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5화
354. 불멸자와 필멸자 (23)
페르난데스가 뷜랑을 떠나 제국 서북부 내륙 지방을 관통하여 육로로 귀르까지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이 개월이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시각각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발맞추기엔 과도한 낭비에 가까운 시간이라 할 만했다.
따라서,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대안을 사전에 처리한 후에 출발해야 했다. 예컨대, 대황야에서 아이언사이드들과 연계하여 작전을 수립하고 있는 로베르와 피엘, 그리고 북해로 이동해 물자를 운송하고 있는 가이메른 왕조의 함대 따위가 그랬다.
휴식을 최소화하고 강행군한다면 귀르까지 넉넉하게 두 달. 그 시간이라면 가이메른 왕조가 귀르의 외항에 도달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시간과 계산, 작전에 어긋남 따윈 없었다.
그렇게 믿었다. 모든 변수를 통제하고 최대한 숙고하여 짜낸 동선이었다.
그러나 파르탁은 동의하지 않았다. 두 달은 너무 길었다.
* * *
“빠!”
“허허, 아가씨. 그런 말씀을 하시면 소신이 매우 곤란해집니다.”
“쁘! 빠!”
“허허허…….”
파르탁은 억눌린 한숨을 내쉬며 아나가 뱉어 낸 멀건 침을 닦아 냈다. 첫 한 달간 아나는 거의 눈을 뜬 모든 순간에 울음을 터트렸고, 그다음 보름 정도는 하루의 절반을 눈물로 보냈다.
실시간으로 부어오르는 아나의 눈을 볼 때마다 파르탁의 가슴이 철렁였다. 그의 머릿속엔 싸늘한 목소리가 항상 메아리치고 있었다.
‘아나가 밥을 먹다 실수로 혀를 씹어도, 파르탁. 네 이름을 부를 것만 같군.’
맹세컨대, 그는 이 한 달간 최선을 다했다. 건강과 질병 사항을 면밀히 검진한,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유모를 수배했고, 뷜랑뿐만 아니라 인근 모든 영지를 뒤져 가장 좋은 옷감과 장난감 따위를 구했다.
아나가 눈을 뜰 때, 그리고 잠에 들기까지. 파르탁은 모든 순간 아나의 곁에서 집무를 봐야 했다.
제아무리 그가 수인 연합을 완벽히 통제한다 한들, 불평분자들이 없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가 눈을 돌린 사이에 이 무방비한 어린아이를 해치려는 잡놈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어쩌겠는가.
이 아이가 죽거나, 아니. 그저 다치기라도 한다면? 파르탁은 자신의 실수가 아닌 것으로 인해 자신의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아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나는 머지않은 미래에 대족장이 될 아이였다. 하트테이커의 혈족을 잇는 첫 번째 황금 혈통이 되리라. 그리고 당연하게도, 매파 원로들 중 그 사실을 반기지 않는 녀석들은 두 손으로 꼽기에도 부족할 만큼 넘쳤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아나에게 물이라도 한 모금 먹일라치면 다섯 명의 시종이 직접 기미를 해야 했고, 최종적으로 파르탁이 물을 조금 덜어 내어 마법으로 검사한 뒤에 조심스럽게 급여했다.
“흐으…… 흐아아앙!!”
“아가씨!! 아가씨, 고정…… 고정하십시오. 아가씨, 우시면 안 됩니다!!”
파르탁은 떨리는 손으로 아나를 앉히고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또 울음을 터트리는 탓에 눈이 붓고 있었다. 좋지 않다. 그는 어금니를 드러내며 유모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네년은 대체 무얼 하는 게야! 아가씨께서 어째서 네년의 젖을 물지 않느냐!”
“그…… 그것이…… 허기, 허기가 지지 않으신 것이 아니올는지…….”
“듣기 싫다! 지금 보아하니 네년은 아가씨를 굶겨 죽이려 수를 쓴 게로구나. 내 알았다. 어느 장로의 사주를 받았느냐?”
“파르탁 원로님! 아닙, 아닙니다! 살려…… 살려 주세요! 정말 아닙니다!”
“거기 누구 없느냐! 암살을 획책한 자가 또 나타났구나! 이자의 배후를 밝혀라!”
그의 외침에 문을 박살 낼 듯 열며 전사들이 뛰어들었다. 그들은 겁에 질린 유모를 잠시 가련하게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으르렁거리며 유모를 붙잡아 끌고 나갔다.
