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 불멸자와 필멸자 (19)
키르하스를 얽어매던 모든 주문이 깨졌다. 그러나 그녀는 바닥에 허물어진 채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여전히, 고대의 주술이 그녀를 묶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저 목소리, 저 숨소리, 저 발걸음이 꿈결 같았다. 결코 로맨틱하지 않은 조우였지만. 난자된 수인들의 피와 머리가 시산혈해를 이루는 이 성내 대로에서 그녀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저벅, 한 걸음씩 그가 다가올 때마다 그녀의 떨림이 거세어져 갔다. 방금까지 지독하리만치 현실적이었던 이 세상이 점점 다른 색으로 물들어 갔다.
피와 살점의 붉은색에서 파랗게. 달이 지고 새벽이 터 오르고 있었다.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로 푸른빛이 가도 위를 적셔 갔다.
승리는 푸른색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그를 올려 보았다.
“꿈인가……?”
“꿈에서 종종 나를 보았나 보구나.”
“매일 밤.”
그 끈적한 목소리에 잠시 페르난데스는 할 말을 잃었다. 슬픔, 그리움, 사랑, 그리고 증오와 분노, 고통까지. 사람이 사람에게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의 총체가 느껴졌다.
그런 감정을 매일 밤마다 반복하고 있었다. 자신을 버리고 먼저 떠난 페르난데스에 대해. 슬픔과 사랑을, 그리고 홀로 남아 허물어져 가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멍한 눈으로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의 멀끔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에서 다가오는 아벨에게 시선이 닿았다가, 다시 페르난데스의 얼굴을 보았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언제…… 언제?”
그 막연한 질문에도 페르난데스는 여전히 엷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얼마 되지 않았다. 일주일도.”
“연락 한 번 어려울 정도로 큰 부상이셨나요?”
“문자 그대로 죽었었거든.”
“깨어나자마자 절 보러 온 것은 아니었군요.”
“키르하스.”
“은공께서 가장 먼저 생각한 사람은 제가 아니었어.”
키르하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삼엄한 기세에 페르난데스조차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키르하스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속삭였다.
“저는 은공의 아이까지 가졌었는데도. 은공과 함께 죽기 위해 그렇게 싸웠었는데도…….”
“키르하스. 단지 선후 관계의 문제였을 뿐이다.”
“네, 단지 선후 관계의 문제였을 뿐이죠.”
-스르릉.
칼날이 서늘한 소리를 내며 뽑혀 나왔다. 키르하스는 칼자루를 반쯤 늘어트린 채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순간 섬칫한 예기에 페르난데스는 빠르게 고개를 젖혔다.
그러나 키르하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기세만으로 마치 칼을 휘두른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경지가 어느 정도에 닿아 있는지, 페르난데스는 쉽게 가늠하기 어려웠다.
성장세가 과도하게 가파르다. 그녀의 전성기는 적어도 스무 해는 뒤에 찾아와야 정상이었다.
“키르하스, 진정…….”
“저는 아주 침착한 상태입니다, 은공. 당신께서 이리 강건하신데 제가 불안해할 이유가 있나요? 칼을 잡으시지요.”
“뭐?”
“검을 뽑으세요, 은공.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페르난데스는 그제야 키르하스의 목소리와 말투에 섞인 감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분노가 아니라 안도, 그리고 애교가 섞인 칭얼거림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키르하스의 두 눈엔 어렴풋이 눈물이 맺혀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전성기의 키르하스가 반쯤 장난 섞인 투정으로 칼을 휘두른다면 버틸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칼을 뽑아 들었다. 저 멀리에서 프레이야가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구하구나! 만나는 인연마다 첫 대화를 칼로 하려 들다니, 업보란 이다지도 빠르게 돌아오는 것이다!”
잠시 뒤에 저 여자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 주어야겠다. 페르난데스는 칼을 중단으로 잡아 올리며 다짐했다.
* * *
“선수를 양보하시지요!”
페르난데스가 자세를 잡기 무섭게, 키르하스는 전력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목소리가 들리는 것보다 오히려 칼이 들이닥치는 것이 더 빨랐다. 페르난데스는 황급히 칼날을 쳐 내며 웃었다.
“아직 양보 안 했는데?”
캉, 칼날과 칼날이 억세게 부딪치며 시끄러운 소리가 울렸다. 페르난데스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며 다음 일격을 대비했다. 키르하스의 검격은 검로를 읽기 어려웠다. 마치 엘프들의 발검술처럼—
-카드득!
인식하는 순간 이미 칼날이 지척에 있었다. 심지어 키르하스는 중간중간 살의를 섞은 검격으로 페인트를 넣었다. 욕지기가 튀어나올 정도로 변칙적인 공격이었다.
