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53화 (354/388)

353. 불멸자와 필멸자 (22)

귀르는 아마도 지금 제국의 모든 대도시 중 가장 번성한 도시에 속할 것이다. 50년 전쟁에서부터, 제국 내전, 그리고 카라드스카르의 대북진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은 도시였으므로.

귀르의 다른 별명은 황금항이다. 북부에 인접한 마지막 부동항이자 드넓은 북해상의 원양 무역로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부, 북부, 그리고 키르자트에 이르는 방대한 무역로엔 반드시 귀르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금, 귀르는 낮보다 찬란한 밤과 밤보다 세련된 낮을 누리는 제국 최대 규모 무역항이자 팔텐노이아에 필적하는 부를 쌓아 올린 주도가 되어 있었다.

“대단하군요!”

키르하스는 연신 눈을 빛내며 주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뷜랑의 선제후 섭정이자 두 집단의 수장으로 역임한 경력이 쌓여 있었고, 그 결과 이제 도시의 번영을 객관적인 척도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 사람의 영주로서, 그녀는 귀르가 가진 이 부유함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여실히 깨닫고 있었다.

오가는 영민들의 안색이 환하고 가도의 정비가 완벽했다. 폐허에 가까운 뷜랑과는 천지 차이였다. 삭막하고 가난한 뷜랑과는 달리, 이곳엔 웃음소리와 밥 짓는 냄새, 그리고 상인들의 시끄러운 고함 따위가 엉켜 있었다.

그건 삶이 타오르는 소리였다. 청야 전술과 전쟁에 직격당한 뷜랑과는 달랐다. 그녀는 감탄 중에 내심 부러움을 느끼며 연신 눈을 굴렸다.

그때, 그녀의 어깨를 감싸는 손이 있었다.

“로베르는 수완가다. 키르하스.”

“예, 은공.”

“그리고 귀르는 전쟁의 모든 여파를 빗겨 갔지. 심지어 내전 도중엔 귀르의 함대가 인근 영지를 공격해 수탈한 이력이 있어. 이들의 축재는 주위 영지들의 약탈품을 기반 삼아 올라간 것이니, 네 영지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크흠. 그건 트레뮐레 궁중백 앞에서 하기엔 문제가 있는 말 아닐까요, 세르너드 공?”

“선대 궁중백과 내가 함께 펼친 작전이니 당연히 말할 수 있는 부분 아니겠나?”

불편해하는 에버리즈의 지적에 페르난데스는 유쾌하게 말을 받으며 고삐를 당겼다. 다각, 다각. 느슨한 리듬의 발굽을 들으며 페르난데스의 말이 이어졌다.

“어쨌건, 귀르의 부유함을 뷜랑의 수인들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아. 지금 당장은 말이야. 앞으로 한 오십여 년. 그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뷜랑이 귀르를 추월할 수 있으니.”

“네? 어떻게요?”

키르하스는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막연하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귀르는 이토록 찬란한 항구도시고, 뷜랑은 황야와 인접한 폐허에 불과했다. 심지어 전쟁 중에 청야 전술을 벌인 탓에 기반 시설을 모조리 파괴해야 했던 폐허.

서부 원정 지원이 멈추며 뷜랑의 경제는 처참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당장 겨울이 다가오면 영민의 절반은 풀뿌리를 긁어 먹으며 버텨야 할 지경이었다.

마땅한 무역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영지의 특산물이 대단치도 않은 데다 자체적으로 갖추었던 곡창지대는 전쟁 통에 모조리 황폐화되어 재건하는 데에 적잖은 시간이 들어야 했다. 심지어 영지의 청년 인구 대부분은 농사와 담을 쌓은 수인들로 이루어져 있기까지 했다.

“카르벨리에 여제는 키르자트와 친교를 다지고 있고, 곧 서방 무역이 활성화되면 먼 옛날 라 메르티옹의 비단길이 이젠 서부로 열릴 테니까.”

“어, 세르너드 공? 그건 동부 왕국과의 교역이 무산되어야 가능한 일 아니겠어요?”

“그럴 거요. 동부는 당분간 저들끼리 살아남기도 급급할 테니.”

페르난데스는 여상한 말투로 대답했다. 전란이 예상대로 진행되어도 최소한 동부 소왕국들의 국력은 반토막이 될 것이고, 예상보다 가열차게 진행된다면 동부 왕국 연합의 절반은 불바다가 될 터였다.

