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58화 (359/388)

358. 수탐자와 수탈자 (4)

바이에미어는 지도에 표기된 마을의 이름을 오랜 시간 천천히 다시 읽었다. 글자 하나하나를 씹어 삼킬 듯이. 그는 떨리는 손으로 수통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켜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산자락 아래로 검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산의 경사면을 타고 더 아래로, 더 아래로. 마침내 평원에 이르기까지.

지평선 곳곳에서 연기가 솟아올랐다. 그는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검은 선들을 하나하나 헤아리다가 곧 힘없이 손을 내렸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

지도는 정확할 것이다.

“미친놈들…….”

원탁 기사가 입에 담기엔 적이 과격한 언사였으나, 바이에미어는 수염을 덜덜 떨며 으르렁거렸다. 그의 곁으로 한 필의 기마가 달려왔다.

“주군, 정찰을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산 자가 있더냐?”

“……없습니다. 적어도 이 근방 10리그 안쪽으로 모든 마을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하, 소개라. 놈들이 저 거주지들을 소개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소각한 것이겠느냐?”

“…….”

정찰을 마치고 복귀한 기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바이에미어의 분노에 동의했다. 소개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완곡한 묘사일 것이다. 생존자를 수습해 퇴각한 흔적 자체가 없었으니까.

지금 이 일대에, 지도에 표기될 정도로 큰 규모의 거주지들은 모조리 불타오르고 있었다. 전시라면 청야 전술을 의심할 법도 하건만, 평시에. 그것도 추수철이 얼마 남지도 않은 초가을에 이런 짓을 저지른다면 그건 전술적 정책이 아니었다.

이단의 행동이다. 그 외엔 이 참사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 어떤 군주도 추수철에 농가를 소개하지 않으니.

“이 일대의 거주민들이 얼마나 되었을 것 같나?”

“……”

“도시가 하나, 마을이 다섯 있었지. 국경 인근에, 무역로와 크게 상관없는 농경지인 탓에 크게 융성한 곳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되었다. 지도에 표기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거주지들도 대략 열댓은 되었을 테고.”

사람 없는 농토 따윈 없다. 잘 정비된 농경지엔 반드시 거주민이 있는 법이다. 그런 단순한 계산으로 고려하자면, 이 근방의 관측 가능한 거리 내엔 최소한 열 개 이상의 소규모 정착지가 있었을 것이다.

이름 없는 마을들. 영원히 이름을 갖지 못할 마을들. 그 안에서 죽어 간 백성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들 모두가 죽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주군. 작금의 페이른 왕가가 제아무리 미치광이들이라 하더라도 그들 모두를 몰살했을 리는 없습니다.”

“살았다면? 평생 땅을 일구던 농민들이 추수철에 농토를 포기하고 이동했다면 그자들이 멀쩡히 살아남아 다시 새로운 정착지를 만들기라도 했겠나?”

재산 하나 없이 방황해야 하는 농민들에게 겨울은 전쟁보다 잔혹하다. 풍부한 물자를 비축한 이후 제 집에 틀어박혀 지내도 겨울나기 동안 죽는 자들이 나오기 일쑤였으니. 마을 전체를 불태우는 미치광이들이 설령 농민들을 살려 놓았다 한들 예후를 보장할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 이 근방의 모든 농민들은 죽었거나, 죽을 예정이란 뜻이었다. 전쟁이나 흉년, 재난이나 역병 따위에 상관없이. 그저 위정자의 여흥으로 인해.

-우드득!

주먹을 너무 강하게 쥔 탓에 건틀릿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뻐근해지는 오른손을 보며 바이에미어는 짧게 혀를 찼다. 그는 예리하게 날 선 눈으로 지평선 너머를 한 번 노려보고는 뒤를 돌았다.

“철수한다. 기수들을 불러.”

“예, 주군!”

-부우우우!

기수가 뿔나팔을 부는 소리를 들으며 바이에미어는 말 안장 위에 올라섰다.

* * *

“놈들이 떠났나?”

“예, 전하. 이틀 전에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

“하하! 좋아, 이제 거의 다 되었군!”