그 모든 일격들을 방어하는 것은 순전히 그의 전투 감각 덕이었다. 디모니카 특유의 동체 시력과 기나긴 실전으로 다져진 감각 덕에 그녀의 검로를 반 박자 차이로 따라잡을 수 있었다.
칼날이 얽히는 순간, 키르하스의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불타올랐다.
“난 혼자 남겨져야 했어요!”
“내가 죽었었다고 말했던가?”
“그래서! 버티려 했다구요!”
-카앙!
검과 검이 마찰하며 불똥이 튀었다. 키르하스는 폭우가 쏟아지듯 날뛰었다. 칼날이 얽힐 때마다 그녀의 눈이 점점 더 매섭게 이글거렸다.
“이 자리를, 이 망가진 도시와 연합을 억지로 끌어모으려고! 저 더러운 정치가들, 원로들을 어떻게든 규합하려고! 그래서—!”
당신의 유산을 보전하려고! 키르하스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다. 칼날이 부딪치는 충격으로, 눈물방울이 피와, 그리고 땀과 섞여 튀었다.
“당신의 아이를 지키려 했으니까! 당신과 내 아이를!”
-카아앙!!
이번 일격엔 살의가 담겼다. 페르난데스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칼날을 애써 쳐 냈다. 일반적인 철검을 들고 왔다면 칼날째로 목이 베였을 강격이었다. 디모니카마저 물러서게 만들 정도의.
짧은 대치 속에서,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름은?”
“아나……. 아나 페르난다, 세르너드.”
“데인 왕국식이군.”
“당신의 고향이니까. 당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으니까.”
수인 연합의 방식으로 이름을 짓는다면 이제 그의 존재를 기억해 줄 사람이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나 페르난다. 페르난데스의 딸 아나라는 이름의 수인이 먼 훗날 대족장이 된다면.
그땐 모든 이들이 ‘페르난데스 세르너드’라는 인간을 기억해 줄 것이다. 역사 속에서 영원히. 그런 사람이 있었노라고. 그녀는 매일 밤 잠든 젖먹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아비의 일대기를 속삭였었다. 동화책을 대신하여, 위대한 성자가 한 사람 있었노라고.
그런데, 살아 있었다고?
살아 있었는데 자신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었다고!
키르하스의 눈이 다시금 불타올랐다. 그녀의 두 팔이 억세게 페르난데스를 밀쳤다. 단순한 근력으로 치자면 결코 디모니카를 물러서게 만들 수 없음에도, 페르난데스는 다시금 두어 걸음 물러섰다.
“고맙다.”
“이제 와서!”
“그럼 내가 다시 죽길 바라느냐?”
거칠게 외치던 키르하스조차도 그 말에 멈칫했다. 페르난데스는 칼을 늘어트리며 자세를 풀었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는다면 목을 취할 수 있을 무방비한 자세였다.
페르난데스의 말에 침을 꿀꺽 삼킨 것은 파르탁뿐이었다. 키르하스는 곧 고개를 조용히 가로저으며 땅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에서 힘과 살기가 흩어져 내렸다.
“건강히 잘 버텼다. 오랜 시간을 잘 버텼어. 힘들었겠구나.”
“흑…….”
“난 네가 자랑스럽단다, 키르하스. 잘해 주었어.”
“은공…….”
페르난데스는 손을 들어 올려, 키르하스의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곧 그녀가 힘없이 그의 품 안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키르하스는 그의 옷소매를 꾹 쥐고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울음이 쉽게 멈추지 않았다. 억눌린 댐이 터지듯이, 반년간의 고생에 대해 한풀이라도 하는 듯이. 그런 키르하스의 등을 다독이며 페르난데스는 잠시 하늘을 올려 보았다.
“그럼 딸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도, 더러운 것은 먼저 청소해야 하는 법이겠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던 파르탁이 움찔 떨었다. 대족장과 돌연 결투를 시작해 정신이 팔린 사이 도주라도 하려 했던 모양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파르탁은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대뜸 무릎을 꿇었다.
“살려 주십시오, 주군. 제게 아직 쓸모가 많다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렇다, 파르탁 블랙팽. 하지만 그 쓸모가 이 아이의 심사보다 중한 것은 아니야. 키르하스, 저자를 어찌하면 좋겠어?”
“……죽여도 돼요?”
키르하스는 코 먹은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파르탁이 곧장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제가 잠시 미쳤나 봅니다, 대족장. 이 나이를 먹으니 간혹 정신이 혼곤해지곤 합니다! 주군, 바라신다면 이대로 은퇴해 다신 의회에 복귀하지 않겠습니다. 수행원 하나 없이 홀로 산중에 은거하겠습니다!”