파르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 도시엔 믿을 수 있는 것들이 없다. 그 누구도 대족장과 아가씨를 반기지 않는 것만 같았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원…….
물론 잘잘못을 따지자면 뷜랑을 매파 부족으로 채우고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파르탁의 잘못이 가장 크겠지만, 파르탁은 진심으로 수인 연합의 미래를 근심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천천히 아나의 등을 토닥였다.
“아붑!”
“허허, 아가씨. 걱정 마시지요. 소신이 그 못된 계집종을 쫓아내었습니다. 곧 새 시종을 구해 오겠나이다.”
“빠!”
“주군께오선 당분간 출타가 지속될 예정입니다. 아가씨.”
“빠!!”
“하오나…… 그리 말씀하셔도 주군께선 오지 않으실 겁니다. 아가씨, 조금만 참으시지요.”
파르탁은 연신 아비를 찾는 아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아무리 친족이라 할지라도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아나와 페르난데스는 서로 만난 시간이 고작 며칠 정도가 아니던가? 어째서 제 어미가 아니라 아비를 먼저 찾는 것일까?
그때, 작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원로님. 골든투스 원로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오, 모시게나.”
곧 문이 열리며 단단한 체구의 중년 사내가 들어섰다. 파르탁은 아나에게서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어려운 발걸음을 하시었소, 골든투스 원로?”
“그래야 할 것 같더군, 블랙팽. 감히 네가 대족장의 자식을 맡고 있다지?”
“대족장께서 명하신 일이오만.”
“네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원파 원로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의 신병을 양도해라, 블랙팽. 네놈의 손아귀에서 그분이 놀아나는 것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 참 섭섭하군.”
평원파, 대황야로 내쫓긴 비둘기파 호족들이 모인 새로운 정치 집단이었다. 반대로, 도시에 남아 정국을 주도하는 매파 호족들은 지금 ‘도시파’라 불리고 있었다.
다소 혐오감 섞인 표현이었다. 수인들에게 도시란 단어는 감옥이나 노예 거래소 정도의 어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전통을 버리고 스스로 노예가 되길 자처한 자들이라는 멸칭에 가까웠다.
파르탁은 그들의 연합이 우스워 견딜 수 없었다. 아무런 생활 기반도 잡히지 않은 저 대황야에서 열매나 모으고 돼지나 치면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비둘기파 호족들에게도 자존심이란 단어가 허용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노릇인가.
파르탁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대족장께 문의하시지, 골든투스. 나는 네 명령을 들을 이유가 없고, 아가씨의 신병을 인도하는 것은 내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니.”
“대족장께 무슨 짓을 한 게냐. 우린 네놈이 감히 대족장께 승계 결투를 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감히라고? 전통을 존중한다는 네놈들이 승계 결투를 무시해?”
“그게 전통을 존중한 결투였나? 응? 언제부터 우리가 승계 결투에서 수십 명의 투사로 한 사람을 핍박했지?”
“그리고 대족장께서 홀로 모두를 이기셨지. 그분이 그토록 건재하시니 나는 마음 놓고 정국을 다스리고 있고 말이야.”
“이놈이……!”
골든투스가 성큼 다가서며 칼자루에 손을 얹자, 파르탁이 손가락을 뻗어 골든투스를 똑바로 가리켰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골든투스. 아가씨가 놀라신다. 겨우 진정했는데 또 울면 자네를 죽여 버릴지도 몰라.”
“……날 왜 불렀지?”
“이제 너희 평원파란 것들도 도시로 돌아와야 할 때가 되었으니까. 연합의 구성을 재편할 필요가 있다.”
파르탁은 매파 원로들을 믿을 수 없었다. 놈들이 머저리라는 사실이 지금만큼 기분 나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본디 머저리들이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짓거리를 하곤 했으니.
생각 없는 겁쟁이들이라 이용하기엔 좋았지만, 이제 하트테이커의 신변을 보호해야 하는 입장에선 더없이 끔찍한 위협으로 느껴졌다. 그는 이제 비둘기파 부족들의 힘이 절실했다.
그런 의미에서 골든투스는 모든 조건에 부합한다. 연합 내에서 인망이 높고 영리하며, 50년 전쟁 말엽부터 키르하스와 함께 군단을 이끌어 충성을 입증한 바 있었다.
“빠!”
