, 그녀와 연합, 그리고 그녀의 딸의 항구적인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은공이라면 어떤 수를 두었을까. 키르하스는 팔텐노이아에서 열린 페르난데스의 장례식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은공이라면 이 순간에—
[어느 정도 머리가 굴러가는 책략가들 사이에선, 함정은 노골적일수록 효과적이란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함정이 치명적인 이유는 불리한 상황에서 적의 전력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역으로, 숨어 있는 적들의 전력과 마주하기 위해선 함정을 향해 발을 디딜 수 있어야 한단다.]
페르난데스는 ‘어째서 디모니카 형제들은 누가 봐도 사지인 곳에 무작정 돌진합니까?’라는 키르하스의 질문에 저렇게 대답한 적이 있었다.
디모니카들이라고 모두 머저리들인 것은 아니다, ‘아마도.’라는 말과 함께 시작된 그의 강의가 떠올랐다.
‘함정을 향해 발을 디딘다.’
내가 너무나 약해져서, 노골적인 함정을 파 두어도 저항조차 하지 못하리라 확신하도록. 주의 깊게, 오랜 시간 그런 순간을 안배해 두고 놈의 전력이 완전히 노출된 그 순간—
‘함정을 향해 발을 디딘다…….’
정면에서 분쇄한다. 상대가 체크메이트라며 코웃음치는 그 순간, 상대의 함정은 역으로 상대의 목을 조이는 올가미가 될 것이다. 체스는 한 번에 한 수를 주고받는 경기지만, 죽은 자에겐 다음 수가 없다.
그것이 페르난데스의 방식이었다.
키르하스는 그날 이후 무능한 정책과 사치, 그리고 상심으로 인한 은거를 반복하며 자신의 세력을 깎아 나갔다.
그렇게, 그녀는 그날만을 기다렸다. 매파 수인들의 불만이 극도로 치솟고, 파르탁이 더 이상 참지 않을 순간을.
적법한 절차를 통해 놈들을 숙청할 순간만을.
* * *
-대족장!! 나 파르탁 블랙팽이 입회하오! 여기에 젊은 전사가 그대의 자리에 도전코자 하니! 전통에 따라 결투를 받든가, 아니면 겁먹은 쥐처럼 도망치시오!!
파르탁의 외침이 성 위까지 닿았다. 키르하스는 창 너머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서 있었다.
그녀의 뒤에 부복하던 전사는 그 소리에 움찔 놀라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서늘한 달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선 키르하스의 얼굴을 보았다.
“네 검을 다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사냥감의 빈틈을 겨누는 사냥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