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 수탐자와 수탈자 (3)
“이년도 아니군. 치워라.”
“예, 전하.”
지기스문트는 고개를 까딱이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세례를 받은 이후 육체에 피로가 오는 일 따윈 없었지만, 육신과는 별개로 정신엔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쓸어 만졌다.
“전하, 파빌로스 경이 독대를 청합니다.”
“들라 하라.”
지기스문트는 와인이 담긴 잔을 손에 굴리며 막사 너머를 바라보았다. 곧 휘장이 올라가며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진척은 있었나?”
“쉬라이크를 꼬여 내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잔당을 추적하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전하.”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페이른 헌팅 스쿨이 그 많은 자들을 추적하지 못했다고?”
“놈들은 이단심문관입니다, 전하. 사냥꾼들은 기본적으로 사냥감의 흔적에 대해 능통하지요. 흔적을 지우는 법에도 결코 헌팅 스쿨에 못지않습니다.”
“내 자네를 만나 변명이나 듣자고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네만?”
“송구합니다. 전하.”
지기스문트는 혀를 차며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카를은 그의 눈치를 슬쩍 보는가 싶더니, 고개 숙인 채 짧게 미소 지었다. 그는 곧 표정을 다잡고 보고를 이어 나갔다.
“하오나 전하, 심려치 마시옵소서. 놈들은 결코 이 나라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드래곤스파인 산맥에서 동부와 북부로 흩어졌다 하지 않았나? 동부라면 모르되 북부로 조금만 더 넘어가도 데인과 레산이 있어. 놈들이 머리가 있다면 그쪽으로 빠지지 않았겠나?”
“골든버그의 박쥐들이 그 인근을 수색 중에 있습니다. 발견한다면…… 사냥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내 볼프스탈 경에게 그대를 도우라 명한 바 있네. 놈들을 찾는다면 섣불리 건드리지 말고, 반드시 그리핀나이츠를 대동해 사냥하도록 하게. 가 보게.”
“예, 전하.”
카를은 다시 한번 고개를 깊게 숙이고 물러섰다. 뒤를 돌아 떠나는 카를의 입엔 짙은 미소가 얹혀 있었다. 막사의 휘장이 내려가고, 카를은 밤하늘을 슬쩍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머저리들.”
왕자는 힘에 취한 머저리다. 저열한 욕망을 야망이라는 허울로 덮어 자기 위안을 하는 주제에, 전장 한복판에서 여자를 끼고 비싼 술과 황금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머저리. 정확히 간판으로나 쓸모 있을 멍청이다.
이단심문관들은 광신을 정의라 믿는 머저리다. 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간을 죽인 믿음이 있다면, 그건 종교다. 악마에 의한 대량 학살을 막겠다는 놈들이, 단 하나의 악마를 방기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저들 스스로 대량 학살을 일으키고 있으니.
쉬라이크. 인간에게 신과 악마 둘 모두가 필요 없다 말한 주제에 신의 꼭두각시로도, 그리고 악마의 꼭두각시로도 놀아나는 머저리다. 제 자신의 모순을 견디지 못해 함몰된 불쌍한 머저리. 놈의 표류가 좌초로 이어질지, 아니면 항해로 이어질지는 즐거운 여흥이 되리라.
주군에 의한 영원한 지배. 이 세계에 이룩할 진정한 지배가 머지않았다. 지기스문트는 그저 징검다리일 뿐이다. 진홍왕께서 도래하시고, 이 세계는 영원히 불타오르며, 그 잿더미 위에 천년 왕국이 도래하리라.
머저리가 아닌 유일한 한 사내를 그 시효로 삼아서. 그는 상징이 될 것이다. 구시대의 마지막을 증거하는 표상이 되리라. 진홍왕께서 굽어보신다.
“막토(찬양하라).”
카를은 비죽 웃고는 성호를 그었다.
* * *
북해의 거친 바다 위로 가을비가 짙게 내리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파도가 뱃전에 부딪치며 일어나는 포말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 있었다.
