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 수탐자와 수탈자 (1)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빛이 오색찬란히 번지며 회랑을 물들였다. 비센테는 아무 말 없이 회랑을 지나며 궁궐의 석주들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선대 왕들의 업적이 묘사되어 있었다. 데인 왕국의 모든 왕들은 임금이기 전에 기사여야 했으며, 왕위 세습 이전에 반드시 기사 수행을 떠나야 했다. 이 그림들은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장 젊고 용맹하던 시절의 왕자들. 선조들의 무용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악령을 죽이고, 백성을 구하고, 거인을 도살하고, 때로는 사악한 마법사나 요정 따위를 무찌르는.
어전으로 향할수록 석주의 그림들은 흐릿해져 간다. 더 오랜 시간을 향해, 신화와 전설에 가까운 영역을 향해. 그리고 마침내 어전의 문이 열릴 때.
-위대한 데인 왕의 후계자이시며, 원탁 의회의 수장이시며, 또한 수천 기수들의 주인 되신 분. 뿔나팔의 지배자, 거인 학살자, 신화의 수복자. 비센테 전하께서 입궐하신다!
-왕가에 영광을!
어전을 가로지르는 붉은 융단을 밟으며, 비센테는 대답 없이 걸었다. 그는 꼿꼿하게 걸음을 옮기며 천장 위로 뻗어 나간 석주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거인을 죽이는 기사, 악령을 쫓아내는 기사, 망자들에 맞서 일어서는 기사. 빛바래 희미한 그림 아래로, 그 오랜 세월에도 여전히 또렷한 글귀가 보였다.
-스러진 자들을 연민하라.
묘사화는 호수 앞에서 무릎 꿇은 기사의 그림 앞에서 끊겨 있었다. 지붕이 뜯어져 나간 탓에 묘사화의 가장 앞부분이 유실된 것이다. 그러나 비센테는 어린 시절부터 봐 왔던 저 자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데인 왕이 용과 마주하여 검을 받는 장면이 있던 자리였다. 그는 어둑한 실내와 대조되는, 찬란히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스르릉!
걸음에 맞추어, 칼날을 뽑아 올리는 서늘한 소음이 어전을 가득 채웠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스쳐 지나간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어 그대로 바닥에 박아 넣었다.
-콰드득! 캉!
-카앙!
마침내 어전의 금지를 넘어 왕좌에 도달했을 때, 비센테는 뒤로 돌아 어전을 내려 보았다. 왕국의 영주들과 그 가신들이 모두 모여 바닥에 검을 박아 넣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영원한 영광을. 짐의 기수들이여, 원탁 회의를 시작하겠소. 발언하시오.”
“신 알트체레스트의 에글로인, 발의를 청하나이다.”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원탁 의회, 왕은 그저 의사를 조율할 뿐 이 자리의 원탁 기사들은 동등한 권한을 가지므로, 이들에겐 존중 이상의 과례가 필요치 않았다.
비센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에글로인은 곧 허리를 펴며 말했다.
“작금 페이른이 벌이는 일련의 사태를 경계하셔야 합니다, 전하. 하명하소서. 알트체레스트의 기사 삼백과 오천 정병이 전하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이 어찌 근시안적인 판단이란 말이오?”
“루칸.”
“신, 알트아키스의 루칸이 발의를 청하나이다. 페이른의 주장은 사뭇 위협적이나, 섣부른 선제 공격은 자칫 위대한 데인을 고립시킬까 저어되옵니다.”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는 이글거리듯 흩날리는 붉은 머리칼을 가진 중년 기사였다.
“페이른이 감히 정복 전쟁을 주창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들은 그저 만신전 교회에 책임을 묻겠다 하고 있을 뿐이옵니다. 더군다나 지난 제국 내전의 원정으로 연합 내에서 우리의 입지가 좋지 못합니다. 명분이 저들에게 있사오니, 잠시 사태를 관망함이 옳다 여기옵니다.”
“비겁자의 논리로군!”
“감히!! 내게 비겁을 논했는가?”
“그렇다! 루칸, 그대의 영지가 페이른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겁이 나겠지! 전하! 관망은 허울 좋은 표현에 불과하나이다. 냉엄히 결단하소서, 전쟁의 매사는 시기를 놓친 자와 그렇지 아니한 자로 그 성패가 가름되나이다!”
“그만들 하시오!! 만검 회의에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쾅!
젊은 기사가 거칠게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핏대를 올리며 서로를 헐뜯던 기사들이 찔끔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청년은 사납게 그들을 훑어보고는, 비센테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전하, 신 알트하이스의 파프나르메어가 발언을 청하나이다.”
