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 불멸자와 필멸자 (20)
키르하스는 완전히 컨디션을 회복한 것 같았다. 대족장의 위엄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연신 쫑알거리며 페르난데스의 뒤에 꼭 붙어 있었다.
성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대족장의 존재 하나만으로 모든 관문과 경비 중 그를 가로막는 이가 없었다. 경비들은 뒤로 물러서며 이따금씩 작게 속삭이곤 했다.
“세상에, 살아 있었어?”
“설마, 저자가 그자라고?”
“왜? 똑같이 생겼잖아!”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들려와서, 페르난데스는 마침내 키르하스에게 물었다.
“대체 저들이 나를 어찌 아는 것이냐?”
“은공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흔적입니다! 자랑스러우신가요!”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듣고 싶군.”
“은공의 몽타주를 온 영지에 뿌리고, 관문을 지나는 교역상에게도 은공을 수배했습니다! 적어도 뷜랑 시내에서 은공의 외모를 가까이서 보고 몰라볼 자는 없을 겁니다!”
키르하스는 당당하게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칭찬해 달라는 듯 그녀의 꼬리가 연신 퍼덕거렸다. 페르난데스는 한마디 하려다가, 곧 이마를 감싸고 한숨을 내쉬었다.
“외모를 바꿀 필요가 있겠구나…….”
“그게…… 주문으로 가능한가요?”
“시술이 조금 필요하기야 하다만, 그래. 불가능하진 않다.”
“어…… 그럼 저도 좀, 아니. 잠시만요. 왜요? 저는 은공의 외모가 좋습니다!”
“많은 지인들의 노력 덕에 내가 이 천하에 숨을 곳이 없으니, 작전의 수행 반경이 너무 좁아졌다.”
페르난데스의 기본 전략은 정보 우위를 백분 활용한 급습이었다. 적들은 페르난데스의 정체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또는 과도하게 오판하거나 확대해석하며 그를 상대해야 했다.
이제 그를 모르는 자 따윈 없을 것이다. 각국의 수장이라 할 만한 자들이 그 하나를 찾기 위해 사방에 인력을 동원했으니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정체를 감출 방법이 없다.
페르난데스의 말에 키르하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왜?
“왜 숨겨야 하지요?”
“응?”
“은공께서 정체를 숨겨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저는 수인 연합을 완벽히 통솔하고 있고, 저 제국의 황제는 은공께 호의적이며, 해상의 엘프들마저 은공의 요청이라면 감히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은공께서 정체를 숨기고 암약할 이유가 있나요?”
제법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대답에 앞서 머뭇거렸다.
이성적인 이유라면 없다. 단지 성향의 문제였을 뿐. 몇몇 급한 안건들만 해결한다면, 이제 물질 세계에 페르난데스가 직접 손을 대어야 할 사건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말레디카를 설립했고, 온갖 위협 요인들을 직접 제거했으며, 종국엔 대악마를 격살하기까지 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숨을 필요도, 누군가를 기습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싫단 말이지.’
그가 생각하는 전략의 미학은 은밀함에 있었다. 적들이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지도 못한 채 죽어 가는 환경. 압도적인 승리와 최소한의 피해를 근간으로 했다. 이건 고질적인 성향 문제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저는 아나가 은공의 위상을 직접 느끼며 자라길 바랍니다.”
“으음…….”
이건 반칙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참 생각을 정리한 끝에야, 간신히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몇몇 일들만 정리된 끝엔 사라질 생각이었다.”
“……예?”
“사라지다니!! 어디로 말이냐!”
말없이 그를 따르던 아벨마저 대뜸 소리를 질렀다. 페르난데스는 그녀들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타고 오르며 말했다.
“베이타서스와의 계약이 끝나고 역천이 이루어진 이후엔 무엇을 해야 할까? 그전까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문제였지만, 이젠 아니지.”
아주 막연한 일은 아니다. 이제 정말 계약의 종료 시점이 초읽기에 들어가 있었다. 부활 이후 육체를 정비하며, 페르난데스는 간혹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마지막 대악마를 격살하거나 봉인하고 마지막 대천사를 되찾은 이후에. 역천이 온전히 끝난다면 이제 그에게 어떤 삶이 남아 있을까?
새로 빚어진 육체는 디모니카와 구동 방식이 다르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신성은 베이타서스의 것이 아니었다. 창생의 관이 만들어 낸 것, 그리고 그 자신이 쌓아 올린 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내심 그 단어를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그는 이제 준신…… 아니, 반신의 격에 올라 있다고 판단했다. 원한다면 교파를 창시하고 신성 주문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신의 권능이라 말할 수 있는 것들을 획득하진 못했다. 권능을 지닌 영속자가 되기 위해선 신앙을 쌓아 올릴 필멸자들이 필요했으므로. 그런 짓을 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반신이다. 수명의 제한이 필멸자들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존재의 격이 영속자에 가까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일을 마무리한 이후에도 ‘내일’이 있다.