지기스문트는 껄껄 웃으며 무릎을 쳤다. 대신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애써 그들의 군주를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이 회의실은 바로 몇 분 전까지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던 곳이었다. 대신들은 공포에 짓눌려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지기스문트는 아직까지도 미처 수습되지 못한 회의실 바닥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선대 왕의 충신입네 하던 작자는 감히 민간인 학살을 멈추라 외친 대가로 유명을 달리했다.

“데인 놈들을 제외하면 이 동부에 감히 우리와 맞서 싸울 수 있을 배포 좋은 녀석들이 없지.”

“전하, 하오나 동부에 불만을 품은 소국들이 적지 않습니다. 다면 전쟁을 겨울에 진행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올는지…….”

“겨울이 어디 우리에게만 온다더냐?”

애써 의견을 짜내던 대신이 예에, 하며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수확철에 군량을 확보하지 못한 국가는 우리뿐이니 그렇지!’

대신들 중에 감히 그런 말을 꺼낼 수 있는 자들이 없었다. 수확철 내내 진행된 민간인 학살과 사치, 내전으로 인한 피해, 지옥 마력으로 인한 오염 등은 페이른의 경제에 치명적인 상흔을 내고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겨울이 끝나기 전 국고가 동날 것이고, 전쟁을 수행한다 한들 보급할 군량이 부족할 것이며, 겨울이 끝나고 봄 수확이 시작되기도 전에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은 극심한 기아에 시달릴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전쟁을 벌이기엔 시기도, 상황도 좋지 않다. 이대론 모두들 개죽음을 맞이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기스문트의 말에 거역한다면 언젠간 다가올 죽는 날이 오늘이 되리라.

고개를 숙인 대신들 사이로 루트비히가 걸어 나갔다.

“전하. 소국 중 그 누구도 감히 전하의 치세에 도전할 자 없겠으나, 다면 전선이 형성된다면 놈들이 단순히 병졸 몇을 이끌어 국경을 도발한다 해도 막을 수단이 없습니다.”

“오, 볼프스탈 경.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겠는가?”

“데인이 동맹을 형성하기 전에 한발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고립되는 것이 우리가 되어선 아니 될 일입니다.”

“이제야 이 어전에도 머리를 굴리는 자가 있구나! 볼프스탈 경, 훌륭하네!”

지기스문트는 껄껄 웃으며 일어섰다. 그는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툭 던졌다. 두루마리가 빙글빙글 돌며 한 신하의 발치까지 굴러갔다.

“선왕께선 내 형제에게 암살당했으며, 이는 베이타서스 교회가 세속 왕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함이었다. 놈들은 감히 페이른의 왕혈을 꼭두각시 삼아 국정을 농단하려 하였으며, 이 죗값을 물리기 위해 놈들의 근거지를 공격했으나, 놈들은 더러운 지옥의 유물을 폭파해 우리의 강역을 오염시켰다.”

모조리 거짓이다. 이 자리의 누구도 지기스문트의 말을 믿는 자는 없었다. 그 자신조차도. 그러나 이것이 명문화된 공식 서한이 된다면 일이 달라진다. 그때부터 사실관계는 오직 칼끝에서 나온다.

페이른 북동부 지역이 오염된 것은 진실이다. 그리고 페이른은 여전히 동부 연합 최고의 강대국인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소국들에겐 극단적인 선택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만신전 교회를 품고 바로 지척에 위치한, 독기 오른 페이른 군대와 전쟁을 벌이느냐.

혹은 페이른 군대와의 교전을 회피하는 대가로 함구하느냐.

“만신전 교회의 위선자들이 데인의 마구간지기를 이용해 우리를 핍박하려 드는구나. 이에 어이하리오. 나, 지기스문트 로이스 폰 블람부르크. 페이른 왕가의 마지막 남은 왕혈로서, 복수와 자유를 천명하나니. 우리 중 누구의 권리도 종교에 의해 탄압받지 아니할 것이며, 이것은 다만 나 개인의 원한이 아니요, 우리 모두의 자유를 위함이로다. 그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노리개 삼아 삶의 권한을 조롱할 권리 따윈 없도다.”