“그리고 동방 교역로가 끊기면 대황야를 관통하는 서방 무역이 활성화되겠지. 대황야로 나아가는 길을 육로로만 한정한다면 크게 두 개의 경로가 있소.”

“뷜랑과 리뷔에지요?”

“그렇소, 트레뮐레 궁중백. 카르벨리에 여제는 리뷔에를 무역 거점으로 삼고 싶겠지만, 뷜랑엔 리뷔에에 없는 대단한 이점이 있지.”

“……수인!”

“그래. 대황야 전체를 권역으로 삼는 강력한 군벌이 뷜랑을 지키고 있지. 리뷔에가 기사단을 지원하지 않는 이상 수인 호족의 호위보다 안전한 상행을 보장하긴 어려울 테고…….”

“수인 전사들은…… 맞아요. 품삯이 싸죠!”

그걸 수인 대족장이 말하는 건 좀 어떨까 싶었지만…….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이상한 기분을 받았다. 하지만 어쨌건 맞는 말이었다.

뷜랑엔 드넓은 농경지가 있었으나 이제 와선 모두 황무지나 다름없게 되었고, 그 위로 수인들이 채산성 부족한 작물이나 가축 따위를 기르며 살고 있다. 그들은 가난하고 농사를 모르는 유목민들이었다.

이들에게 농경법을 전수해 정착을 지원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행위 정도에 불과하다. 이들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50년 전쟁 당시 수인들은 용병단으로 활용되곤 했다. 부족 거의 전원이 기마에 능숙했고 장거리 상행과 같은 긴 여정에 이골이 난 자들이었다. 심지어 대황야의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 자들.

장차 키르자트와의 정국이 안정화되고 무역로가 개방된다면 뷜랑은 빠르게 재건될 것이었다. 다만 시간문제일 뿐.

‘그래, 시간문제일 뿐.’

어쩌면 세상은 천칭과 같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몰락한다면 그 반대급부로 누군가는 부와 명예를 쟁취하므로. 동부의 몰락과 서부의 재건은 심지어 그 각운마저 적절했다.

이 도시, 귀르가 지난 전쟁의 참사를 통해 성장했듯이. 도시와 영지의 발전은 다른 누군가의 고혈을 빨아먹어야 가능해지는 것일지도. 페르난데스는 귀르의 번화가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 참. 세르너드 공, 무역선은 뭐 부탁하신 대로 준비는 했습니다마는, 군함이 아니라 무역선을 요청하신 까닭이 뭔가요?”

“동부로 갈 거란 것쯤은 알고 있지 않소?”

“그러니까 묻는 거랍니다? 지금 동부의 사태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는 확인해 보아야겠지만, 무역을 할 만한 상황은 아니지 않을까 싶은데요.”

“동부에 군함을 보내면 제국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비춰질 수 있소.”

페르난데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귀르의 아성이 보였다. 아성으로 향하는 번화한 대로와 능선을 따라 펼쳐진 가옥들, 그리고 그 끝에서 서서히 커져 가는 수평선까지.

밝은 햇살이 북부항을 비추고 있었다. 수평선의 물비늘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페르난데스는 그 위에 점점이 떠다니는 선박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직 동부 전역이 타락한 것은 아니오. 오히려, 놈들은 악마의 개입을 은폐하고 교회의 과실을 확대하고 있지. 이 상황에서 제국의 개입은 정치적으로 악용될 여지가 있소.”

동부 왕국은 지금 내전을 준비 중인 화약고가 되어 있다. 페이른 왕실은 머지않아 베이타서스 교회를 공식적으로 규탄할 것이고, 세속 사회와 종교권의 분쟁은 곧 연합 전체를 불사르는 내전으로 발달할 것이다.

제국은 동부 연합에 결코 친절한 이웃이 아니다. 겉으로야 우방국이자 주요 교역 대상이었으나 극심한 관세와 무역로 유지비 명목을 빌린 사실상의 조공을 수탈하는 강대국이었다.

지금의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제국이 무력 개입을 시작하려는 낌새라도 보인다면, 페이른의 입지가 더욱 공고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데인을 비롯한 온건적 소왕국들을 규탄하며 제국에 대항해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기치를 내걸 것이다.