-끼이익!
용골이 파도를 타고 오르며 비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르에서 출항한 제국 무역선은 북해 원양에서 동부를 향해 곧게 순항하고 있었다.
아에렌의 북부 전사들이 함대의 각 함선 내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과 휴식이란 단어가 퍽 낯설게 느껴졌다. 페르난데스는 차갑게 식은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는 바다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그가 기억하는 바다는 대부분 폭우가 쏟아지는 밤바다의 정경을 담고 있었다. 특히 북해 원양이라면 더욱.
프란츠리트 가문과의 접전. 말레이른 왕가와의 전투. 치열한 교전과 목숨을 건 사투. 추억을 되감아 반추할 때마다 심장 한켠이 두근거리며 뜀박질을 시작했다.
손가락 마디가 움찔거렸다. 쉬운 싸움 따윈 없었으며, 더러는 목숨을 잃기도 했던 전투들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날의 간극이. 생과 사를 가늠하는 간극이 그립게 느껴졌다.
‘제기랄.’
페르난데스는 짧게 혀를 찼다. 신성을 품기 시작한 순간부터 존재는 점차 물질의 한계를 벗고 관념의 영역으로 다가간다. 이는 축복이자 저주였다. 육체의 기능이 필멸자의 것을 상회하며 올라가는 대가로, 제법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곤 한다.
일례로 감정이 있다. 과거는 다채로워도 현실은 그렇지 않게 된다. 추억은 관념의 영역이므로. 과거를 회상할 때의 감정은 점차 선연해지는 반면, 현실을 바라보는 감정은 점차 무감각해진다.
영과 성, 백과 혼의 성장에 따른 괴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영성은 성장하나, 육체에 얽매여 있는 혼과 백은 그렇지 못하다. 즉, 현실을 바라보는 감정이 점차 퇴색되어 가게 된다.
신성이 드높아진 초월자들과 대화를 하게 된다면 종종 느낄 수 있는 문제다. 필멸자의 관점에서, 불멸자들은 ‘비틀린’ 존재다. 감성이라 할까, 감수성이라 해야 할까. 마음을 구성하는 어떤 부분이 일반인의 상궤와 크게 다르다.
치졸하거나 유치할 정도로 특정한 관점에 매몰되기도 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초탈하기도 한다. 페르난데스는 어둑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비가 쏟아지는 해상 위의 밤은 경계가 희미했다. 수평선은 뭉그러져 있고, 검은 바다와 묵빛 하늘이 어우러져 일렁이곤 한다. 그 사이에 색채란 존재하지 않는다. 흰 포말 올라오는 파도의 백색, 빛을 빨아 당기는 바다의 묵색. 오직 그뿐이다.
지금 자신처럼. 페르난데스는 싸늘하게 식은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페이자쉬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이런 순간에라면 그가 홀연히 나타나 조용히 다독여 주곤 했었다.
이렇게 말하자면 우스울 수 있지만, 아버지 같은 존재라 해도 좋았을까. 노년기의 감정을 고스란히 품은 채, 육체에 휘둘리는 젊은 혈기의 자신을 때때로 부끄러워하고, 때때로 훈계하며 함께 나아가는 존재였다.
‘미치겠군.’
페르난데스는 칼자루를 콱 움켜쥐며 웃었다. 자기애도 이 정도면 도를 지나쳤다. 자기 자신을 자신의 아비로 여기는 것은 정신병의 초기 증세일 수도 있었다.
-스르릉.
칼자루에서 대검이 뽑혀 나왔다. 두터운 검신에 바람이 휘감겨 칼날이 평소의 배는 무거웠다. 무거운 것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페르난데스는 칼을 낭창하게 휘두르고 빠르게 거두며 몸을 풀었다.
차갑게 식었던 육체에 온기가 돌았다.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과거의 대적들을 반추하며, 칼날을 모로 눕혀 길게 베어냈다.
-후웅!