데인 왕국이 진군을 준비할 것이다. 그들을 도발하기 위해 데인과의 국경선 인근의 모든 영민들을 소개하고 농토를 불살랐으니, 놈들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그리고 만일 안다면, 데인의 기사들은 반드시 출정을 시작할 것이다. 그치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이나 실리 따위가 아니라 명예였으니.

정의를 위해 투쟁한다고 믿는 자들만큼 파악하기 손쉬운 자들이 없다. 지기스문트는 비릿하게 웃었다.

“자, 이제 대답해 보게, 볼프스탈 경. 이 공문이 주위 모든 소왕국들에게 전달된다면 그들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아마도 침묵하겠지요.”

페이른을 적극적으로 도울 리는 없다. 교회를 공격하자는 말에 손쉽게 가담할 자들 따윈 없었다. 그러나 데인과 페이른. 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소왕국들은 편을 고르기에 앞서 관망할 터였다.

데인이 우세한다면 페이른은 고립될 것이고, 페이른이 우세하다면 데인은 고립될 것이다. 이 전쟁의 초전은 곧 종전이 되리라. 두 강대국 중 어느 한쪽이 승기를 잡기 시작하는 순간 눈더미가 굴러가듯 전황이 이어질 것이다.

“그래, 침묵하겠지. 그건 동조를 의미하는 침묵이 아니라, 약점을 노리는 승냥이들의 도사림이다. 두 강대국이 서로 치고받는다면 소국들의 입장에선 떡고물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이니.”

“하오나 전하. 데인은 회전에서 패배한 적이 없는 강국입니다. 하물며 비센테 왕의 치하 아래에서, 놈들은 제국과의 일전에서도 승리한 바가 있사옵니다.”

라 메르티옹 전투가 일어나기 전, 동부 연합의 그 누구도 감히 제국과의 전쟁에 엄두를 낸 자가 없었다. 그러나 비센테 왕은 자신의 직속 기사들만을 이끌어 제국을 향해 진군하였으며, 심지어 승리해 선제후령 하나를 점거하기까지 했다.

단지 ‘흡혈귀가 백성들을 착복한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금 데인의 국제적 위상이 크게 실추된 상황에서도, 감히 소왕국들이 데인의 강역을 넘보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미친개들, 그것도 끔찍하게 강력하고 단결된 미친개들의 모임. 데인에 대한 외부의 시선이 정확히 그랬다.

“볼프스탈 경. 그리핀나이츠가 놈들과의 회전에서 패배할 것 같은가?”

“……장기전이 될 겁니다. 그리고 그건…….”

“그래, 장기전이 된다면 데인의 편에 가담하는 왕가들이 나타나겠지. 우리에겐 좋지 않다.”

회전에서 쉽게 밀린다 할 수는 없어도, 쉽게 승리한다 장담할 수도 없다. 비센테 치하의 원탁 기사들은 데인 왕의 재림이라 불릴 정도로 위세가 드높았다.

그러나 장기전이 된다면 페이른은 군비를 감당할 수 없다. 겨울이 시작될 때 지금의 비축 군량으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페이른이 천천히 무너진다면, 남은 살코기를 탐내는 이리 같은 소왕국들이 데인에 손을 내밀 것이다.

다면 전쟁은 피할 길이 없다. 루트비히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기스문트는 혀를 날름거리며 웃었다.

“수도를 내어 줄 것이다.”

“……예?”

애써 표정을 관리하던 대신들마저도 순간 휘청거릴 발언이 나왔다. 지기스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최소한의 병력만을 남기고 수도를 내어 준다. 각 영지는 봉문하여 요새화하고, 농경지를 모조리 소각할 것이다.”

“청야 전술입니까? 하오나 전하. 그건 버틸 수 있을 때,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서나 할 법한 전략입니다. 이건 그저 국경을 열어 놈들의 공세를 맞이하자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 그럴 것이다. 왕국 전역에 대기근이 밀려들기를 기다리면 된다. 놈들이 회전에서 패배한 적이 없다고? 좋다. 회전을 하지 않으면 그만 아니냐?”