내일이 있다. 그 말이 어찌나 낯설었는지, 페르난데스는 잠시 눈을 감고 곱씹었다. 내일이라.
“내 생각보다 나는 무계획적인 인간이었던 모양이더구나. 당면한 목표가 사라진 이후엔 무엇이 남을까.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은공…….”
페르난데스는 문고리를 쥐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문을 밀었다. 새파란 새벽빛이 드리운 방이 한눈에 보였다.
화려한 사치품들이 사방에 난잡하게 늘어서 있었다. 반짝이는 장신구나 보석, 비싼 가구들 사이로 작은 요람이 보였다.
그는 천천히 요람을 향해 다가갔다. 피가 마르고 피부가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발걸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조금씩조금씩, 행여나 발소리가 나진 않을까 조심스럽게.
“브압.”
요람 안에서, 맑은 푸른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창밖에 드리운 새벽하늘처럼, 시리도록 푸르고 티끌 없이 맑은 눈동자가.
살이 통통하게 올라온 손가락이 꼬물거리며 요람 위로 뻗어 올라오다가, 곧 힘없이 축 늘어졌다. 아직 몸을 가눌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이는 침 묻어 반짝이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연신 꼼지락거렸다.
페르난데스는 한참 동안 멍하니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그는 숨소리마저 죽인 채 아이의 옹알이를 듣고 있었다.
“아븝.”
아이가 몸을 들썩이며 쫑알거렸다. 작은 손이 연신 움찔거렸다. 페르난데스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뻗어 아이의 손으로 다가가다가 곧 멈췄다.
오랜 시간 칼을 잡아 거친 손이 아이를 상처 입힐까 두려웠다. 그의 손가락은 마법을 자아내고, 칼자루를 움켜쥐고, 살점을 저며내는 것이었다. 짐승의 발톱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쓰임을 가진 것이었다.
반드시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종류의 손이었다. 살인자의, 아니 학살자의 손. 그는 지금껏 그 사실을 당연하다 여기며 받아들였으나, 지금 이 순간 이 작은 아이의 몸을 만지는 것조차 두려웠다.
“닮았구나.”
그래서, 그는 손을 거두어 요람에 얹으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닮았다. 그를, 그리고 키르하스를. 수인 혼혈인 탓에 털 덮인 귀와 꼬리가 작게 자라나 있었지만, 아이의 눈매와 입술 모양 따위에서 그는 자신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닮았어…….”
자신을 절반 닮았다는 것은 달리 말해, 죽은 아들과 닮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페르난데스는 이 아이의 얼굴에서 아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슬픈 눈과 울부짖는 입술까지도.
환각처럼 죽은 자의 냄새가 났다. 지옥 마력에 오염된 시체의 냄새가. 그날의 광경이 머릿속을 스쳤다.
‘페이자쉬. 너는 이런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었구나.’
페이자쉬의 영혼이 그와 합쳐지며, 그는 이제 먼 옛날의 감정들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아들의 죽음, 아리아의 죽음, 세계의 죽음. 그 모든 순간들의 감정이 낡은 사진처럼 그의 가슴 속에 영사되고 있었다.
그건 애써 덮고, 힘겹게 잊으려 해도 이따금씩 그를 괴롭히는 감상이었다. 그는 꼬물거리는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두 눈을 꾹 감았다.
“아븝?”
그 순간, 무언가가 그의 손끝에 닿았다. 따듯하고 말랑한 것이. 페르난데스가 눈을 떴을 때, 아이가 손을 뻗어 그의 손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이는 퍽 뿌듯한 모양이었다. 손가락을 조물거리던 아이는 곧 그와 눈을 맞추고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빠바!”
그 순간, 페르난데스는 참지 못하고 아이를 들어 올리고 말았다. 그는 아이의 살냄새를 맡으며 높게 아이를 안아 올렸다.
“그래, 내가 네 아비다. 내가…… 아나, 아나 페르난다 세르너드. 그래…… 그래. 내가 네 아비야.”
“빠!”
“그래…… 그래. 아나. 아나 페르난다 세르너드.”
아나는 팔을 쭉 펴며 연신 웃음을 터트리고 쫑알거렸다. 하늘을 나는 느낌에 즐거운 모양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웃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지켜 주마. 아나.”
“빠!”
“또 한 번 되산다 하더라도 반드시.”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가 눈물 흘리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페르난데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멍하니 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가 낯가림이 없어 다행이네요, 은공.”
“널 닮아 똑똑한 모양이구나.”
“똑똑한 것을 닮았다면 제가 아니었겠지만요.”
“예쁘기도 하지, 착하기도 하지. 아나, 착하기도 하지.”
페르난데스는 입술이 풀린 얼굴로 연신 중얼거렸다. 아벨은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내 예상했어야 했다. 아들을 위해 목숨을 건다 했을 때부터. 팔불출일 줄은 알았으나 큰일이구나.”
“린드부름. 이제 네가 큰일인 것 아냐?”