“하게.”
“언사가 거칠었으나 루칸 경과 에글로인 경의 의견 모두 합당하나이다. 전쟁을 준비하시되 저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소서.”
파프나르메어는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왕의 기사들이 보였다. 이들은 선왕의 폭정을 견디면서도 그 정기를 잃지 않은 영웅들이었다.
고작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도시, 알트베르트는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다. 망자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왕과 그의 귀에 사악한 마법을 불어넣던 마술사들이 공공연히 사술을 벌이고 백성을 착취하던 땅이었다.
어떤 귀족들은 이에 왕가를 등지고 떠났고, 또 누군가는 낙담한 채 은거하였으며, 어떤 자들은 시류에 편승하여 선왕의 간신이 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 원탁 기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죽은 자신의 조부와 함께 반정의 뜻을 모으고, 오직 정의. 그 한 마디 단어에 목숨을 걸어 창칼을 쥐었던 자들이다. 서로의 의견이 달라 대립하고 있다 한들, 저들은 진정코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이들이었다.
하여, 파프나르메어는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며 짧게 목례했다.
“근자에 시기가 수상하니 방비를 함은 옳은 일이오. 허나 동부 연합의 왕가들은 우리의 무장을 달가이 여기지 않소. 제국을 도와 진군한 지난 전쟁에 교역이 끊긴 것을 복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참이 아니오.”
“그렇다면 어쩌자는 게요?”
“가을이 오고 있소, 곧 겨울이 닥칠 게요. 추수 직전 하절기는 사냥철이 아니겠소? 전하, 전국에 해수 토벌을 명하시옵소서.”
“해수 토벌에 기사들을 대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편력 수행을 위해 괴수를 사냥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 아니겠사옵니까. 전국적인 사냥을 명하시고 각 요충지의 병력을 무장하여 소란을 대비하소서.”
그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비센테는 턱을 쓰다듬으며 주위를 훑었다 파프나르메어의 의견에 반대하는 신하가 없었다.
“지금 페이른은 그저 교회를 규탄할 뿐 실질적인 무력 행사에 나서고 있지 않소. 많은 왕국들이 그자들의 의견에 동조하여 연합하고 있고, 그자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국가들은 고립되어 가고 있소.”
비센테의 말이 어전 위로 길게 울렸다.
“단순히 보자면 타당한 의견일지도 모르오. 그치들의 영토에서 일어난 소동 탓이었으니. 그러나 경들과 짐은 이미 알고 있소. 교회를 배격하고 세력을 결탁하여 백성들을 혹세무민하는 자들에 대하여.”
기사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건 선왕의 이야기였다. 흑마법사에 의해 타락했던 선왕의 시기를 보낸 탓에, 데인 왕국은 다른 어떤 국가들보다도 고위 권력층의 신앙심이 두터운 나라에 속했다.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악인에 대하여 오직 심증만으로 이들을 징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오. 하지만 우리는 왕이며, 영주이며, 또는 백성이기에 앞서 기사들이오. 우리가 저들을 경계함은 우리의 권리가 아니요, 다만 의무일지니—.”
-쾅!
말이 이어지려던 찰나, 어전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창백하게 질린 기수가 뛰어 들어왔다. 삼엄한 기사들의 눈빛에도, 기수는 헐레벌떡 뛰어와 금지 바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무슨 소란인가?”
“송구합니다, 전하. 급보 탓에 무례를 범하였나이다!”
“시종장은 저자에게 마실 물을 내어 주어라. 천천히 숨을 돌린 이후에 말하게, 무슨 일인가?”
시종이 다가와 찬물을 건네자 기수는 숨도 쉬지 않고 잔을 비운 뒤에 곧장 고개를 바닥에 박았다.
“전하, 무례를 용서하소서. 이너 서클의 급사가 메를린포트에서 파발을 보내 왔나이다.”
“무슨 내용이었나?”
“페이른 왕실이 왕국 전역의 여인들을 잡아 죽이고 있사옵니다.”
“……여인들을? 다시 말해 보게. 무어라?”
“십 대 중반에서 이십 대 중반에 이르는 젊은 여식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 후에 처형하고 있사옵니다!”
“대체……?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공공연히 자행됨에도 연합의 반발이 없었단 말인가?”
“외국으로 향하는 정보가 통제되고 있습니다. 이 정보를 보내온 급사 또한 그 이후 연락이 두절되어 행방이 묘연하옵니다!”