“……전하. 숙고하여 주십시오. 페이른의 그리핀나이츠는 결코 놈들에게 밀리지 않는 강군입니다. 싸우기 전에 패배를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누가 패배한다 하느냐? 회전을 피한다 하였지. 우리는 놈들의 군세를 수도로 불러모으고, 직접 놈들의 수도를 칠 것이다.”

루트비히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역으로 공세하자고? 실패할 경우 적의 본대 한가운데에서 포위된 채 농성해야 하는 전략이다. 하물며 아군의 근거지를 모두 포기한 상황에서야, 승산이 있을 수가 없다.

“데인의 예상 진군로에서 벗어나 우회하여 공격한다면 가능이야 하겠으되, 시간 내에 맞출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본대가 데인의 알트베르트를 공격할 때, 놈들은 이미 페이른 전역을 불사르고 회군을 시작할 것입니다!”

“육로로 간다면 그렇지.”

지기스문트는 와인잔을 들어 기울이며 말했다.

“페이른은 해상 강국이 아니겠느냐?”

데인이 비교적 최근에 해상 무역을 시작했다고는 하나 놈들은 기본적으로 내륙 국가다. 해군력은 말할 것도 없고, 제대로 된 군항(軍港)조차 없다. 인퍼머르가 그나마 가장 거대한 항구라 할 수 있겠지만, 엘프가 지배하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데인 왕국은 인퍼머르를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실정이다.

놈들의 기병대가 페이른 전역을 불태워? 불태우라지. 이미 남은 것도 없을 테니. 그사이, 페이른의 군사들은 데인의 무주지를 점거하고 약탈을 시작할 것이다.

“겨울철 동안 극심한 기아가 있을 것이라 했나?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지! 데인의 마구간지기들은 신이 나서 텅 빈 우리의 강역을 진군하지만, 폐허와 난민을 제외한다면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사이 우리가 놈들의 배후를 공격하고—.”

“보급을 끊겠다는 의미시군요, 전하.”

“그래. 보급을 끊는다면 놈들이 어찌할 것 같으냐?”

“회군하지 않겠사옵니까?”

“일반적인 군단이라면 그렇지. 하지만 놈들의 명분은 ‘정의’다. 이 나라의 비극을 막아 내고 백성들을 구원하겠다는 놈들이지. 놈들의 앞에 굶주린 백성들이 식량을 구걸하며 달려들 것이다. 놈들을 해방군이라 칭송하며 우리 왕실의 부덕을 성토하겠지.”

과연 원탁의 머저리들이 이를 내치고 돌아설 수 있겠느냐? 지기스문트의 광기 어린 눈에 대답하는 대신이 없었다.

비센테는 그것이 함정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피할 도리가 없으리라. 국제 사회에서 비센테의 전쟁 명분은 ‘정의의 회복’이었으며, 굶주린 백성들을 포기하는 순간 페이른 왕가는 그들의 악덕으로 외교전을 펼칠 테니까.

“데인이 무너지면 소왕국들은 우리에게 저항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잡아먹고 난 뒤엔. 그래. 동부 연합은 이제 페이른 제국이란 이름을 갖게 되겠지. 레바인테르의 콧대 높은 허깨비들은 지난 전쟁의 피해를 추스르지도 못하고 있으니 말이야.”

이번 겨울이 지나기 전에 동부 왕국 연합은 진정한 의미로 하나가 되리라.

“만신전 놈들과 제국의 황제가 이 일을 눈치채고 손을 뻗으려 할 때는 이미 늦었다.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저 천상의 대신들뿐이리라.”

그리고 신은 그 어떤 순간에도 응답하지 않는다. 대륙은 그의 손에 들어올 것이며, 지옥의 군주들은 그에게 가장 높은 자리를 약속하리라. 세상은 이제 그의 것이나 다름없다.

지기스문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 * *

[……라고 합니다. 주군.]

“피엘에게 항상 고난이 많다 전해 주거라. 큰 도움이 되었구나.”

페르난데스는 선실 구석에서 타오르는 암녹색 화톳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불꽃 속에서 파르탁이 음산하게 웃고 있었다.