허공을 긋는 서늘한 감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흔들린 마음인지, 무거운 바람 탓인지 검 끝의 궤적이 다소 어그러져 있었다. 그러니, 다시.
-후웅!!
처음 일격보단 나았다. 그 시점에서, 페르난데스는 잠시 생각했다. 처음 그의 전투가 시작되었던 시절을. 세르너드 영지에 돌아가서 자신의 종형제와 숙부를 죽이던 시점을.
그때로 돌아가면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실험이라는 핑계를 대었었으나, 기실 그건 오랜 숙원에 가까운 복수였다. 어린 시절의 학대와 모욕에 대한 유치한 복수. 이제 그들에게 남은 감정 따윈 없었다. 만일, 만약에 그날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당연히.’
고민은 찰나에 가까웠다. 용서라. 웃기지도 않았다. 유년 시절의 복수라 해 보았자 반백 년이 훌쩍 지난 먼 옛날의 일이고, 그들은 그가 직접 도륙하기엔 너무 하찮은 존재였다.
-후우웅!
그러니 끊어내고. 다시 한번 검끝을 끌어 올려. 페이른의 메를린포트. 그의 두 번째 전투. 스승, 기안-켈을 떠올리며 휘두른다. 예리하게 선 칼날이 빗방울을 쓸어내며 반원을 그리고—
-촤아악!
한순간, 허공에 붓칠하듯 빗물이 쓸려 나갔다. 페르난데스는 짧은 숨을 토하며 추억 속에 젖어 들어갔다. 세 번째 전투. 그다음 전투. 그리고 그다음…….
세르너드 영지 외곽의 외딴 숲에서 처음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가 겪어 온 모든 싸움과 생사의 경계를 되새기며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키이잉…….
만약에, 그때에, 그런 단어들이 쌓여 간다. 칼날이 그의 심정을 담아 잘게 떨렸다.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 환청처럼, 전생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후회한다. 아리아. 후회하고 있다.’
평생을 후회 없이 살았다 자부했던 한 늙은 마법사가 최후의 순간에 내뱉은 낮은 흐느낌이 그의 귓가에서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캉, 칼날이 갑판 위를 파고들며 파르르 떨었다. 페르난데스는 칼자루를 쥔 채 허리를 굽히고 숨을 몰아쉬었다. 육체의 피로 탓이 아니라 감정의 격류 탓이었다. 현실의 감정이 희박해지는 만큼, 과거의 기억들이 점차 더 농밀해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페르난데스는 어느새 자신의 머리 위에 빗방울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갑판 위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쯧, 그는 짧게 혀를 차며 허리를 폈다. 감정이 격해졌기 때문일까, 그의 등 바로 뒤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야 이쪽을 보는구나.”
“밤이 늦었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페르난데스. 비를 맞는 습관은 좋지 않다. 세탁도 문제가 되고, 위생도 문제가 되고, 음. 건강도 문제가 될 것이다.”
“하하…….”
페르난데스는 툴툴 웃었다. 이 육체가 고작 가을비를 조금 맞고 추위에 잠시 노출된다고 감기라도 걸릴까. 제법 긴 시간 함께했지만 여전히 이 용의 농담은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다가온 아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큰 우산을 손에 들고 페르난데스의 머리 위에 쓰여 주고 있었다. 우산을 기울여 그늘막을 만들어 준 까닭에, 오히려 아벨의 몸은 비에 푹 젖어 있었다.
“그러는 그대도 비를 맞고 있지 않소?”
“뭐어…… 뭐든지 함께 나누면 고난은 반이 된다 하지 않더냐?”
“잠이 오지 않소?”
“누가 배 위에서 칼을 쥐고 춤사위를 벌이는데 잠이 올 턱이 있겠느냐.”
아벨은 씩 웃고는 우산을 탁, 접었다. 어차피 둘 모두 이미 흠뻑 젖은 상태여서, 우산을 드는 이유가 없던 참이었다.
“칼끝이 떨리더구나. 너답지 않다.”
“그런 날도 있는 법이지.”