지난번 교회의 북부 원정 사태 이후로 데인 왕가는 페이른의 메를린포트를 비롯한 인근 항만에 첩보원을 파견한 적 있었다. 그 이후 대륙 중부에서의 혼란으로 잠시 관심이 멀어졌었으나, 정보선은 아직 희미하게나마 유지되고 있었다.
페이른에 파견된 정보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페이른 왕가의 내분이 도드라졌을 때, 비센테는 각국의 첩보원들에게 잠복을 명했다. 이런 시기에 외국의 첩보 기관이 노출될 경우 심각한 내정 간섭으로 비화될 수도 있었던 탓이다.
어전에 침묵이 감돌았다. 너무나 뜬금없고 비현실적인 정보에 기사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십 대 중반에서 이십 대 중반에 이르는 젊은 여성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 후에 죽이고 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제정신인가?”
비센테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체 왜? 후폭풍도, 내부 반발도 감당할 수 없는 그따위 짓거리를 이 혼란한 정국 속에서 굳이, 대체 왜?
“파프나르메어, 괴수 사냥의 안건은 기각하겠다.”
“예, 전하.”
비센테의 머리칼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자의 갈기가 바람결에 흩날리듯이. 정점에 도달한 검사의 몸엔 마력이 흐른다. 그 흔적이, 감정의 격류에 따라 외부에 드러나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 불같은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낮게 말했다.
“바이에미어?”
“예, 전하!”
“그대는 페이른의 국경을 넘어 사태를 파악하라. 경들은 즉시 가용 가능한 병력을 알트베르트에 집결시킬 수 있도록. 마구스를 소집하라. 바이에미어 경이 복귀하는 대로 원정을 시작하겠다.”
원탁 기사들은 말없이 바닥에 박아 두었던 칼을 뽑아 올렸다. 카앙, 스릉. 강철이 마찰하는 날 선 소음이 어전을 가득 채웠다.
기사들의 머리칼과 옷가지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가장 온건한 의견을 보였던 기사조차도. 지금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은 분노에 몸을 떨며 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라. 데인의 기수들이여. 그대들이 멈춰선 시간에도 불의는 멈추지 않으리라. 가라!”
“왕가에 영광을!”
* * *
“전하, 전하!! 이건 미친 짓입니다!!”
“오, 왔는가?”
루트비히 폰 볼프스탈은 급조된 야전 막사를 거칠게 밀어젖히며 달려왔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왕자를 노려보았다.
왕자는 붉은 와인이 든 잔을 한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웃고 있었다. 그의 곁엔 헐벗은 여인들이 교태를 부리고 있었고, 주위에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사치품들이 늘어서 있었다.
왕자의 선명한 금색 머리칼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루트비히는 그의 태연한 기색에 어금니를 아득 씹으며 외쳤다.
“전하, 어찌 이런 참사를 조장하셨습니까. 어찌…… 어찌!”
“자, 진정하게. 볼프스탈 경. 전쟁을 앞둔 사령관이 그토록 경거망동해서야 쓰겠는가?”
“전쟁……?! 전하! 분명 이 일은 교회의……!”
“아, 그래. 교회가 빚어낸 참사를 규탄하기 위해 일어난 의거지. 맞아.”
왕자는 부스스 일어서며 허리를 쭉 폈다. 그의 몸을 가리고 있던 얇은 비단 가운이 흩어지며 새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잘 단련된 가슴팍 위로 불길한 붉은 문신이 일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감히 대페이른 왕가의 강역을 지옥 마력으로 더럽힌 저 교회를 규탄하는데, 왕과 대신들이란 작자들이 어기적거리며 훼방을 놓고 겁에 질려 옹송그리고 있으니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일어난 거사이기도 하고 말이야.”
“……저는 전하를 믿었습니다……. 정녕코……!”
“재미있구만. 나도 그대를 믿고 있다네, 볼프스탈 경. 왕과 그 식솔이 모조리 도륙된 지금, 나까지 죽으면 페이른은 갈기갈기 찢어지겠지. 아니 그런가? 그대는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을 테니 날 죽이지 못하겠고.”
“지기스문트……!!”
“그대의 군주를 그리 부르면 쓰나?”
루트비히는 어금니를 아득 깨물며 왕자를 노려보았다. 지기스문트 로이스 폰 블람부르크. 저 청년은 페이른 왕가의 마지막 남은 왕혈이었다. 방계 가문을 모두 포함해서, 블람부르크 왕가의 그 누구도 반정 속에 살아남지 못했으므로.
드래곤스파인 산맥에서 지옥 마력이 터져 나와 대기를 오염시킨 이후, 지기스문트는 대신과 백성들을 선동해 교회를 규탄해야 한다 주장했다. 왕과 온건파 대신들은 왕자의 이 급진적인 대처에 머뭇거렸고, 이들을 비겁자라 칭한 왕자가 정의를 기치로 군대를 조직했다.