[그 계집은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더군요. 제 몸의 한계를 넘어선 능력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페르난데스는 조용히 찻잔을 기울이며 씁쓸하게 말했다. 예언 능력은 수명을 잡아먹는다. 정확히는 정신을. 피엘의 정신이 아직까지 공고한 것은 오직 로베르의 보살핌 덕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기 전까지 피엘은 반드시 살아 있어야 했다.

“그나저나, 아나는 좀 어떠냐? 보여 다오. 얼굴을 보고 싶구나.”

[예, 주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가씨, 주군께 인사해 보십시오.]

[빠!!]

페르난데스의 입가에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빠다! 하하, 이 녀석. 날이 갈수록 더 영리해지니…… 어떠냐, 파르탁. 네가 보기엔 말이다.”

[……주군을 닮아 영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래, 본 날이 고작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이 아비를 잊지 않는 것이 참으로 대견하다. 그렇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주군.]

파르탁은 시선을 비스듬히 돌리며 애써 대답했다. 페르난데스는 옹알이를 시작한 아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해 그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파르탁이 헛기침을 몇 차례 하고는 말을 꺼냈다.

[허면 주군, 어쩌시겠습니까? 인퍼머르를 재탈환하고 놈들의 배후를 치시려는 겁니까?]

“아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예?]

“데인과 페이른의 전쟁에 우리가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도망치는 페이른의 군단을 쫓는 것은 시간이 아까운 일이고, 데인은 우리가 굳이 돕지 않아도 회전에선 패배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군, 데인의 젊은 기사왕을 돕기 위해 출정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돕는 방법이 꼭 파병만 있다더냐?”

페르난데스는 당황한 파르탁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페이른과 데인 둘 모두 소왕국들의 참전을 경계하여 선수를 친 것이다. 그렇다면 전황의 성패가 저 두 국가의 전쟁에 달려 있지 않다는 뜻이지.”

페이른이든 데인이든. 동부 연합의 소왕국들이 여론을 형성해 어느 한쪽의 편을 드는 것이 최악의 결과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두 왕국은 건곤일척의 승부에 목숨을 걸고 다소 위험한 도박수를 두며 험난한 전쟁을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승부의 종착지는 결국 소왕국들의 참전 여부에 달려 있다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왕국들을 규합하려 하십니까? 하지만 그건…….]

“시간도 많이 걸리고 가능성도 낮지. 놈들을 하나하나 상대하며 협상을 벌이고 규합을 시도하려 들다가는 때를 놓치지 않겠느냐?”

[저는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주군.]

“군주라는 것들은 기회의 순간엔 둔감하고 우유부단하지만 위기의 순간엔 더없이 영민해지는 자들이다. 전쟁을 기회로 여기는 자들은 몸을 도사리고 있겠지만, 갑작스러운 위기엔 그렇지 못하겠지.”

소왕국들의 군주와 대영지의 영주들을 하나하나 만나 협상을 진행하여 데인을 돕는다? 당연히 시간 안에는 불가능하다. 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조차도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페르난데스가 죽음에서 깨어나기 전까지, 페이른은 이미 수많은 수를 두었다. 체스로 치자면 첫 열 수를 양보하고 시작한 셈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시간 싸움에 맞출 수 없다.

그러니 정도와 정수를 놓지 않고, 다시 한번 기책이다. 군주들과 협상해 세력을 형성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확실하며 강렬한 기책.

“소왕국들의 모든 영지를 동시에 약탈한다.”

추수철 가을. 어떤 왕국도 이 끔찍한 참사에 감히 방관하지 못할 것이다. 외부로 돌렸던 시선이 황급히 자국 내로 집중될 것이며, 감히 타국의 전쟁에 개입하려는 생각조차 어려울 터였다.

그리고 북부의 전사들은 이 막대한 약탈품을 고향으로 전달할 것이다. 식량난에 시달리던 북부는 겨울철을 보낼 충분한 식량을 받고, 그 대가로 더 많은 군사를 파견할 수 있으리라.

페이른과 데인은 외부의 조력 없이 서로를 향해 장기전을 시작할 것이다. 모두가 굶주린 겨울이 온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파악할 수 없는 혼란과 함께.

자고로 혼란은 흑마법사의 터전이다. 페르난데스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웃었다.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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