“마법과 검술은 비슷하면서 다르지. 심상을 자아내 현상을 빚는다는 점에서 유사하고, 감성을 이성으로 다스리느냐, 이성을 감성적으로 풀어 내느냐에서 차별점을 지닌다.”
아벨은 조용히 노래하듯 말하며 페르난데스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하얗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섬세하게 그의 거친 손등을 쓸었다. 빗물이 아교처럼 끈끈하게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곧 그녀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페르난데스는 칼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천천히 칼을 뽑아 올리는 손짓에, 페르난데스는 별 저항 없이 그녀의 인도를 따라 칼을 들어 올렸다.
아벨은 그를 뒤에서 끌어안듯이 잡고 칼을 위로 뻗어 올렸다.
“그러니, 칼을 쥘 땐 마법을 다루듯 하지 말거라, 페르난데스. 나는 마법이라곤 전혀 모르지만, 검술엔 제법 능하지 않더냐?”
칼끝이 빙글 돌아 상단 자세를 취한다. 페르난데스는 그저 아벨의 손짓에 따라 칼자루를 고쳐 잡으며 조금씩 자세를 바꿀 뿐이었다. 귓가에서 아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또, 또 그러는구나.”
“뭐가 말이오?”
“칼끝이 흔들린다. 힘이 너무 강하거나, 너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건 마음이 어지러운 탓이다.”
손가락에 힘이 와락 들어갔다. 아벨은 그의 손을 강하게 쥐었다. 마치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듯이.
“네 마음이 표류하는구나. 가슴은 빠르게 뛰고 있고, 피부가 뜨겁게 올라 있으니. 몸은 완성되어 있어도 네 마음이 그렇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겠소?”
아벨은 고룡이다. 오랜 시간 사람 사이에서 칼을 잡아 온 종류의 용이었다. 머나먼 옛날, 이젠 신화에 더 가까운 오랜 과거에 기사들의 왕을 직접 가르쳐 키운 검의 대가였다.
그녀는 단지 닿는 것만으로도, 칼을 쥔 방향과 자세, 칼끝의 움직임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듯했다. 아니면 그저 관록으로 넘겨 짚은 것이거나. 무엇이 되었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핵심에 가까웠다는 것을 제외하면.
페르난데스의 물음에 아벨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건 칼을 처음 잡는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인데, 뭐. 이것도 제법 운치가 있으니……. 자, 페르난데스. 검술의 가치가 무엇이겠느냐?”
“상대를 베는 것이오.”
“이래서 마법사들이란. 틀렸다. 검술이란 목표에 닿는 수단이다. 네 칼끝이 어지러운 것은 네가 목표를 잃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그건…….”
억측이오. 그렇게 말하려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단어가 목에 걸린 듯 한참 동안 입안에서 굴러 다녔다. 아벨이 그의 손에서 힘을 살짝 풀어내며 말했다.
“네 목표가 무엇이냐?”
네 번째 대천사의 행방, 마지막 대악마의 격살, 역천의 도래, 아니, 아니다. 아들…… 불쌍하게 사그라든 그 젊은 영혼……. 하지만, 그 생각에 닿는다면 두려움이 왈칵 앞섰다.
‘아나……’
이제 그에겐 딸이 있다. 전생에 없던 딸이. 역천은 이 세계의 정보와 영혼을 본산 세계에 덮어씌우는 대술법이다. 그렇다면 본산 세계엔 없는 정보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그러니, 역천이 성공한다면 아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라질까? 다른 존재에 스며들까? 아니면 지금처럼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아나의 존재는 그의 아들과 완벽한 대척점에 있다. 역천 이후에 아들이 존재한다면 아나는 그럴 수 없다. 그러니, 페르난데스의 목표는 잔혹한 양자택일을 향해 뻗어 있었다.
애써 시선을 돌렸다. 당면한 과제들이 너무 많다는 핑계를 대며. 당장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는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그런 고리타분한 변명만 늘어놓으며.