제아무리 급격한 변혁이라 할지라도 너무나 체계적인 반란이었다. 루트비히는 자신의 고향이 불타올랐다는 소식에 왕자의 곁에 섰으나, 그 스스로도 이 반정은 다소 기이하다 여기고 있었다.
분명 별다른 지지 기반이 없었을 2왕자가 어떻게 이토록 빠른 시간 안에 군대를 조직했을까. 그리고 왕가의 다른 장수들은 어째서 별다른 대처조차 하지 못하고 무너졌는가?
반역도와 배반자, 그리고 겁쟁이들을 처단하고 다시 한번 페이른을 일으켜 세우리라. 왕자는 그렇게 주장하며 전 국토에 징집령을 내렸다. 반발하는 자는 장대에 걸렸고, 민중의 지지는 하늘을 찔렀다.
왕자는 달변가였다.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 사이를 순방하며 이들을 독려했고, 대신들은 그런 왕자를 이 시대의 영웅이라 여기며 따랐다.
‘모두들 제정신이 아니야.’
루트비히는 불타는 눈으로 왕자를 노려보았다. 왕자의 연회에 초대받은 귀족들은 모두 극성스러운 충성파가 되어 있거나, 다신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루트비히는 왕자의 카리스마에 매혹된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왕자가 돌연, 젊은 여인들을 징집해 모조리 처형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루트비히는 왕자에게 반발하는 궁중 귀족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닫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악마. 그 외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가정하니 모든 의문이 풀렸다. 이단심문청이 불타오른 사건, 그것이 단순한 유물 관리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면……?
그러나 진창이다. 더 이상 발을 뺄 수가 없는 진창이었다. 국가와 왕가에 대한 충성을 자신의 유일한 가치로 삼았던 늙은 기사단장은, 최후의 왕혈에게 반발할 수 없었다.
지기스문트의 말이 옳다. 모든 왕혈이 죽어 없어진 이 시점에서, 왕국 전역의 광기를 폭로하고 왕자를 처단한들 페이른엔 미래가 없다.
드래곤스파인 산맥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지옥 마력. 내전으로 인해 황폐화된 국토. 숙청으로 사라진 행정 인력들. 워커 사태와 이단 조사 과정에서 무너진 경제…… 이제 해상 무역의 주도권까지 잃어버린 페이른은 천천히 고사하는 것 외엔 다른 미래가 없었으니.
분노로 타오르던 루트비히의 눈에 천천히 체념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왕자는 짙게 미소 지었다.
“진정하게, 볼프스탈 경. 페이른은 영원하고, 또 유일한 제국으로 거듭날 것이며, 페이른의 백성들은 이 물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고결한 국민이 되어 남을 것이니. 그대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네. 나는 그대가 내게 반발할 정도로 영민하여, 그것이 참으로 만족스럽군.”
“전하…… 하지만. 명령을 철회하셔야 합니다.”
“고작 계집 몇몇일세. 안 그런가? 페이른의 인구 절반이 여성이고, 그중 오분지 일이 스물 남짓의 계집이지. 고작 그 정도야. 불만이 잠시 있을 것이고, 고난이 잠시 따르겠지만. 언젠 아니었나? 백성들이야 언제나 그래 왔고, 곧 배부르고 따듯해지면 모두 잊고 웃으며 살아갈 걸세.”
“저들은 가축이 아닙니다.”
“아니었나?”
왕자는 루트비히의 손에 잔을 쥐여 주고 술을 따랐다.
“정녕 아니었나? 그대의 영지에 농노가 몇이었고, 그들의 자산과 생활이 어떠했는지는 알고 말하는 건가? 그들의 삶이 정녕 개와 돼지, 말과 소보다 우월했단 말인가?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들과 가축의 차이가 대체 무엇이었나?”
“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러시는 겁니까?”
“한 사람을 찾고 있네. 여자, 스물 남짓. 신의 핏줄을 이었거나, 그 외의 경우로 신성을 띠고 있을 계집.”
왕자는 짧게 운을 떼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마지막 하나.
“그 나이대의 모든 여성을 죽이겠다는 것이 아닐세. 그것만 찾으면 끝이야. 고난은 짧고 영광은 영원할 걸세. 참게. 그대가 지금껏 그래 왔듯이. 눈을 감고 잠시만 숨을 돌리게. 그대는 쉴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
루트비히는 멍한 눈으로 천천히 술잔을 들이켰다. 왕자의 높고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막사 안을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