‘그게 가장 확실하니까.’

페이른은 지금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동맹 체제를 노리고 있다. 동부 연합의 지역 강국을 넘어, 어쩌면 연합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보이고 있었다.

반면 제국은 동부를 도울 명분도, 그럴 만한 여력도 부족하다. 오랜 전쟁의 여파로 제국엔 더 이상 원정 전쟁을 벌일 자본이 없었다.

‘라 메르티옹을 중심으로 동부 방면의 방어선을 펼치는 것 정도라면 모를까, 동부 원정은 무리지.’

페르난데스는 슬슬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제 귀르의 아성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아성의 성벽 위로 가문기들이 바람결에 따라 흩날리고 있었다.

‘카르벨리에 가문기……?’

트레뮐레 가문기와 귀르의 군기 따위 사이로, 가장 높은 장대에 카르벨리에의 가문기가 보였다. 페르난데스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그 모습을 보며, 에버리즈가 짓궂게 웃었다.

“설마?”

“맞아요. 황제 폐하께서 지금 귀르에 친정해 계시죠.”

“언제부터요?”

“저와 함께 입성하셨고, 그대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셨죠. 퍽 반가우시겠습니다. 마마?”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어쩐 일로 선제후가 영지 외곽까지 마중을 나와 직접 그를 대접하나 싶었는데, 르네가 명령한 모양이었다.

“폐하께선 공의 입성을 알뜰히 챙기어 자칫 길을 잃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 하셨답니다. 후후, 어찌나 공을 아끼시는지 아시겠나요?”

“도망치지 말란 뜻이겠지.”

“그런 낭만 없는 태도는 바르지 않아요.”

“내 낭만은 그런 곳에 있지 않소.”

“연회가 열리고 만찬장이 있을 예정이랍니다. 본디 공의 생환은 팔텐노이아에서 축하연을 벌였어야 마땅하나, 어머나. 공께선 또 팔텐노이아를 무시하고 그대로 귀르를 통해 출국하려 하지 않았던가요?”

“이혼 서류에 도장 찍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법무서경이 반려했더군요. 폐하께선 아직 새로이 혼례를 드시지 아니하셨으니, 법적으로 공은 여전히 황제 폐하의 국서십니다.”

에버리즈는 연신 싱글거리며 말했다. 페르난데스는 말머리를 돌려 빠져나가고 싶은 심정을 애써 눌렀다. 지금 시점에서 르네와 재회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너무 눈에 띈다.’

차라리 팔텐노이아를 들렀어야 했나? 황제가 수도를 벗어나 갑작스레 귀르를 내방했다는 것은 뭇 선제후들은 물론이고, 인근의 모든 왕국들이 경계할 정보였다. 지금의 황제는 전쟁 영웅이며, 선대 트레뮐레 궁중백은 개국공신이었으니.

그러나 곧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모든 작전이 완벽히 은밀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이번처럼 그 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국가 규모의 작전이라면 정보가 반드시 새어 나가기 마련이었다.

동부 연합의 소왕국들은 무능한 머저리들 따위가 아니었다. 연합 내부와 제국의 동향에 언제나 촉각을 기울이고 있는 승냥이들이다. 기왕 그렇다면, 이건 거름망이 될 기회이기도 했다.

‘누가 어느 편에 서는지 알 수 있는 기회지.’

정보의 불투명성은 페르난데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카라드스카르가 몰락한 이 시점, 페르난데스는 이제부터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선대 트레뮐레 황제가 돌연 타락했듯이, 그리고 페이른이 내전을 준비하는 것처럼. 그가 지금껏 쌓아 올린 업적이 곧 예측 불가능한 미래가 되어 그의 앞에 늘어서 있었다.

정국은 안개에 휩싸여 있다. 그에게도, 그리고 물론 적들에게도. 적과 우방을 가리기 어려운 세속 왕가의 뭇 군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기왕에 착수점을 가늠하기 어렵다면—

‘모두에게 공평하게 혼란을 주어야지.’

전쟁은 불공평한 게임이다. 각국이 완전히 동일한 팻감과 동일한 자본을 가지고 겨루는 신사적인 체스 놀이 따위가 아니다. 전장에는 혼란이, 그리고 더 큰 혼란이 찾아오고. 정보와 정보가 난삽하게 뒤얽히며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난립하는 곳이다.