그러나 신성의 축적으로 무뎌져 가는 감정 속에서도 화려하게 타오르는 단 하나의 감정이 있다면, 그건 부성애였다. 아나를 향한 사랑. 페르난데스의 칼이 파르르 떨렸다.
“후회하지 않고 싶소.”
그러니 이것이 그의 진심이었다. 후회하지 않는다 자부했던 늙은 마법사가 후회 속에 죽었을 때. 다시 태어나 후회하지 않기 위해 살겠다 맹세했던 그 순간부터.
이제 칼뿐만 아니라, 목소리마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 다시는 그 끔찍한 감정 속에 매몰되고 싶지 않다. 한 번이면 족하다. 아니, 한 번도 이미 너무 많다.
죽어 가는 아들의 목소리를 또다시 듣고 싶지 않다. 아니…… 죽어 가는 ‘자식’의 목소리를 살아 있는 채로 듣고 싶지 않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세계를 멸망시키려 발악하던 악당이 품기엔 적이 소박한 소망이었다.
그 순간, 그의 손을 감싸 쥔 아벨의 손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잦아드는 빗줄기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어쩐지 물기 젖어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의 삶을 후회하느냐?”
이 말엔 확실히 대답할 수 있었다. 아니다.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왔고, 가능한 최선의 결과를 쟁취했다. 그렇게 쌓아 올린 몇 년. 지난 수십 년의 삶보다 밀도 높은 몇 년을. 다시 되산다 한들 그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
만약에, 그때에. 그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그런 단어들이 하나하나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돌아간다 한들 더 능숙할 수는 있더라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 결국 그는 다시 달리게 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선연하게 타오르던 과거의 감정들이 점차 희미해져 간다. 비가 잦아들고 구름이 걷히듯이. 아벨은 천천히 페르난데스의 팔을 이끌어 검을 길게 늘어트렸다.
“그거면 되었다. 그것이 검의 기본이며—.”
-키이잉…….
칼이 날 선 검명을 울린다. 바깥으로 넓게 뻗어 올라간 검이 하늘을 향해 완만한 반원을 그려 나간다.
“아울려 검의 마지막이다.”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 검의 기본이자 마지막이다. 아벨의 말이 끝나며 칼끝이 부드럽게 하늘을 감았다. 잦아든 구름 사이로, 새파란 달이 떠올라 있었다.
밤하늘에 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갈라진 구름 틈을 뚫고 달이 커튼처럼 너울지며 떨어지고, 그 사이사이에 붉은색, 노란색, 또는 이따금씩 푸른색의 별무리가 반짝였다.
아벨은 페르난데스의 손을 이끌어 칼날을 검집에 갈무리하며 웃었다. 그녀는 구름 뒤로 보이는 별무리를 향해 손을 뻗고는 말했다. 그녀의 손이 그의 어깨 위에 살풋 걸쳐졌다.
“이왕 이런 분위기이니 내 한 번만 더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페르난데스. 이번엔 진지하게 대답해 주거라.”
“……무슨 말이오?”
“일전, 저 먼 북녘 땅에서 네가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저 밤하늘 별의 절반, 그 반의반, 그조차 많다면 그것의 절반만큼이라도…….”
빙글, 아벨은 페르난데스의 고개를 잡고 자신을 향해 몸을 돌렸다. 바로 전까지 바싹 붙어 있던 탓에, 서로의 거리가 숨결조차 닿을 만큼 가까웠다.
“나를 생각해 주겠다고.”
물기 젖은 황금색 머리칼이 차분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방금까지 온통 무채색이던 밤바다 위에서, 그녀는 등대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소년 시절처럼 웃음이 나와서, 대답 없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아주 잠깐 서로의 숨결이 섞였다. 그는 가볍게 뒤로 물러나 떨어지며, 아직까지 멍하니 입술을 더듬는 아벨에게 웃어 보였다.
“대답이오.”
“정말이지…… 화가 날 정도로 능숙하구나.”
그는 말없이 웃고는 아벨을 안아 들고 선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