그때 아나가 골든투스를 보며 대뜸 소리쳤다. 파르탁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나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뭔가 찜찜하다 싶었는데, 그 순간 어떤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봤나, 블랙팽, 이 녀석이 벌써 나를 알아본다.
‘설마.’
파르탁은 아나의 입가에 묻은 침방울을 닦아 내며 생각했다. 아나가 말하는 ‘빠’가 설마, 그냥 아무 사람이나 보면 건네는…… 일종의 인사 같은 것이었다면? 그걸 보고 당연히 아빠라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을 페르난데스. 그리고—
‘대족장. 당신……. 무서운 사람이었군그래.’
단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아나를 길렀던 키르하스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 파르탁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대족장의 그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떠올렸다.
페르난데스는 여자관계가 다소 복잡한 편이다. 파르탁은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아벨이라 불리는 그 여인을 제외하고도, 문명 사회의 유력 인사들 중 그에게 개인적 호감을 가진 권력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자들을 상대할 때 키르하스가 가진 우위가 무엇일까. 외모는 둘째 치고, 권력으로 따져도 당장 제국의 황제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그녀가 가진 가장 강력한 패는 아나의 존재일 것이다.
파르탁은 따듯하게 웃는 페르난데스를 떠올렸다. 그 차디찬 사내도 제 자식은 귀히 여기는 듯했고, 그의 애착을 더 자극하기 위해 딸의 말버릇을 이용했다면—
‘과연, 불패자.’
그녀는 승리로 향하는 길을 읽고, 처음 순간부터 냉정하게 한 수를 두었던 것이다.
* * *
페르난데스는 어쩐지 자신만 술을 먹는 것 같다 생각하며 또다시 한 잔을 받았다. 대낮부터 시작된 만찬은 해가 질 즈음까지 이어지더니 이젠 그저 술자리가 되어 있었다.
황제의 권주를 사양할 수 있는 대신들 따윈 없었기에, 만취하여 실려 가는 신하들이 속속 늘어가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웃고 떠드는 르네를 바라보았다.
“대낮부터 이리 과음하시어도 되겠소?”
“하하, 세르너드 공. 내가 얼마만에 휴가를 즐긴다고 생각하시나요?”
“퍽이나 격무에 시달리셨나 보오.”
“아무렴요. 누가 제게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연중무휴로 시달리고 있지요.”
르네는 노래하듯 말하며 웃었다. 그날, 리뷔에의 늦은 밤. 당시 황자였던 로베르와의 밀담에서 페르난데스는 차기 황위를 르네에게 주어야 한다 말했었다. 벌써 먼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과거지만, 연회가 열리는 저녁 밤하늘을 바라보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땐 악의적인 농담이라 여겼다. 제아무리 황위가 혈통 승계되는 자리는 아니라 한다지만, 멀쩡한 황자를 눈앞에 두고 차기 황위를 논한다는 것은 외교적인 모욕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차 하는 사이 페르난데스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마치 마법처럼. 그녀는 추억을 곱씹으며 멍하니 말했다.
“그렇게까지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무슨 말이오?”
“아니, 평범하게 공녀로 지내다가 적당한 상대와 정략결혼하고 영지를 돌보며 후계자를 양성할 사람을 이렇게 혹사시켰으면 보상이 있는 게 합당하지 않나요?”
르네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페르난데스의 잔에 술을 따르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 억울하네? 제 행복을 빼앗긴 그런 기분? 알아요? 저 요새 되게 불행했다는 거? 휴가는 없지, 친구도 없지, 가족도 없지, 보람도 없지. 국고는 텅텅 비어 있고 경제가 파탄 나서 조세를 인상할 수도 없는데 그 이유가 제 사치나 향락 때문이 아니란 것이 더없이 불행해요.”
역대 황제들 중 가장 가난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황제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제국의 오랜 역사 동안 제국이 빈곤한 적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기에서 황실이 가난했던 적은 없었다. 거의 대부분의 황실은 언제나 부유했다. 기본적으로 제위를 잇는다는 것은 거대 영지의 대영주이자 선제후라는 뜻이며, 제국 국고와 가문 영지의 국고를 동시에 착복할 수 있는 황제는 가난하려야 가난할 수가 없는 직위였다.
그러나 카르벨리에 가문은 대공 시절에도 빈곤한 몰락 귀족이었으며, 리뷔에는 50년 전쟁 이후 반쯤 폐허가 된 땅이었다. 그 와중에 내전과 방어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군비가 소모되고, 이제는 황폐화된 국토를 수복하기 위해 또 국고를 털어내고 있었다.