“그것도 큰일이다. 내 알기로 용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들은 바가 없거늘…….”
“뭐…… 방법이 아주 없겠어? 나도 한번 찾아볼게.”
“고맙구나, 바나디스.”
두 불멸자들의 중얼거림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로,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는 아나를 들어 올리고 간질이며 떠들고 있었다.
“천재야, 천재를 낳았어, 키르하스!”
“은공을 닮아서 그래요!”
“하하하!”
정말, 큰일이구나……. 아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감쌌다.
* * *
“이젠 뭐 하실 거예요?”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의 접시에 고기를 썰어 올리며 말했다. 그녀는 어느새 그의 곁에 꼭 붙어서 연신 이것저것 음식을 날라 오곤 했다.
아침답지 않은 호화로운 만찬이 열렸다. 페르난데스는 아나를 품에 안고 천천히 얼러 주며 말했다.
“우선 페이른을 쳐야지.”
“이단심문청으로 복귀하진 않으실 거고요?”
“교황과의 거래는 내가 황제와 약혼하는 순간 끝났어. 교황이 이제 내 말을 들어야 할 입장인데, 굳이 부속 기관에 몸을 담을 필요는 없지.”
페르난데스는 여상하게 말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교황은 더 이상 권위로 그를 억누를 수 없다. 대황야의 성자로 추서되기 전에도, 이 물질 세계에서 그보다 많은 업적을 살아서 이룩한 자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르네와의 혼약이 이루어지며, 오히려 교황이 페르난데스에게 빚이 있다 쳐도 좋았다.
베이타서스 교회의 입지가 제국 전역에서 치솟고 있었다. 황제의 묵인하에 일어난 일이기도 했고, 페르난데스가 주도하여 발생한 지난 십자군의 여파이기도 했다.
교황이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린다면 이젠 신정 국가 하나를 세울 수 있을 정도일 터였다. 세속 왕가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공의회의 선언은 종잇조각이나 다름없었다. 저토록 드높은 권위를 지닌 기관이 바란다면, 그 어떤 세속 왕가가 저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있을까.
만신전의 대신 교회 중 하나였던 베이타서스 교파가 이토록 강성해진 것은 거의 전적으로 페르난데스 덕분이었다. 그런 와중에 굳이 이단심문청에 투신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이제 이단심문청은 더 이상 없거든.”
“네?”
“다리안이 불태웠고, 페이른이 무너트렸으니까.”
“어……? 어??”
“아이가 듣기에 좋은 말은 아니니 나중에 하지. 어쨌건, 페이른을 쳐야 해. 키르하스. 왕가의 뿌리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페이른 왕실은 동부 왕국 연합의 주축 중 하나다. 비옥한 곡창지대와 발달한 항만을 중심으로 동부 왕국 전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투사하는 국가였다.
페이른이 공격받는다면 저들의 편에 합세할 소국들이 적지 않았다. 그 결과는 명백했다. 내전이 시작될 것이다.
제국은 동부 왕국의 내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어렵다. 50년 전쟁과 내전, 그리고 카라드스카르의 대북진이 이어진 지금. 제국의 경제는 파탄 직전에 놓여 있었으니.
키르자트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망령 군벌들 또한 마찬가지다. 페르난데스가 그 내전에 직접 개입하려 한다면 사용할 수 있는 수가 많지 않았다.
‘정석만 둔다면.’
기보대로 움직인다면. 페이른 왕실의 향후 행보는 명백했다. 이단심문청을 무너트리고 페이른 서남부 지방에 대한 지옥 마력 오염의 원인으로 교회를 들어 규탄을 시작할 것이다.
교회가 공식적인 주장을 발표하기도 전에, 동부 왕국 전역을 선동해 교회의 영향력을 뽑아내고 왕국들 전체에 사교도들을 침투시킨다. 이단심문청이 기능을 정지했으므로, 이제 동부에서 그들을 막을 자들이 없다.
정석대로 둔다면 외통수나 다름없다. 이단심문청의 파괴를 사전에 막지 못한 이상, 대륙 동부는 지옥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저들을 막을 수 있을까요, 은공? 다른 형제들을 규합해 암살을 시도하실 건가요? 아니면……. 데인?”
“데인의 비센테는 제국 내전의 개입으로 국제적 위상을 많이 상실했어. 데인 왕국이 개별적으로 반발할 수야 있어도 세력을 규합해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하기엔 모자라지.”
페르난데스는 아나를 키르하스의 품에 안기고 컵을 들었다. 컵 너머로, 샐러드를 와구와구 입에 담고는 우물거리는 프레이야가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페르난데스를 보았다. 뭔가 복잡한 얘기가 오고 갈 때 그녀는 그에게 어떤 관심도 주지 않고 제 할 일을 하곤 했다.
페르난데스는 그 모습에 픽 웃으며 말했다.
“북부는 요새 어떠하오?”
“그걸 왜 내게 묻느냐?”
아무래도 그녀는 자신이 북부의 여신이라는 것을 망각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