그리고 혼란은 흑마법사들에게 있어 결코 적이 아니다. 페르난데스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대악마들에 맞서는 신전 사제가 가져선 안 될 감정.

세속의 왕국과 각국의 영웅들, 그리고 도열한 수만의 병력들에 맞서는 흑마법사가 가질 법한 감정이었다. 전장을 내려다보는 흑마법사가.

‘나쁘지 않군.’

페이자쉬와 하나가 된 이후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페르난데스는 지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자신의 감정일지, 아니면 페이자쉬가 가졌을 감정일지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 * *

“제국 국서, 사자비 페르난데스 드 카르벨리에 공의 입궐입니다!!”

페르난데스 일행이 귀르 아성의 회랑을 넘는 순간 문의 양측에 서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외치며 연회장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방금까지 문 너머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지만, 문이 열린 이후 연회장 내부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황실 귀족들이 일제히 연회장에 들어서는 그를 바라보았다. 붉은 융단이 깔린 연회장 위를 성큼성큼 걸어가는 젊은 청년의 모습을. 정리되지 않은 검은 더벅머리에 형형히 빛나는 푸른 눈, 단단한 장신의 기사가 곧장 황제를 향해 직진하고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물결처럼 낮은 소란이 퍼졌다. 귀족들은 저마다 소리 죽여 페르난데스의 소문을 속삭였다. 황제 시해자, 악마 사냥꾼, 홀로 저 흉포한 야만인들을 교화시키고 무찌른 사내.

들리는 소문처럼 거구의 기사도, 사자 같은 머리칼의 흉터 빼곡한 야전 사령관도 아니었지만. 저 청년의 업적을 감히 폄하하려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키르하스는 그 광경을 보며 감회에 젖었다. 그들이 처음 제국 정치에 개입했다 할 수 있었던, 리뷔에의 어전에서. 그들은 제국 기사들의 비아냥과 괄시를 감당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했어야 했다.

지금 이 순간, 황제가 다리를 모로 꼬고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는 이 자리에서. 그들의 권위를 의심하는 자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단지 경외심에 속삭일 뿐. 키르하스는 복잡한 심정으로 멈춰 서서, 앞서 나아가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철컥.

융단의 끝, 황제의 앞에서 페르난데스가 멈춰 서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경갑이 가볍게 달그락거리는 소음을 냈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숨을 들이마셨다. 곧, 그가 고개를 들어 황제를 올려 보았다.

“신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원정을 마무리하고 귀환했나이다. 폐하.”

“세르너드?”

“송구하나 성을 바꾼 기억은 없는지라.”

르네는 아무 말 없이 페르난데스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완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곧, 슬금슬금 르네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소 불온한 분위기에 귀족들이 겁에 질릴 때쯤, 황제의 맑은 웃음소리가 어전에 울려 퍼졌다. 궁중 귀족들은 황제가 웃는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랐다. 제위에 오른 이후, 그녀가 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처음 본 탓이었다.

“아하하하! 짐의 농담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군?”

“재미는 있었소.”

“다행이야. 무엇들 하는가? 귀빈이 돌아왔으니 연회를 시작하지 않고!”

“예, 폐하!!”

르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그에게 걸어왔다. 그녀의 발걸음에 맞추어 시종들이 재빨리 그녀의 망토를 조심스럽게 들었다. 그녀가 손을 뻗자, 시종장이 그녀에게 투명한 크리스탈 잔을 건넸다.

“받아요, 세르너드 경. 어울리지 않게 그렇게 있지 말고.”

“카르벨리에 영애.”

“후후,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리운 이름이죠. 그대도, 나도?”

“……그렇소.”

“그때의 한 사람은 돌아왔지만, 다른 한 사람은 영원히 그러지 않겠죠. 나 홀로는 충분히 애도했으나, 누군가와 함께 술을 나눌 수는 없겠더군요. 그대가 나를 도와주겠나요?”

“기꺼이.”

페르난데스는 르네의 손에서 잔을 받아 들었다. 르네는 그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고, 자신의 잔을 채웠다. 쨍, 맑은 소리와 함께 서로의 잔이 부딪쳤다.

“위대한 선제후, 에르브 드 카르벨리에 대공을 위하여.”

“리뷔에의 아버지를 위하여.”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둘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단숨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연회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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