물론 황실이 가난한 이유는 르네의 성실함 때문이었지만, 역으로 르네는 자신의 성실함이 자기자신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고 대단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대충 부를 축적하면서 사치 좀 부리다가 제위를 이양하고 리뷔에로 돌아가면 편했을 텐데.’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픽 웃었다. 전생에도,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르네는 제국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황제였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후회하시오?”
“후회요? 음…… 으음……. 글쎄요. 공의 생각은 어때요. 내가 후회를 해야 할까요?”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 같소.”
“역시 그렇죠? 후후.”
르네는 페르난데스와 잔을 부딪치고는 웃었다.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페르난데스의 잔에 다시 술을 부었다.
“공이 보기에, 내가 아버지께 자랑스러운 딸이었을까요?”
“더없이.”
“이 나라 국민들에게도?”
“물론이오.”
“……당신에게도?”
“그렇소.”
그의 말에 르네는 머뭇거리며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술에 취한 탓일까, 르네의 양 뺨이 발그레하게 붉혀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의자를 끌어 페르난데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조금…….”
“잠깐만요, 폐하. 아무래도 제 주군이 걱정이 되어서요. 은공, 아이참. 아나를 생각하셔야지요. 이렇게 과음하시다간 몸을 버립니다.”
페르난데스와 르네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키르하스가 나타났다. 그녀는 페르난데스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들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당신…….”
“아, 폐하. 혹시 들으셨었나요? 아나는 제 딸 이름입니다. 선제후 섭정이란 직위가 혹시 승계가 가능한 자리인지 여쭈어보려 했거든요. 아무래도 성씨를 아비에게서 따서 ‘세르너드’로 지었더니 애매해서요.”
“법무서경!!”
“예, 폐하!!”
르네의 인상이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추억에 젖은 제 나이 또래의 공녀 같던 인상이 순식간에 철혈의 여황제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의 외침에 연회장 구석에서 술에 취해 졸던 귀족이 벌떡 일어섰다.
“섭정 위가 승계가 가능하던가!”
“아닙니다, 폐하!!”
“그렇다는군, 대족장. 섭정위는 일 대 귀족에 한한다. 아쉽게 되었군. 이제 궁금한 것이 더 없다면 물러서고, 남았다 하더라도 법무서경과 의논하도록.”
르네는 거의 죽일 듯이 키르하스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술에 반쯤 취해 있던 귀족들마저 르네의 외침에 놀라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는 연회장의 광경을 훑어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가 깨졌군. 경들에게 미안하게 되었네. 즐길 자들은 충분히 즐기며 오늘 하루 편히 보내고, 짐은 이제 국서와 함께 침소에 들 계획—”
-콰아아아아앙!!
그녀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나가려던 찰나, 찢어지는 듯한 포성이 먼 해안에서 울려 퍼졌다. 연회장 외부를 지키던 기사들이 혼비백산하여 창으로 뛰어가고 귀족들은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연회장이 순식간에 소란에 휩싸였다. 폐하를 지켜라! 무슨 일이냐! 보고하라! 완전히 술에서 깬 귀족들은 저마다 놀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곧, 황급히 문이 열리며 귀르의 경비병이 달려와 부복했다.
“폐하, 송구하나이다! 엘프 함대가 항만에 나타나 예포를 쏘고 있사옵니다!!”
“……예포를……?”
“예, 폐하! 심려치 마시옵소서. 그저 요란할 뿐 빈 포를 발포하는 것뿐입니다. 저들은 언제나 내륙 항구에 입항할 때 저런 기행을 벌이곤 하나이다!”
페르난데스는 이마를 감싸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레이아. 제발. 그녀의 등장에 대해 미리 들어 알고 있던 르네마저도 멍하니 보고를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 곧 포성이 잠잠해졌다. 야만적이고 무례한 것들이라며 성토하는 귀족이나,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대신들의 모습이 보였다. 르네는 손을 덜덜 떨며 조용히 말했다.
“트레뮐레 궁중백.”
“예, 폐하?”
“저치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면 승산이 있겠나?”
“아뇨, 폐하. 없습니다. 해상에서 엘프 함대를 상대로 승기를 장담할 수 있는 자들은 엘프를 제외하곤 없나이다.”
심지어 지금 엘프 삼왕조가 통일된 시점이라면 더욱 그렇지요. 에버리즈는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했다. 르네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황제 하기 싫어.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