“아니지, 파르탁. 본디 짐승은 보이는 곳에 묶어 두어야 안전한 법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겠다고? 찰나의 순간에도 꾀를 짜내는 모습이 우스워서, 페르난데스는 놀리듯 말했다.
“대족장이 네 반역을 징치하길 바라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널 살려야 한다면, 이유가 무엇이겠나?”
“저는…… 주군께서 명하신 바를 따랐을 뿐입니다!!”
“음……?”
키르하스를 죽이라고 명령한 기억은 없었는데? 페르난데스는 떨떠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파르탁은 무릎 꿇은 채로 고개만 들어 간절히 외치고 있었다.
“주군께선 제게, 저희 모두에게 쟁취하며 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야망을 이루고, 열정을 지니고 삶을 불태우라고! 주군께선 생각 없는 꼭두각시를 바라서 저를 거두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께선 제 의지와 야망을 쓸모 있다 평하셨습니다!”
제법 날카로운 정치적 식견과 마법 실력, 그 모두를 효율 좋게 사용하여 의회를 주무르는 야망까지.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기에, 대황야의 의회에서 파르탁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를 이용하고자 했다.
파르탁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압도적인 마법사에게 대항할 생각조차 없었다. 단순히 유순하게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장치가 아니라, 적재적소에 자신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수완가가 되었다.
페르난데스가 살아 있을 때, 그는 수인 연합의 이인자로 만족했다. 키르하스는 대외적인 수장이었을 뿐, 실질적인 정치는 그가 담당했었으니. 그는 이 연합의 최고 원로로 대우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연합의 정세가 격변하고, 키르하스의 업적이 가히 전설적인 수준이 되자 더 이상 수인들은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는 새롭게 두각을 드러내는 젊은이들에게 구시대적 낡은 전통 주의자 정도의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래선 안 된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페르난데스가 죽고, 다시금 정세가 변할 때. 그는 자신의 야망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것이 잘못입니까? 주군, 당신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저는 감히 대족장의 자리를 노리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하지 않았다 한들, 대족장이 저를 살려 두었을 것 같습니까?”
키르하스의 입장에서도 매파 원로들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이다. 수인 전통 주의자들, 제국과 키르자트 모두에게 배타적인 이들을 온전히 포용하려면, 뷜랑의 선제후 섭정이라는 직책을 포기해야 했다.
뷜랑의 거점을 잃는다면 제국과의 교역에서 열세를 면키 어렵다. 제국 상인들이 수인을 존중하는 까닭 중 대부분은 대족장이 선제후 섭정직을 맡은 제국 고위 관료라는 점에 있었다.
다시 황무지로 돌아간다면, 그곳이 비록 과거와 같은 폐허는 아닐지라도 가난한 방랑 유목민의 신분을 면키 어렵다. 대족장은 뷜랑을 포기할 수 없기에 파르탁과 매파 원로를 견제해야 했으며, 파르탁에게 이는 정치적 위협뿐만 아니라 생명의 위협이기도 했다.
살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야망을 위해. 지금보다 더 적합한 순간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죽기 위해 사는 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파르탁은 그렇게 외치며 다시금 고개를 바닥에 붙였다.
“인간적이구나.”
페르난데스는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이다, 파르탁 블랙팽. 내 너를 이해하마.”
“주군! 하옵시면……?”
“네가 너의 쓸모를 증명했으니, 네 충의를 다시금 사겠다.”
“기꺼이 따르겠나이다!”
쿵, 파르탁은 바닥에 머리를 세게 찧었다. 그는 깨진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에도 괘념치 않고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자존심은 목숨보다 헐값이었으니까. 살아 있어야 다음 기회가 있는 것 아닌가.
파르탁에겐 예카세트의 잔재가 남아 있다. 타락을 불러오지만, 적절히 사용한다면 대단히 강력한 힘이다. 대악마의 권능은 그 편린만으로도 신의 것에 못지않으니.
그리고 페르난데스는 당년, 이미 타이반의 힘을 사역한 적 있던 흑마법사였다. 지금 시대엔 이제 더 이상 대악마의 힘을 온전히 사역할 수 있는 자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이건 예상 외의 수확이었다.
새로 들어온 팻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페르난데스는 즐거운 고민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제 진짜 어려운 부분만 남았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더 무거워지는 것도 같았다.
부활 이후 가장 떨리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바로 전까지 이름조차 모르던 딸을 직접 만나러 가야 했다.
‘페이자쉬, 네가 있었다면 좋았을 거야.’
페르난데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세포르 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